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어느 날의 영어 시간.

"야! 이눔들아!"

벼락같은 소리에 놀라 뒤돌아보니, 뒷문을 통해 교장 선생님이 교실 가운데에까지 들어와 계셨다.

"어이쿠, 선생님 계셨군요. 그만 선생님이 안 계신 교실인 줄 알고......"

멋쩍어 하며 엠한 헛기침만 하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교실을 나가는 교장 선생님. 귓불이 약간 붉어지던 영어 선생님.

"인제 짤렸다, 짤렸어."

교실 어디에선가 혀차는 소리와 함께 들리던 소리.

그 해 여름 방학이 다되어서라고 기억된다. 어느 날 교실에 들어오신 선생님들 중에는 '참교육! 전국 교직원 노동 조합'이던가. 아무튼 노란 리본을 달고 들어오신 선생님들이 몇 분 있었다. 영어 선생님은 달고 있지 않았다.

손이 매웠던 수학 선생님도, 강의 중에 유난히 침을 많이 튀기던 사회 선생님도, 늘 허무주의자처럼 보이던 기술 선생님도 달고 들어왔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가을이 되어도 기술 선생님은 볼 수가 없었다. 아이들 말로는 전교조 문제 교사로 '짤렸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후 그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라디오 수리점을 냈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해 가을. 그 다음날부터 2학기 중간 고사가 실시될 어느 일요일 오후. 나는 다음날 치는 과학 과목의 교과서를 교실에 놔두고 온 사실을 오후 늦게야 깨달았다.

그때 그날의 일직 교사가 영어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열쇠 꾸러미를 들고 앞장서서 교실로 오르는 층계 입구의 쇠창살문을 열었다. 그녀가 계단의 난간을 잡고 천천히 오르자 나는 알 수 없는 가슴 두근거림으로 그 뒤를 쭈빗쭈빗 뒤쫓았다. 복도는 적막했다. 인색한 늦가을 석양이 교실의 반쪽만 채우고 복도 쪽은 무거운 어둠에 가라앉아 있었다. 4층 복도 끝의 우리 반 교실이 긴 터널의 끝 같았다. 간간이 주택가 어디선가 아이의 우는소리가 길게 들렸다. 야채 트럭의 확성기 소리도 아련히 들렸다.

"너 이름이...... 신형민, 맞지?"

갑자기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

"아! 네..... 어떻게 제 이름을......."

뭔가 들킨 듯 지레 놀라 말까지 더듬자,

"너희들 이름 정도야 다 알고 있지. 다만 60명 하나 하나를 모두 불러 볼 기회가 없을 뿐이지. 그리고 그 반에서 넌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아이 중의 하나니까"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 돌아보며 멋쩍게 웃었다. 그녀의 흰 이가 참 환하다고 느낀 순간 한쪽 귀퉁이가 깨진 우리 반 팻말이 나타났다.

교실은 시험 때문에 일렬로 책상 배열이 되어 있었지만 줄을 맞추지 못해 오히려 더 무질서해 보였다. 책상이 뒤섞여 종전의 내 책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난 괜찮으니까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잘 찾아봐라."

내가 책상 하나 하나를 다 뒤져 가고 있는 동안 그녀는 청소용구함 앞, 창가 쪽 맨 뒷자리에 오도마니 학생처럼 앉아 있었다. 우리 반에서 가장 키가 큰 60번 김철기의 자리였다.

팔을 턱에 고이고 칠판을 가만히 응시한 채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의 감색 스웨터의 어깨 부분이 서쪽 창에서 들어온 햇살로 바다 색으로 보였다. 그런 그녀는 르노와르 풍의 그림에 나오는 소녀처럼 보였다. 나는 내심 서두를 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와 단둘이 이 고적한 고요의 바다에서 유영하는 한 마리 넙치라도 되었으면 싶었으니까.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내 과학 책은 눈에 띄고 말았다.

"아아 여기서 교탁까지 정말 멀기도 하구나......"

그녀가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뭐 그런가......? 그러자 그 생각이 났다.

어렸을 때 형의 세계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형이 물었다.

"우리 나라에서 제일 먼 나라가 어딘지 말해 봐."

"미국."

비행기로 열 여섯 시간이나 걸려 미국 출장을 갔다 온 민식이 아빠 생각이 나서였다.

"아냐, 바로 여기야. 북한."

하던 형의 그 말.

"그래 책은 찾았니?"

"네......"

책을 찾았으니 이제 그녀를 앉혀 둘 명분은 없는 셈. 주제넘게도 자꾸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가슴속에 늘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그 무엇이 샴페인처럼 터져 올라올 것같이 조마조마했다.

그녀 역시 평일 날은 전쟁터와 같은 이곳을, 옛날 격전지를 돌아보는 노병처럼 새삼스레 둘러보고 있었다.

"공부하기 힘들지?"

나는 선생님이야말로 가르치시기 힘들죠, 하며 주제넘게 맞받을 뻔했다.

"혹 교실에서 이해가 안되는 것이 있거든 개인적으로라도 꼭 오너라."

"애들이 알면 욕해요."

"왜......?"

"개인 플레이 한다고......"

그녀의 얼굴이 일순 어두워졌다. 그러자 내 입에서 생각지도 않은 말이 불쑥 튀어 나왔다.

"애들이 다 선생님을 좋아하니까요."

아첨을 떤 것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으나 그 순간 그 말이 정말로 딱 들어맞는 말인 것 같았다.

그녀가 소리 없이 웃다가 쓸쓸한 얼굴빛이 되었다.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으므로 나도 엉거주춤 교실을 나왔다.

"형민이, 너 혹시 책 읽는 거 좋아하니? "

교실 문을 닫으며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 얼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네."

그녀의 표정이 환해졌다.

"야시장의 불빛 속에서 너를 가끔 본 듯해. 가끔 어두운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던 아이가 너 맞지? 넌 슬쩍 모른 척 하더구나. 혹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내게 언제든지 와, 아주 힘들면. 진양아파트 1동 505호가 우리 집이야. 네게 책들을 빌려줄 수도 있어. 아주 힘들 때 나는 책을 읽는단다. 시도 읽고. 그럼 참 위안이 되거든.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건 바로 그런 건데......"

하긴 선생님은 박식하다. 영어의 예문을 들어줄 때도 원전에 나온 원문들을 밝혀서 써 준다. 이건 세익스피어의 오델로에서, 이건 코울리지의 시에서, 이건 키이츠....... 그래 봤자 아이들은 섹스 피워, 코 흘리지, 키쓰로 발음하며 낄낄대었지만.

수업시간과 달리 밝은 얼굴에 말이 많은 선생님의 모습은 조금은 낯설었다. 어쩜 이게 그녀의 본 모습이 아닐까.

"나는 너희들의 지금 얼굴을 보지 않는단다. 지금은 크느라 다 아픔이 있겠지만, 저마다의 그런 아픔은 영글어서 꽃송이가 된다고 믿어. 나는 그래. 저 애들은 앞으로 어떤 꽃으로 피어날까, 상상을 하면 희망이 생기거든. 그런 상상을 주는 건 인간에 대한 믿음이고 그건 다 책에서 오거든. 난 널 믿는다. "

왜 내게 그녀는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그녀의 그 말은 너무 시적이고 비현실적이라 내게 하는 말이라기 보단 그녀 스스로 힘을 얻기 위한 주술처럼 나는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눈물겹게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바람에 전선줄이 위-잉 울리듯 내게도 어떤 울림이 전해져 왔다.

그녀는 아까와는 달리 바삐 걸었다. 서무실 앞에서 그녀는 내 어깨를 한번 다정하게 쳐주고는 안으로 사라졌다. 언젠가 정식으로 그녀를 만나 보고 싶다는 용기가 내 안에서 솟아났다.

학교에서 나오는 길에 분식집 앞에서 황종규의 패거리를 만났다.

"야, 박미연이 오늘 일직이지?"

그 중의 하나가 느물거리며 다가와 내게 물었다. 그의 숨결에 술냄새가 났다. 나는 내 마음에 메아리 치고 있는 좀전의 그 울림을 놓칠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을 지나쳤다.

"야, 내비둬라. 저 새끼, 은근히 좀 맛이 간 놈이야."

그 날밤, 나는 국화 분이 놓인 그녀 집의 창가에서 그녀가 나를 위해 시를 읽어 주는 모습, 내가 아주 교양 있고 박식한 청년이 되어 그녀와 자신만만하게 담소하는 흐뭇한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다 그녀의 꿈을 꾸고 부끄럽게도 새벽에는 몽정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다음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반 교실에 어제 화재가 났었다며 출입이 통제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교실의 전면을 좀 태웠을 뿐이라고 했다. 우리는 과학실을 임시 교실로 마련해 중간고사를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며칠간의 중간고사가 끝나고, 영어 시간이 되어도 선생님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며칠 밤을 진양아파트 놀이터로 가서 1동 505호, 그녀의 베란다 창을 올려다보았다. 불꺼진 창은 내 가슴에 알 수 없는 삶에 대한 절망과 체념을 안겨 줄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베란다 창에 불빛이 보였다. 나는 반가운 맘에 늦은 시각에도 용기를 내어 현관 벨을 눌렀다. 그런데 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나오더니, 그녀는 얼마 전에 이사를 떠났다고 했다.

아이들 말로는 선생님의 일직 날에 불이 나서 선생님이 짤렸다는 것이다. 아이들 입에서 나온 소문은 그 훗일에까지도 시나리오가 마련되어 있었다. 영어 선생님이 미쳐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는 둥, 자살을 했다는 둥, 온통 비극적인 내용 일색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 다음주 조회 시간에 영어 선생님이 사직을 했다는 교장 선생님의 짤막한 언급에 이어 후임 교사로 한 남자 선생님이 소개되었다. 그는 짦은 머리에 체육 교사 풍의 몸집이 좋은 중년의 교사였다.

조회가 끝나고 교무실로 들어가는 여선생님들의 작은 웅성거림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사직서만 달랑 내고 쥐도 새도 모르게 잠적했대요. 그렇게 훌떡 사표낼 거면 지난 여름에 대의를 위해 전교조 지부에 이름이라도 걸지. 명분도 좋잖아. 남편도 운동하던 사람이었다던데, 그렇게 설득해도 묵묵부답이더래요. "

"그래도 그이, 교육현실에 늘 가슴아파했어요. 참 순수한 사람인데......."

"그것도 문제야. 내 이 바닥에 오래 붙어 있을 사람은 아닌 거 진작 알아봤지만서두."

"불 난 거야 시말서 쓰고 아무 문제없이 처리됐다던데, 왜 사표까지 냈을까. 멀리 있는 남편 대신 생계를 꾸려 가는 사람 같던데. "

"그런데 3학년 10반 교실에 불은 누가 냈을까?"

이경철 선배의 소문이 무르익을 동안 너는 "시인과 촌장"에 나타나지 않았어. 그뿐 아니라 학기말 시험에서도 널 보았다는 애들조차 없었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널 찾는 이경철 선배는 학교 앞 술집에서 자주 취해 있었어. 학기말 시험이 끝나는 날, 나는 너의 하숙으로 전화를 해보았지.그러나 보름 전에 네가 하숙을 옮겼다는 거야.

그런데 늦장마가 시작된 7월 중순의 어느 날 저녁, 네가 내게 전화했지. 실로 오랜만이었지. 반가운 마음에 택시까지 타고 간 모래내의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만난 너는 몹시 초췌한 모습이었다. 추적추적 오는 비를 우산도 없이 돌아다녔는지 몇 번이고 손으로 짧은 머리를 털었다. 옷도 후줄근히 젖어 있었지.

"아무말 하지마. 그저 네 얼굴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너는 쓸쓸한 눈빛으로 조용히 웃었지. 금방 네 눈빛이 내 가슴에 떨어진 조약돌이 되어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했어.

우린 따뜻하게 데운 막걸리와 뜨거운 해물 전골을 안주로 정말 아무 말없이 마셨지. 가끔 들창을 때리는 빗소리와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넌 멍하니 바깥을 보며 생각에 잠기다가 부르르 몸을 떨기도 했지.

"빨리 늙어 버렸음 싶어. 이 비가 그치면 한 쉰 살쯤 되어 있으면 좋겠다....... "

그리고 너는 바람벽에 몸을 기대고 깜박깜박 졸기 시작했다. 나는 네가 애처로와 네 곁에 가서 너의 목고개를 내 어깨에 편히 기대게 해 주었지. 젖은 네 몸 어디선가에선 향긋하게 쪄지고 있는 옥수수 냄새 같은 게 나는 듯 해서 아주 슬픈 기분이 들었더랬다. 나는 나도 모르게 네 목덜미에 코를 박고 네 한쪽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 내렸는데, 가끔 진저리를 치듯 너는 몹시도 떨고 있더구나.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

너는 확실히 예전과 달랐다. 감상적인 말들을 할 때야말로 여자가 사랑에 빠졌다는 거 아닌가. 나는 네가 왠지 애처롭고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때 술에 취한 내가 네 귓밥 속에 흘린 내 말을 너 아직 기억하니?

"네가 어떤 남자들을 헤매더라도 내 품으로 돌아오너라. 난 너의 마지막 사랑이 될 거야."

그러자 꿈꾸듯 취해 있던 네가 날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지.

"사랑이라구? 그건 또 다른 이름의 폭력일 뿐이야. 남자는 사랑의 이름으로 여자의 몸 속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하는 거지. 말하자면 처녀막이란 그것의 뇌관인 셈이구."

"넌 뭐니, 그럼, 사랑이 그저 파괴란 말이니, 넌 사랑을 전혀 믿지 않니?"

내가 발끈해서 물었지. 그 통에 네 고개는 내 어깨에서 떨어지고, 고개를 다시 세운 너는 대답 않고 오랫동안 날 응시할 뿐이었어.

그때 주모가 나타나서 가게문을 닫겠다고 해서 우린 쫓겨 나왔지. 밖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폭우로 변해 있었어. 내 우산을 방패삼아 우리 둘은 부둥켜안고 거리로 나섰다. 거리는 성난 해일이 한 번 쓸고 지나간 듯 너무나 텅 비어 있었지. 곧 우산도 소용이 없어질 정도로 내리는 폭우와 천둥과 번개에 마치 우린 조난 당한 사람들 같았어.

비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그때 어디선가 여관의 붉은 네온사인 등이 꺼질 듯 말 듯 우리 눈에 나타났지.

여관의 온돌방에 들어선 우린 그야말로 꼭 짜지 않은 빨랫감처럼 끊임없이 빗물을 흘리고 있었지. 내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젖은 옷을 짜서 더운 방바닥에 늘어놓을 때까지, 너는 젖은 옷 그대로 방안에 도사리고 앉아 있기만 했지.

"감기 들겠어. 젖은 옷을 벗어서 말리지 그러니?"

내가 괜히 겸연쩍어 하며 말했지. 너는 얼어붙은 듯 차가운 얼굴이었다. 술도 말짱하게 깼고, 멀쩡한 정신에 단지 옷을 말리기 위해서 네 앞에서 옷을 벗었다는 자각이 좀 우스꽝스러웠다. 무슨 갑옷처럼 물 젖은 청바지를 입고 앉은 네 앞에, 팬티 바람으로 마주 앉는 것도 쑥스러워 나는 아랫목에 이불을 펴고 들어갔다.

아아 술이라도 있어 다시 취할 수 있다면....... 나는 술 생각이 간절했다. 방안은 금방 따뜻한 습기로 가득 찼어. 너의 몸에서 더운 훈김이 오르는 듯 했지만, 너는 무척 몸을 떨었다. 나는 널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지.

"부끄러워 그러니?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네 몸에 손가락 하나 안댈 거야. 그러니 제발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옷을 벗어서 말려. 너 나 만나기 전부터 비 맞고 다닌 것 같은데, 병나면 어쩔려고........"

나는 생각했다. 네가 어쩜 보기보다 아주 수줍은 여자 애라고. 과연 네가 처녀였다는 소문은 맞는 거구나. 그때 네가 갑자기 단호한 목소리로 결심한 듯 말했다.

"절대 불 켜지 말아 줘. 꼭."

네가 일어나더니 형광등을 껐다.

"그래, 알았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그 후에 벌어질 일의 성마른 상상을 지그시 누르며 눈을 감고 기다렸다. 그러나 너는 미동도 하지 않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거센 빗소리만 들리고 나는 온돌로부터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에 그만 까무룩히 잠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잠결에 샤워의 물줄기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내가 잠에서 설핏 깬 것은 빗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너의 한숨 때문이었는지, 잠들지 못해 네가 뒤척이며 내는 이불깃의 사그작거림이었는지......... 아니면 그 모든 소리의 음울한 화음이, 내 가는 의식의 끈을 잡아당긴 때문인지.

내가 한 번 뒤집어 누워 손을 뻗으니 내 손엔 물컹하면서도 따뜻한, 내 생애 최초의 빨려들 듯한 부드러움이 있었다. 내가 그것을 잃을까 봐 더욱 움켜잡자 가느다란 한숨 같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런데 그 신음의 끝은 무척 축축하고 떨렸다. 너는 울고 있었던 거다. 반듯하게 누워 한쪽 젖가슴을 내 손에 잡힌 너는. 나는 참을 수 없는 욕정으로 네 알몸 위에 올라갔다. 내 내부의 허기진 본능이 시키는 짓에 서두르며, 광포하게 너를 파헤쳤다. 너는 날 밀어내지도 않았고, 날 끌어안지도 않았다. 대신 흐느끼는 목소리로 물었다.

"날 사랑해?"

"응."

"정말?"

"응."

"곧 후회하게 될 거야."

그리곤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고는 울어 버리는 통에 나는 그만 어이없게도 사정을 하고 말았다. 문전에서, 너의 거웃만 잔뜩 적신 꼴이었다.

우린 엎드려 어둠 속에서 함께 담배를 나눠 피웠다. 밖은 그새 빗줄기가 가늘어져 있었다. 물조리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들렸다. 난 멋진 결합을 이루지 못했다는 일말의 부끄러움이 있었지만 왠지 가슴이 벅찼다.

"아침이 오지 말고, 이 밤이 끝나지 않고 계속됐으면....... "

"넌 꼭 이 밤이 지나면 홀연히 사라질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옛날 전설처럼 말이지, 어떤 선비가 비오는 날 길을 잃어 숲 속 오두막에서 하룻밤 자는데, 어여쁜 여인이 나타나 동침을 하게 됐더란 말이지. 둘은 기막힌 운우지락(雲雨之樂)을 나눴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인은 간 데 없고 흉칙한 구렁이만 남아 있더라....... 뭐 이런 식으로 말야."

그러자 넌 피식, 바람 빠지는 풍선 같은 소릴 내며 웃었지. 그리고 이야길 시작했지.

"들어봐, 아주 아주 슬픈 전설이야. 옛날 옛날에 저 전라도 남쪽 항구도시에 착하고 예쁜 여자 애가 살고 있었대. 그 애네 집은 바닷가에서 횟집을 하느라 그 애 아빤 통통배를 타고 자주 바다를 나갔지. 그 애도 아빠가 바닷물에서 싱싱한 물고기를 낚는 걸 보는 걸 아주 좋아했지. 그 애는 자라서 소녀가 됐지. 그 소녀는 어느 날 아빠의 배를 빌려 타고 바다낚시를 나가겠다는 남자들에게 배를 매어 둔 선착장으로 안내를 하게 됐었지. 그런데 그만 정신이 아득해져 버렸어. 나중엔 정신이 들었지만 눈이 가려져 온통 어둠뿐이었지. 파도 소리가 들리고 가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대. 두 손이 어딘가의 기둥에 묶여 있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대. 세 사람인지 네 사람의 남자들은 늘 술이 취해 있었고 아주 상스러워 소녀에게도 억지로 입에 술을 붓기도 했었대. 그들이 누군지, 왜 소녀가 이렇게 끌려왔는지, 아무런 필연성이 없었지. 아무 예측의 여지도 주지 못하는 그 우연성에, 죽을 듯한 공포로 몸을 떨었지만 그후에 그들이 한 짓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대. 몇 번씩 까무라치면서 깨어날 때마다 살아 있다는 것에 진저리를 쳤대. 한 번씩 까무라칠 때마다 소녀는 환생을 하는 자신을 느꼈대. 사람에서 개로, 개에서 뱀으로, 뱀에서 지렁이로........

얼마 후, 그들도 떠나고, 버려진 소녀는 지나가는 낚싯배에 발견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대. 그러나 그때부터 소녀는 주홍 글씨를 단 에스터란 여자처럼 푸른 낙인이 찍혀 버렸대........"

너는 갈수록 목소리가 떨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불을 켰다.

"날 똑바로 봐!"

나는 갑자기 쏟아진 빛에 눈을 찡그리다 떴다. 아! 그때의 그 심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니.......? 단지 놀라움이라기엔, 그저 슬픔이라기엔, 차라리 처참한 분노........ 아아, 모르겠다.

너의 희디흰 나신은, 서투른 문신 자국과 담배 불로 지져 놓은 흉칙한 흉터들로 얼룩져 있었다! 젖가슴 밑에서부터 그건 아래로 내려가면서 더 심해졌다. 용을 새기려 한 건지 뱀을 그리려 한 건지 조잡한 솜씨였다. 마치 공중변소의 푸른 낙서처럼 악의가 철철 넘쳐 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조금 전까지 내 손길과 입술에 참을 수 없는 갈증을 주던 부드러움의 실체가........

"네가 사랑한 나는 뭐니? 이래도 날 사랑할 수 있니?"

네가 날이 선 목소리로 추궁하듯 물었지. 나는 눈을 감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만 시간이, 그래 시간이 좀 필요할 거란 생각만이 핑계처럼 들었다.

그때 네가 무너지듯 주저앉아 울더구나. 한참을 울더구나. 나는 형언할 수 없이 가슴이 아파왔다. 다가가 너의 등을 어루만지고 너를 내 가슴에 안아주었더랬지. 넌 울면서 말했어.

"왜 하필 나여야 했지? 그때 이후로 나는 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세상이 무서웠어. 여자인 나를 조롱하고 무시하고, 복수하고 싶었어. 내가 열다섯살, 여자라는 자각이 들기 전부터 어처구니없이 당한 그 남자들의 폭력에, 세상의 폭력에. 남자들보다 더 똑똑하고 씩씩하게 살아야겠다고 이를 악물었지. 아무도 날 여자로 여기지 말기를. 내 자신도 여자임을 잊고 싶었어. 우먼이 아닌 휴먼으로 살고 싶었을 뿐이야. 이렇게라도 살아 있는 내가 얼마나 지독한지....... 나 한 번도 맘놓고 울어 본 적도 없이 살았어. 이런 모습 네게 처음이야. 하지만 내게도 사랑이 찾아오면, 난 어째야 하는 건지....... 이런 날이 오게 될까 봐 두려웠어."

그랬다. 네가 사랑의 고백을 그렇게 하는 걸, 야비하게도 나는 짐짓 모른 체 하며 물었다.

"경철이 형과는 결혼 할거니?"

어이없는 표정으로 네가 또 말했지.

"내가 그 형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니, 너는? 어처구니없게도 경철이 형은 내가 순결한 처녀인 줄 알아. 형이 논문 마무리 작업을 도와 달라고 해서 간 저녁에 마침 정전이 되었더랬지. 기다려도 불은 들어오지 않고, 그는 아주 잘된 기회라 생각했겠지. 갑자기 내게 이불을 뒤집어씌우고 자기 욕구를 채우고 말았어. 그 형이 세든 집의 마루에선 식구들이 모여 초를 밝힌 채 떠들썩하게 저녁을 먹는 중이었는데, 내가 반항을 하는 소리를 들었을텐데도 모두들 못들은 척을 하더군. 또 고양이 아가리에 생선이 들어가는구나, 그랬겠지. 옷을 주워 입고 나니 마침 불이 들어왔어.

그의 흰 여름 요에 붉은 핏방울이 몇 점 떨어져 있더라. 그 형이 아주 아주 감동스런 얼굴이 되어 내게 뭐라구 했는지 아니? 말할 수 없이 고맙구나, 네가 순결한 여자여서,라구. 나는 바로 그 방을 나와 버리고 말았어. 그가 감동한 그 혈흔은 뭔지 아니? 생리가 시작되려고 하던 중, 자극으로 일찍 터져버린 것 뿐이야. 난 화장실로 가서 곧 패드를 꺼내어 찼단다."

그리곤 네가 호옥 한숨을 쉬었던가.

"네가 꿈꾼 사랑도 그런 환상이겠지. 사랑에 당의정 같은 환상이 칠해져 있지 않다면 어느 누가 사랑을 하겠니. 내 인생에서 환상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아. 그저 쓰디쓴 독약을 조금씩 조금씩 마셔서 서서히 중독 되어 죽는 일만 남은 삶이야......."

지금도 가슴이 아프구나. 그때의 너의 독백을 새기는 일이........

"너무 자학하지마........"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 것밖에 없는 것이 나도 답답했었지. 너는 내 말에 서글픈 웃음을 보내 왔다.

지친 네가 졸음이 오는 듯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지.

"내 순결한 몸과 영혼을.......어찌해야 돌려 받지.......? 백일 동안 어두운 동굴에서 마늘을 먹어 볼까....... 바위에 천만번 머리를 찧어 볼까.......어찌해야 돌려 받지......."

꿈을 꾸었다.

너무도 강렬한 붉은 이미지의 꿈이었다. 나는 꿈의 한 자락을 애타게 붙들고 그 느낌, 그 기억을 살려 내려 애써 본다. 그러자 몇 조각 꿈의 파편들이 모자이크 퍼즐처럼 떠오른다.

불! 흥분한 무리들의 함성! 어떤 절정을 향해 치솟는 고조되는 분위기...... 나는 방금 지나온 무의식의 터널을 손전등을 들고 탐사하듯이 더듬어 나간다. 터널의 저 쪽 끝에 빛!

그렇다! 우리는 한 마녀의 화형식을 거행하려는 중이었다. 꿈속에서, 우리는 열 다섯살 어린 소년들의 모습이었다.다리 부러진 채 뒹구는 의자, 칼 자국이 난 책상 위에 저마다 올라서서 주먹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교단 앞, 왼쪽 윗 부분이 무언가의 둔기로 얻어맞아 찌그러진 채 구멍이 나 있던 예전 우리 학급의 칠판 앞이 온통 불 바다였다. 우리들이 마녀라고 믿고 있는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커지는 함성...... 여자의 얼굴이 점점 불길 속에 확대되고...... 고개가 확 젖혀지는 순간. 아! 그 얼굴은......박미연 선생님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또 서현의 얼굴이 되었다.

4시 40분. 시계 속의 마녀는 활강하고 있다.

지독한 갈증이 목을 죄어 온다. 동전을 꺼내 들고 위층 음료수 자판기로 가서 코카콜라 캔을 뽑아서 들이켜니 잠은 뿌리째 뽑히고 맑은 바람이 들이치듯 맨 정신이 든다. 나이트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쿵쿵거리는 육중한 스테레오 음의 음악 소리가 들려 온다.

수평선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바다는 마냥 허공처럼 느껴진다. 멀리 형체도 보이지 않는 선박의 등불일까?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그것은. 포말도 파도도 보이지 않고, 배조차 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웬 마녀의 꿈? 시계를 들여다보다 잠든 걸까, 그 맹랑한 꿈이라니...... 마녀 화형식...... 불길 속의 여자의 얼굴. 박미연 선생님과 서현의 얼굴이 교대로 점멸등처럼 내 머리 속에서 계속 깜빡 깜빡 떠오른다.

그 여관에서 너는 울다 지쳐 잠이 들었지. 나는 네 몸의 흉터와 아직도 피흘리는 네 마음의 상처까지도 사랑을 할 수 있는가, 끊임없이 자문했지. 만약 내가 그때 맹세를 했다면 너는 떠나지 않았을까? 그처럼 소리 없이 사라지진 않았을까. 그때 겨우 갓 스물 하나. 사랑의 이름으로 내가 네 영육의 상처를 모두 치유할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면....... 나는 두려웠다. 그리고 비겁했다. 어쩌면 나 또한, 상처받은 영혼에게, 세상의 보이지 않는 폭력의 가해자인지도 모를 나, 이제 네게 용서를 빌고 싶다.

아침이 되어 깨어나 일어나 보니, 너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잘 마른 내 옷가지들이 뱀의 허물처럼 방 한가운데 펼쳐져 있더라. 마치 마법의 밤 속에 헤매다 나온 듯이 너와의 일들이 한바탕 꿈인 듯 싶더구나. 너는 마치 몹쓸 주술에 걸린 불쌍한 마녀가 아닐까. 밤 동안의 비는 그쳤고, 햇살이 나는 아침이었다. 여관을 나서며, 살 부러진 찢어진 검은 우산을 두고 나오며, 나는 바깥 세상의 찌르는 햇빛에 눈물이 났다. 마치 세상의 폭풍우에 찢어진 우산처럼 네가 생각되어져서.

어제 내가 만난 그 선생님이 언젠가 마녀재판이란 말을 했던 게 생각이 난다. 그래. 아직도 마법에 걸린 순결한 영혼들이 있겠지. 또 마녀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몰라. 이데올로기가 있고, 가난한 자와 부자가 있고, 힘센 지배자와 약한 민중이 있고, 홀로인 사람과 여럿인 사람이 있고, 남자와 여자가 있는 한.

넌 마법을 풀려고, 나름대로 주술에서 풀려나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았어. 그 견딤을 나는 안다.

나는 네가 마법에서 풀려났는지 지금도 잘 알 수는 없구나. 그러나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 짧은 우리의 해후를....... 내가 남불의 도시로 널 찾아갔을 때, 네 방에서 나온 사람은 늙수그레한 아랍 남자였다.

잘못 찾아왔구나, 돌아서는 내게 그는 웃는 얼굴로 묘지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지. 내 뒤쪽의 보이지 않는 아주 먼 곳을 보는 듯한 그의 이상한 눈빛. 계단을 내려가면서 생각하니 그는 장님이었던 거다.

묘지의 벤치에 나와 오후의 햇빛을 즐기는 너의 모습에도 나는 가슴이 내려앉도록 놀랐다. 긴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잔주름을 많이 잡은 풍성한 스커트를 입은 네 모습에. 그 풍성한 스커트 속의 동그마한 수박 같은 배를 보듬고 있는 너의 모습에.......

너는 말했지. 그 앞을 못 보는 알제리 사람은, 네 남편이고, 너는 뱃속의 아기를 기다리고....... 그리고 행복하다고.......

모르겠다. 생이란 것의 그런 돌발성을.

참, 한가지 고백할 게 있다. 네가 들으면 웃겠지만 계속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 자꾸 마녀, 마법 운운하는 게 나도 마법에 씌인 건 아닐까하구. 이 시계 때문인 거 같아. 지금은 여섯시. 마녀는 계속 추락 중이야. 사실 이건 훔친 거야.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결국엔 그렇게 돼 버렸어.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까 봐. 여행 전에 뭘 찾느라 오래된 서랍 속을 뒤지다 나온 건데 말야. 이건 원래, 지금은 콩나물을 길러 팔고 계시는 그 여선생님의 것이야.

세상에 얽힌 우연이 절대적인 필연성을 향해 가는 미로 찾기처럼 느껴져서 갑자기 두려워. 아니 이 하루 동안의 항해에, 내가 그녀의 오래 전의 시계를 차고 우연히 그녀를 만난 게, 마치 서투른 3류 소설의 플롯처럼 우스꽝스럽기 조차해. 그녀는 여름 날, 교실에 들어오면 늘 시계를 자신의 분필통 위에 벗어 놓는 버릇이 있었지. 그녀가 아주 비참하게 절망한 어느 여름 날, 그녀는 교탁에 그걸 잊고 나갔다. 주번이던 내가 칠판을 지울 때 그 걸 발견해 내고 내려갔지만, 그녀는 등나무 벤치에 앉아 혼자 울고 있었다. 나는 그걸 그 후에도 돌려주지 못했고, 그녀 역시 어느 날 홀연히 떠나 버렸거든. 이제 아침이 오면 돌려주어야겠어.

잠이 든 것은 희부윰하게 날이 샐 무렵이었는데 눈을 뜨니, 벌써 11시 10분이다. 안내 방송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일랜드의 로슐래어 항구에는 정각 1시 10분에 도착하겠으며, 대륙의 시간보다 섬의 시간은 한시간이 늦다고. 지금은 아일랜드 시각으로 10시 10분이라고 알리는 소리였다. 10시 10분으로 시간을 고치니 1시간을 덤으로 얻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시계를 풀어 깨끗한 백지에 싸서 주머니에 넣었다. 아침을 먹고 그녀에게 돌려줄 참이다.

사람들 틈에 끼어 부산스럽게 커피 한 잔과 크롸상 두개로 아침을 때우고,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C복도 303호를 찾아갔다. 손이 조금 떨리는 것을 느끼며 노크를 하니 아무 대답이 없다.

나는 갑판으로 올라간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다. 아니나 다를까, 때마침 박미연 선생 가족들이 모여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아니, 고갤 이쪽으로, 아니 좀 더 왼쪽으로 사알짝...... 그렇지."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뱃전에 서게 하고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는 그녀의 프로필을 찍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손으로 퍼머넨트 된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시선은 카메라를 향한 채 웃는 모습이다.

지금 찬찬히 보니 그녀는 예전 보다 무척 살이 올라 있다. 그래 그런지 예전의 그 고집스런 단정함이 얼굴에서 사라지고 적당히 흐트러진 모습으로 보인다. 그녀의, 계란의 곡선처럼 단아하던 턱 선이 허물어져 목과 턱의 살집이 두툼해 보인다. 그다지 눈에 띄는 건 아니지만 아래 눈두덩도 힘없이 처져 있는 듯 하다. 그래서인지 얼굴 전체가 약간은 방심한 듯 시무룩한 인상을 주고 있다.

꽃이 허물어지는 것이 저러할까...... 막 피기 시작하는 장미는 얼마나 옹골찬 긴장미를 가졌던가! 그걸 볼 때마다 '꽃의 의지'가 느껴지지 않던가. 안으로 무언가를 꼭 쥐고 놓치지 않으려는 그 구심력과 한 겹 두 겹, 꽃잎이 벌어지려 하는 원심력과의 대결 같은 게 느껴지는 긴장감 있는 봉오리! 그러나 만개하고 시들기 시작하는 그 모습은 속의 꽃술을 온통 드러내고 헤벌어져 얼마나 헤프고 무기력해 보이던가. 모름지기 인생이란 그런 건가. 문득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누구도 세월을, 지구의 중력을 벗어 날 수는 없지만...... 저 얼굴이었던가. 내 사춘기의 밤과 꿈을 바람처럼 흔들던......나는 또 그녀가 새삼스러워진다.

나를 본 사내가 반긴다.

"어? 잘 됐네. 이리 와서 가족 사진 하나 박아 주게나. 암튼 남는 건 기념 사진밖에 없다니깐"

나는 그의 요구에 세 번 셔터를 눌러 준다. 그는 행복한 가장임을 과시하듯 아이들을 앞세우고 아내의 살찐 둥근 어깨를 꼭 껴안는다.

그녀 또한 햇빛 때문에 눈은 찡그렸지만 입은 활짝 벌리고 웃는 모습이다.

"잘 주무셨어요? 멀미로 더이상 고생은 안하셨어요?"

내가 인사 삼아 그녀에게 건넨 말이다. 그녀는 지금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다. 키가 커지고 몸이 단단해지고 수염까지 덥수룩하게 자란 청년이 된 나를.

"네, 덕분에요. 아! 저기 좀 보세요."

그녀가 웃으며 대꾸하다 손가락으로 바다를 가리킨다.

"바다에 길이 나 있는 거!"

그러고 보니 배의 선미(船尾 )에서부터뒤쪽 저 멀리 수평선 끝까지 거대한 담청색 길이 나 있다. 바다를 가르고 지나 온 배의 흔적일까. 바다에 담청색 긴 양탄자를 깐 듯한 선연한 물길.

"배가 가면서 만드는 길인가 봐요. 바다를 가르고 헤쳐 온 물길이 어쩜 저리 선명하고도 투명할까!"

그녀의 남편과 나는 뱃전에 기대서서, 그 바닷길을 바라보며 담배 한대씩을 나눠 피운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그녀와 혜주는 저만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손뼉을 치며 노래한다.

"쌔쌔쌔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울고가는 저 기러기. 우리 선생 계실 적에 엽서 한 장 써 주세요. 구리 구리 구리 구리 가위 바위 보."

혜주의 깔깔대는 소리가 구슬이 구르듯 떼구르르 굴러 온다.

나는 가만히 종이로 싼 시계를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린다.

"배가 이렇게 크니 그게 남긴 흔적도 이렇게 크구만. 인간에게 과거란, 시간이란 괴물에 지워져 흔적조차 없이 미미하지만, 역사란 저 물길처럼 거대한 족적을 남기지. 나, 이제 사십이지만 내 지나온 길을 후회하진 않아요. 상처도 영광도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나. 젊은 친구, 저 물길에다 어제의 상처와 집착과 고통은 다 던져버리라구. 학생 얼굴 보니까 꼭 실연 당한 얼굴이라고. 세월이 가면 인생의 곳곳엔 그만큼 다른 보너스도 많이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청춘이 젤 고통스럽지. "

그 때 도착 시간을 한시간 남겨 놓았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여보. 내려가요. 슬슬 짐을 좀 챙겨야지."

그녀가 다가오며 말한다.

"그러지 뭐. 여기 있을 텐가, 학생은? 배에서 내릴 때 혹시 못 만나게 될지 모르니까 여기서 미리 작별 인사합시다. 즐거운 여행하고 무사히 잘 돌아가요. 멋진 추억도 많이 만들고. 별거 아냐, 여자와 버스는 기다리면 다시 온다구."

그는 눈을 찡긋, 하며 내 손을 잡고 힘차게 악수를 한다.

그가 먼저 아기가 탄 유모차를 번쩍 들고 계단을 성큼 성큼 내려간다. 그녀도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하고 딸의 손을 잡고 발길을 돌린다. 혜주가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앙증맞은 불어로.

"오르브와."

나는 시계 생각에 순간적으로 혼란을 느낀다.

그러자 앞서 몇 걸음 걷던 그녀가 천천히 어깨를 돌린다.

"인상이 참 좋아요. 어디서 많이 본 듯 하기도 하고......"

나는 그냥 말없이 웃는다.

그녀도 아무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흡족한 듯 웃는다. 그녀가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설 때, '선생님!', 하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누른다.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대신 나는 마음속 깊이 절을 한다. 이제 다시는 내 인생의 어딘가에서 만나기 힘들 내 어린 꿈속의 선생님, 부디 안녕히.......모든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순간, 어쩜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갔다.

나는 선미에 서서 푸른 잉크빛 바다를 가르고 이어지는 담청색, 배의 발자취를 바라본다. 그녀는 젊은 날의 잃어버린 꿈의 자취를 좇아 아일랜드로 가고, 나는 추억을 묻으러 아일랜드로 간다. 추억 속의 마녀를.

갑자기 늙은 알제리 남자의 눈이 생각난다. 그에겐 사랑이 어떻게 보이는 걸까? 그는 서현과의 사랑을 어떻게 인식하는 걸까....... 묘지로 가 봐요. 지금쯤 내 사랑은 햇빛 속에 앉았을 테니까....... 그는 웃으며 시를 읊듯 내게 그랬던가. 서현의 것을 닮은 그의 웃음.

그래, 그녀의 말대로, 그들은 행복할지도 모르지. 이제 그녀를 놓아주자.......

나는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어 들여다본다. 12시 15분. 마녀는 빗자루를 타고 맹렬한 속도로 솟구치고 있다. 나는 배낭에서 서현의 주소가 적힌 분홍색 메모지를 꺼낸다. 그것으로 시계를 돌돌 싼다. 그리고 난간에 선다. 호흡을 고른다. 나는 수장(水葬)한다. 마녀의 시간을! 이제 시간은 그녀를 마법에서 풀어놓아 줄 것인가. 배의 뒤편에서 이어지는 거대한 물길을 향해 힘껏 그것을 던진다. 광대무변한 우주에 떨어지는 한 점 꽃잎처럼 그것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아! 바로 그때, 풀려난 마녀의 환생인가. 그 물길에서 힘차게 솟구치는 흰 바닷새를 나는 보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