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형사에게 두번째 피해 신고가 접수된 것은 한 여름날에 생성됐던 별스런 태풍이 막 소멸된 직후의 일이었다. 첫번째 사건 이후 한 달이 넘게 지
나고 있었다. 그는 피해자의 인적 사항과 사건 정황, 그리고 피해 사례 등에 대해서 적은 다음 비로소 상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맞을 일을 했으니까 맞았다는 생각은 안 드시오?”
아무리 형사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넘겨짚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민 형사는 그걸 얼버무리기 위해서 상대에게 미소를 보였다. 두번째 피해자 역시 얼
굴에 진흙을 갖다 붙인 듯 퉁퉁 부어 있었다. 본래 살집이 많은 얼굴이라서 그런지 첫번째 신고했던 남자보다 더 세게 맞은 것처럼 보였다. 안기문이
란 이름을 가진 오십대 남자였고 특별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정말입니다. 이름만 확인하더니 다짜고짜 치고 달아나버렸단 말입니다.”
“지금 그런 식으로 신고해 놓고 범인을 잡아달라는 거요?”
안이 대꾸를 하지 못하고 양손을 비비적거렸다. 처음 신고했던 정병억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말못할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제 두 사람을 한
자리에서 대질 심문해 보면 무엇인가가 분명 나올 것이다. 미리 정병억을 소환해 둔 건 잘한 일이었다. 민 형사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어쨌거나, 딱 한 대 맞았는데 뺨이 그렇게 부었단 말요?”
“말도 마시오. 영락없이 곰 발바닥 같은 손으로 꼭 떡메 치듯 내려치는데 그 길로 그냥 가는 줄 알았으니까요.”
안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민 형사는 다시 한 번 사건의 성격에 대해 찬찬히 궁리해 보기 시작했다. 우선 떠오르는 건 원한관계였다. 물론 미심쩍은 바
가 없는 건 아니었다. 피해자 두 사람 다 한 대씩밖에 맞지 않았다는 게 의문이었다. 사실 민 형사는 처음 신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사건을 서둘러
해결하고픈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서류를 그냥 밀쳐둔 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언론에도 아직 보도되지 않은 개인적 사건이라는 성격이 강했으며
무엇보다 이른바 ‘영양가’가 별로 없어 보인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나중에 사건이 갑작스럽게 확대될 경우에 대비해서 어느
정도는 파악을 해두는 게 옳을 것 같았다.
“아, 참! 혹시 정병억이라는 이름을 아쇼?”
“그런 이름은, 기억에 없는데…….”
“알았어요. 따라오시오.”
민 형사는 정병억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안을 데려갔다. 그러면서 두 피해자가 처음 얼굴을 마주치는 순간을 눈여겨보았지만 서로 아는 사이는 아
닌 게 분명했다. 겉으로 보면 두 사람에게는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그러나 사실이 확인되면 무엇인가 하나만큼은 공통분모가 찾아질 것이다. 민 형
사는 그 수수께끼를 염두에 두면서 두 사람을 향해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건 형사사건이오. 이 말은…….”
그는 일부러 말을 자른 다음 눈을 부라리며 정과 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안기문은 얻어맞은 자리에 갑자기 경련이라도 이는지 뺨을 어루만졌다.
“두 사람이 피해자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보호만 받을 수는 없다는 뜻이오. 알겠습니까?”
싸라기 밥만 먹고 자란 사람처럼, 말끝마다 일부러 톡톡 부러뜨린 듯한 토막말로 다그치던 민 형사가 느닷없이 미끈한 존경어미를 썼다. 그러나 그건
말뿐이었지 오히려 더 살벌하게 들렸다. 정과 안이 뜨악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민 형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시간을 줄 테니까, 그놈들이 왜 때리고 도망쳤는지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 보쇼.”
에어컨을 일부러 끄고 선풍기 하나만 돌리는 듯한 비좁은 실내는 무척이나 갑갑하고 후텁지근했다. 정과 안은 벌써부터 땀으로 목욕하는 느낌이 들었
다. 특히 비대한 몸집의 안기문은 이마에서부터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느라고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재미있는 건 똑같은 얼굴인데도 불구하
고 맞아서 부어오른 쪽에서 눈에 띌 만큼 훨씬 더 많은 양의 땀이 흐른다는 사실이었다.
밖으로 나온 민 형사는 몽타주를 담당하는 직원을 불러 그들이 있는 방으로 들여보냈다. 두 사람의 기억을 종합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어
폰 하나를 찾아 귀에 꽂은 채 미결사건의 파일을 꺼내 건성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여름철 실내 적정온도라는 지침을 충실하게 사수하고 있는 수사
계 사무실도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는 조금이라도 동선(動線)의 길이를 줄이는 게 피서를 위한 최선의 방책이기도 했다. 그 지혜를 발휘하기
라도 하듯 몽타주 담당이 가필 작업을 끝내고 방을 나선 뒤에도 민 형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이윽고 그 방에서 속삭이는 소리들이 민 형사의 귀에 잡히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어쩌다가 그 새끼들에게 당했습니까?”
“……”
“니미럴!…… 우리끼린데, 한번 말해 봐요. 그래야 범인들이 누군지 짐작이라도 해보죠. 나한테는 길거리에 담배꽁초를 버렸다고 그 지랄을 합디다.
아무래도 할 일 없는 경찰놈들 소행이 아닐까 싶은데…….”
“이 방, 도청되지 않을까?”
“쓰바! 하고 싶으면 하라고 그러지.”
“난, 담배도 안 피우는 사람이요.”
“에이, 시방 우리끼리 중고생들처럼 흡연 검사나 하자는 게 아니잖아요. 그 망나니 새끼들이 뭐라고 하더란 말이냐, 이거죠.”
“누구누구 남편이냐고 묻습디다.”
“그래서요?”
“……”
안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민 형사는 재빨리 사환을 불러 안기문이라는 이름을 적어주고 가족관계를 조회해 보라고 일렀다. 방에서는 끊겼던 대
화가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흐유!…… 아저씨도 참, 어지간히 독종이요. 그러려면 뭐 하려고 신고했소? 억울해도 쓰바, 그냥 재수없이 똥통에 한번 빠진 셈치고 죽치고나 있
지.”
“부아가 나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건 나도 그래요. 길거리에 담배꽁초 하나 버렸다고 오만 원, 아니 오백만 원을 벌금으로 물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약 오르지는 않았을 거요.”
“혹시, 그 근처에 누가 있었는지 특별히 기억나는 놈들은 없소?”
“가만!…… 새벽길 오거리 신호등이라?”
그때 사환 아이가 대단한 사실이라도 찾아낸 것처럼 민 형사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복사해 온 문서를 받아서 읽어보니 아닌게아니라 거기
에는 놀랄 만한 정보가 있었다. 안기문은 다름아닌, 얼마 전 세상을 온통 떠들썩하게 했던 악덕 사채업자의 남편이었던 것이다. 그 부인은 평범한 어
느 가정주부에게 몇백만 원을 빌려주고 나서 불과 7년 만에 무려 백 배도 넘게 갈취했을 뿐만 아니라 인신매매까지 서슴지 않은 죄목으로 이미 구속
돼 있는 여자였다.
민 형사는 무릎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범인들이 누군지 아직 오리무중이지만, 그들은 의적 일지매나 홍길동을 모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옛적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재산을 빼앗는 대신 귀뺨을, 그것도 개인적이거나 주관적인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딱 한 대씩만 매우 호되게 때린다는 사
실 정도였다. 그렇다면 안과 정 두 사람을 제외하고도 피해자는 훨씬 더 많을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민 형사는 그들을 때리고 다니는 자들이
과연 누구인지 어린아이들 같은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헤아릴 수 없는 어떤 고무되고 격앙된 감정으로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길을 지나가던 아름다운 청년 둘이서, 어느 때던가 한참 동안이나 내 수레를 밀어준 적이 있다. 그들은 수레를 미느라고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끝없이
무슨 얘긴가를 나누었다. 그때 나는 그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이건 숨김없는 고백이거니와, 나 역시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게 마치 유일한
감사표시이며 무이(無二)의 답례라도 되는 듯 그들의 대화를 새겨들었는데 그때 내가 얻어배운 단어 하나가 분수 넘게도 ‘천민(賤民) 자본주의’라
는 말이다.
나는 처음에 그 말이 우리 같은 환경미화원들을 얕잡아보고 천민 취급하는 그런 표현 가운데 하나인 줄 알았다. 그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수
레를 멈추고 그들에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좁은 소견머리로 따져봐도 역겨운 냄새가 나는 수레 뒤를 자청해서 밀어주
는 청년들이 내 처지를 가리키며 손가락질하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묵묵히 수레를 끌며, 나는 대신 그 단어 하나만을 내딛는 발걸음마다 새겼다. 그
리고 다음날부터 얼굴에서 조금이라도 배운 티가 풍기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물었다.
―`천민 자본주의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묻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내 질문에 명쾌한 답을 주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나는 그들이 뜻을 몰랐다거나 아니면 행색
이 꾀죄죄한 나를 기피했던 건 아니라고 믿는다. 다만 그들은, 천민 자본주의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보자면, 약간의 오해를 했을 게 틀림없다. 생각
해 보라. 어느 한 아파트 단지에서 쓰레기를 치우고 있던 불한당 같은 젊은이가 느닷없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가정주부나 출근을 서두르고 있는 남
자들을 붙들고 천민 자본주의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얼마나 당황했을까를.
어쨌든 이제 나는 그 말의 뜻을 완전히 이해한다. 이해하기 때문에 그 표현은 사실 ‘천민’이라고 하지 말고 ‘쓰레기’로 바꾸어야 한다고 믿고 있
다. ‘쓰레기 자본주의’라고 말이다. 쓰레기야말로 당신의 전문분야니까, 하고 몰아붙인다면 좀 섭섭하다. 이를테면, 당연히 입에 넘기지 말아야 할
불량식품을 꿀꺽 삼켜버린다거나 비록 좋은 음식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소화시키지 못할 때 그 배변물(排便物)은 유난히 역겹고 냄새가 지독한 법이
다. 앞에 말한 자본주의가 바로 그렇다. 필요 이상 포식하고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토해내는 상태가 아니던가? 매일 새벽,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쓰레기들에 짓눌리며 내가 확인하고 깨달은 게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쓰레기 자본주의!……
여름 내내, 우리는 상사병 앓는 바람난 도깨비떼처럼 동서남북을 종횡무진하며 남의 귀싸대기를 정신없이 때리고 다녔다. 다시 내 식대로 고쳐 말하
자면, 그만큼 쓰레기를 즐겨 치우고 다녔다는 말이다. 정말이지 행복하고 신이 났으며 무엇보다 보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귀싸대기과의 세번째 행사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어느 금융기관에서 세금을 받는 직원 하나를 대상으로 벌인 일이었다. 물론 우리는 그가 세금
을 도둑질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으며 그를 추궁하지도 않았다. 직장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 사실만 물었었다. 네번째는 일부러 부녀 운
전자들만 골라 접촉사고를 낸 다음 고액의 위자료와 보험금을 상습적으로 챙겨왔던 기사 하나가 귀싸대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이른바 ‘나이롱 환자
’로 병원에 장기 입원중이었는데 기분 좋게 술 한잔을 걸치고 병원이 아닌 자기 집으로 돌아가던 길목에서 우리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다음 대상이
아마 그 파렴치범이었을 것이다. 그는 새벽에 교복을 입은 앳된 소녀와 시내 변두리 모텔에서 나오는 길에 아귀 같은 우리와 맞닥뜨려야 했다. 꼭두
새벽에 놈이 탈선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걸 우연히 지켜본 연장자 이씨가 부랴부랴 우리를 소집했었다. 이른 아침부터 맞아야 했던 사람은 그가 최초
였고, 다른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한 사람도 그가 최초였다. 우리는 모텔 주차장에서 그 어린 소녀가 지켜보는 데도 불구하고 손찌검을 감행했던
것이다. 물론 그 밖에도 우리 표적이 되어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한 사람은 많다. 자기 상점 앞에 주차하는 차량마다 날카로운 못으로 깊숙이 긁어놓
거나 교통경찰에게 억지를 써서 기어코 주정차위반 딱지를 붙이도록 해왔던 상인, 사채놀이를 통해 두세 가정을 절단 내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채무자
여성에게 강제로 몸을 팔도록 알선하고 그 돈까지 챙겼던 한 마녀(魔女)의 남편도 우리 그물망을 빠져나가지는 못했다. 특히 그는 주종을 따질 수 없
을 정도로 범죄에 직접 개입한 혐의가 짙은데 용케 법망을 피했는가 하면 자기 아내가 구속되기 직전에 재산을 딴 곳으로 빼돌린 사기꾼 사내였다.
내 말을 듣는 이들은 이쯤 해서, 우리가 힘없고 말 못하는 날피리나 잡고 다닌 셈이 아니냐고 평가절하를 할지도 모르겠다. 성급한 그들을 위해서 먼
저 밝히지만 그건 결코 아니다. 어떤 한 언론인과 정치가, 그리고 유흥업소로부터 정기적인 성(性) 상납을 받아온 것으로 의심되는 경찰 한 놈도 우
리와 각자 한 번씩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면 수긍하겠는가?
내가 앞에서 파렴치범(破廉恥犯)이라는 말을 구사한 적이 있던가? 사실 이 말처럼 두루뭉실하고 애매모호한 용어도 따로 없는 듯하다. 염치를 깨부순
죄?…… 잘 알다시피 법률용어들이란 실험실의 핀셋처럼 범죄행위를 정확하게 집어내는 용어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법이다. 그런데 유독 이 표현 하나
가 우리 법률사전에 올라 있고, 심지어 법률용어에도 등록돼 있지 않은 이른바 그 ‘괘씸죄’와 더불어 우리 사회 태반의 범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다. 너무 다양하거나 부피가 큰 것들은 추상(抽象)의 끈이 아니면 묶기가 어려운 것일까?
어쨌거나 귀싸대기 한 대에 저 멀리 나가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고 우리에게 잘못했다고 빌거나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즉석
에서 다짐하는 이들도 더러 없지는 않았다. 믿지 않는 이들도 많겠지만, 그럴 때면 우리 역시 가슴이 몹시 아팠다는 점을 고백한다. 물론 그것 때문
에 우리가 그 멋진 일을 잠시 접고 파업을 하기로 한 건 아니었다. 때마침 괭이갈매기처럼 눈매가 매서운 사내 하나가 쓰레기 하치장에 나타나 이것
저것 탐문하고 갔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또 다른 소식에 의하면 경찰에 고발된 우리들의 행각은 단 두 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다행인지 불행
인지 모를 얘기도 들린다. 어쨌든 큰 목소리 최씨와 나는 아예 그 참에 청소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비교적 얼굴이 덜 알려졌을 연장자 이씨와 박씨
는 그대로 남았는데 그 편이 경찰 동정을 파악하는 데 더 유리할 것 같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최씨와 나는 그뒤 공사판에 뛰어들어 잡일을 했다. 주로 개인 가옥이나 연립주택을 짓는 일이었다. 인절미 잘 만드는 년이 수제비를 못할 리 없다는
속담처럼 건축 일은 청소 일보다 더 어렵지도 않았고 힘들 것도 없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집을 짓는 일 역시 쓰레기를 치우는 일만큼이나 가
치가 있고 아름답게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그게 참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둔하기 그지없는 나로서는 달리 어떻게 표현할 도리가 없어 그저 벙
어리 냉가슴 앓듯 할 뿐이지만, 어떤 한 가족의 밝은 웃음소리가 방벽을 빙 둘러 휘돌고 때로는 그 구성원들의 깊은 탄식과 한숨이 머물다 가기도 하
는 공간, 그걸 짓다보면 비록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집이라고 하더라도 언제나 참 좋았다. 그래서 집일을 할 때면 누군지 모르는 그 집 가장의 마음
이 되어 벽돌을 올리고 모래를 퍼날랐던 것이다. 아내가 있고 아이들도 셋이나 넷쯤, 아니 한둘만이라도 딸린 가장의 마음으로서.
이따금 삼겹살을 굽다 말고 최씨와 나는 여름의 일들을 떠올리곤 한다. 더러는 그 삼겹살 구워지는 자욱한 냄새처럼, 불현듯 죄책감이 우리를 엄습할
때가 있다. 우리에게 뺨을 맞은 뒤 아프고 분해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그들의 행위는 어쩌면 그냥 단순하고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실수에 지나지 않았
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자책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은 순박하고 무구하기 짝이 없을 사람들인데, 한때 우리가 이발소에서 자주 익힌 시구처럼, 삶이
그들을 잠시 속였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때로는 우리 자신을 응징하려고 다가와 그림자처럼 에워싸는 이들이 없는지 둘러보기도 한다. 그들은 우리
를 둘러싸고 물을 것이다. 우리가 항상 사실관계를 먼저 확인하고 뺨을 때렸듯.
―`어쭙잖은 정의감으로 당신들이 여태 행패를 부리고 다녔는가? 당신들이야말로 크게 틀렸으니 이리 귀싸대기를 대라!
우직하게 그냥 강조해서 말하자면 이렇다. 실제로 뺨을 때린 적은 없지만, 전에 이런 시골 노인이 하나 있었다. 흑염소 값이 흰 염소 값보다 훨씬 비
싸지자 노인은 구두약을 두어 통 사서는 자기가 기르던 흰 염소를 붙잡아놓고 그걸 발랐다고 한다. 그리고는 시장에 내다 팔았다가 결국 고발됐다는
것인데, 우리가 그 노인을 때린 셈은 아닌가 자꾸 돌아보게 된다는 얘기다. 공포감에 사로잡힌 염소는 자꾸 미끄러져 도망치려고 하고, 살아 있는 가
죽과 털에 생각만큼 구두약은 쉽게 칠해지지 않았으리라. 그래, 땀을 뻘뻘 흘리며 진지하리 만치 노인은 꼬박 한나절을 애써 일하고 나왔을 게 분명
한데 우리가 앞뒤 생각도 없이 덜렁 찾아가 단죄를 한 건 아닐까 한다는 것이다.
너희들도 과연 양심이란게 있었던 것이냐고 의아해할 사람들에게 구두약 얘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만 더 덧붙이기로 하자. 일본 여자들이 흑인을 좋아
한다더라는 밑도 끝도 없는 얘기를 듣고 젊은날 우리는 온몸에 구두약을 바르고 밀항선을 한번 타보자는 모의를 한 적이 있다. 물론 그저 농담으로
그친 얘기였지만, 우리가 그때 실제로 구두약을 그럴듯하게 칠하고 항구에 나섰다가 누군가에게 덜미를 잡혀 귀싸대기를 맞았다고 치자.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그래서 나는 아마도 이날 이 순간까지, 사위지 않는 복수심으로 그들 웃기는 무리를 찾아헤매고도 남았을 것이다.
―`제발, 내게 맞은 자들이 부디 발 뻗고 잠들기를!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지킬 박사’에게 깃들었던 불청객 ‘하이드’처럼, 내 얼굴의 굴에는 주인인 얼 대신 정체 모를 마구니(魔軍) 하나
가 어느덧 들어앉은 게 분명하다. 무엇인가에 놀라 나는 이따금 한밤중에 잠을 깨곤 한다. 그때마다 나를 소스라치게 했던 건, 다름아닌 내 손이었
다. 그 손이 마냥 혼자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동안 내 몸의 다른 부위에 깔려 피가 통하지 않았던 것처럼 저릿저릿 울고 있는 손은 그냥 숨을 죽여 우는 정도가 아니었다. 뭐랄까?…… 자기
주인의 목을 스스로 잘라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분하게 통곡하더라는 옛적 어느 의병장의 명검처럼, 아니 때를 잘못 만났음을 절통해하던 ‘아기장수
’ 설화 속의 용마(龍馬)가 벼랑에 몸을 던지며 울부짖듯, 그렇게 운다. 울어.(끝)
-- 실천문학 2001년 가을호(통권 제63호) 수록

이 병 천(소설가)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1956년 전주에서 태어나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우리의 숲에 놓인 몇 개의 덫에 관한
확인」이 당선돼 한동안 시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8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더듬이의 魂」이 당선된 후 소설에 주력해왔다. 소설집 『사냥』
『모래내 모래톱』 등과 장편소설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저기 저 까마귀떼』 동화집으로 [세상이 앉는 의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