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가 모퉁이를 돌아들자, 낯익은 문패가 그네를 맞았다. 그러나 차임벨 앞에서 그네는 몇 번이나 망설였다. 단추를 대뜸 누르지 못하고 자꾸 어깨를 추슬렀다. 어느 이웃집 개가 귀를 세우고 있다가 짖어대는 소리에 놀라 그네는 그만 단추를 눌렀다. 목소리를 확인한 질부가 황급히 문을 열고 맞았다. 그러나 그네는 선뜻 마루로 올라서지 못했다. 질부가 한 쪽 팔을 잡으며 반기는 바람에 엉거주춤 올라서서 어머니가 있음직한 방을 두리번거렸다. 질부가 눈치 빠르게 "할머니"하며 어머니 방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주름진 입매는 사 년 전과 마찬가지로 다물려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만큼의 주름의 숫자와 깊이가 어머니 얼굴 위에 여지없이 내려앉아 있었다. 깊은 잠에 빠진 어머니는 사 년만에 다가온 그네 발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질부가 몇 번이나 어머니를 흔들어 "고모님이 오셨어요" 하자, 어머니가 감은 눈을 겨우 움직여 떴다. 그네는 몇 발자국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어머니의 흐릿한 시선이 그네를 더듬었다. 어머니 눈빛이 가볍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떨리는 손이 그네 앞에 뻗쳐왔다. 그네는 와락 다가갔다. 쇠잔하고 허약한 기운이 그네 손에 전달되었다. 어머니가 입을 조금 달싹였다. 질부는 그만 곡기를 끊은 것에 겁을 먹은 듯, 보리차와 통조림 국물을 준비해 놓고 곧 떠 넣을 기세였다.

"할머니! 이제 고모님 보시니까 좋으시죠? 그러니까 뭣 좀 잡수세요. 고모님더러 먹여드리라고 할께요."

질부가 숟가락을 내밀며 눈짓을 했다. 그러나 그네는 머뭇거렸다. 숟가락만 받아든채 지긋이 시선을 비꼈다.

"아이구 참, 고모님이 할머니 드릴려고 맛있는 거 사오셨나 본데 이게 뭘까?"

질부는 아이 어르듯 어머니를 쳐다보며 감 봉지를 끌어당겼다.

"할머니! 이 감 좀 잡숴 보실래요? 고모님이 할머니를 최고로 생각하시니까 감도 다 사오셨네요."

혼미한 상태의 어머니에게 의사를 전달하려 애쓰는 질부앞에서 그네는 더욱 주눅이 들었다. 주춤거리는 그네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듯이 가져간 질부가 감을 잘라 부드러운 속살을 저며냈다. 어머니는 얼른 입을 열지 않고 고개를 흔들었다. 질부가 "고모님이 사 오신 감이예요." 하고 재차 소리치자, 호물호물 내려앉은 잇몸을 움직이며 겨우 음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곧 손사래를 쳤다. 질부가 하던 짓을 멈췄다. 그네도 물끄러미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가 다시 눈을 내려감은 채 입을 다셨다. 음식물이 거북한지 어머니는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입가로 묻어나온 물기를 질부가 티슈로 닦아냈다.

"저는 처음에 옥례가 누군가 했어요. 생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을 찾으시길래 오래 전의 친구였나 했더니…"

질부가 말을 하다 말고 어머니를 돌아봤다. 일그러진 어머니 입매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에미야… 미전 에미야…."

그네는 훅 숨을 들이켰다. 질부는 또 낯선 이름이 들먹여진 탓인지, 어머니 앞으로 몸을 잔뜩 수그렸다.

"풍, 풍산댁이… 죽었다. 풍산댁이 맡아서 잘 기르다가… 고만 죽었기 때문에 미전이를 기를 수가 없어서…."

그네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네는 붙박듯 허공을 응시했다. 미국으로 보내 잘 길러준다는 데가 생겼다고 해서 맡긴 곳이 어디란 말인가. 유서방 맞아들여 사는 네 앞날을 생각하니 암만 해두 그래야 될 것 같았다는 어머니는 풍산댁 감 맛이 안 난다며 이내 낯을 찡그렸다.

어머니의 희미한 말소리가 사십 년 전의 과거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네는 실낱같은 눈으로 밖을 내다봤다. 담장 위로 초가을 햇빛이 물줄기처럼 쏟아졌다. 부신 햇살에 시선을 맡긴 그네는 아득한 귀울음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담벼락에 무수히 뻗어 올라간 나팔꽃을 따서 두 돌이 채 안 된 아이를 붙들고 '따따따' 놀이를 재촉했다. 아이의 귀에 나팔꽃을 대고 말을 하면 아이는 귓속이 간지러워 연신 꽃을 잡아챘다. 육이오 동란 중이었으나 남들처럼 피난도 가지 못하고, 아침결에 화우라며 찾아 온 사람과 함께 나간 아이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이 아버지가 돌아올 동안 기다리기가 너무 두려워 그네는 아이와 놀이라도 하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저녁에 돌아온 아이 아버지는 <조선미술가동맹> 사람들과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고 왔다며, 좌익에 가담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강 다리가 끊긴 상황에서 서울거리는 인민군들이 활보하며 판을 치고 있었다. 좌우가 대립하여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 안 있어 전세는 다시 아군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아이 아버지는 몹시 불안한 기색이었다. 이튿날 그는 잠시 북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오겠다며, 나팔꽃이 핀 담장 앞에서 아이를 한 번 안아주었다. 며칠 안가 중앙청에는 태극기가 다시 게양되었다. 국군이 승승장구, 북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거리엔 다시 빨갱이를 잡자며 총을 든 군인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팔꽃 이파리는 누렇게 죽어가고, 남아있는 꽃받침 속엔 새까만 열매들만 동그랗게 남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익어가는 열매를 툭툭 건드리며 담장 밑을 서성일 때, 한 사내가 그네 앞에 다가왔다.

--서필호씨 기다리십니까.

흠칫 놀라 고개를 떨구는데 새까만 나팔꽃씨가 발 아래 무수히 떨어져 있었다.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다 북으로 간 남자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네는 무조건 고개를 저었다.

--아아니요.

저만치서 국군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집이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집이 맞죠? 댁이 그 부인이요?

그네는 총을 든 군인 앞에서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아니라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허, 수고 많으십니다. 아마 잘못 아신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내 아내요. 우리는 그런 거 잘 모릅니다.

사내는 아이를 번쩍 안으며 앞장 서 걸었다. 그네는 총총히 그 사내를 따라갔다. 누른 잎 하나를 손에 든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천연스레 '따따따 따따따' 손나팔을 불었다. 사내는 자신도 <조선미술가동맹>에 불려가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는데 참여했는데, 그림이 시원찮다고 비판받는 바람에 슬그머니 빠져나와 몸을 숨겼다고 했다. 아이 아버지가 나가던 회화연구소 후배이기도 하다는 사내는 아이 아버지가 미전에 입선했다는 소식을 듣던 날 아이를 얻어 이름도 미전이라고 짓지 않았냐며 웃었다. 그렇게 따라간 남자가 지금 백두산 스케치 기행을 떠났음을 그네는 떠올렸다.

서미전. 그네는 아이의 이름을 뇌며 소리없는 신음을 터뜨렸다.

어리둥절하던 질부는 이내 송연해져서 어머니가 남긴 음식을 들고 방을 나갔다. 어머니는 숨소리를 비교적 고르게 내며 다시 잠이 들었다. 사년여를 아니, 사십여년을 지켜온 말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고 느꼈는지 어머니의 표정은 지극히 평온해 보였다. 그네는 어머니의 손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질부는 모처럼 온 김에 하루저녁 쉬었다 가라고 붙들었지만, 노인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손을 잡아주고 집을 나섰다. 골목 어귀까지 따라나온 질부는 택시를 잡아세워 기사에게 선금까지 주며 그네를 배웅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그네는 몇 번이나 차의 방향을 홀트아동복지회로 가자고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슴으로 차 오르는 회한 때문에 어디에고 빨리 도착해 드러눕고 싶었다.

등이 땀으로 축축했다. 누구에게라도 부축을 받고 싶었으나 아파트 입구의 경비원마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는 사이 그네는 화단에서 길게 뻗어 올라가고 있는 나팔꽃 줄기와 시선이 맞닥뜨렸다. 어느새 달아맸는지 베란다 난간에 줄까지 매어져 있었다. 온통 분홍색, 흰색, 청자색으로 어우러진 나팔꽃 덩굴이 기세좋게 줄을 타고 있었다. 그네는 부리나케 현관 열쇠를 꽂으며, 전지가위를 어디에 두고 나왔는지 생각을 더듬었다. 경비원이 보이지 않는 김에 덩굴뿐 아니라 아예 밑줄기까지 잘라 버릴 셈이었다. 그러나 열쇠가 돌아가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그네는 흠칫 뒤로 물러섰다. 영인이 현관 앞에서 배시시 웃고 서 있었다.

&quot;놀라셨죠? 어디를 다녀오시는데 이렇게 힘들어 보이세요?&quot;

&quot;…아니! 이 대낮에 너는 웬 일이냐?&quot;

&quot;하루 쉬는 거죠 뭐. 엄마도 적적하시고 한데 놀아 드릴려구요.&quot;

거침없이 나오는 대답치고 신뢰감이 적다는 것쯤 그네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영인은 개교기념일이라 하루 쉰다며 호들갑스레 웃어제쳤다. 그네는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영인은 하루 휴일이 즐거운 듯 표정이 한결 밝았다.

&quot;…그런데 장서방이 구했다는 그림이 한국에서도 아주 유명하다나봐요. 아주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는데, 북한에서 어떻게 중국으로 흘러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진짜라면 꽤 값나가는 물건이 된대요. 중국은 농산물도 싸고 뭐든지 싼 편이니까…. 뭐 아버지가 보시면 확실히 알 수 있겠죠. 만정이라던가, 뭐라던가. 6·25때 월북한 사람거래요.&quot;

그네는 영인의 말에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나 영인은 그림에 무심한 듯 살아온 그네를 잘 아는 양, 탁자 위에 펼치고 보던 신문에서 광고지를 들어보이며 백화점 세일이나 보러 가자고 부추겼다. 그네는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사다 꽂았는지 거실 한켠 질항아리에는 꽃이 한아름 꽂혀 있었다.

&quot;상가 앞을 지나오는데 싱싱한 야생화가 좋아보여서요. 재배화보다 향기도 좋고, 너무 세련되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어요. 엄마가 꽃을 좋아하시니까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죠.&quot;

껑충 솟은 마타리 꽃대가 계절이 완연히 바뀌고 있음을 알렸다. 가슴으로 소슬바람이 일었다. 장서방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전화기를 들고 그네를 피하듯이 방으로 숨어들곤 하던 남편의 표정이 떠올랐다. 통화를 끝내고 나온 남편은 말없이 담배를 피워물고 허공을 응시하곤 했다.

그네의 표정을 살피던 영인이 신문을 들추다 큰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quot;와, 임홍주 화백이 역시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예요. 여기 금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대가로 평을 했네요. 이것 좀 보세요. 소전이 없으면 한국 화단이 쓰러질 것처럼 극찬일색이예요. 아버지도 화실에만 파묻혀 계실게 아니라 소전 아저씨처럼 개인비서라두 두고 홍보좀 하셔야 된다구요.&quot;

영인은 입을 실룩이며 신문을 밀어놓았다. 재차 백화점 구경을 나가자고 서두는데 전화벨이 울었다.

&quot;사모님 안녕하십니까? 박영진입니다. 지금 유나 백화점 전시장에 나와 있는데, 제가 잠깐 들어가 뵙겠습니다.&quot;

손님이 방문한다는 소리에 영인은 그만 동행하기를 단념하고 혼자 현관을 나섰다. 영인을 보낸 그네는 베란다 밖을 내다봤다. 대각선을 이룬 경비실 쪽을 살폈다. 경비원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구석진 창가에 너울너울 올라가고 있는 시퍼런 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네는 다시 전지가위를 재빠르게 찾기 시작했다. 덩굴처럼 꿈틀거리며 살아나는 만정의 환영이 온 몸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그네는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까지 몰아쉬었다. 그러나 가위는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 가위가 없으면 두 손으로라도 뽑아낼 요량으로 그네는 부리나케 현관쪽으로 몸을 돌렸다. 현관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벨소리가 요란했다.

&quot;사모님 안녕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뵙겠습니다….&quot;

&quot;오, 박기자 양반 어서 오세요.&quot;

박영진의 깍듯한 인사에 그네는 억지 웃음을 띄웠다. 박영진은 남편의 중국얘기로 말머리를 잡으며 자리에 앉았다.

&quot;어제 전화로도 말씀드렸지만, 이번에 유화백님 돌아오시면 아주 뜻깊은 전시회가 열릴 것입니다. 화랑에서 대대적으로 중국 연변의 조선족 화가들과 교류도 하고 월북화가들의 근황도 살펴서 그동안의 우리 미술사 전반적인 것을 돌아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기획전이 해방이후 반쪽 미술만 알아 온 우리에게 큰 기대가 되리라고 벌써부터 비상한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필요한 일 있으시면 종종 불러주십시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유화백님 한 번 힘껏 도와드리겠습니다&quot;.

능숙한 언변으로 얘기를 풀어내던 박영진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들고 온 가방을 열었다.

&quot;이번에 우리 소전 화백님 기념전이 해외에서도 관심이 높은 모양입니다. 많은 분들이 전시회 참석차 내한하셨는데, 일본에서 오신 손님 한 분이 이것을 사모님께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왜 청암 윤지섭이라고, 동미 회화연구소 동기중 한 분이 계신데, 그 분이 몸이 좋지 않아 조카분이 대신 내한했습니다. 사업차 홍콩으로 다시 들어가는 길이라며 저더러 꼭 전해 달라는 얘기였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일본에 갔을 때 알던 친구여서 저를 믿고 맡긴다고 하더군요….&quot;

박영진은 소전 전시회 개막식에 꼭 참석해 달라는 청을 다시 하며 일어났다. 박영진을 보내고 난 자리에서 그네는 문득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을 보는 듯 했다. 임홍주, 유정한, 윤지섭, 서필호… 동미 회화연구소 동기.

탁자 위에 놓인 납작한 물건으로 시선이 갔다. 무얼까. 보내는 이의 이름도 주소도 들어있지 않은 물건을 그네는 한동안 주시했다. 그네는 잠시 후 경비원을 살핀 뒤 나팔꽃 덩굴을 뽑아내리라 생각하면서 서둘러 물건을 들어올렸다. 여러 겹의 종이를 벗겨내는 동안 그네는 물건을 소중히 다뤄 보낸 사람이 더 궁금했다. 그 사이, 흰 봉투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봉투 안에는 따로 접힌 두 개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집어들자, 아주 오래 전으로 기억되는 해묵은 글씨가 꿈틀거리며 나타났다.

 '미전 모친 나 옥례 여사 보시오. 나 서 필호요. 떠나올 때 아무 것도 주지 못하고 왔소. 좋은 날 있을 때까지 이름이나마 잊지 않길 바라오. 부디 건강하시오. 만정 서 필호.'

한 폭의 그림이 눈 앞에 드러났다. 아이를 안고 나팔꽃 담장 앞에 서 있는 여자. 그네는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망연히 쳐다봤다. 그 아래 붓으로 쓴 한글 사인이 그의 마지막 뒷모습인양 아련히 다가왔다. 그네는 이름 석자 사인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가슴으로 차가운 전율이 왔다.

어디선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노랫소리로 이어졌다.

&quot;햇님이 방긋 웃는 이른 아침에 나팔꽃 아가씨 나팔 불어요… 따따또또 따따또또 나팔 불어요….&quot;

그림 속 아이는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볼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고 청자빛 차림의 여자 가슴에 안겨 있었다. 그네는 가슴으로부터 아이의 숨소리를 듣는 듯 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없었다. 눈 앞이 온통 뿌연 안개로 뒤덮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사이로 이미 고쳐 살 수 없는 나이에 이른 모습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간신히 한 무더기의 농무를 걷어내듯 축축해진 손등을 알아봤을 때, 또 하나의 편지가 그네 앞에 드러났다.

'…… 연전에 친분이 있던 사람이 북한을 다녀오던 길에 서필호 화백과 일면식을 하고 소품을 한 점 받아왔습니다. 당시 사정이 나빠 해를 여러번 넘기고야 이렇게 전달하게 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서화백은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듣기로 지난 해 가을 유명을 달리 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이 부디 가족의 뜻있는 유품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청암 윤 지섭.'

 그네는 일어나 창 밖을 향했다. 아이들이 한바탕 지나간 마당은 조용했다. 그네는 경비원 눈을 피해 덩굴을 걷어내야 할지 망설였다. 줄을 타고, 얼어붙은 먼 땅에서 나팔꽃 담장을 잊지 않은 한 사람의 모습이 점점 뚜렷이 다가왔다. 그네는 반쯤 가려진 커튼을 옆으로 힘차게 밀었다. 커튼의 주름이 밀리며, 어디선가 어머니의 음성같은 나팔소리가 뚜우- 들렸다. 그네는 가위를 든 채 나팔꽃 덩굴로 다가갔다.(*)

 ([내일을 여는 작가] 1997년 수록)

 

이해선(소설가)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경기도 화성 출생.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당선. 현재 인천 거주. 이메일 sunny558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