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다시 읽는다 제5회

나팔꽃 담장 아래

 



 

이해선(소설가)
 

 

 어머니는 입을 열지 않았다. 주름진 입매는 빗금친 통제구역처럼 꼭 다물려 있었다. 어머니의 그 왜퉁스런 고집을 외면하고 살아온 지 어느새 네 번째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네는 제멋대로 자란 화초의 곁가지들을 잘라냈다. 그제서야 침침했던 가지 사이로 밝은 햇살이 비쳐들었다. 말쑥해진 가지 사이엔 바람결마저 시원하게 스쳐갔다. 다른 화초로 가위를 옮기는데 전화벨이 요란했다.

친정조카의 눅진한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며칠째 '옥례야'를 연거푸 부른다는 것이었다. 그네는 갑자기 뒷목이 당겨왔다. 팔십이 넘은 노구라 누가 거들어야만 겨우 밥상에 앉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한달여 전이었다. 연로한 할머니를 걱정하는 친정조카의 목소리는 그네가 한번쯤 다녀가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한낮의 햇살을 두려워하는 짐승처럼 그네는 여름내 빈 그늘만 맴돌고 있었다.

" …고모는 한 분 뿐인 어머니시면서…."

"그래, 느이 내외가 할머니 수발에 고생이 많다…."

조카의 목소리가 꼬부장해지는가 싶어 그네는 조카 내외를 에두르며, 들고 있던 가위를 내려놨다.

손길을 기다리던 화초를 밀어놓고, 바닥에 떨어진 잔가지들을 주섬주섬 들어올렸다. 손님이 방문할 오후까지 어머니한테 다녀올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방문 약속을 갑자기 취소하기도 난처한 노릇이어서 그네는 어지럽혀진 베란다를 서둘러 치웠다.

--박영진입니다. 내일 오후에 잠시 들를까 하는데 어떠신지요? 만나뵙고 전해드릴 물건이 있어서요.

남편 전시회 문제로 이따금 전화를 걸곤 하던 박영진은 어제 저녁, 뜻밖에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 백두산 스케치 기행단을 주선하면서 익히 듣던 목소리와는 달랐다. 전화선을 한번 당겼다 놓자, 늘어진 전화선 그림자가 저만치서 출렁거렸다. 그네는 이번 여행에 남편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킨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선선히 약속에 응했다.

그 바람에 아침 일찍부터 집안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베란다에 나가 잔가지가 무성하게 뻗은 화초머리를 급히 다듬었다. 여름내 물주기만으로 내버려 둔 화초들이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하는 김에 바깥 화단에서 베란다 창으로 올라오고 있는 나팔꽃 덩굴도 잘라낼 생각을 했다. 가위질하는 틈틈이 경비실을 두리번거리고 살폈다. 경비원이 없는가 엿보려는 것이었다. 꽃가꾸기를 유달리 좋아하는 경비원 조씨는 동네 아이들이 배드민턴 공만 화단에 떨어뜨려도 나무라곤 했다.

그네 역시 꽃을 좋아하여 화단이 잘 가꿔진 이 1층 아파트를 택했지만, 어느날 무심코 칭칭 올라오는 나팔꽃 줄기에 그네는 그만 창 쪽을 외면하고, 아예 그 쪽 커튼은 반쯤 가린 채 한여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낮에도 커튼을 걷지 않고 더위 먹은 사람처럼 엎드려만 있다는 남편의 질책을 민망해 할 때, 어느덧 처서였다.

그네는 전화기의 작동버튼을 누르고 외출준비를 서둘렀다. 미처 집어 올리지 못한 아침신문이 현관 앞에 떨어져 있었다. 신문을 집어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남편은 언제나 탁자 옆 안락의자에서 신문을 집어들었다. 남편이 보고 난 다음 흩어진 신문을 간추리며 보는 것은 그네가 오래 전부터 되풀이해 온 습관이었다. 문득 그네의 시선이 의자 뒤에 걸려있는 그림에 가서 머물렀다.

곧 울 것 같은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낡고 퇴색한 금박 테두리 안에서 부옇게 떠올랐다. 흐릿한 배경 속의 아이는 냉이꽃 같은 풀꽃을 한 줌 쥐고 서 있었다. 뒤틀리고 늘어진 원피스 자락이 회색빛 담벼락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길다란 회벽이 끝나는 자리에 영문자 팻말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팻말 너머에서 금방이라도 푸른 눈을 가진 미군 병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호통치며 달려나올 것 같았다. 그네는 미군 병사의 호통에서 비켜서듯 액자를 바로잡았다.

유다른 애착과 자존심으로 지켜온 남편의 고집이 뿌연 먼지 속에서 꿈틀거렸다. 새로운 그림으로 바꿔 걸지 않는다는 영인의 질타가 있을 때마다 남편은 전란기를 드러내는 자신의 유일한 작품이라며 말없이 응시하곤 했다.

그림을 주문했던 부자의 홀대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소재도 파악할 수 없을 그림이었다. 6.25 직후 미군부대 피엑스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연명하던 시절, 그림을 주문했던 부자는 무명화가라는 약점을 물고 늘어져 헐값에 가져가려 했다.

--저런 자들에게 안 팔길 잘 했지. 그림이 그자들 손에 들어가봐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창녀꼴 밖에 더 되겠어?

남편은 벽에다 쇠망치 소리를 우렁차게 내며 자존심을 높이 걸었다. 단순한 사실성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겪은 현실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네는 그림 속 풍경을 다시 한번 바라보다 현관을 나섰다.

경비원 조씨가 1층 화단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매사에 부지런한 성품이어서 또 뭔가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꽃이 좋아 이 집으로 오게 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조씨는 그네만 보면 꽃얘기를 하려 들었다.

--꽃은 손길 가는 대로예요. 마음을 주면 주는 대로 잘 자라거든요.

정성 쏟은 만큼 곱게 피어나는 꽃가꾸기가 무엇보다 큰 즐거움이라는 말에 그네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해 가을, 화단에 해바라기와 당국화가 가득히 심어진 것에 이끌려 그네는 아파트 계약을 서둘렀다. 부동산 남자는 다른 동 로열층을 보여주겠다고 했지만 그네는 사양했다. 아파트 평수가 크다는 것보다 철마다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그네는 이따금 혼자 있게 될 시간이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그네는 다른 날과 달리 목례만 하고 곧장 아파트 벽을 꺾어들었다.

처서라고 해도 햇살이 뜨거웠다. 눈이 부셔 이마에 손을 얹자,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당신 올 여름 보내기가 영 수월찮던데 이젠 찬 바람도 나고 했으니 약이라도 한 재 지어먹지 그래.

남편의 목소리가 저만치 떠올랐다. 언제나 무덤덤하던 그가 전에 없는 잔 걱정을 하고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여행에 앞서, '백두산 올라가는 코스가 아주 험하다나봐' 하고 느닷없이 난코스를 들먹이며 은연중 동행의사를 꺾어 놓았던 남편은 어젯밤 들뜬 기분으로 전화까지 걸어왔다.

--여기 연길 백산 호텔인데….

심양 연길을 거쳐 저녁먹고 호텔에서 쉬는 중이라며, 도착 안부를 했다. 좀처럼 전화를 하지 않는 성미인데, '당신과 같이 못 와서 미안하다' 는 소리를 말끝마다 붙였다. 이젠 부부가 함께 다녀야 할 시기가 아니냐는 영인의 성화 탓인가. 이번 중국여행에서 돌아가면 하와이나 발리여행을 같이 하자며 때아닌 선심까지 썼다. 그러나 그네는 '칠십고개에 그런 소리도 다 듣는군요.' 하고 내뱉고 싶은 말을 용케도 참아냈다.

공항으로 마중 나오겠다던 장서방은 만나봤는지 궁금했다.얼마전 희귀한 그림이 있다며 전화를 걸어왔는데, 그림 또한 구경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문의하는 장서방에게 남편은 우선 가계약으로라도 그림을 수집해 두라며, 실물을 봐야 그림의 진위를 알 수 있겠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중국 현지 공장에 파견된 지 10개월이나 된 장서방 안부를 깜빡 잊고 보니, 영인이 그런 사실을 알면 장모가 사위 하나 있는 거 무심히 여긴다고 속을 낼 것이었다. 영인은 제 아버지편에 최근에 찍은 가족사진을 보내면서, 아버지가 전하게 될 생생한 소식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방학이 되면 핑계김에 중국여행도 다녀와야겠다고 했다. 제 아버지가 출타중일 때면 그네에게 안부전화도 더욱 자주 걸고, 아예 열쇠 하나를 만들어 가지고 틈틈이 들르기도 하는 영인이 그네는 그저 미더울 따름이었다. 그네는 어제 저녁 남편에게 한일작가초대전 일정이 잡혔다는 박영진의 통보도 미처 말하지 못했다.

 

아파트를 돌아나오며 그네는 때이른 연시감 살 가게를 떠올렸다. 전날 저녁부터 식사를 전혀 하지 못한다는 어머니 소식을 접하고 불현듯 생각난 것이 감이었다. 어머니는 유난히 감을 좋아해 늦가을부터 한겨울 내내 홍시단지를 끌어안고 살 정도였다. 어머니에게 이끌리는 마음이 급했지만, 그네는 철이른 감을 사기 위해 백화점이 있는 곳으로 택시의 방향을 잡았다.

백화점이 가까워져 가는 도로변에 대형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네는 세일 때마다 번잡을 떠는 광고물이려니 하고 고개를 돌렸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피해 그네는 아예 차양막처럼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택시기사가 급정거를 한 탓인지, 앞좌석 시트를 잡고 있던 손이 심하게 미끌어져 내렸다. 그네의 속이 덩달아 울렁거렸다. 택시기사는 자신의 난폭한 운전솜씨는 아랑곳없이 앞차가 교통방해를 한다고 버럭 성질을 냈다.

"저것 보라구요. 글쎄, 미군부대가 저만큼이나 땅을 차지하고 있으니, 길이 밤낮 붐비고 차들은 이렇게 구부러진 길로 곡예 운전을 해야 되잖아요."

그네는 택시기사의 불평을 건성으로 넘기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땅 미군부대를 되찾자는 현수막이 전봇대 사이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미군부대 땅을 되찾아 직선도로를 내고 근린공원을 조성하자는 시민운동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백화점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미군부대 담벼락엔 담으로부터 2미터이내 주정차를 금한다는 영내 사령관의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접근금지라는 오래된 고딕체 명령문이 차갑고 딱딱하게 가슴을 두둘겼다.

--아이고 야야, 애를 잃어버렸다야. 어떤 미군이 애기가 이쁘다고 쪼꼴레또를 주며 안아본다기에 내려놨더니, 그만 안고 가버렸어야….

우는 아이를 달래주마고 업고 나갔던 어머니는 빈 몸으로 돌아와 그렇게 말했다. 그네는 가슴속에서 몇 십 배나 크게 자리잡은 ' 내 아이를 찾습니다… 내 아이를 돌려주세요….' 라는 현수막을 공중높이 걸고 싶었다. 마치 그 거대한 땅덩어리 안에 외롭게 갇혀 있는 것처럼. 몇 십만 평이나 된다는 땅에 보기좋게 심어진 나무들이 비좁은 길에서 복작거리는 차량과 인파를 유유히 내려다보는 듯 했다.

어머니가 미군부대 담너머로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를 보고 있다가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소리에, 한때는 육중한 담벼락 주변을 얼마나 배회했던가. 파란눈의 보초병의 알아들을 수 없는 호통에 낙심천만하고 돌아와 아이를 찾아내라며 어머니한테 사정없이 퍼붓던 일이 아련했다. 패악을 당하던 어머니 심중에 아이의 행방을 어처구니없이 둘러대는 꿍심이 들어있을 줄이야. 어머니가 좀더 빨리 얘기만 제대로 했어도, 아니 실수로 그냥 잃어버린게 아니라 일부러 미군 장교에게 업어다 줬다는 사년 전의 실토만 없었어도 어머니와 담을 쌓고 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네는 한세월 다 보내고 나서야 재우쳐 캐물어 알아낸 자신의 미욱함에 혀를 찼다.

--네 서방 보기 안 됐어서…. 모두 빨갱이 따라 넘어갔는데 네 뒤까지 맡은 유서방 보기가 여간 안 됐어야지. 남의 자식 키워서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겄냐? 그것도 빨갱이 된 사람의 자식을….

--보초서는 미군이 어떻게 어린애를 맡을 수 있어요? 말도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미군 장교를 만나고 애를 맡아달라고 넘겨줘요. 아무리 전쟁통이라 부모잃은 애들이 천지였다고 해도 어떻게 외손주를 길에서 주운 고아라고 내맡겨요?

어머니는 입가의 잔주름만 가볍게 떨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네는 그날 부대앞 플라타나스 나무에 오래도록 기대서 있었다. 난리통에 집과 부모를 잃고 떠돌던 아이들을 미군들이 데려다 일을 시키거나 더러는 미국에 데려가 공부를 시킨다는 소문이 귓가에 어지러웠다. 그네는 어머니의 실토가 사실이라면, 그 아인 어느 쪽이었을까 망연히 점쳐보기도 했다. 애써 발끝에 힘을 모은 채, 그네는 더 이상 어머니 임종도 보지 않겠다는 모진 결심을 하고 돌아섰다. 그 자리의 플라타나스는 사 년 전보다 훨씬 노쇠한 빛을 띠고 가을볕 아래 무연히 서 있었다.

백화점 지하매장에 얌전히 포장된 감은 아무래도 자연시가 아니어서 그런지 빛깔이 미덥지 않았다. 아무려면 이제 겨우 가을볕과 바람에 제 색이 돌고 있을텐데, 제대로 익은 홍시가 있을 리 만무했다. 어머니는 어쩌면 풍산댁 감맛이 안난다고 고개를 돌릴지도 몰랐다.

잎이 다 지고 날씨가 쌀쌀해질 무렵, 과일가게 앞에 늘어선주홍빛 감을 보면 그네는 풍산댁이 생각났다. 풍산댁은 고향에서 정성껏 갈무리한 감을 날라오곤 했는데, 아이를 잃고 넋이 빠져 있던 그 해는 감을 더욱 많이 가져 왔었다. 입맛 잃지 말고 이거 하나 먹어보라던 풍산댁은 지금 어디서 지내려나. 어머니는 먼 친척뻘인 풍산댁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좋아했다. 어머니한테 아이가 없어 소박당한 아픔을 털어놓던 풍산댁은 몇 년동안 어머니일을 거들다 마음씨 좋은 영감을 만나 재가했다던가. 그 후 어머니는 감을 먹을 때마다 풍산댁을 입에 올리곤 했다.

백화점 입구를 돌아나오는데, 젊은 작가 초대전이 열리고 있다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만 조급하지 않으면 백화점 전시실을 한 차례 둘러봐도 좋을 일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도 저런 걸 한다고 야단인데, 화업 오십 년이 넘도록 그런 일과는 동떨어진 채 붓을 잡고 있는 남편의 고집이 생각났다.

--진짜가 아니면 그려선 안 돼. 자기를 속이지 말고 자기 것을 그려야 해. 타이틀 따내기처럼 수상에만 집착하고, 전시 경력만 내세우면 헛 것을 그리게 돼.

모두들 자기를 드러내 보이려고 애쓰는 세상인데, 유독 남편은 그런 것을 거부하였다. 자기가 좋아서 하면 됐지, 대외적인 평가가 뭘 그리 대단하냐는 것이었다.

언제나 세상을 빠르게 읽어내는 영인의 눈엔 그런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높았다. 더우기 주변의 동료나 후배들의 왕성한 활동소식에 접할 때면 먼저 시샘을 부렸다.

--소전 아저씨 팡팡 잘 나가는 거 보면 샘나 죽겠어요. 일간지 기자들도 소전 임홍주 화백이라 하면 기사를 대문짝 만하게 내주고 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어디 조그만 단신기사도 찾아 볼 수가 없으니, 도대체 한국화단에 유정한 화백은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우편으로 배달된 소전의 전시회 팜플릿을 보고 영인은 또 불만을 터뜨렸다. 개관 20주년을 기념하여 이 시대 최고 원로 작가의 역작을 준비했다는 화랑대표의 노련한 인사말이 상술처럼 번득였다. 팜플릿 전면에 친화력이 넘치고 풍부한 표정의 소전은 외곬수인 남편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전란 후, 남편과 함께 미군 피엑스에서 그림을 그리던 시절에도 소전은 워낙 번죽이 좋아 양키들의 까탈을 잘 받아넘기며 주문을 압도적으로 늘려 나갔다. 딸린 식구가 많아 유난히 끼니 걱정을 하던 그에게 남편은 그림값을 더러 떼어주기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전은 집도 사고 화실도 장만했다.

70년대 이르러 그림시장에 느닷없는 상업적 열기가 불어닥치자, 소전은 이 때에도 타고난 기질을 발휘하여 제법 그림으로 돈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흐름을 재빨리 따라잡은 그는 일찌기 인기 중견작가로 발돋음해 덕소와 안성에 근사한 아틀리에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 때까지 제대로 된 살림집 하나 없던 남편에게 소전은 화실 하나를 빌려 줄테니 내려가서 마음껏 쓰라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러다 내 그림 다 가로채려는 수작 아니냐며 너털웃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한때 그림이 안 된다, 좀 더 다른 그림을 그릴 수는 없는가 하며, 새로운 예술혼을 접목시키겠다고 남편은 뉴욕과 중동 그리고 파리화단까지 훌훌 돌아다녔다. 그러나 남편은 개인전은커녕, 화랑주최의 초대전도 마다하고 자기세계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아직도 집 한 칸 없이 곤궁한 생활을 하는 가족을 위해서 선심쓰듯 귀국전을 치룬게 고작이었다. 모처럼의 전시회를 성황리에 마친 남편은 쑥스러워 어쩔줄 몰라했다. 나중에 유작전이나 열면 모를까, 이제 입에 풀칠 할 정도는 됐으니 전시회 같은 것은 사양하겠다고 의무를 다한 양 선언했다.

--이 봐, 우리 회화 연구소 출신이 누가 남았나? 모두 다 뿔뿔이 흩어진 데다 먼저 세상을 뜨기도 하고, 이제 국내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자네와 나 말고 더 없지 않은가? 노골적으로 얘기하는데 이제 한국화단에 내 그림 안 가진 사람 거의 없어. 이젠 자네 차례야. 이 소전 그림뿐 아니라 자네 그림도 같이 걸어야지. 적극적으로 내보이고, 그래서 원하면 양도해야 한다구. 그리고 더 늙기 전에 일본에 나가있는 우리 출신 몇 사람하고 한일작가초대전 한 번 갖자구.

소전의 입김이 작용한 탓인지, 박영진이 요즈음 부쩍 관심을 보이며 잦은 연락을 해왔다. 이번 백두산 스케치 기행단에 남편이 참석하게 된 것도 자신의 공로임을 은근히 내세우는 그는 남편을 초대전까지 몰고 가려는 게 역력했다. 이제야 중앙무대 진출을 노려 박영진과 적극적인 교류를 할 것인지 남편의 태도가 궁금했다. 박영진은 얼마 전까지도 일간지 문화부에서 미술담당기자로 활약하다 임홍주화백 문하에 들어가 개인비서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소전의 작품세계를 홍보하고 상품화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는 소문이 오래 전부터 화랑가에 돌고 있었다. 일전에 일본을 다녀왔다는 박영진의 목소리는 은근하면서도 의욕이 넘치고 있었다. 그 곳에 살고 있는 교포화가들의 근황을 살피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소전 초대전에 나와 테이프 커팅을 꼭 해 달라는 당부를 하면서 시종 능란한 화술로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려 들었다.

--이번 기획전으로 이는 바람을 그대로 몰고 나가면 유화백님 평생 화업을 누구보다도 큰 잔치마당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중국여행에서 돌아오면 좀 더 현실적인 그림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남들이 좋아하는 그림도 그리길 바라는 영인의 기대가 자꾸 마음에 떠올랐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디선가 냄새가 풍겨왔다. 고개를 돌리고보니 빵굼터라는 간판이 보였다. 영인이 있었다면 아마 코를 싸쥐고 피하느라 수선을 피웠을 것이었다. 그네는 아릿한 기억으로 차를 기다렸다.

남편이 화구를 들고 해외로 떠난 뒤, 줄어드는 연탄 숫자를 세며 살아갈 날을 막막하게 저울질하던 때였다. 뜰 아래 낡은 화분에서 부등부등 자라오르던 군자란을 보고 그네는 울 것 같은 힘을 얻었다. 열심히 물을 주고 보살핀 정성으로 꽃대가 힘있게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네는 친구가 개점한 제과점을 찾아가 무조건 앞치마를 두르고 빵상자를 나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는 그네보다 더 딱한 표정을 지었다.

--얘, 고상한 물감 냄새만 맡던 네가 이런 밀가루 냄새를 맡아서 어쩌니.

친구는 차라리 그림 한 점이라도 후하게 사 주겠다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그네는 코끝을 허물고라도 딸의 꿋꿋한 지주목이 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세계를 고집하고 떠난 남편대신 영인을 보란 듯이 키우겠다고 스스로를 채근했던 것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저녁이면 친구는 팔다 남은 빵을 싸주곤 했다. 그 빵은 때로 모녀의 저녁요기가 되기도 했다. 딸아이가 정신적인 파동을 일으키던 때가 그 무렵이었던가. 하루종일 지친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그네 앞에 영인은 손에 들린 빵봉지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넣었다.

--됐어요. 엄마 이런 거 들고 다니지 말아요. 내가 취직해서 돈 벌어 올테니까 제발 이런 거 받아오지 말란 말예요.

처음으로 아이의 뺨에 벌건 손자국을 내고 붓통에 남아있던 붓자루를 모두 꺾어 던졌다. 그네 친구의 질녀가 영인의 반에 새로 전학와 '쟤네는 저녁마다 우리 고모네서 빵을 가져다 먹고 산다'는 소리를 했던 것이다. 영인은 그 후로 부쩍 마음의 성장을 했다.

'나는 배웠다 아버지로부터. 삶은 결코 열정에 들떠 행동할 것이 아니며, 쓸데없는 열정을 잠재울 줄 알 것을. 나는 배웠다 어머니로부터. 순한 마음만을 갖지 말 것이며, 뱀의 교활함과 비둘기의 순수함을 함께 지닐 것을….

딸아이의 일기장을 본 그날밤 그네는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도 자신도 영인에게 좋은 부모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쓰라렸다. 그네는 벽에 걸린 그림을 노리듯이 쳐다봤다. 싸구려 화상을 찾아가 그림을 내놓고 남편의 하찮은 자존심을 사정없이 뭉개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림 속 아이와 눈망울이 마주친 순간, 그네는 사느라고 잊혀졌던 한 아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영인을 키워내고 살아가는데 짓눌려 응어리로 남겨진 아이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네는 가슴속으로부터 아이의 숨소리를 듣는 듯 했다. 그네는 사라진 아이의 행방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쪽으로 치우친 삶의 무게 중심을 남 모르게 이동하면서 그네는 오래도록 고개를 꺾고 울었다. 그네는 영인이 교육대학을 마칠 때까지 내내 앞자락에 빵가루를 묻혔다.

영인이 잘 자라온 것을 기특해 하는 남편의 심중에 잃어버린 아이의 흔적이 터럭만큼이라도 있을까, 그네는 공연히 은밀한 눈치를 엿보다 소스라치곤 했다. 언젠가부터 그네는 부모형제를 찾는다는 신문의 휴지통 기사를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온갖 사연으로 헤어진 사람들의 애타는 심정은 늘 눈시울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요즈음 누구보다도 빨리 현실에 편입하여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영인을 보는 것이 과히 나쁘지 않았다. 그 때의 빵맛에 질렸는지 빵을 싫어하는 거 외에. 아마 어머니도 그네가 출가시킨 딸과 가까이서 오손도손 사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는지도 몰랐다. 그 옛날 당신이 저지른 실수를 넌지시 풀어넘기고 싶은 심정에서였는지, 팔순잔치가 끝난 저녁 어머니는 그네를 불러 앉혔다.

--내 이제 속엣말을 내놓는데, 미군부대 앞에서 잃어버렸다고 한 아이는 그냥 잃어버린게 아니라 내가 일부러 업어다 준거여. 네 앞날을 생각하던 끝에 미군 장교한테 길에서 주운 앤데 잘 맡아 달라고 했으니 이제 너는…

어머니가 채 말을 마칠새 없이 그네는 불덩이같은 악다구니를 마구 쏟았다.

그네는 감이 든 봉지를 조심스레 안으며 차에 올랐다. 어머니가 해답이 될 마지막 말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꾸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직 이렇게 총총히 걸을 수 있는 힘이면, 그네는 백두산인들 오르지 못할까 싶었다. 약한 체력에 의료시설도 없는 곳에서 병이 날 것을 염려하던 남편의 기우가 그네로서는 자꾸 섭섭했다.

생활의 책임도 화가로서의 대중적 성공도 이루지 못한 채 시류만 탓하는 사람을 한 때의 보호막이 되었던 인연으로 소리없이 지켜온 세월이 바람결처럼 일었다. 이제 주저앉지 않을 힘이 있는 한 그네는 아이의 행방을 찾는데 매달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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