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다시 읽는다 제3회

낙원장(樂園莊)

 

이경혜(李庚惠)




밤차에서 내린 손님들이 역사(驛舍)를 빠져 나오자 갑작스레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제길, 웬 썩을 놈의 눈이여?"

장씨가 퉁명스레 말을 뱉자,

"이쁘기만 한데, 이 양반은 괜히..."

서울댁이 타박주듯 말문을 연다.

"이삔 거야 자네제....지깟 눈이 무신..."

장씨는 여전히 궁시렁거린다.

아직 컴컴한 거리 위로 가로등불에 비친 눈발이 부나비떼처럼 하얗게 나부낀다. 잰 걸음으로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들을 좇아 장씨와 서울댁도 길을 건넌다.

여느 역전(驛前)처럼 여수역 앞에도 불 밝히고 나그네들을 기다리는 작은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장씨는 오징어배처럼 환하게 불 밝히고 있는 장어탕집 유리문을 드르륵 민다.

"어서 오시요잉, 방이 절절 끓는디 싸게싸게 올라가시드라고!"

방안은 손님용 상과 방석이 한 채 놓여 있을 뿐 영락없는 살림방이다. 자개장과 텔레비젼, 문갑, 책상이 귀퉁이마다 오밀조밀 놓여있고, 벽에는 아이들의 상장까지 줄줄이 걸려 있다.

무심코 방을 둘러보던 서울댁의 눈가에 문득 그늘이 내린다.

"앗따, 참말로 발바닥 디겄네. 여그 장어탕 두 그릇 맛나게 내와보소!"

방석 밑으로 발을 집어넣으며 장씨는 서울댁을 보고 덧붙인다.

"여글 혼자 올 적마다 임자헌티 씨언한 장어탕 한 그릇 멕이고접어 내가 안달을 했지라."

주문 받고 나가던 아줌마의 눈길이 언뜻 서울댁을 재빨리 훑는다. 헤픈 여자 취급이라도 받은 것 같아 서울댁의 얼굴이 금세 새초롬해진다. 그러자 장씨가 눈치 빠르게 엉너리를 친다.

"임자는 절색에다 애기씨겉은디, 내는 간데없는 도둑놈 면상에다 송장내가 풀풀나니께 그라제, 흐흐..."

장독대 위 항아리처럼 오동통하고, 나이 쉰을 넘긴 게 벌써 세 해 전인 서울댁에게는 터무니없는 말이다. 그런데도 서울댁의 나이답잖게 뽀얀 뺨은 금세 복숭아빛으로 물든다. 그런 서울댁의 속살을 짐작하려니, 바짝 쪼그라든 거무튀튀한 얼굴에 꼬챙이 같이 말라 비틀어져 금방이라도 저승사자가 채갈 것 같은 장씨지만 자기도 모르게 사추리께가 뻑적지근해진다.

그새 따끈따끈한 하얀 밥과 얼큰한 장어탕이 밥상 위에 놓여진다.

"어여어여 들어봐. 별미라니께."

장씨가 숟가락까지 집어주며 서울댁을 재촉한다.

"장어 갖고 국을 다 끓이나 보네."

서울댁은 시큰둥한 소리를 뱉으며 수저를 든다.

"어뗘? 별미지라?"

장씨는 조급스럽게 서울댁의 반응을 살핀다.

"시장이 반찬이지, 뭐 별나게 맛있어서 그런가?"

말은 시답잖게 하면서도, 조신한 서울댁이 하얀 밥을 듬뿍 장어탕에 말아 입안 가득 숟가락질을 하는 걸 본 장씨는 그제야 흡족해서 제 숟가락을 든다. 첫 숟가락질에나 뜸을 들였지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동을 해대던 두 사람은 다른 밑반찬 집어먹을 새도 없이 밥 말은 장어국을 후루루 떠넣기 바쁘다.

국물까지 남김없이 싹 비운 장어탕 그릇을 밀어내며 장씨가 먼저 담배를 꺼내문다. 서울댁도 가셔낸 듯한 빈 그릇이 무안해 다 먹은 수저만 일없이 만지작거리다 슬며시 벽에 등을 기댄다.

밤새 무슨 생각을 하며 새까만 차창 밖을 달려온 건가. 이렇듯 뜬금 없이 입이 달라붙기도 하고, 그러다간 속없이 어설픈 농담들을 쏟기도 하면서.

장씨는 밥그릇 뚜껑에 담뱃재를 떨구어내고 다시 깊이 빨아 들여 연기를 뱉는다. 이제 예순에 접어든 장씨의 이랑처럼 골진 이마가 어둡다.

생각허믄 참말로 징허게 모진 목심이제, 회한이 그를 덮친다.

젊을 떄는 옹기쟁이 노릇을 했다. 곡성이니, 구례니 옹기굴 있는 곳을 찾아 떠돌며 흙을 치고 반죽해 옹기를 빚어 구워냈다. 옹기를 만들고 있으면 염불하듯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옹기는 만드는 대로 팔려나가서 살림이 되었다. 그러나 양은 그릇, 플라스틱 그릇이 나오자 옹기는 단박에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그래도 배운 재주라 손을 놓지 못했지만, 결국 사십 년 넘어 살던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딸려 올라온 게 열 다섯 해 전이었다. 그리고 삼 년만에 마누라가 어이없이 세상을 떴다. 큰아들 내외 단칸방에 얹혀 살던 장씨는 그 길로 집을 나왔다. 그래도 옹기독 들어나르는 일로 뼈대가 굵은 몸이라 쉰을 반 너머 넘기도록 장정 소리를 들었다. 그 힘으로 공사장이며 지게꾼이며 품팔이며, 거렁뱅이짓만 빼곤 안해본 것 없이 치대며 살아왔다.

방 한 칸 없이, 노숙자들이 묵는 싸구려 합숙소에 몸을 얹어놓고 밤마다 술독에 빠져 지내던 세월, 무슨 낙이 있어야 살지, 중얼거리며 젓가락 장단에 고래고래 노래를 불러대고, 한잔 술에 작부의 가슴을 풀던 세월, 그저 그날그날 술값이나 벌어 근근히 이어온 목숨.

그러다 근력마저 사라져 그 일도 더는 못 해먹고 가리봉 시장터에 보따리 풀고 주저앉은 게 이태 전이다. 밤 늦게 취해서 걸레같이 된 몸을 이끌고, 합숙소보다 나을 게 없는, 사람 하나 잘 자리만 달랑 되는 일세방(日貰房) 한 칸을 얻어 구멍난 담요 한 장을 덮고 누우면, 나이 탓인가, 눈 가장자리로 멀건 눈물이 흘러내리곤 했다. 자식들도 다 제 살기에 허덕거렸으니 일년에 한두 번 얼굴 맞대봤자 가슴만 쓰라릴 뿐이었다. 이렇게 살다 어느 날 죽으면 그뿐이다,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남의 인생 바라보듯 흘려보냈다.

서울댁을 만난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매일 보따리 행상을 풀어놓던 자리가 바로 서울댁이 세들어 재봉질을 하던 골무만한 수선집 앞이었다. 나이 쉰을 넘긴 과부라도 서울댁은 깔끔했고, 틈을 주지 않는 여자라 장씨는 주인집 아씨 같이만 여겼다. 언제부터인가 서울댁이 오가며 인사말을 건네고, 라면이라도 끓이면 같이 먹자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서울댁은 어딘가 수줍음을 타는 듯 눈길을 피했고, 비로소 장씨는 서울댁을 여자로 느꼈다. 그 뒤로야 홀아비 홀엄씨 정드는, 세상에 흔한 과정이 이어졌다.

"버는대로 족족 임자허고 몽조리 써버렸음 여한이나 없제...."

담뱃불을 짓이기듯 비벼끄는 장씨의 손을 서울댁이 탁, 소리나게 친다.

"이번 길에선 그 얘기 안 하기로 해놓고선...."

장씨는 입을 다문다.

"그만 일어나요."

서울댁이 먼저 몸을 일으킨다.

아직도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장씨가 손바닥을 높여 눈을 받으며 말한다.

"눈이 눈 같질 않지라? 그려도 이기 귀한 눈이랑께. 여간히선 눈 보기 어려운 고장인디..."

장씨의 손바닥에 닿은 눈은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언젠 썩을 놈의 눈이래더니..."

서울댁의 핀잔에 장씨는 멋적게 피식 웃는다.

"사람살이 같애. 도통 허무한 것이...땅에도 쌓이지 않고..."

내리는 눈을 보며 서울댁도 나직하게 덧붙인다.

"잡것, 꼭 우리 꼬라지 같구먼...."

그러면서 장씨는 덥석 서울댁의 조그만 손을 잡아 제 호주머니 속에 넣는다. 서울에서는 손가락 끝만 닿아도 펄쩍 뛰던 그녀가 흔히 있던 일처럼 무심히 손을 맡긴다. 손가락마다 재봉바늘에 찔린 상처에 굳은 살 투성이의 험한 손, 장씨에게 내놓기 부끄러워 감추고만 싶었던 손.

서울댁, 아니 엄영순이는 기실 손이 고운 처녀였다. 줄줄이 오빠들 밑으로 고명처럼 얻은 딸에게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일을 시키지 않았다. 워낙에 단풍잎처럼 자그마한 손이 물일을 하지 않아 아기 손처럼 예뻤다. 남편도 그녀의 손을 들여다보길 좋아했다. 당신 손을 보고 있으면, 내가 어디 부잣집 무남독녀라도 보쌈해온 기분이 든다구. 새댁 엄영순이도 손을 아꼈다. 남편과 아이를 위해 그 작지만 솜씨 좋은 손은 오만가지 잡일을 해냈지만, 그래도 잠자리에 들기 전엔 얼굴보다 공들여 크림을 발랐다.

그날도 눈이 흩뿌렸던가. 벌써 20년도 훨씬 넘는 세월이 흘렀다. 기억도 아슴아슴한.

그날 새벽 남편은 눈을 뜨자마자 아내의 몸을 찾았다. 날이 찼던 탓인지 남편의 몸은 유달리 뜨거웠다. 남편은 택시 기사였다. 서울댁은 남편의 일이 일인만큼 온갖 금기사항들을 지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일 나가기 전의 부부관계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몸 달아오른 젊은 남편이 물오른 젊은 아내를 껴안은 채 그깟 가당치도 않은 핑계에 물러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서울댁 역시 무섭고 아프기만 했던 새댁 시절을 지나 이제 조금씩 몸맛을 알아가던 때였다. 그날 새벽은 왜 그랬던가. 손으로 남편을 밀어내는데도 남편은 왁살스럽게 아내를 당겨 안으며 실실 웃었다.

"이리 펄펄 끓으면서도 벌린 입이라고 딴 말을 하시네."

그렇게 맺어진 그날 새벽의 정사(情事),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서울댁의 몸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 느낌.

남편에게도 그 새벽은 남달랐던지. 여느 날과 달리 대문을 나서다말고 갑자기 돌아서 아내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말했던 것이다.

"오늘은 종일 당신만 안고 있고 싶어. 일 나가기가 싫어..."

"이 이가...주인집에서 내다보면 어쩔려구, 얼른 가요..."

"끝나는 대로 올 테니까 애순이는 장모님한테 하루만 봐달라고 해. 아이 잠들 때까지도 못 기다릴 것 같다니까...."

"점점, 왜 이리 치근거린대요, 빨리 갔다 와요. 오늘만 날인가, 어디 갈 사람처럼..."

어디 갈 사람처럼...그런 방정맞은 소리를 한 자신의 주둥이를 도려내고 싶었던 건 사고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을 때였던가. 죽은 남편의 차디찬 몸을 확인했을 때였던가.

식모살이에서부터 식당일, 바느질을 해가며 남편 그늘 없이 딸 하나를 데리고 험한 세상을 혼자 힘으로 버텨온 서울댁이었다. 솜씨 맵고, 인물 곱고, 육덕 좋은 과부가 그 세월을 홀몸으로 버텨오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흔들림이 있었던가. 점잖은 혼담도 끊이지 않았지만 만만히 보고 덤비는 남정네들의 집적거림에 올올이 맞서다 문 뒤에 앉아 눈물을 훔친 날들도 셀 수 없었다.

그 세월을 버텨온 힘은 오직 그 새벽의 기억 탓이었다. 어디 갈 사람처럼...그 방정맞은 말을 한 데 대한 속죄의 세월, 금기(禁忌)의 원칙을 깨고 쾌락을 택한 행위에 대한 응보의 세월.

그리고 다 늙어 이제서야, 자기 가게 앞에 보따리를 풀고 앉던 장씨의 쓸쓸한 어깨에 비로소 얼굴을 묻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가책의 힘조차 다 가셔버린 세월의 탓이었으리라. 아니, 하나 있던 딸마저 시집 보내고 혼자 살던 서울댁의 외로움이 그 끝에 다다른 탓인가.

"저그, 저것 좀 보랑께, 보기가 좋네."

장씨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사진관의 진열창이다.

장씨는 서울댁의 손을 잡아끌고 그 앞으로 바짝 다가간다. 이제 막 동이 튼 옅은 햇살 밑에 먼지 앉은 진열창 너머로 커다랗게 확대된 한 장의 사진이 보인다. 곱게 한복을 입은 여자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서 있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남자의 모습. 여자의 머리에는 화관이 얹혀 있고, 남자의 손에는 흰 장갑이 끼여 있다. 아주 오래된 사진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약혼이나 결혼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 틀림없다.

"우리도 한 장 박아뿔까?"

장씨가 서울댁을 보고 부끄러운 듯 눈웃음을 치며 말한다.

"마음대로 해요. 우리야 이 돈만 끝나면 끝나는 사이니까, 원하는 대로..."

서울댁의 말이 새침하게 들렸는지 장씨는 서울댁을 쓸쓸한 눈길로 쳐다볼 뿐그대로 내쳐 걷는다.

흰 눈이 나부끼는 하늘 밑으로 하얀 세상이 늘어서 있다. 왼쪽으로는 기차역을 따라 하얀 담벼락이, 오른쪽으로는 이 역시 하얗게 칠을 한 일본식 집들이 바닷바람을 맞고 줄지어 서있다.

여전히 서울댁의 손을 힘주어 잡고 있지만, 장씨는 말이 없다. 서울댁 역시 낯선 항구 도시를 무심히 바라보며 길을 따라 걸을 뿐이다.

그새도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다.

전봇대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다. 셋방 있음, 부엌 딸림, 방 넓음, 무심코 글귀를 읽던 서울댁은 얼른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러자 갑자기 생각난 일처럼 피곤이 와락 몰려온다.

"어디 가서 눈이나 좀 붙였음..."

그러나 말을 하다말고 서울댁은 제풀에 움찔한다. 아직 한 번도 몸 섞은 일 없는 남자 앞에서 할 말이 아닌 것이다.

장씨가 얼른 말을 받는다.

"그, 그라제. 어데 가서 따땃한 아랫목이서 푹 자고 그 담에 오동도도 가고, 여그저그 귀경도 댕기고, 맛난 것도 푸지게 사먹더라고."

늘그막에 새삼 애틋한 연애란 걸 하면서도 어디 구경은 커녕 포장마차 술 한 잔 마음놓고 마셔보질 못했다. 시장 좌판에는 언제나 먹을 것이 풍성했고, 저녁이면 즐비한 술집들이 고기 굽는 냄새를 시장 가득 풀어내곤 했다. 서울댁과 둘이 앉아 뜨끈한 술국이나 삼겹살에 소주 한 잔 걸치고 싶은 그 작은 소원조차 장씨는 내내 꾹꾹 누르기만 해왔다.

홀애비로 살아온 10여 년 세월, 어쩌다 일당을 들고 찾아들었던 몸파는 여자말고는 뜨내기 살림조차 차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 장씨였으니, 서울댁과 살만 스쳐도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이 부르르 떨리곤 했다. 하지만 서울댁은 마음씀은 자상해도 그런 면에서는 매몰차기 짝이 없었고, 아무리 어르고 보채봐도 장씨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서울댁의 고집을 끝내 꺾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장씨의 마음이었다. 장씨 역시 애가 닳으면서도 서울댁의 그런 성정이 싫지 않았고, 한편으론 지켜주고 싶기도 했다. 그라제, 오다가나 만낸 뜨내기겉이 되지는 말아야제, 몇 달만 참으믄 방도 생기구, 방만 생기믄 조촐허게 격식도 갖추구, 남은 인생, 원없이 행복하게 살어야제. 이 고개만 넘으믄 되니께, 이 고개만 넘으믄...그랬던 것이다.

"또! 또!"

서울댁이 어느 새 장씨의 속마음까지 읽어낸다.

장씨는 서글픈 미소를 짓는다.

"임자가 아무리 그리혀도 내는 자꾸만 속이 탄당께. 임자 볼 낯도 없고..."

"자꾸 그러면 난 이 길로 도로 올라가요."

서울댁이 장씨에게 잡힌 손을 쑥 잡아 빼자 장씨는 얼결에 서울댁을 덥썩 안아버린다.

"왜, 왜 이래요? 남 부끄럽게! 빨리 놓지 못해요? 남들이 보잖아요? 얼, 얼른, 놔줘요!"

"다, 다시는 그런 말 말어. 농담이래두 내는 숨이 막힌당께...임자가 내 옆에 있을 시간이 을매나 된다구..."

"아, 알았어요. 다신 안 그럴 게요."

장씨는 팔을 풀고 물끄러미 서울댁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아까처럼 서울댁의 손을 잡아 주머니에 넣는다.

두 사람은 또다시 말없이 걷는다. 눈은 그렇게 깃털처럼 나부끼다가 가뭇없이 사라지면서 여전히 싸묵싸묵 내리고 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가 장씨가 먼저 입을 연다.

"임자, 그 날은 참말로 좋았지라? 쓰발, 우라질 그 날 아침 말이여."

"좋았지요. 그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지요."

담담히 대꾸하는 서울댁의 목소리가 겨울 강바람처럼 까칠하다.

"하믄. 그 말이 딱 맞는 말이랑께. 그 자리서 죽어도 여한이 없얼 것 같았지라. 500만원을 떡허니 받어 쥐었을 땐...내헌텐 그기 돈이 아니라 임자였으니께...인저 임자를 영원히 내 사람으로 만들었다 싶었으니께..."

"우리가 살 방이 생기는 거였으니까...."

"그 질로 방부텀 계약얼 하러 갔어야 했제. 그만 내 욕심에..."

"그게 왜 이녁 욕심이예요? 내 맘도 그랬는데...나일롱 쪼가리 한복이라도 한 벌씩 사 입고 정한수 떠놓고 그렇게 시작하고 싶었는...걸요."

서울댁의 말꼬리에 물기가 묻는다.

방 한 칸을 장만하기 위해 먹을 것 입을 것 안 쓰며 돈을 모았던 지난 여덟 달...보증금 500만원만 만들면 월세야 둘이 벌어 채워내지 못할까, 500만원 짜리 계를 타는 날, 당장에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금반지 하나 끼워주며 서울댁과 혼례를 올리려니 했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함께 살기로.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이지 싶은 절박함으로 그들은 그 꿈에 매달렸다.

두 사람은 통장 하나에 날마다 버는 족족 입에 풀칠할 돈만 남기곤 모두 집어넣었다. 그렇게 해서 곗날까지 50만원을 만들어내곤 했다. 어떤 때는 몇 만원이 모자라 꾸어다 집어넣기도 했고, 어떤 때는 몇 만원이 넘었지만 다음 달의 곗돈을 위해 남겨두기도 했다. 아무리 둘이 번다 해도 좌판 방물장수 천 원 짜리 장사에, 바짓단 고치는 일이나 겨우 떨어지는 코딱지만한 수선집 일감으로는 한 달에 50만원 만드는 일이 숨통을 조일 만큼 고달팠다.

그렇게 곗돈을 부어 여덟 달만에 500만원을 탔던 날.

두 사람은 곗돈을 타서 나오는 길로 한복을 사러 시장으로 가다가 아무래도 큰돈 들고 다니기가 불안했다. 그래서 장씨가 얼른 제 방에 들려 그 돈을 비닐옷장 구석에 잘 넣어두고 나왔던 것이다.

"그, 그 녀석이 그럴 줄이야....시상에, 내 자식이 그럴 줄이야..."

물건을 사들고 돌아온 두 사람이 비닐 옷장 지퍼를 열고 손을 들이밀었을 때 집혀 나온 것은 한 장의 흘려 쓴 쪽지 뿐이었다.

'아버지, 도리는 아니지만 이제는 어디도 손 벌릴 데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일자리를 얻어 1년 안에 이 돈만은 꼭 갚겠습니다.'

장씨가 서울댁과 장에 간 사이, 공장에서 쫓겨나고 일자리를 못 구해 쩔쩔 매던 둘째 아들이 그 사이 장씨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 아들은 장씨의 아들 중에서 그래도 제일 사람 꼴을 하고 살던 자식이었다.

"그래도 그 돈이 생떼같이 귀한 당신 아들 손에 들어갔으니, 아깝지는 않아요. 괜찮아요. 단지....우리가 인연이 안 닿는 사이거니, 하늘이 말리는 사이거니 그런 생각만 들 뿐이지."

"하늘이 말리는...옘병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나...이런 놈의 세상이 저주스러울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서울댁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겉은 놈 만나 임자가 아까운 인생만 죽였소. 내가 입이 열 개라도 임자 앞이서 무신 말을 하겄소. 인자라도 새사람 만나..."

장씨가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서울댁은 넋 나간 눈길로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고개만 끄떡거린다. 그 고개 끄떡거림에 장씨의 가슴은 회칼로 저며내듯 쓰라리다.

하지만 장씨 역시 다시 악착스럽게 일을 하고, 수전노처럼 돈을 모을 기력이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쳤다. 더 이상은 어떻게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전처럼 지낼 자신도 없었다. 장씨가 훌훌 보따리 싸서 가리봉 시장통을 뜨려 했지만 서울댁이 말렸다. 자기가 가게를 정리하고 결혼한 딸네 집으로 들어가겠다며 앞서 가게를 정리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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