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게 글을 쓰던 걸 멈추고, 그녀 생각으로 빠져 있던 중 참을 수 없는요의를 느낀 건 방금 전. 선실을 빠져 나와 급히 홀의 화장실을 향하다가 나는 나직나직한 자장가 소리를 듣게 되었지.

 "잘 자라 우리 아가 금물결 은물결도 모두 잠든 이 한 밤......."

 그녀였어. 검은 선창(船窓)을 향해 아기를 업고 어르는 뒷모습의 그녀. 사르르르 사르르르, 콩나물 뿌리에 물이 스미듯 아기는 까뭇까뭇 잠속으로 빠지는지 고개가 미끄러지고 있었지.

 화장실에서 나오니 그녀는 없어졌다. 마치 환영을 보았던 듯....... 나는 그녀가 섰던 선창에 바짝 붙어서 어두운 바다를 보았다. 거기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검은 교자상처럼 번들거리는 창엔 제멋대로 자란 수염을 깎지 못한 우울한 한 청년의 실루엣만 어른거릴 뿐.

 다시 선실. 정확히 자정. 시계 속의 마녀는 지금 자신의 빗자루를 끌어안고 있구나. 캐빈에 들지 못한 나처럼, 몇몇 가난한 여행객들이 팔걸이를 접어 길게 누워 있는 선실로 돌아와 생각한다. 우리가 열 다섯이던 그해. 그 때의 여름밤에도 그녀는 아이를 업고 야시장의 불빛 속을 서성거렸다. 그리고 그해....... 아직 내게는 오기 전의, 역시 열 다섯인 너에겐 무슨 일이 있었나. 상처....... 세월이 지나도 흉터로도 남지도 못하고, 아물지도 못하는 너의 상처.

 

 그해 여름. 날씨는 점점 무더워지고 있었다. 우리가 310호 감방이라 부르는 3학년 10반 우리 교실은 슬래브 건물 4층 꼭대기, 태양열에 시달려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 여름 TV 뉴스에서는 데모하는 시위대의 모습이 자주 비쳐졌다. 머리에 띠를 두른 선생님들. 화염병을 던지며 몸싸움을 벌이는 대학생 데모대. 통일의 꽃이라 불리는 풋풋한 인상의 한 여학생이 북한으로 갔다고 했다.

 교정의 10년생 플라타너스 나무가 제아무리 발돋움을 한다고 해도 꼭대기 우리 반 교실에 해막이를 해줄 순 없었다. 교실은 뜨거운 해를 고스란히 삼킨 듯 했다. 하나 둘 더위에 러닝 셔츠 바람으로 앉아 있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주로 점심시간 이후의 영어 시간엔 거의 대부분이 상의 하나는 벗어 던졌다. 아예 윗통을 벗은 아이들도 나타났다. 윗통을 벗은 놈들 중엔 검은 싸인 펜으로 야성적으로 보이라고 가슴에 털을 잔뜩 그린 녀석도 있었다.

 그해 들어 최고로 더웠던 그 날, 점심 후 5교시 영어 시간. 우린 거의가 윗통을 벗었다. 마침 점심 시간엔 누군가의 손에서최신 포르노 잡지가 돌려졌다. 아찔한 장면의 원색 화보를 서로 보겠다고 한바탕 치고 받은 후인데다가 선정적인 장면들이 교실을 후끈 달궈 놓았다. 그날 따라 주번이었던 나는 개판이 된 교실 분위기가 몹시 신경이 쓰였다.

 그날, 팔이 짧은 흰 아사 원피스를 시원하게 입고 들어온 선생님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와! 쥑이네."

 "씨팔, 유혹하지 말아 줘."

 "아아 꼴린다, 꼴려."

군데군데서 외설 섞인 군지렁거림이 들려 왔다. 예쁘다는 최고의 찬사를 우리는 그렇게 했다.

 교실을 둘러 본 그녀가 잠시 어이없는 듯,

 "이거 꼭 남탕에 잘못 들어 온 것 같네." 하고 오랜만에 농담을 했다.

 "아녜요, 남녀 혼탕이에요."

 누군가의 응수에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녀는 재빨리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교탁을 두드리며,

 "18번 나영수 일어나 봐. 전 시간에 현재완료 배웠지? 한번 정리해 봐."

 "......예, 저...... 그 그런데 선생님, 워, 원서를 읽다가 이해가 안되는 여, 영어 단어 하나 질문해도 되, 됩니까?"

 "그래......"

 말더듬이 나영수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진지하게 더듬거린다.

 "임포턴트, 주, 중요한 이라는 혀,형용사의 명사형이 임포턴스 마, 맞지요? 그런데 이, 임포텐스는 뭐, 뭡니까?"

 선생님은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순간적으로 얼굴이 빨개졌다.

뒤쪽에서 음흉하게 낄낄대는 소리를 신호로 아이들이 또 폭소를 터뜨렸다. 나영수는 평소 다른 시간엔 아주 진지한 학생이었다. 누구나 나영수가 더듬거리기는 해도 현재완료형에 대한 설명을 하리라 예상했었다.

 "선생님, 오르가즘이 뭐예요?"

 "마스터베이션은뭘 마스터했다는 거예요?"

 갑자기 사방에서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선생님은 못들은 척 교편으로 교탁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몇 번 설명했는데 아직 그 용법을 구별 못하니, 너희들? 우리 나라 말엔 그 구별이 확실치 않아 더 이해가 잘 안가겠지만. 자! 주목하고 다시 보자. 먼저 현재완료 용법 중에 완료 용법은......"

 그녀는 출석부 갈피에서 흰 모시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꼭꼭 찍어누르며 다시 한번 현재완료형에 대해 칠판에 판서를 하며 숨가쁘게 설명을 하였다.

 "야, 더 질문하지마. 영어 선생 실력 뽀록난다."

 "에이, 그 정도 실력으로 어떻게 교단에 서세요?"

 "야, 임마. 그래도 때 되면 다월급 나오게 돼있어."

 몇몇 녀석들이 저희들끼리 찧고 까불다가 제풀에 곧 잠잠해졌다. 그러나 아이들은 듣고 있지 않았다. 아이들의 눈빛이 게슴츠레했다. 영어 선생님의 드러난 흰 팔과 얇은 천 속에 아련히 드러나는 속옷의 흰 레이스 무늬, 그 안에 감추어진 흰 몸의 실루엣 .어쩌면 점심 시간에 본 춘화 속의 나신을, 한 겹 옷 속을 뚫고 떠올리는 지도 몰랐다.

 "야, 보인다 보여."

 "나는 봤다."

 앞줄의 꼬마 녀석들이 한마디씩 하는 소리에 교실 안은 갑자기 호기심으로 들썩들썩 했다.

 "야! 뭔데?"

 "털!"

 "뭔 털? 거시기 털?"

 교실 안에 휘파람 소리가 찌익찌익 났다. 칠판을 막대로 치며 강의에만 열중하느라 짧은 소매 속으로 그녀의 겨드랑이 털이 드러났던 모양이었다.

춘화로 이미 들떠 있던 우리들에게 그 한마디의 단어는, 그 나이의 우리들에겐 야릇한 흥분을 주기에 충분했다. 바지 속에 한창 음모가 돋는 성기를 가진 우리들이기에.

 아예 몇몇은 일어나 몸을 비비꼬며 바지 혁대를 푸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개판이 된 수업 분위기였지만 모독 감을 느낀 듯 얼굴이 붉게 물든 그녀가 바지 혁대를 푸는 몸짓을 하는 아이 하나를 지적하며소리쳤다.

 "너 이리 나와. 어디서 그 따위 수작이야? 그래 벗어 봐라, 이 녀석아."

 그러자 지적 받은 그 아이는 그녀의 칠면조같이 변한 얼굴을 보고는 머쓱해 하며 고개를 숙여 버렸다. 아닌게 아니라 그녀는 그 동안 우리들에게서 받았던 수모가 한꺼번에 생각났는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분을 삭이지 못해 했다.교실 안은 서서히 웃음기가 걷혔다.

겨우 감정을 수습한 그녀가,

 "망할 놈의 저질들. 책 펴------!"

일갈하며 분위기를 정리하려 할 때였다. 그 때 우리들의 뒤쪽에서 낮고도 거만한 목소리가 들렸다.

 "벗으라면 못 벗을 줄 아나?"

황종규였다. 선생님과 그의 눈에 일순 팽팽한 긴장이 서렸다. 곧 그가 소리 없이 느물느물 웃었다. 윗통을 벗고 걸상 등받이에 등을 꼿꼿이세운 그의 몸은 강인해 보였다. 선생님의 굳어진 얼굴 너머로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그래? 이왕이면 이 앞 무대에 나와서 벗어 보지 그래?"

 만만치 않은 목소리. 어디 누가이기나 해보자는 투였다.

 교실 안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선생님은 칠판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가소롭다는 듯이 그를 쏘아보았다. 황종규는 그 시선에 약간 눈부신 듯 비칠거렸으나 오른 손으로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젖히며 교단 앞으로 나섰다. 앞줄의 한 녀석이 얼른 교탁을 한 옆으로 치워 주었다.

 그는 다리를 약간 벌리고 몸의 균형을 잡는 듯하더니 빠른 동작으로 걸치고 있던 러닝 셔츠를 벗었다. 다부진 가슴팍, 튼실한 어깨가 이미 성숙한 한 남자의 몸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혁대를 풀었다. 버클의 쇠장식 소리만 째그렁거릴 뿐 우리들은 숨소리도 죽인 채였다.

 허리를 구부리고 바지를 벗는 그. 더위 때문인지 다리에 착 감긴 청바지는 잘 내려가지 않았다. 엉덩이를 이리저리 비틀고 꼬기 시작하자 바지는 조금씩 내려갔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는 것 같았다.

 그 외설스런 몸짓 후에 바지는 벗겨졌다. 그의 건강해 보이는 하체가 드러났다. 팬티 위가 붕긋했다. 우린 침을 꼴깍 삼켰다. 잔인한 쾌감에의 기대는 풍선처럼 차 올랐다. 황종규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조금 뒤쪽에 물러나 있는 선생님을 깊고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우리도 선생님의 얼굴을 보았다. 동공에서 푸른 불꽃이 이는 눈빛이었다. 황종규의 눈동자 흰 창에서는 축축한 광채가 번득인 듯도 했다. 그 순간은 아주 짧지만 길게 느껴졌다. 내 짝이 그때 속삭였다.

 "씨팔, 쥑인다, 쥑여. 쟤 뽄드한 거 아냐?"

 그가 푸른 색 줄무늬 팬티에 손을 대려고 한 순간,

 "그만!"

 선생님이 절박하게 악을 썼다.

 그 순간 우리들의 풍선도 터졌다. 우린 침을 꼴딱이며 삼키려던 고깃덩어리를 빼앗긴 개처럼 억울하고 허탈했다.

 "뒤돌아 서!"

 그녀가 다시 소리쳤다.

 선생님의 명령에 황종규는 느물느물 웃으며 순순히 복종했다.

 칠판을 잡고 엉덩이를 내맡긴 그에게 선생님의 당구 큣대는 사정없이 내려쳐졌다. 튼튼하고 거대한 나무 둥치처럼 바닥에 딛고선 긴장감 있는 단단한 맨살의 허벅지 근육과 당구 큣대. 두 물체가 부딪히는 도발적인 소리와, 매가 내리칠 때마다 리드미컬하게 용수철처럼 퉁겨지는 그의 엉덩이...... 그것은 우릴 조금씩 미치게 하였다. 결정적인 장면을 놓치고 만 우리들의 박탈감은 알 수 없는 분노로 치닫고 있었다.

 그 때 교실 뒤쪽의 아이들 몇 명이 소리쳤다.

 "폭력 교사 물러가라! 폭력 교사 물러가라!"

 당장은 무언지 모를, 아니 알고 싶지도 않은 이상한 광적인 일체감이 급성 전염병처럼 일시에 번졌다. 급기야 우리는 다 같이 합창했다. 구호를 외쳤다. 주먹을 쥐고 손을 높이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TV에서 본 대로.

 "폭!력!교!사! 물!러!나!라!"

 우리편이 아니면 적이 있을 뿐이었다. 흥분한 뒤편의 몇몇은 훌쩍 책상 위로 올라가 팔을 흔들며 악을 썼다. 소리는밀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커졌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쥐고 있던 막대를 힘없이 내던졌다.

우리는 승리자처럼 와아, 함성을 질렀다. 선생님이 낮게 명령했다.

 "들어가거라."

 황종규가 찔뚝거리며 굳은 얼굴로 제자리로 돌아가자 교실은 썰물처럼,히히덕거림과 수런거림이 차츰 사라졌다.

 "다들 눈감아라."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우리는 눈을 감았다. 그때 나는 시계를 봐 두었다. 2시 5분. 수업 종료를 20분 남겨 둔 시각. 무엇이 잘못되어 버렸나...... 잠시 잠깐 나의 머릿속에 회한이랄지 낭패감이랄 지가 지나친 듯도 했다.

 침묵이 흘렀다. 아무 소리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교실은 마치 깊은 우물 속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선생님이 울고 있는 게 아닐까?

 답답하다 못해 가늘게 샛눈을 뜨고 교단을 바라보니 선생님은 없다. 창 쪽이 눈부신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하얗게 햇볕에 바래 가는 옥양목처럼, 흰옷의 그녀가 창가에 정물처럼 서 있다. 아니 날개 다친 작은 흰 새처럼. 창 쪽을 향해 있는 옆얼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미동도 없이 시선을 고정시킨 채.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가끔 그녀의 목울대가 꿈틀했다. 나는 안다. 그녀가 우리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속울음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언제였던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시장 거리에서 아이를 포대기에 업고 바람들지 않게 외투로 여미고 종종걸음치는 그녀를 보았다. 아이가 아팠던 모양인지 박소아과 문턱으로 급히 들어서던 그녀. 리어카 노점에서 꽁치를 고르던 진지한 모습. 바닥에 한줌 거리 산나물을 펼쳐 놓고 파는 할머니에게 쪼그리고 앉아 뭔가 얘기하며 산나물 향내를 맡던 모습. 밤늦은 시각 돌 무렵의 아이를 유모차에 앉히고 시장 끝머리 화원과 수족관을 겸한 '낙원 꽃집'의 유리문 앞에서 아이와 오래도록 진열창 앞에서 열대어를 들여다보는 긴 그림자의 그녀. 한 손으로 잠투정하는 아이의 유모차를 밀며 한 손엔 책을 들고 몰두하던 '혜안 서림' 속의 그녀. 밤늦은 시장 거리를 홀로 배회하는 나의 눈에 먼발치에서 보게 되는 그녀의 긴 그림자는 왜 그리 슬퍼 보였을까.

 그녀도 지독히 외로운 게 아닐까? 나처럼......

 지금 왜 그런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는 걸까......

지루함을 못 견디는 아이들의 잔기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왔다. 아마 그들도 샛눈을 뜨고 그녀를 탐색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수업 종료 2분전이었다. 땀에 젖고 헝클어진 머리를 왼 손으로 쓸어 올리며 교탁으로 돌아온 그녀가 말했다.

 "옛날 17세기 무렵에 영국과 미국엔 마녀로 몰린 선량한 여자들이 처형되었다. 마녀재판이라고....... 그 말은 금세기 미국에선 반공산주의를 지칭하기도 했지. 왜 그런지 그게 생각나는구나. 너희들과 나, 왜 이런 적대 관계에까지 몰리게 되었는지...... 나를 정말로 너희들의 적으로 생각하는 거니? 모르겠다. 교단에 처음 섰을 때 생각이 나는 구나......세상에서 다른 어떤 일보다 너희들을 기르는 것만이 가장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했지. 너희들 하나 하나는 들여다볼수록 꽃 같다고 생각했지.......그러나 이렇게 척박한 땅에 무리 지어 핀 꽃들이 위험하다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았구나. "

 목이 메인 듯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부끄럽구나. 이 교단, 이 자리가......"

그리고는 이내 종소리가 나고 그녀는 영어 책과 출석부를 들고 허청허청 교실을 나갔다.

 "야, 좀 불쌍하다. 내일부터 학교 안 나오는 거 아냐?"

 "어이 재수 없어, 씨팔. 잘난 척 하긴."

 "오늘 또 종례 시간에 독사 대가리한테 작씬 물리겠구나. 분해서 고자질할지도 모르잖냐. "

 교실 안은 금방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느라 웅성대기 시작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때 까진 적어도 '우리들'편의 소속이었다. 그런데 약간은 사적인 감정이 들어간 그녀의 말. 그러나 어쩜 다른 녀석들에겐 '웬 신파야?'하는 느낌을 주었을 그 말이 그후로 긴 여운을 남겨 주었다. 특히 울 듯한 표정으로 '너희들 하나 하나, 들여다 볼수록 꽃 같다고 생각했지.'하던 그 말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가슴속이 아렸다. 괜히 서러워지고 형의 얘기랑 어머니의 절망, 나 자신의 외로움도 마구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거였다.

 그날 종례 시간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로도 몇몇 아이들의 우려와 달리 영어 선생님 또한 수업 종이 치면 들어와 45분을 견디고 종료 종이 울리면 조용히 나갔다. 그 일 이후 우리들의 관계는 표면상 아무 변화가 없었다. 적어도 우리들은 그런 일로 자괴감이나 회오를 간직할 만큼 염치도, 그걸 반추하여 곱씹을 이유도 없었다. 돌에 맞은 개구리의 아픔 같은 건 우리들의 몫이 아니었기에.

 그녀가 변한 것이 있다면 매를 들 만한 구실을 애써 그녀가 피한다는 것. 숙제 검사도 없어지고, 쪽지 시험도 없어졌다. 교실은 마치 남대문 시장 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들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은 뒷칠판 어딘가에 고정을 시키고 마치 마지막 리허설 연습을 하는 대사 많은 1인극의배우처럼 혼자 떠들었다. 그렇다고 직무 유기는 아니라는 듯 열심히. 끊임없는 교실의 소음을 우려해서 동시에 칠판에 쓰면서 가르쳤다. 칠판은 한 시간에도 서너 번씩 닦여졌다. 순전히 그녀 자신만의 노동으로 한시간이 채워졌다.

 우리들의 자리는 아침 등교시간 순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었다. 당연히 모세의 바닷길처럼 앞좌석은 공부에 그나마 관심 있는 몇몇 아이들의 고정석이 되었다. 그 뒤부터는 조용히 다른 시간의 숙제를 하는 부류, 그 뒤엔 완전 자유석이었다. 아침부터 뒷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계속-

 맨위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