5.

그리고 그 기둥이 기우뚱하게 기울기 시작한 건 몇 해 전이었다. 그 많은 시련을 받으면서고 꼿꼿하게 서 있던 기둥도 이제 더 버틸 여력을 잃은 모양이었다. 집보수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날을 잡아 기둥을 바로 세워 놓아야 한다고 별렀던 것이 벌써 두 해를 지나쳤는데, 벽까지 허물어놓은 지금은 아버지도 무슨 수를 쓸밖에 딴 도리가 없게 된 것이었다.

김씨 영감님이 대목 이씨의 부축을 받으며 대문을 들어선 것은 일손을 놓고도 5일이나 지난 날 오후 늦게였다. 여름비 답지 않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를 이틀이 지나, 아무래도 흉물스레 서 있는 집이 아버지가 보기에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습기가 차 가끔씩 서까래 쯤에서 삑삑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대목 이씨에게 김씨 영감님을 모셔와도 좋다고 했던 것이다.

팔순이 넘은 노인이라고는 해도, 김씨 영감님의 얼굴에는 병색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날씨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여름인데, 솜을 누빈 바지저고리에 한겨울에나 입을 법한 조끼까지 입고서도 잔뜩 어깨를 움츠린 자세는 그렇잖아도 검버섯 든 노인네를 더욱 웅숭그려 보이게 만들었다.

"벌써 메칠 전버텀 앓아누워 계싰다는디, 이 집 기둥이 삐딱하니 넘어가 있다고 허니께 기다맀든 것처럼 자리를 떨구 일어나시데유. 아무래두 노인네 초상 치를 거 같어서 그만 누워 기시라구 말렸는데두 막무가내로 방 문을 나서는 거라.”

대목 이씨를 따라가 김씨 영감님을 모셔온 판검사 최씨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아버지는 난감한 표정으로 대문께에 서 있는 김씨 영감님의 며느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김씨 영감님이 동생을 잃었던 그해 낳았던 아들을, 그나마도 장가를 못 들이고 있다가 몇 해 전에야 연변의 조선족 처녀와 결혼시켜 얻은 며느리였다. 무표정하게 서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같은 한민족이라지만 어딘가 이해할 수 없는 먼 땅의 언어가 짙게 배어 있었다.

"선상님, 먼저 집버텀 한번 둘러보시구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말씸을 해 주시지유. 어떻게 어떻게 하라구 말씸만 허시믄 지가 다 알어서 할 수 있으니께.”

불안한 표정의 주위 사람들은 아랑곳 없이 대목 이씨는 신이 나서 김씨 영감님의 소매깃부터 끌었다.

그렇게 처마 밑을 한바퀴 빙 돌고 나서는, 그 기둥 앞에서 모두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김씨 영감님은 기둥을 한 팔로 짚고 간신히 서서 기둥머리께를 말 없이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씩 아래로 훑어내렸다.

웅숭그린 어깨와는 달리 빛을 띤 그의 눈에서 잠깐 동안이나마 강렬한 기운을 느꼈다면 나의 착각이었을까? 아니 그의 눈은 분명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중간쯤의 옹이박이 아래에 나 있는 낫자국과 총탄이 박혔던 자리를 도려내고 새로 박아 넣은 곳, 그리고 불에 그을린 자국들. 마침내 주춧돌 위에서 한참이나 어긋나 안쪽으로 쏠려있는 밑둥치를 내려다보던 김씨 영감님이 들보 아래께를 가리키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목 언저리에서만 돌뿐 주윗사람들이 알아들을 만큼 분명하지는 않았다.

"야? …저기를 워쩌라구유?”

제일 답답한 건 자기라는 듯 대목 이씨가 부축하고 있던 왼팔을 슬쩍 치켜올리며 김씨 영감님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들보와 도리가 맞닿은 곳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지주목을 가져다가 받치라는군요.”

김씨 영감님의 며느리였다. 이상한 억양에, 그러나 분명 표준말을 구사하고 있는…. 한집 식구라는 것이 저런 거구나. 몇천 리 떨어진 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저 우물거리는 말까지 알아들을 수 있는.

어쨌든 김씨 영감님의 며느리까지 가세하니 그런대로 살아움직이는 하나의 팀을 이룬 느낌이었다. 우선 들보와 도리, 장여가 서로 어긋나지 않게 대못을 치고는, 뒤안에는 도리를 받춰줄 커다란 버팀목까지 세웠다. 김씨 영감님의 웅얼거림을 며느리가 받아 대목 이씨에게 전하고, 다시 대목 이씨는 이런 저런 작업지시를 남은 사람들에게 했다.

방앗간에서 곡식 빻을 때 쓰이던 부속중에서 개조된, 기중기 형태의 잭(Jack)이 들려왔고 지렛대와 해머도 준비되었다. 다들 급조된 것이었지만 그것 만으로도 만족한 듯 김씨 영감님은 기둥 윗부분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어 굵은 지주목이 들보 아래에 받쳐졌고 대목 이씨가 잭을 밑에다 이어 붙였다. 그리고 지렛대를 잭의 높이조절구에 끼워넣고는 조금씩 돌려가며 들보 아래까지 밀어올려지자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지렛대를 돌리던 대목 이씨가 묵직한 지붕의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했던지 김씨 영감님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김씨 영감님은 고개를 가로저어 조금 더 밀어올리라는 신호를 했다. 나는 괜한 불안감에 외양간을 서성이는 소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뒷마당에 묻혔을 하수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혹시나 김씨 영감님이 실수를 하거나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 중에는 만약 실수를 해 집에 변이라도 생긴다면 오 대에 걸친 우리집의 명당자리도 마무리되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억측까지 했다가는 이내 머리를 내둘러 생각을 고치곤 했다. 그리고 속으로 내뱉아진 말은 아버지의 음성을 많이 닮아 있었다. 이 집이 그래도 명당자리에 세워진 집인디 하는.

모두의 시선이 들보 아래께를 향해 치켜 올려졌다. 그리곤 잭의 높이 조절구가 돌려지면서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는 지주목과 그때마다 지붕 전체에서 울리는 삐걱거림을 예사롭지 않게 느끼고 있었다. 대목 이씨는 그 답지 않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판검사 최씨는 기둥 밑둥치를 두 팔로 감싼 채 불안스런 눈동자를 위아래로 굴려댔다.

그러기를 수삼초 쯤 지났을까, '텅'하는 쇠붙이 튕기는 소리와 '우지끈'하는 지붕 가라앉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눈이 질끈 감겨졌다. 결국 걱정했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는 이내 기둥으로 눈이 돌아갔다. 역시 가슴만 한번 철렁했다가는 별일 아니었다는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악몽을 꾸고 났을 때 그렇던가? 분명 꿈이었다는 걸 느낌으로 알면서도 다시 한번 머릿속을 추스르게 되는.

뒤로 나동그라졌던 판검사 최씨가 잠시 눈을 씀벅거리다가 일어나 기둥을 두 손으로 받쳤고, 튕겨진 잭과 지주목을 제자리로 옮겨놓으며 대목 이씨는 지붕 여기저기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지붕은 아무일 없었던 듯 고요했다.

"이런, 빌어먹을 놈으꺼.”

별일은 아니라는 듯 대목 이씨가 잭을 발바닥으로 걷어찼다. 그리곤 잊고 있었던 것처럼 쳐다본 사람. 김씨 영감님은 내 한쪽 어깨에 몸을 기댄 채 눈을 지긋이 감고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뭘, …밑에다 받쳐놔야 …되겄-제?”

좀처럼 말을 붙여볼 것 같지 않던 아버지가 김씨 영감님을 힐끗 쳐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열댓 살이나 많을 김씨 영감님이지만, 옛날 습관 때문에 존대가 나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김씨 영감님 역시 눈을 조금 열어 동감을 표시하며 뒷곁에 쌓아둔 마루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랑비를 맞으며 대목 이씨와 판검사 최씨가 굵직한 마루널 한 개를 들고 왔다. 그리고 이번엔 제대로 지붕을 들어올리겠다는 듯 바닥부터 잘 골라놓고는 마루널 위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가마니까지 깔았다.

발바닥에 걷어차일 때는 언제고 신주단지 모셔지듯 잭이 다시 올려졌고, 지주목은 들보 아래에 받쳐졌다. 이어 잭의 높이조절구에 지렛대가 끼워졌다. 아까처럼 식은땀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지렛대를 돌리는 대목 이씨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내 지주목이 들보 아래를 팽팽하게 지탱하기 시작했고, 예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대들보, 도리, 장여, 서까래, 마루대공 할것없이 지붕 전체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잭을 지탱하고 있는 마루널에서도 약간의 삐걱거림이 있을 쯤 지붕이 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판검사 최씨가 흥분된 어조로 기둥이 움직여진다고 외쳤고, 지렛대를 돌리는 대목 이씨는 초조한 듯 김씨 영감님의 표정을 곁눈질했다.

그러고도 지렛대를 얼마나 더 돌렸을까. 눈을 지긋이 감고 있던 김씨 영감님이 손을 들어 그만 들어올리라는 신호를 했다. 그리고 몇 번을 사양하다가 판검사 최씨의 손에 해머가 쥐어졌고, 얼겁먹은 듯 휘두르는 해머질에 조금씩 조금씩 기둥 밑둥치가 주춧돌 가운데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혹 들보를 들어올릴 때보다도 더 큰 소리의 삐걱거림이 있기는 했지만 모두들 김씨 영감님의 표정을 살피며 위험한 지경은 아니구나 하고 안심을 했다.

한 사람만 빼고 시간이 멈추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런 경우가 아닐까? 조심스레 기둥을 두드리는 판검사 최씨의 해머질을 뺀다면 모든 움직임이 정지해버린 듯한 시간. 사람들은 모두 김씨 영감님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고, 김씨 영감님은 기둥 윗부분을 쳐다보며 박힌 듯 서 있었다. 그러기를 몇 차례, 기둥의 밑둥치가 주춧돌의 한가운데로 자리를 잡으면서 똑바로 곧추서자 모두의 얼굴에는 안도와 감동 어린 표정이 교차했다.

"이걸 한번만 더 휘둘렀다간 내가 제 명에 못 죽을끼라….”

판검사 최씨가 마당 한가운데로 해머를 집어던지며 말하긴 했지만, 똑바로 선 기둥을 못내 자랑스레 쳐다보는 표정이 역력했다.

"지가 뭘 했다고…, 사고만 쳤으민서.”

술병을 찾아 대문간으로 걸어가며 대목 이씨도 얼굴 가득 웃음을 흘렸다. 아버지는 처마 밑을 한바퀴 삥 둘러보고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그제야 기둥을 텅텅 치며 웃었다.

"이만하문 아직도 오백 년은 더 버틸 수 있을기라. 내가 뭐라구 했나? 이 자리가 명당자리라고 안했어. 허허.”

아버지는 마치 명당자리이기 때문에 집도 오래 서 있는 거라는 듯 크게 웃었다. 정말 기둥은 언제 옆으로 기울었었느냐는 듯 당당하고 곧게 서 있었다.

그리고 김씨 영감님. 내 한쪽 어깨에 기대어 간신히 서 있던 김씨 영감님은 기둥을 향해 다가서더니, 두 손으로 상처들을 어루만지며 뭔가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와 아주 오랜만에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는 표정으로. 아까의 강렬한 눈빛은 어디로 갔는지 힘 없는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하게 고여 있었다. 그러면서 입술을 움직여 웅얼거렸던 소리는 분명 이랬다.

끝날 때두 된 거 아닌가유? 나두 인자, … 갈 때가, 가ㄹ….

그랬다. 김씨 영감님은 기둥에 대고 그런 웅얼거림을 남기고 있었다. 며느리의 부축을 받으며 우리집 대문간을 빠져나가기 직전, 나무둥치 넘어가듯 마당가에 쓰러질 때까지 몇 마디 말을 더 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 어. 이냥반이 왜 이러나?'하며 아버지가 등을 내밀었고, 그 등에 업혀 집으로 가면서도 김씨 영감님의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은 계속되었다.

 

 

6.

들고 온 우산만큼이나 허리둘레가 커다란 산모가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과 장난을 치며 들어왔다. 그리곤 접수대에 의료보험증을 맡기고 돌아와 대기석에 엉덩이만 겨우 붙이고 비스듬하게 앉았다. 쌍둥이가 들었다 싶을 만큼 커다란 배였다. 남자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 배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귀를 가져다 대기도 하면서 킥킥거렸다. 덕분에 접수대 앞에 있는 간호사들의 시선이 내게서 그쪽으로 옮겨갔다. 나로서는 무척 다행스런 일이었다. 대기실 의자에 놓인 여성지를 들척이다가 벽에 걸려 있는 텔레비전을 한동안 쳐다보기도 했지만, 간호사들의 눈이 줄곧 나만 겨냥하고 있는 듯해서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겠노라고 유리와 몇 번이나 약속을 했기 때문에 나는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린 듯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창 밖에서는 비가 제법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벽돌이 장여 아랫부분까지 올라가는 걸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다음 작업이 걱정스러웠다. 벽돌이 완전히 굳은 다음에 장마가 시작되었더라면 좋았겠지만 하늘이 하는 일을 어쩔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둥이 똑바로 선 뒤라, 다른 걱정 않고 벽 쌓아 올리는 데만 신경을 써도 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 바쁜 와중에도 어젯밤 울음 섞인 유리의 전화 목소리를 듣고, 나는 오늘 아침 첫기차를 탔다. 아버지한테는 지도교수의 호출이라고 둘러댄 채.

"저…, 많이 기다려야 되나요?"

"아뇨, 금방 끝나실 거예요. 수술 중이거든요."

나는 불에 덴 듯 자세를 고쳐잡고 텔레비전을 쳐다보았다.

"아! 누가, 출산 중인가보죠?"

"아, 아뇨. …그냥 좀, …."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시치미를 떼고 텔레비전만 쳐다보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인도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수도승과 거지와 소가 뒤엉켜 사는 곳. 화장(火葬)할 때 쓸 장작을 사기 위해 구걸을 하는 노인들, 재산이라면 오로지 그것 만으로도 풍족하게 여기는 나라. 소가 찻길을 가로막고 있어도 가볍게 경적을 울리거나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나라.

저긴 소 팔자가 사람 팔자보다 훨씬 낫구나.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유리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그렇게 말했다.

인도 사람들은 소가 세계의 창조자고, 또 양육을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소를 돈으로 생각하는 나를 보면 저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악마? 사탄?

…….

그저께는 오랜만에 아빠 회사에 갔었어. 아빤 요새 문화사업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했다면서 회사에서 두문불출이거든. 그래봐야 소백정이 양반 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야. 암튼, 내가 아빠 집무실에 들어갔을 때 공장장이 요즘 호주에서 새로 개발된 거라면서 보고를 하는데, 그 게 뭐였는지 알아? 에어 건Air-Gun으로 소를 기절시킨 뒤 얼마만에 피를 뽑았을 때 육질이 가장 좋은가 하는 거였어. 공장장이 가지고 있는 도표에는 시간마다 육질이 어떻게 변하는지 상세하게 수치로 표시되어 있더군.

…….

좀 있으면 내 몸 속에서도 피가 줄줄 새어 나올 테지. 그러다가 피가 완전히 빠져버려서 내 육질이 최상품이 되었으면 좋겠어. …중간에 피가 엉겨버리면 안 될텐데.

나는 유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더 놔뒀다간 무슨 끔찍한 상상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소는 원래가 부활과 재생을 상징하는 동물이야. 소 뿔이 초승달하고 닮아 있잖아, 그렇지? 초승달이 점점 차올라 만월이 되는 것처럼 소는 다시 부활할 수 있어. 예수도 3일 만에 부활했잖아. 달이 완전히 사라지는 그믐에서 가장 작은 초승달이 돋을 때까지 며칠이 걸리는 줄 알아. 3일이야, 3일. 네 아기도 3일만 지나면 새로운 생명을 얻을 거야. …그러니 제발, 엉뚱한 상상 좀 하지마.

내가 숨도 안 쉬고 정신없이 말을 늘어놓자 유리는 내 눈만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나는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갑자기 통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 속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유리는 어지러운 듯 한 손은 머리를 짚고, 나머지 한 손은 아랫배 위에 얹은 채 걸어나왔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사이, 유리가 먼저 씩 웃었다.

"가자. 배고픈데, 나가서 뭐든 먹자. 웬만하면 소고기로. …나도 부활할 수 있게 말야."

그나마 표정이 밝아보여 다행이라 생각하며 유리가 이끄는 대로 고깃집을 찾아가긴 했지만, 그녀는 쇠고기 살점이 불판 위에서 까맣게 탈 때까지 뒤적거리기만 했다.

"임신된 걸 열흘 전에만 알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나, 사실은 수술대 위에 누워서 줄곧 그 생각만 했어. 그랬으면 이혼을 안해도 됐을지 몰라 하고."

"……"

"허영으로 가득한 새끼들! …결국 내가 어쩔 수 없는 소백정집 딸이란 걸 알아챘던 거겠지. …빌어먹을. 제깟것들이 학자집안이면 이었지, 글밥이나 처먹은 게 뭐 대단한 거라고."

"…네 진가를 제대로 모르니까."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런 물음을 수없이 던졌던 건 오히려 나 자신이었다. 하루에도 소를 수백 마리씩이나 도살하는 백정집 딸년이랑 정분이 났노라고, 게다가 이제는 이혼녀가 된 그 여자가 자꾸만 좋아진다면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실까 하고.

"그러지 말고, 나 그 얘기 좀 다시 해줘. 네가 가지고 있는 소에 대한 첫기억. 내가 가지고 있는 시시껄렁한 기억들과는 다른, …그걸 듣고 나면 용기가 생길지도 모르겠어."

유리가 듣고 싶어하는 내 기억이란 내가 처음 소를 몰고 돌아오던 밤 얘기였다.

내가 열 살이던 해 여름. 어느 날인가 아버진 술이 잔뜩 취해서 한밤중에야 집에 들어왔다. 그리곤 들판에 묶어 놓은 소가 여태 외양간에 들여지지 않은 걸 알고는 내게 소를 몰아오라고 호통을 쳤던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도 그렇겠지만 열 살이란 나이는 한창 무섬을 많이 탈 나이였다. 나는 나가자니 깜깜 밤중이 무섭고, 집에 있자니 술에 취한 아버지가 무서워, 결국엔 엉엉 울어가며 소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 밤중에 나를 더 놀래킨 건 소의 눈이 밤에 빛을 받으면 도깨비불처럼 푸르스름한 인광(燐光)을 낸다는 사실이었다. 들판 한가운데 두 개의 푸른 빛이 나를 올려다보며 빙빙 돌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언덕배기에 앉아 또 한참을 울었다. 하지만 동화에서처럼 운다고 해서 도와줄 누군가가 나타날 건 아니었다. 한참만에야 용기를 쥐어 짠 나는 소를 묶어 놓았던 밧줄을 끌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어둠 속에 혼자 있었던 소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음머' 울며 나를 끌고 앞장서 집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덩치만 컸지 순하기 그지없는 동물을 앞세워 걸으며, 그날 나는 세상이 그다지 적대적이지만은 않다는 걸 배웠다.

벌써 몇 번이나 들려주었을 얘기를 끝냈을 때 유리는 울고 있었다. 커다란 눈을 반짝거려가면서.

 

 

7.

아버지와 내가 도착했을 땐 발인제(發靷祭)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검은 띠에 둘려진 김씨 영감님이 상주의 손에 들려진 채 마당 한가운데 나와 있었고, 나무 외투를 입은 또다른 김씨 영감님은 문지방을 나서자 마자 앞에 놓였던 바가지를 눌러 깼다. 다시는 이승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약속.

몇 되지도 않는 상제들이 일제히 곡(哭)을 하며 관을 붙잡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연꽃으로 장식된, 지금껏 살아본 적 없는 좋은 집이 마당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리고 김씨 영감님은 그 위에 가뿐하게 올라가 누웠다. 아버진 상여를 메기로 한 자리 옆으로 가서, 상여를 들어올리도록 되어 있는 흰 무명끈을 한 손으로 잡고 상제들을 쳐다보았다. 집을 짓는 중엔 남의 장례집에 가는 게 아니라며 어머니가 말렸지만, 아버지는 어제부터 줄곧 김씨 영감님 집 주위에서 이런 저런 일을 맡고 있었다.

우리가 무리한 부탁을 했든 기 아닌지….

원 별말씀을. 그 기둥을 바로잡구 돌아오셔서 얼마나 편안해 하셨다구요. 사실 만큼 사셨으니 가신 게죠. 여든을 넘기셨는데, 그만하면….

그래두, 이거 원, 면괴시러워서….

어제 나와 함께 문상(問喪)을 했던 아버지는 김씨 영감님 영정에 두 번 절하고, 김씨 영감님의 아들과 맞절을 한 뒤에 대나무를 쥐고 있는 그의 손을 잡고 무슨 말인가를 한참 나누었다. 평소에도 문상을 가면 가장 부자연스런 대목이 그 부분이었던 나는 고개만 수그린 채 아버지 옆에 앉아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과, 그것도 당사자도 아닌 상주에게 정중하게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란 삼십에 가까운 내 나이로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발인제가 끝나자 마자 여덟 사람의 상여꾼들이 상여를 들어 올렸다. 김씨 영감님이 저승으로 들어갈 땅은 꼬리고개 너머에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에서 제법 평평한 골짜기를 건너 마주 내다보이는, 우복산 오른쪽 뒷다리 정강이께가 김씨 영감님이 돌아갈 자리였다. 그 곳엔 200평 남짓 되는 김씨 영감님네 밭이 있었는데, 그 밭 자드락이 장지(葬地)였다. 어제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밭은 해방을 맞던 해 증조(曾祖)께서 김씨 영감님의 아버지에게 떼어준 밭이라 했다. 문상을 가면서 제법 두둑한 부의금을 요구하는 아버지에게 묏자리를 통째로 줬으면 됐지 무슨 부조까지 하느냐고 어머니가 말했던 것이다.

……, 간다-아 간다 나는 간다 북망산천을 나는 간다, 너호 너호 에이넘차 너호,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내년 이맘때 제삿날에, 너호 너호 에이넘차 너호, 내가 가면 아주 가나 저승길에나 만나 보세, 너호 너호 에이넘차 너호, …….

아버지의 뒷자리를 차지한 대목 이씨는 상여꾼 중에도 제일 소리를 높여가며 '너호 너호 에이넘차 너호'를 외쳤다. 잔칫집이든 상례집이든 그의 신명은 나름대로 감초역할을 하곤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만 해도, 나는 처음 당하는 상(喪)이라 슬픈 중에도 무척 번거롭고 까다로운 절차에 힘들어했었는데, 그의 신명기와 재치에 가끔씩이나마 웃을 수 있었다.

상여가 올라가는 우복산 위쪽으로 몰려드는 먹구름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나마 장마가 끝난 직후에 김씨 영감님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기엔 큰 탈이 없었지만, 남부지방까지 북상한 A급 태풍이 내일 쯤엔 중부지방을 강타할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기상통보관은 게릴라성 폭우가 언제, 어떤 심술을 부릴지 알 수 없으니 특별한 주의를 요망한다고 말을 끝맺었다. 집수리 시기를 잘못 잡은 탓에 이래 저래 집만 볼썽사납게 되고 말았다. 모내기를 끝내 놓고 본격적인 밭일이 시작되기 전의 농한기를 이용해 집수리를 끝낸다는 게 아버지의 계획이었지만, 기둥 바로잡는 일과 예상보다 일찍 시작된 장마탓에 이제 고작 벽을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하관(下官)을 하고 광중(壙中) 네 귀퉁이에 흙이 부어지자 상제들의 곡소리는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 연변에서 시집왔다는 며느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가며 곡을 했다. 그 울음 속엔 이역 만리로 시집온 고뇌와 한마저 스며있는 듯보였다. 그러나 그 역시 잠시였다. 관이 눈 앞에서 아주 사라지자 상제들은 이곳 저곳으로 시선을 뿌리며 허탈해 했다. 이제는 어디서든 죽은 이의 모습을 마주볼 수 없으리라는 허망함.

그 다음 작업부터는 빨리 진행하는 것이 남은 사람을 위하는 길이라는 걸 아는 상여꾼들은 중간 중간 달구소리를 넣어가며 봉분을 다지기 시작했다. 김씨 영감님의 사위들이 건넨 지폐를 여기 저기 꽂은 대나무가 봉분자리 가운데로 들어서자 대목 이씨와 판검사 최씨들은 둥글게 둘러서서 왼발과 오른발을 교차해가며 몇 차례나 달구질을 했다.

……, 기와집은 뉘집인가, 워어 달구야, 산천초목 울을 삼구, 워어 달구야, 떼딴재미 이불삼구, 워어 달구야, 널판질랑 요를 삼어, 워어 달구야, 까막까치 벗을 삼구, 워어 달구야, 눈감구 누웠는 시상, 워어 달구야, 슬프구두 애닲구나, 워어 달구야, ……, 천하명산 골라잡아, 워어 달구야, 편한 양지 어디든고, 워어 달구야, 팔도강산 좋은 명산, 워어 달구야, 역력히도 둘러보소, 워어 달구야, ……, 이산맥을 밟아보니, 워어 달구야, 천하에도 제일인디, 워어 달구야, 편한 양지가 여기로구나, 워어 달구야, …….



 

8.

비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늘과 땅이 거대한 물줄기로 이어진 듯했다. 어제 새벽부터 시작된 장대비는 점점 거세지는가 싶더니, 불과 몇 시간 만에 마을 앞 강을 누런 황톳물로 넘실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비는 지치지도 않고 퍼부어댔다. 급기야 오늘 점심께부터는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를 넘어 철로가 있는 둑방 가까이까지 시뻘건 혓바닥을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물이 그 철로마저 넘어선다면 우리 마을 가운데 반 이상은 수장될 게 물을 보듯 분명했다. 방송국에서는 각 댐을 연결해가며 수위 변화를 중계하고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빨리 댐 수문을 열지 않는다고 열을 올렸다. 우리 마을 앞을 흘러가는 강이 바로 남한강의 지류인데, 서울시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충주댐이 수문을 굳게 닫은 채 물을 가두기만 했던 것이다.

"뭐 안타까운 기 있다구 저래 술병만 붙잡구 있나 그래. 그만치 살었으믄 인제…, 입식붴 하나 만들어주는 것두 남덜 다 한 뒤에, 이래 힘들이서 허는 걸 가지구."

어머니와 나는 아까부터 집주위를 둘러보며 물도랑을 넓히거나 건축자재를 치우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면서 사랑채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않고 빈 속에 소주만 마시는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는 애먼 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이 참에 아주 도회지루 뜨는 것두, 상수 중에 상수일 것인디…. 어이구, 이눔어 데 징그릅게두 오래 살었지."

나는 아뭇소리 없이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이런 저런 비설거지를 계속했다. 나름대로는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했던 것이다. 태어나서 지금껏 한번도 다른 곳으로 이주해본 적이 없는, 아버지의 땅, 아버지의 아버지의, 그리고 그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명당자리인, 땅.

그저께 김씨 영감님의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는 시청 문화계에서 나왔다는 주사(主事) 한 명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짜고짜로 꺼낸 한마디는 집수리 하는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 위에 몇 겹의 고민덩어리를 올려놓고 말았다. 그건 말이 좋아 협조요 부탁이었지, 거부할 수 없는 통보에 다름 아니었다. 우리 집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사백 년 전의 모습으로 복원될 예정이니 내년 봄까진 집을 비워야 한다는 게 그 통보의 요지였다. 물론 주사는 다른 집보다는 땅값이나 집값을 높게 쳐주겠다는 것과, 원한다면 복원 뒤에 관리인의 자격으로 재입주할 수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리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아버지 앞에서 집 자랑을 늘어놓았다.

여기가 바로 충청도 의병이 일어난 발원지 아닙니까. 한말에 내로라하던 의병장들이 여기를 거쳐갔던 건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이렇게 유서 깊은 집에서 오래도록 사셨으니 얼마나 좋으셨겠습니까. 시(市)에서 조금만 일찍 결정이 떨어졌더라도 집수리를 하시느라 번거롭지는 않았을 텐데…, 후원해줄 문화재단이 이제야 나타나서 말이죠. 그저 집을 빼앗기게 되었다고 생각지 마시고, 다시 들어와 사실 수 있게 해드릴테니….

어차피 아버지가 허락하고 말고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다는 건 자랑스레 협조해야 할 일이 분명했고, 재입주에 우선권을 주겠다는 것 역시 나름대로 우리 사정을 고려한 좋은 조건이었다. 게다가 주사는 증조(曾祖) 되시는 분이 일제시대때 독립운동했던 내용을 의병장들의 활동과 함께 비각에 추서할 예정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다만 뜻밖의 말이 한 가지 덧붙여졌다면 바로 김씨 영감님의 할아버지 된다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첨엔 '김석금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더군요' 하는 말에, 나는 '석금(石金)이면 돌쇠 아닌가'하고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나 생전 처음 듣는 김씨 영감님 집의 내력에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얘길 처음 듣는 건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을미년에 일어나 충청도와 강원도를 넘나들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의병이 결국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퇴해 망명길에 올랐을 즈음이었다. 의병의 근거지였던 제천은 일본군에 의해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는데, 우리 집이 거기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김씨 영감님의 조부 된다는 분이 우리 집 마루 기둥 ―얼마전 바로잡은 바로 그 기둥이었다― 에 새끼줄로 몸을 묶고는 절대 이 집만은 불지를 수 없다고 일본군 앞에서 눈을 부라렸다는 것이다. 그 서슬에 일본군은 몇 군데 불로 그을려 놓기만 하고 그냥 물러서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 집안이 이사올 때까지 일년간 집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이 김씨 영감님의 조부였다고 시청 문화계 주사는 말했다.

합방되기 삼 년 전이라던가, 의병대 내에서 양반과 상민들의 불화가 있었다더군요. 결국 의병장 앞에서 상민 출신 대장 하나가 항명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되는 일이 있었고, 그때 의병대에서 이탈한 상민들이 꽤 많았다죠, 아마. 그 할아버지도 의병으로 있다가 그때 고향으로 돌아와 계셨던 모양이에요. ……김석금 할아버지가 그 기둥을 바로잡고 나서 운명하셨다던데…, 역시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셨어요. …대단한 분들이에요, 정말.

 

시커먼 먹구름이 지척에서 몰려다니며 비를 쏟아냈다. 점심 때보다도 한껏 굵어진 빗발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지는 바람은 본격적으로 태풍의 손아귀에 들어서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랑채 앞 마루에 앉아 있는 동안 빗줄기는 바람에 뿜어지듯 내게로 불어들어왔다. 그때마다 띠살문의 문종이로 빗줄기가 후둑 후둑 뿌려져 물기가 뿌옇게 번졌다. 대추나무에서 개선행진곡이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나는 휴대폰이 비를 맞아 고장 나기 전에 명당자리에서 철수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우산을 받쳐들고 대추나무로 뛰어갔다. 유리였다.

"어디야?"

"아직…, 시골-집…."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뭐해? 집 걱정은 하나도 안되나 보지?"

아! 내 자취방. 나는 한참이나 잊고 있었던 게 기억난 듯 말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거긴 장마만 졌다하면 으레 침수가 되는 지역인데. 그것도, …반지하. 나는 지난 학기에 쓰다 만 논문부터 떠올랐다. 컴퓨터가 물에 잠긴다면 그야말로 죽은 자식 불알에 불과했다. 변변히 출력해 놓은 것도 없는 데다, 그나마도 물에 젖어 잉크가 번지기라도 한다면 알아볼 수조차 없을 게 뻔했다. 어떻게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자료나 책들까지 한꺼번에.

"내■ 지ㄱ 거■■ 가고 있으■■ …■무 걱정ㅎ■ 마."

유리의 말을 뭉개놓은 채 전파가 끊어졌다. 나는 휴대폰 덮개를 접었다 폈다 하다가 바지 뒷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전파장애로 제대로 전달되진 않았지만, 우선은 안심이 되는 말이었다. 컴퓨터만이라도 물에 젖지 않을 수 있다면 그나마 천만다행일텐데. 그러나 자취방이 급하다고 서울로 달려갈 수 있는 사정은 못되었다. 당장 마을로 물이 넘어 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어차피 기차는 오늘 오후부터 철로 근처에 얼찐거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가 떨어지면서 상황은 점점 안 좋은 쪽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충주댐이 몇 개의 수문을 개방하면서 앞 강의 수위는 걱정할 문제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집 옆으로 연해 흐르던 조그마한 도랑물이 넘치면서 뒷뜰로 넘쳐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평소 수량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라 마포 몇 개에 모래를 담아 도랑 옆으로 늘어놓았지만,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라 집 주위에 어떤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돌풍에 섞인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뒷뜰에 있던 이백 년 묵었다는 배나무에서는 연신 가지가 부러져 마당으로 떨어졌고, 대추나무에 올려졌던 궤짝은 벌써 떨어져 담 밑에 나뒹굴고 있었다. 어머닌 내가 태어나던 해 겪었던 물난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라며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앞마당은 비가 고일 새도 없이 도랑물처럼 흘러내려갔다. 우왕좌왕 움직이고 있는 사이 뒷주머니에서 개선행진곡이 다시 울렸다. 그러나 유리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그리고 비관적이었다.

도저히 갈 수가 없어. 여긴 온■ ㄹ, 물 뿐이■. 네 자취방 근■엔, …거ㄱ■■■■■■■

그리고 밤 열한시가 넘었을 때쯤 전기마저 끊어졌다. 가끔씩 하늘을 가르는 불칼이 여기 저기를 후려치며 '우르르' 거릴 뿐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암흑 속이었다. 서 있기조차 힘들 만큼 불어대는 바람에 기왓장이 들썩거리기 시작했고, 해가 떨어지고 나면 좀처럼 우는 법이 없던 소도 외양간을 미친 듯 돌아치며 울어댔다. 술과 잠에 취해 있던 아버지까지 밖으로 뛰쳐나왔고, 어머닌 대목 이씨네로 도움을 요청하러 뛰었다.

마침내 도랑물이 뒷뜰로 넘쳐들기 시작했다. 속수무책이었다. 마침내 휴대폰을 펼쳐 119를 눌러댔지만 우리 집 어느 곳에도 구조대와 연결할 수 있는 전파는 없었다. 우리 집 전체가 어디 멀리 튕겨나기라도 한 것처럼. 바로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 도랑물은 토사와 함께 밀려들어 새로 쌓아놓은 벽을 치고 들어왔다. 도랑물이 넘친 것만도 아니었다. 뒷산 기슭의 흙이 밀려 내려오면서 곧바로 뒷마당을 강타하고 있었다. 뒷산과 집과의 거리를 감안한다면 믿기 어려운 양의 토사물이었다. 그 물에 죽담이 쓸려나가기 시작했고, 이어 고임돌을 쓸어냈고, 주춧돌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리고 기둥을 뭉개고 지나갔다. 대목 이씨, 그리고 김씨 영감님의 아들과 며느리가 뛰어왔지만 모두들 뒤로 물러서기만 할 뿐 아무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채는 흙더미를 끌어안고 주저앉기 시작했다. 모두들 입만 벌리고 있는 사이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찢어질 듯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지붕은 도랑물에 낙엽 떨어지듯 풀썩 가라앉고 말았다.

 

 

9.

그리고 다시 봄.

횅댕그렁한 집터 위에도 봄기운은 완연했다. 몇 그루 살아남은 나무들에서는 푸릇푸릇한 새싹이 돋았고, 굵은 가지 하나가 통째 찢겨나간 이백 년 된 배나무에서는 어느 해보다도 하얀 배꽃이 풍성하게 피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뒷마당에 묻힌 황소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작년 여름, 지붕이 가라앉으면서 깔려 죽은 소를 뒷마당에 그대로 묻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태연스레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올린 나무들이지만 땅 속에선 일제히 소의 주검을 향해 뿌리를 뻗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가까운 이웃집으로 가재도구를 옮겨 놓은 우리 집은 문화재 복원사업이 빨리 마무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새 집을 지어 들어간다고 뿌듯한 표정을 보였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생전 처음 집 밖으로 옮겨앉은 데다 다시 들어간다고 해도 결국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는 입장이라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한 구석에는 집 복원에 쓰일 목재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대부분은 새로 마련된 것이었지만 상태가 괜찮은 목재들은 무너진 집 아래서 골라지기도 했다. 그 중에는 지난번에 바로잡느라 고생했던 둥구리 기둥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상태가 좋을 리 만무했지만, 그 기둥이 지니고 있는 여러 의미들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모르긴 해도 그 기둥은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쓰일 것이 분명했고, 옆에는 이런 저런 수난사가 적힌 푯말이 따라붙어 관람객을 감동시키게 될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실력 발휘할 기회를 만난 대목 이씨는 건축자재를 깔끔하게 정리해놓느라 분주하게 돌아쳤고, 작년 사법고시 2차에서 둘째가 끝내는 낙방해 잔뜩 기가 죽은 판검사 최씨는 대목 이씨가 지시하는 일만 마지못해 따라하는 눈치였다.

오늘은 시장(市長)과 후원단체 이사장이 참석한 가운데 주춧돌 놓일 자리에 콘크리트를 부어넣기로 되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땅을 잔뜩 다진 뒤에 주춧돌을 놓고 솜씨 좋은 대목(大木)이 그랭이질을 해 기둥을 세웠을 테지만, 지금은 콘크리트로 땅 속 깊이까지 지정(地釘)을 박고 나서 잘 다듬어진 주춧돌을 그 위에 올리는지라, 주춧돌을 놓는 일 자체보다는 튼튼한 지정을 박는 게 중요한 공정에 들었다. 아까부터 불도저 한 대가 왔다 갔다 하며 집터를 편편하게 만드느라 바삐 움직였다. 시장이 도착하기 전에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을 보여주려는 모양이었다.

시장보다 먼저 도착한 시청 문화계 주사가 집터 앞에 플래카드를 달고 있었다. 플래카드에는 '경축, ××서원 복원사업 및 의병발원지 성역화 사업, 주최 제천시, 후원 유리문화재단'이라 쓰여 있었다. 플래카드 하나를 다는 데도 주사는 몇 번이나 올렸다 내렸다 수평을 잡느라 고생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터의 좌청룡에 해당할 꼬불꼬불한 산자락 길을 돌아 검정색 중형승용차 두 대가 들어왔다. 앞차에는 시청 공무원들이, 그리고 뒷차에는 문화재단 관계자들이 타고 있었다.

나는 앞차에는 눈길 한번 돌리지 않은 채, 뒷차의 문을 열고 유리 아버지를 향해 깊이 머리 숙여 인사했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대학의 실질적인 재단이사장. 유리의 아버지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정 교수가 고생이 많구만' 하곤, 준비된 의자로 걸어가 시장과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뒤따라 내린 유리는 내게 눈을 찡긋해 보이곤 화사한 레몬빛 원피스를 날리며 배나무 밑으로 가서 섰다. 하얀 배꽃과 레몬빛 원피스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황토빛 옛집 언저리에 박힌 듯 어우러졌다.

문화계 주사의 사회로 내빈 소개가 있었고, 몇 가지 경과보고가 뒤따랐다. 그 사이 유리 아버지의 보좌관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이번 사업은 유리 아버지의 경력을 꽤 괜찮은 이미지로 바꾸는 데 사용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식순에 따라, 레미콘 트럭이 집터로 들어와 막 지정 골조 위에 콘크리트를 들이부을 찰나였다. 누군가 시장과 유리 아버지 앞으로 튀어나갔다.

"아, 아무리 현대식으루다 공사를 혀두 그릏지, 달구질도 안허구 주춧돌을 놓는 법이 시상천지에 어딨대유? 안 그려유? 시장님."

대목 이씨였다. 그는 집터 한가운데로 새끼줄이 여러 방향으로 달린 나무달구 하나를 들어다 놓고, 판검사 최씨를 손짓해 불렀다. 문화계 주사는 식순에도 없던 사고라 당황스런 표정이 역력했지만, 시장과 유리 아버지는 박수까지 쳐가며 대목 이씨를 재촉했다. 달구질에는 아버지도, 김씨 영감님의 아들도, 그리고 마침내는 시장과 유리 아버지까지 달려들어 새끼줄 하나씩을 차지하고 둘러섰다.

"자, …그럼, 지가 앞소리를 헐티니까, 잘덜 받어 치셔유."

"그럼, 그럼, 빨리 달구나 들어올리라구."

우리 집터에 갑자기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자, 들어갑니다. 에야라 지경야.

지경소리 인붓난다, 에야라 지경야.

제일명당 터를 닦아, 에야라 지경야.

입구자(口)로 집을 짓고, 에야라 지경야.

왼쪽 가슴에 꽃을 꽂은 양복쟁이 시장과 개량한복 차림의 문화재단 이사장, 그리고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의 대목 이씨와 판검사 최씨. 번쩍번쩍 구두에, 흰 고무신, 운동화에 장화까지. 어깨 위로 새끼줄을 잡아당겼다가 내려놓는 장단은 한가지로 돌았다. 거기엔 자연스레 어깨춤까지 배어 나왔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기둥을 바로잡겠다고, 아니 지금은 기둥 놓을 자리를 딴딴하게 다지겠다고 나무달구를 들어올리는, 저 많은 사람들의 노래소리. 저들은 도대체 저 자리에 뭘 세우고자 하는 걸까?

나는 하얀 배꽃 그늘 아래로 걸어가 화사한 레몬빛의 손을 잡은 채 그 고적(古蹟)한 풍경에 동화(同化)되었다. 그러면서도 입술 언저리로 배어 나오는 웃음기를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얼굴을 치켜들고 하얀 배꽃만 올려다 보았다.

레미콘 트럭이 저만치 물러난 자리에 이박자의 노래소리가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 한가운데로 한껏 울려퍼졌다.

안팍중문 줄행랑에, 에야라 지경야.

소슬대문 뚜렷하다, 에야라 지경야.

이집 진지 삼년만에, 에야라 지경야.

삼태복을 담아오네, 에야라 지경야.

아들을 낳으면 효자낳고, 에야라 지경야.

딸을 낳으면 열녀로구나, 에야라 지경야.

에야라 지경야, 에야라 지경야.

심으로나 닦어주게, 에야라 지경야.

……, ……. □

* '상여소리'와 '무덤달구소리'는 임재해의 『전통상례』(대원사)에서, '집터달구소리'는 임동권의 『한국민요집』(집문당)에서 각각 인용되었음을 밝힙니다.

* 이 소설은 1999년 『진주신문』 가을문예 소설부문 당선작입니다.



원 시 림(소설가)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