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내내 스티브 일행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에도 승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대진 시멘트 담당자들과 상대할 일이었다. 현지
인과의 상담에 대한 성과는 있었다. 시멘트 외에도 철근이나 중장비의 수입도 하겠다는 업자들을 만났고 단계적으로 전자제품을 구입하겠다는 구체
적인 서류까지 받았으니 출장비는 건진 셈이었다. 상담이 끝날 무렵에 다시 나타난 김태우는 스티브와 승재 사이의 가교 역할을 자청했고 그의 노
력 덕분에 처음 대면하는 상담자들과도 어색하지 않은 자연스런 분위기를 유지 할 수 있었다.
우선 당면한 문제는 대진시멘트였다. 스티브는 대진 쪽으로 상세한 내용의 편지를 다시 팩스로 띄웠다. 그들의 태도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어떤 가격이라 해도 시멘트를 팔 수 없다는 대답 뿐이었다. 승재는 그들의 얼굴을 뭉개듯 팩스 용지를 거칠게 구겨버린다. 이제 막 재기의 첫 발을
내디디려는 승재로서는 약을 올리는 듯한 그들의 태도에 분노보다는 불안을 느낀다. 동시에 이곳의 건설 사업자들과 함께 가보았던 부러진 다리에
대한 기억이 정수리를 무두질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잘못 삽입된 비디오 화면을 연상케 했다. 주변의 경관과 어울리지 못하고 화상자국처럼 도드라
져 거슬리는 문제는 두고라도, 지나치게 번들거리는 외양 때문이었다. 설계도면을 겉만 충실하게 잘 따랐다는 사실은 수치심을 배가시켰다.
 
 "저희 집으로 가시죠. 하룻밤 편히 묵고 가시도록 미리 준비해두었습니다."
스티브의 목소리는 날선 감정의 입자들을 따뜻하게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 승재는 차마 거절의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너무 폐를 끼치게 되지나 않을 지."
스티브는 두 손을 커다랗게 저어가며 승재를 설득하려 애썼다.
"문사장님은 저희들이 필요해서 초청한 손님입니다. 당연히 모셔야지요. 자, 나가시죠. 저희 집은 공항과도 가깝고 명소들과도 가까이 있어요.
물론 이 나라는 대부분 산호섬이라 볼거리가 풍부한 편이지만 특히 저희 집 앞은 경관이 탁월해요. 해상에서 펼쳐지는 돌고래쇼에 날치들이 장관을
이루는 광경도 심심찮게 볼 수가 있으니까요."
스티브가 열띤 호소를 하는 동안 김태우는 조용히 사라졌다. 승재는 스티브의 안내에 응하는 것으로 주저앉을 것만 같은 졸렬한 의지에 간신히
제동을 걸었다.
승재는 스티브의 안내로 두 명의 업자를 더 만났다. 그들은 주방가구와 생필품에 대한 수입 의사를 밝혀왔다. 물량도 적은 데다가 마진률도 박해
서 승재로서는 선뜻 내키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쪽에서는 수출중개업자를 사칭한 해외도피자들에게 한 두 번의 사기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
절박한 사정을 호소해왔다. 스티브의 입장을 보아서도 외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승재는 스티브의 집이 있다는 바벨투아프섬으로 이동을 했다. 코로르섬과 바벨투아프섬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잔잔한
강물 같은 해수면에서 저녁 햇살이 유리 파편처럼 튀고 있었다. 해안 어디에서나 바다 속은 투명하게 내려다 보였다. 사람이 다가가면 형형 색색의
열대어들이 빵부스러기를 받아먹기 위해 모여들었다. 먹이를 주는 사람의 손가락을 물기도 했다.
"저희 아버지는 여든이 다 되셨지만 아직도 낚시를 나가셨다가는 빈손으로 돌아오실 때가 많아요. 그렇게 바다만을 바라보시는 데에는 사연이 있
습니다. 저 태평양을 거슬러 가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을 테니까요."
"아버님도 징용되어 이곳으로 오신 분이시죠?"
"여기서 수십 년 동안 살아온 한국인이면 대부분 그렇다고 봐야지요."
승재는 직감적으로 그의 평온한 얼굴 뒤에 가려진 어두운 그늘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같은 병을 앓아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동
류의식 같은 것이었다.
"사실은 저도 그런 아픈 역사와 무관하게 살지 못했어요. 솔직히 표현하자면 저로서는 별 이끌림이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어머니와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의 운명 공동체이듯 그 분과도 무관 할 수 없는 기묘한 운명적인 관계라고나 할까요?"
승재는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쉰다. 땅이 꺼질 듯이 토해내는 긴 한숨, 그것은 어머니의 전유물이었다.
"저의 아버지 역시 평생을 망해버린 조국에 대한 저주와 분노로 힘겹게 버텨오신 분이었어요. 어머니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종군 위안부로
오셨다가 아버지를 만나셨다니까요. 낳아주시지는 않았지만 그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해요."
그의 한국어 발음은 정확했다. 어릴 때부터 영어를 써온 사람답지 않은 탁월한 한국어 실력이었다. 승재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보기
만 했다.
 
스티브의 아버지는 빛 바랜 사진 속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그는 승재가 건네준 사진을 물기 어린 눈으로 뚫어질 듯 들여다보았다.
"글쎄, 어디선가 한 번은 마주쳤겠지. 하지만 기억에 없어."
기대하지 않겠다고 다졌건만 승재는 허탈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는 일에만 모든 세월을 소진해버린 승재의 가족을 비웃기
라도 하듯 스티브의 가족은 평온해 보였다. 스티브가 한국에서 사왔다는 마소재의 개량 한복을 입은 스티브의 어머니는 동그란 얼굴에 자그마한 체
구의 전형적인 한국의 옛날 여자였다. 승재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재가했다는 사실을 족쇄처럼 지고서 자신이 낳은 자식으로부터도 대접받지 못한
불행한 여인이었다. 냉대로 일관했던 지난 세월이 자신의 뺨을 후려치는 것만 같았다.
수면에서 반사되어 유리조각처럼 튀던 햇살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저녁 바다는 검푸르다. 낮과는 판이한 환상적인 색감의 옷이었다. 스티브
의 아버지는 추락한 가미가제 특공대의 전투기 옆으로 모여드는 형형색색의 열대어들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저게 저러고 있어도 여긴 여전히 아름답지 않아? 우리 부부가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하지."
그의 평온한 얼굴의 이면에는 세월 저 편의 분노와 슬픔이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듯한 목소리였다. 승재의 가슴 속에서도 어머니와
화해하지 못했던 날 선 기억들이 차츰 모서리를 허물고 있었다.
"부러진 다리 보셨소? 한 맺힌 흙다리 아이고로도 부족해 이제는 콘크리트 다리로 시위를 하고 있으니...,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야."
"아이고라니요?"
"내게는 가장 끔찍했던 시절을 기억하게 만드는 생인손과 같은 존재지. 등짐으로 져나른 흙으로 바다를 메워 다리를 만들어야 했으니까. 수치스
런 역사의 증거품인 셈이야."
열린 창을 넘어 들어온 해풍에도 식탁 위에 놓여진 김은 바삭바삭한 채로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승재는 기막힌 과거를 안고 살았을 스티브가
여전히 지니고 있는 맑은 표정처럼 팔라우의 고슬고슬한 해풍도 불가사의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스티브는 보기와는 달리 쉰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직 미혼이었다. 그가 사랑했던 파란 눈의 여자는 그를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떠났지만 자신은
아직 그녀를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혼자 산다며 쓰게 웃었다. 스티브에게서는 억눌림 없는 조화가 주는 부드럽고 탄력 있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스며나고 있었다.
"이런 씁쓸한 자유로움도 사귀기에 따라서는 견딜만 해요. 이 세상에는 아직 나만큼의 자유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러고 보면
우리 가족은 모두 세상과 사이좋게 악수하지 못하고 운명의 바람 앞에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길이 이제 마악 시작되고 있는데 여행을 끝
내버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아요. 덕분에 서로의 짐이 아주 가벼워졌지요."
거실 탁자에는 수많은 사진들이 놓여있었다. 크고 작은 사진틀 속에는 하얀 드레스 차림의 아름다운 신부와 스티브의 어린 시절이 점점이 이어지
고 있었다. 사진 속의 인물들이 지어 보이는 그늘 없는 환한 웃음 앞에서는 그들이 주홍글씨처럼 지니고 있는 스티브 이치로오라는 이름도 무색하
게만 느껴진다.
 
다음 날은 이른 아침을 먹고 스티브의 집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곳에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원시 자연의 모습과 일본군의 포가 설치되었던 굴
들이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었다.
"보세요, 추락한 전투기 잔해 속에도 열대어들은 집을 짓고 알을 낳고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어요."
승재는 그 순간 어머니의 얼굴을 곤혹스럽게 떠올렸다. 스티브의 아버지는 게다리처럼 구부러진 자신의 손가락들을 들어올려 야자수 너머를 가리
켰다.
"저게 바로 그거요. 불쌍한 우리 조선인들의 한과 피가 응어리져 있는 곳이지. 여기만 오면 희망에 불타던 청춘이, 피 흘리며 쓰러져가던 절망의
군상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해. 부러진 다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저건 아직도 멀쩡하게 잘도 버티고 있는데 말이야."
그의 시선이 이끌려간 해안의 끄트머리에는 오래된 흑백 사진 속의 그림처럼 흙으로 다져진 언덕을 디딤돌처럼 고이고 가늘게 이어진 다리 하나
가 앉아 있었다. 그건 교각이라는 느낌보다는 방파제나 물가에 놓인 작은 둔덕을 연상케 했다. 김태우가 스티브에게 물어보라던 바로 그곳이었다.
태평양의 여명을 배경으로 '아이고 브리지'라는 이름이 새겨진 다리 하나가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걸친 채 남루하기 짝이 없는 몰골로 세월 저
편에서 성큼 다가섰다. 수십 년을 역사와는 한 번도 진지한 관계를 맺어보지 못하고 살았던 승재로서는 그제서야 어머니의 혼례 사진과 처음으로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 한 많았던 세월의 아이고 소리가 지금도 내 귓가에는 생생히 살아 있어. 너무 지독해서 그럴까 그것들이 모두 하룻밤 꿈같게만 느껴질 때가
많아. 한숨소리가 저렇게 다리 이름이 되어 박혀 있는 걸 보면 분명 꿈은 아닌데 말이야. 허술해 보이는 저 다리가 아직도 저렇게 건재한 건 아마
그때 묻은 사람들의 한이 응어리져 있기 때문 일 게야. 사람의 등짐으로 져다 나른 흙으로 바다를 메우는 일, 그래, 그건 전설이 되고도 남을 일이
었어."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사방으로 고루 퍼져나갔다. 섬 전체가 잠이 든 것처럼 고요하다. 승재의 눈에 비친 그들 부자의 모습은 따뜻하고 잔잔한
팔라우 해안을 지키는 푸른 산호를 연상케 했다.
"문사장님은 제가 말하고 싶은 걸 이해하시겠지요?"
스티브의 아버지는 승재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우린 초면이나 다름없어요. 너무 부담 드리지 마세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두 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것 역시 승재의 눈에는 수면 속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푸른 산호의 움직임과
흡사해 보였다.
"그렇지 않아."
그의 음성은 여전히 낮게 깔리고 있었지만 함부로 근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승재는 눈앞에 다가선 아이고 브리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
다. 나라 잃은 조선인의 한이 스민 곳이라 그럴까. 그곳은 고향 마을의 친숙한 구릉이나 봉분을 연상케 했다. 실지로 이곳은 육신과 한이 묻힌 이
름 모를 젊은이들의 무덤이기도 할 것이었다. 심중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스티브는 승재의 등뒤로 다가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곳은 사실 형체만 다리일 뿐 거대한 묘지나 다름이 없어요. 그 당시 징용 와서 죽은 사람들이 대부분 무덤도 없이 그대로 수장되기도 하고 공
사장에 예사로 묻히고 다져졌다니까요. 이곳이 무풍지대인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거울처럼 투명하고 잔잔한 이곳의
바다가 가슴이 저리도록 슬프게 느껴질 때가 많아요. 그들의 한이 산호초로 환생하여 습기찬 바람을 재운 덕에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은 거
구나 싶어서 말이죠."
아이고 브리지로 올라간 승재는 혼례 사진 속의 얼굴을 아프게 떠올렸다. 그가 보내었을 눈물겨운 한의 세월이 그제서야 두꺼운 둔감의 벽을 뚫
고서 쩌릿하게 와닿았다.
"나는 그 때 인간이란 것의 본성이 생래적으로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 낱낱이 다 보았다. 다들 미쳐있었지. 열병에 걸려 가쁜 숨을 몰아쉬던 피투
성이의 내 목을 조르던 사촌 형님의 얼굴은 지금도 내 등줄기를 한기로 쓸어 내리곤 해. 결국 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군표가
들어 있었던 가방을 빼앗겼지. 그게 내 운명이었어. 난, 병마와 싸우는 것보다도 복수심과 싸우는 것이 더 힘들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제껏 보아온 얼굴과는 판이한 모습이었다.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를 잃고 이 땅으로 실려왔지만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인생을 새롭게 개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함께
품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잃었어. 하지만 난 그 힘든 세월을 살아냈다. 버텨낼 힘이 내겐 있었으니까. 가끔 잠 안오는 밤이면 고향 마
을의 뿌연 달빛 아래에서 그 처자와 바라보던 당굿나무에 매달린 색헝겊이며 희푸른 눈꽃, 햇무우를 뽑아먹던 봄날이며, 수국이 가득했던 한여름
뜰 안의 풍경들이 저무는 초가을의 햇살과 함께 생생하게 되살아났지. 못견디게 보고 싶었다.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 풍경들이야. 여긴 언제나 우
기와 건기가 되풀이되는 여름 한가지 뿐이니까. 이곳에서의 그 모든 것들을 견뎌내게 한 것은 가슴 속에서 살아 숨쉬던 그 추억들이었다. 내 인생
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뼈를 도려내는 그런 아픔이 있었기에 아름다운 삶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가 견뎌내었을 눈물겨운 소외의 세월이 승재의 머리 속에서 요란한 종소리처럼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들 부자의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그렁
그렁 맺혀 있었다.
승재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피그미족을 연상케 할 만큼 작은 체구였지만 재첩 양동이를 예사로 들어올리던 어머니는 항우장사보다도 힘이
세었다. 어머니의 삶이 비로소 그에게 아픔으로 닻을 내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원했던 것은 세월 저 편의 징용이 앗아간 남편이 아니라 어머니
의 한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족이었는지도 몰랐다.
"내 고향은 지독한 병균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새날도 무자비한 톱니바퀴처럼 고통스러웠다. 생의 응고된 고통들을, 얼어붙어
있었던 마음을 이곳의 바람이 다독여주었지. 그리고 아마 스티브와 저이가 없었다면 그 긴 세월을 버텨내지 못했을 게야. 스티브의 어머니 역시 정
혼자가 신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는 배신을 하지 않았다면 종군 위안부로 끌려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사랑하는 이를 보내야만 하는 같은 운명
의 바람에 휩쓸렸던 우린 귀향 대신 스티브를 택한 셈이지. 내가 태어난 고향은 피투성이의 우리를 결코 환대하지 못했을 테니까. 불행하게도 그건
유일하게 내가 확신 할 수 있는 부분이야."
격해져 오는 감정 때문인지 그는 잠시 숨을 몰아 쉬었다.
"이러는 내 마음을 아마 문사장님은 아실 게다. 할 일이 남아 있는 곳이 바로 고향인 게야. 사업도 결국은 사람이 함께 잘 살아보자고 하는 일이
니까 말이다."
그는 폐부 깊숙한 곳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승재는 출발하기 전 서울의 사무실에서 보내온 팩스를 받았다. 대진의 직원과 담합했던 무역회사 사장과 김태우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은밀하게
닿아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김태우는 계획적인 부도를 내고 해외로 빠져나간 김상규와 동일인이라는 것, 그 때문에 이번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
며, 물증이 확실하게 잡힐 때까지는 내색하지 말라는 내용도 덧붙여져 있었다. 승재의 예감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틀리기를 바랄수록
그의 예감은 불행하게도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시멘트를 창고에 쌓아두고 하는 소리가 경기 좋을 때는 당신 같은 잡바이어들 만나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 해야할 일이라는 겁니다."
승재의 의식 속에서 잠자던 적개심이 확실한 뇌관을 얻은 듯 뻐근하게 숨통을 조여왔다. 그러나 김태우는 마음의 동요를 숨긴 채 태연스레 지껄
이기도 하고 소리 내어 웃기도 한다.
"대진 쪽 사람들이라면 꽉 잡고 있습니다. 믿어 주세요."
가눌 길 없는 생생한 혐오감이 승재의 가슴 한가운데로 치솟는다. 최소한의 자제력 마저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김태우의 익
살스러운 표정이 위태롭고도 아슬아슬하게 실려온다. 지금은 여유롭고 빛나 보이지만 그의 생도 언젠가는 창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부러진 다리처
럼 회생 불능으로 주저앉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밀려드는 것이다.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하는 데에 분통을 터트려야만 했던 일은 이미 수 없이 겪었다. 그런데도 가슴 한가운데를 베인 듯한 통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상처를 입은 것은 승재의 자존심이 아니라 그 순간까지도 아주 털어 내버리지 못했던 인간에 대한 막연한 기대였다. 스티브는 승재의 속내
를 아는지 모르는지 시종 밝고 환한 얼굴이다. 느끼는 만큼 정직한 웃음을 내보이는 그의 눈빛은 투명하게 빛났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죄
의식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여긴 잡종투성이지요. 이름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팔라우에 처음 발을 내디디는 순간 김태우가 승재에게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승재의 굳은 표정에 무안해하며 말머리를 돌려버렸다. 김태
우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그가 선택한 새 삶과 버린 과거가 대조적인 두 개의 색깔로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스티브의 아버지는 가해자로 군림하고도 반성을 모르는 이들에 대해 분개하는 승재에게 빙그레 웃으며 말했었다. 늪을 두려워 말라고. 미래가 누
구에게나 똑같은 형태와 빛깔로만 정해져 있다면 생이 끝나도록 무료하게 기다릴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냐고.
승재는 스티브의 얼굴을 바라보며 김태우에 대한 불쾌감을 떨쳐버리려 애쓴다.
"소송을 위해 우리가 준비할 서류의 내용들은 다시 팩스로 보내겠습니다. 우선 철근만이라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보내주세요. 선적되는 즉시
대금은 지불하겠습니다."
소송절차만 밟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는 듯 스티브의 낯색은 여전히 천진스러운 표정이다. 그러나 승재는 그의 말에 선뜻 대답을 못한
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이익을 떠나서 신뢰할 수 있는 상대를 찾았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하니까요. 저도 이쪽 사람들을 최
대한 설득해서 거래선을 바꾸어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마, 잘 될 겁니다."
스티브의 얼굴이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김태우는 처음과 달리 승재의 굳은 표정 앞에서는 능숙한 안면 관리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대
진시멘트 직원과의 담합을 의심케 하는 굳은 표정이었다. 공산품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라 한국업체들과의 그런 불공정한 거래는 비일비재했
다. 김태우는 결국 팔라우의 사정을 더 어렵게 만든 뒤에 다급한 처지를 빌미로 물건값을 조정하려고 할 것이다. 분노를 느끼기 이전에 동포의 살
을 깍아 먹는 답답하고도 어리석은 술수에 서글픔만 밀려든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서로를 할퀴어서 결국 자멸하고야 마는 항아리 속의 참게 같은
신세라고나 할까.
김태우와 같은 이들이 즐기는 이중거래는 연변에도 있었고, 인도네시아며, 베트남에도 있었다. 재기를 위해서는 이 땅의 수많은 거래가 그래왔듯
검은 돈을 건네야만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가는 셈이다. 은행의 꺾기 때문에 천만 원도 되지 않는 소액으로 부도를 내어야 했던 수백
개의 하청공장들이 그랬고 수많은 부실공사의 이면이 그랬다. 암담함만이 코올타르처럼 뇌수를 가득 채워버린다.
"그래도 저 아이고 브리지를 맨 손으로 지어야 했던 세월보다야 낫잖아요?"
스티브는 승재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외로운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동류의식 같은 것이 그들만이 지니는 직감의 통로를 타고 쩌릿하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스티브와 사무실에서 헤어진 승재는 전날 만나지 못한 자재업자 둘을 만난 뒤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팔라우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부러진 교각과 세월 저 편의 '아이고 브리지'가 현재라는 공간에 혼재하고 있듯이 그
들의 의식 세계 또한 조화롭게 배분되어 있었다. 뼈조차 헐게 만들 골 깊은 원한마저도 밝은 정신의 힘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던 스티브
아버지의 말이 승재의 귓전에서 쉴새없이 맴돌았다. 복수심에 불타던, 어둡고 복잡한 정열의 힘이 자신의 몸 속에서 빠져나가게 하는 데에 평생을
지불했다던 그였다.
어둠의 흔적마저도 말끔하게 털어 내버린 아침 햇살은 크리스탈처럼 투명하게 빛난다. 한폭의 파스텔화를 연상케 하는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곧게 치솟은 코코스 야자수들은 무수한 영혼들을 지켜주는 천상의 거인들을 연상케 한다. 저공비행을 하던 비행기가 열대 우림을 벗어나자 승재의
시선을 붙들고 있던 아이고 브리지도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순간 승재의 가슴 깊숙한 곳에 좌정 하고 있던 시커먼 옹이 하나가 슬며시 빠져나가
는 듯했다.

정 혜 경(소설가)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1960년 부산 출생. 동아대 영문과 졸. 199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장편소설 [죽은 나무는 그늘이 없다](동천사,
1996) 등. 이메일 hye960@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