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제목	[소설] 첫사랑 엘레지
이름	유중원

첫사랑 엘레지

분노는 기묘한 용법을 가진 무기다.

다른 모든 무기는 인간이 이를 사용하지만,

분노라는 무기는 반대로 인간을 사용한다.

― M.E. 몽테뉴

서울가정법원 조정실

조정전치주의

2024년 늦가을이다.

안개와 낙엽의 계절이다.

아내는 얼굴이 잔뜩 굳어있는 채로 원고 측 의자에 앉아 있고 맞은편 피고 측 의자에 앉은 남편의 얼굴은 세상만사에 지친 듯 어둡고 힘들어 보였다.

두 사람 모두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조정위원들이 자리를 잡았다.

조정위원은, 가사사건 해결에 필요한 전문적 지식과 사회적 경험이 있는 사람, 국가공무원법 제33조 각호 소정의 공무원 임용 결격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 인격 및 행동에 있어 지역사회의 신망을 받는 사람, 조정과 사회봉사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 접수시작일 기준 70세 미만으로서 건강하고 활동력이 있는 사람 중에서 선발되어 위촉한다.

아내는 이혼을 요구한다. 남편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이혼할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든다.

둘이 한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마가복음 10:9).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아이들과 첫사랑 애인이 뜬금없이 생각난다. 그동안 고군분투하면서 내가 성취한 일들 (과연 의미있게 성취한 일들이 있기는 했나?) 아직도 머릿속을 맴돌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일들, 즐거웠던 추억,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인생의 무대에서 살면서 겪었던 수많은 사건과 장면, 인물들이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돌아다닌다. 내 인생역정의 어느 순간이 그대로 반사되어 환원되는 느낌이 든다. 그것들이 심연의 깊은 곳에서 제멋대로 춤추고 있다. 수많은 희미한 기억들이 종잡을 수 없이 들끓고 있다. 기억은 생생하고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자신의 기억을 신뢰할 수 없다. 기억의 공백은 늘 있는 일이고 자신이 기대하거나 가정한 것들로 채워지곤 하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기억은 머릿속에는 존재하지만 그 내용이 아주 애매해서 부정확하거나 내가 원했던 기억이 아닌 경우가 많다. 악몽 속에서 얼핏 보았던 것이거나 기억의 출처를 도저히 밝혀낼 수 없는 것들이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환상을 현실로 오해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 망할 놈의 기억은 이전에 겪은 경험을 제멋대로 수정하거나 완전히 새롭게 다시 쓰기도 한다. 그 결과 인생의 특정 사건이나 그보다 더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던 경험이 지금 이 시점에서는 완전히 왜곡되어 나타난다.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또는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내가 지금 여기에 살아있으면서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렇게 끝없이 반복하는 질문과 대답이 내 심장을 관통하고 있다.

요즈음 잠들면 이대로 두 번 다시 눈뜨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진 채 잠자리에 들면 두려움 때문에 잠들기가 어려웠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점점 더 많은 문제점들이 생겨났고 마침내 극단적인 대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한 상태는 아주 격렬하게 진행됐고 우리들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소실되었다. 누구에게 더 책임이 있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지금 이 지경이 되었는데 책임 소재를 따진다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조정위원장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원고에게 먼저 질문했다.

“원고의 주장 사실을 잘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조정위원들은 원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서로 용서하고 원만히 합의하여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요?

서로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진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게 되는데 가정을 이루는 토대는 부부 사이의 사랑과 신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유지하려면 서로 양보와 배려를 하고 경우에 따라 자기희생도 감수해야 합니다.”

원고가 대답했다.

“우리 부부는 진즉 가정이 파탄되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장기간 별거하면서 파탄이 일어났고 부부생활의 실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혼에 합의까지 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결혼 생활을 지속하라고 말씀하지만…… 모두에게 커다란 불행이 될 것입니다.”

조정위원장이 다시 피고에게 질문했다.

“부인은 절대적으로 이혼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정 생활이 파탄되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피고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피고가 대답했다.

“세상이 우습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을 가출한 게 누구입니까. 가정 파탄의 원인은 전적으로 저 여자에게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이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마는……? 대법원의 확고한 판례는 유책 배우자는 이혼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상담한 이혼 전문 변호사가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원고가 반박했다.

“유책, 유책하는데 유책이 무슨 의미인가요? 모든 일에는 원칙이 있고 그 원칙에는 어김없이 예외가 있다고 합니다. 유책주의에도 예외가 있을 겁니다.”

피고가 반박했다.

“원고는 감히 예외를 주장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가련한 희생양 신세입니다.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은인자중하면서 참을 대로 참아 왔습니다. 제가 먼저 이혼 소송을 제기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원고가 재반박했다.

“피고는 스스로 나서서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하도록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무조건 남을 탓합니다. 그게 평소의 태도입니다.

진실은 밝혀질 겁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어요.”

피고가 재반박했다.

“저는 그 남자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화기애애하고 단란한 가정을 파괴한 인간이란 말입니다.

지금은 간통죄가 폐지됐다고 합니다만 저 여자는 상간남과 수십 번 간통 행위를 했단 말입니다. 성경 말씀에도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했고 또한 ‘간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가정 파탄의 책임은 오히려 그 남자에게 있습니다. 당연히 그 남자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격심한 정신적 고통을 위로하기 위하여 위자료를 지급해야 합니다.

저는 절대로 이혼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혼하면 저 여자는 그 남자에게로 득달같이 돌아갈 것입니다.

저는 평범한 인간이지 성인군자가 아닙니다.

제가 묻고 싶습니다. 왜? 그들을 위해서 제가 희생해야 될까요?”

우리는 그들 부부간 삶의 궤적과 깊은 내막을 모른다. 부부지간이라고 해도 가정의 평화를 지키려면 살아가면서 서로 모르는 척해야 하는 것들도 많이 있다. 삶을 배우려면 일생이 걸린다고 했다. 나의 지친 마음이여,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리가 남의 일이니까 대충 얼핏 생각한다면…… 그 남자의 정서적 감성적 심리 상태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가 얼마나 억울했으면 유명한 병원의 과장이라는 지위에 있으면서 자기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살까지 했을까? 자살이란 자기 자신을 살해하는 살인 행위이지 않는가? 성경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했지 않은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몹시 의아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내와 체결한 합의 이혼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그 남자를 상대로 다시 위자료 청구 소송을 진행한 남편이야말로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정당하게 체결된 계약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게 계약의 법리이고 게다가 부부간 계약이라면 더욱 철두철미하게 준수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세상이 험악해서 계약 파기를 밥 먹듯이 해도 말이다.

원고 (최문자, 48세)는 이혼 소장에서 주장한다.

원고는 2004. 9. 20. 피고와 혼인신고를 마친 법률상 부부로서 슬하에 큰아들 (2005년생), 작은 아들 (2008년생) 등 아들 둘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매로 만나서 석 달 동안 첫사랑 연애처럼 열렬히 교제한 끝에 결혼에 성공했습니다.

원고와 피고는 오랫동안 경제적인 문제, 성격 차이 등으로 불화를 겪었는데, 원고는 그해 봄 부부싸움 끝에 피고로부터 “우리는 지금부터 절대로 부부가 아니다. 완전히 남남이다”라는 말을 듣고 2022. 3. 자식들을 남겨둔 채 가출하여 이때부터 별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 유일한 친구는 커피였습니다. 하루에 에스프레소를 열 잔 이상씩 마셨습니다.

우리는 진즉 합의 이혼하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파기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거액의 위자료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남편과 큰아들이 모의하여 제가 옛날 남자 친구와 간통했다고 하여 상간남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그는 이 어려운 상황을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기 살해를 감행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사랑했던 첫사랑 그 남자를 죽인 것입니다. 살인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더 이상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아내는 2023년 여름 무렵 그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면서 합의 이혼의 조건을 밝히는 이메일을 발송했고 남편도 아내에게 “먼저, 왜, 이혼을 요구하는지 이유를 밝혀라. 가출을 하고 간통을 하였으면서 먼저 이혼을 요구하다니……? 어불성설이다. 만약 꼭 이혼을 하려고 한다면 이혼을 해줄 테니 위자료 1억 원과 두 아들을 키우는데 필요한 양육비로 매달 200만 원을 송금해라. 그러면 확실하게 이혼해주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아내 : 뭐가 뭔지 모르겠어? 혼란스럽다니까.

남편 : 그럴 거야.

아내 : 뭔가 두려워……? 너무 두려워.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고 있어. 갈팡질팡한다니까.

남편 : 자업자득이야.

아내 : 당신은 무심한 사람이다. 왜, 이혼을 요구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인가? 나는 완전히 소외되어 격리되어 있다. 자식들과도 소외되고 남편과도 소외되고…… 사회와도 격리되어 있다.

그래서 그 집은 가정이 아니라 지옥과 같다.

남편 : 말을 삼가하기 바란다. 크고 작은 문제가 없는 집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나? 모두들 참고 그럭저럭 사는 거다.

아내 : 인내하는 데도 한계가 있는 거야.

남편 : 그래서 가출했나? 그 남자 때문 아닌가?

아내 : 그 사람한테 책임을 전가하지 마세요. 가출은 그분과 관계가 없어요. 제 문제인거죠. 우리의 만남은 엄연히 경계선이 있어요. 일시적일 수도 있단 말입니다. 우리도 나이가 들었고 철이 들었다고 할 수 있어요.

남편 : 그래서…… 간음을 했나? 그건 불륜이야.

아내 : 왜? 사랑을 문제 삼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남편 : 어련하겠어?

아내 : 그런데 말이야…… 당신은 그걸 한 적이 없었던가? 잘 생각해보라고. 나는 알고도 모른 척 했어.

남편 : 생사람 잡는 소리 하지 마.

아내 : 당신은 메마른 사람이에요.

남편 : 우리가 애시당초 번지수가 틀린 사람끼리 만난 건 아니지 않는가. 짧은 기간이었지만 열렬히 연애를 했고 결혼하고 나서도 오랫동안 알콩달콩 살았지 않았어?

아내 : 출판사를 차린 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어. 난…… 당신 회사에 합류하길 거부했지. 당신도 은근히 싫어했거든. 방해가 된다고 생각 한 거지. 뭔가 이상했어. 뻔히 보였단 말이야. 현실을 외면한 채로 낯설고 새로운 일에 너무 무모하게 투자했단 말이야.

남편 : 도산이니 가난 같은 건 내 인생 시나리오에는 없었던 거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

아내 : 지나간 일이야……?

남편 : 나는 이미 이혼 조건을 제시했다.

아내 : 그렇게 해준다면 너무나 고맙지만…… 너무 가혹하단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남편 : 아들들은 지금 많이 컸지만 그래도 내가 돌봐야 한다. 걔들은 남자이니까 아버지가 키우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너는 들어와서는 안 된다. 너는 우리를 버렸어. 그러면 지금부터 재산분할에 대해서 논의해보자.

아내 : 나는 분할해줄 재산이 없어요. 지금 살고 있는 안양 평촌동 원룸은 보증금 1,200만 원에 월세 50만 원을 주고 있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가끔 출판사에서 의뢰해온 번역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게 전 재산…….

위자료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예금을 털어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재산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죠. 하지만 당신의 재산은 무조건 당신의 소유에요. 그걸 인정합니다.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면 이혼에 동의하지 않을테니까.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재산분할을 청구하지 않겠어요.

다만…… 양육비는 내가 부담할 능력이 없습니다. 게다가 걔들은 지금 미성년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남편 : 나는 당신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다시 말하지만…… 속 시원히 이혼하고자 하는 숨어있는 이유를 밝혀라.

내가 납득할 수 있게…… 말이지.

아내 : 나는 당신이 무조건 싫다.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다.

남편 : 그 남자 때문인가? 첫사랑 애인을 다시 만나니까 그 시절 노스탤지어가 일어났단 말인가?

아내 : 당신은 자신을 잘 알라. 당신은 너무 거칠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강간 행위다. 나를 폭행한 후 항거불능 상태에서 강제적으로 간음한다. 당신은 아내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하고 사랑이 뭔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성적으로 억압된 삶을 인내할 수 없지.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여성이 가지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거야.

남편 : 그 문제에 관해서는…… 남녀 간에는 신체적이건 심리적이건 상당한 차이점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그걸 무시해서는 안 되지. 여자는…… 특히 마누라는 순종하는 게 도리야. 알겠어?

어디서 부부 간에도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어설픈 소리를 들은 모양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세상 물정 모르는 판사가 그 따위 허튼 말을 한 거야.

아내 : 당신은 항상 그 모양이야. 남편은 하늘, 아내는 땅이란 말 아닌가요? 남존여비 사상은 그 집의 뿌리깊은 내력이죠.

일류 대학 나왔다고 은근히 뻐기면서…… 남 부러울 것 없이 호강하면서 살았다고 자랑했으면서…….

남편 : 사랑 타령 그만해라. 정말 지겹지…… 그런 건 연애할 때나 하는 거야.

아내 : 진정한 사랑이 뭔지 모르면서…… 그래도 시를 쓴다고?

남편 : 여기서 왜 시를 들먹이나? 나는 시인이기를 진즉 포기했지. 인간이 무슨 놈의 시를…… 쓸 수 있단 말인가. 이제부터는 AI가 시를 쓰는 거야. 인간 시인은 모두 사라져야 해.

아내 : 본론으로 들어가자.

남편 : 당신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이 제시한 조건대로 합의 이혼하겠다.

피고 (유중필, 53세)의 답변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남자는 아내가 대학 시절 사진 동아리에서 만난 첫사랑입니다. (아내가 중매로 만나 교제할 당시 그 사실을 솔직히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아내가 그 남자와 재회하기 전까지는 우리 부부 사이에 어떠한 문제점도 없었습니다. 물론 부부간에 사소한 말다툼은 있었겠지만 그 말다툼은 사랑의 언어를 변주한 것에 불과합니다.

부부 싸움은 개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내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무슨 말을 들으며 늘 환하게 웃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아내는 콧노래가 저절로 나올만큼,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즐거운 모습이었고, 볼은 발그스름해지고 날씬한 몸매와 매끈한 피부를 가꾸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확연히 눈에 띄었습니다.

그 해 (계절의 여왕인) 5월 중순경 밤 12시쯤 큰아들이 우연히 엄마가 이어폰을 귀에 꽂고 뭔가를 들으며 가수면 상태에 들어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큰아들은 너무나 호기심이 발동하여 엄마의 이어폰을 자신의 귀에 꽂고 들었습니다. 엄마가 어떤 남자와 속삭이면서 녹음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대화를 반복해서 듣고 분석한 결과 그 남자는 아내의 불륜 상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불륜의 대화였습니다. 말은 너무너무 부드러웠고 속삭임이었고 성적 농담치고는 너무 진했고 솔직했습니다.

불륜은 모르고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대단한 몹쓸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는 그 남자와 통화를 녹음해 두고는 혼자 있을 때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듯이 이를 재생하여 반복적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큰아들은 엄마를 미행해서 진실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어떤 남자를 만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으려고 해도 그게 말처럼 쉬운게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감쪽같이 가출해버리자 우리는 몹시 당황했고 정신을 바짝 차렸습니다. 더욱 확실하게 의심이 깊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만능 해결사 - 무엇이든 해결드립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영업을 하는 미래스페셜컨설팅주식회사 (MSC) 산하 탐정법인 솔로몬에게 그 조사를 의뢰하게 되었습니다.

[탐정팀은 오랜 조사 끝에 그 오피스텔의 전경과 원룸의 출입문 사진, 그 연립주택의 전경과 출입문 사진, 그들이 각기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그들은 둘 다 자가용 차가 없었습니다), 그 남자의 전신상과 얼굴을 찍고 그가 근무하는 의정부에 있는 종합병원의 사진, 그의 상세한 이력 등을 기재한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인내할 수가 없었습니다.

2024년 (누군가, 여름은 하나의 꽃다발 시들 줄 모르는 영원한 꽃다발이라고 했습니다만 여름에 접어든) 6월 중순경 우리 가정을 파탄나게 한 그 남자를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하는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저는 지금 예민한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한참 성장하고 있는 아들들을 생각해서라도 아내와 20년간 평화롭게 유지해온 가정을 파괴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저와 아들들은 아내가 하루빨리 우리 집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남편이 답변서에 첨부한 소송 자료에는 그 이전 단란했던 가족의 모습과 아내와 그 남자의 불륜 행위의 명백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불륜이란 다름 아닌 간음 혹은 간통을 말한다. 십계명 (The Ten Commandments)은 일곱 번째 계명으로 ‘간음하지 말라’고 했다. 그 자료들에 의하면 아내와 상간남은 오랫동안 옛날 첫사랑 시절처럼 연인 관계로 지내오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 사건의 자초지종과 깊은 속내를 모르는 상태에서 남편을 이해하기가 너무 곤란하다. 저렇게 첫사랑 남자가 좋다고 다시 만나서 몇 년 동안이나 연인 관계로 지내오면서 간통을 했고 더군다나 가출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아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 아마 아내가 너무 괘씸한 나머지, 만약 이혼해주면 그 남자한테로 다시 돌아갈 것 같아서 보복 심리가 발동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가장 고귀한 복수는 관용이다.’라고 했고 ‘섣부른 복수는 자신의 파멸을 초래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소외 疏外와 간극

원고가 제출한 준비서면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저는 7살 때 모친을 여의고 아버지가 재혼한 계모와 살면서 정서적으로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저는 일방적으로 그렇다고 믿었습니다) 항상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이 그리웠습니다.

계모가 어떤 경우에도 저에게 신체적이건 정신적이건 학대를 한 일은 없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과 똑같이 대우했습니다.

계모는 남의 자식보다 자기 자식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계모가 없는 신데렐라 이야기나 백설공주 이야기는 무의미합니다. 하지만 저희 두 번째 어머니는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단지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승 사자가 엄마를 데리고 가는 순간에 창백하고 하얀 엄마 얼굴을. 저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고 입이 얼어붙었고 눈물 한방울 흘릴 수도 없었습니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어쩌다 가슴 통증이 시작되면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가슴이 조여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심장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고 찢겨진 심장은 그 후 오랫동안 치유되지 못했습니다.

심장이 저주처럼 계속 피를 흘렸습니다.

그 상처를 마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 상처받은 영혼은 여전히 심연 속에 갇혀 있습니다.

영혼의 상처는 저의 핏속에 지워지지 않는 아주 특별한 지문을 남겼습니다. 저는 원인이 되는 상처를 건드리기를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방아쇠가 될 만한 상황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 장면은 악몽 속에서 얼핏 보았던 것도 아니고 환상을 현실로 오해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희미한 기억이 아닙니다. 기억의 출처는 명확합니다.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 해 추운 겨울날 한남동에 있는 병원 중환자실이었으니까요.

남편은 부잣집에서 삼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밑으로 결혼한 여동생 둘이 있는데 둘 다 캐나다로 이민가서 살고 있습니다.

훨씬 나중 일입니다만, 시누이들은 가정 형편이 기울어 몹시 살기 힘들 때 우리들을 못 본 체하고 재빨리 캐나다로 도망간 겁니다.

그때는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평생 함께 살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일단 결혼하기만 하면 만약 둘 사이에 무슨 문제점이 생겨도 봄눈 녹듯 사라 없어질 일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부잣집 아들이고 일류 대학을 나와서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더 좋은 누군가가 나타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나를 버린 그 남자를 증오하고 원망했습니다. 나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버렸지요. 나는 버림받은 후 계속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그의 얼굴, 모습, 실루엣, 촉감, 고립, 관계 단절, 불안 강박이 악몽처럼 떠올라서 그 지독한 기억들을 완전히 지우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습니다.

풋풋한 사랑의 감정이나 연애의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대학생 시절이었지만 최고급 독일제 라이카 카메라로 찰나에 불과한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셔터를 연거푸 눌러대는 (자칭 사진작가인) 명문대학의 의대생과 사귀며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혐오와 두려움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자신을 계속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이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다는 건 상대방이 나를 해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걸 깨달은 건 훨씬 나중 일이었습니다.)

사실은 사실입니다.

현실은 현실입니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을 스스로 속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남편과 결혼할 당시에 남편 부친은 강남 지역에서 크고 작은 상가 건물의 중개를 전문으로 하는 부동산 중개업을 수십 년간 하면서 나름대로 경험과 노하우가 쌓여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 무렵 남편은 자기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서 안정적으로 다니던 대기업을 뛰쳐나와 생소한 인쇄업 겸 출판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생리에는 맞지 않다고 하면서 부친의 부동산 중개 법인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시를 좋아했고 몇 권의 시집을 자비 출판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출판사는 불과 몇 년만에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시대의 트렌드에 맞지 않는 고전적인 책을 무작정 출판하면서 반품과 재고가 쌓이고 마침내 도산했습니다.

사업 실패로 인해서 빚이 산더미처럼 쌓인 상태였습니다. 살고 있던 집 등을 팔아서 어느 정도 빚을 청산 한 후 남편은 식구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온갖 일에 매달렸습니다. 남편은 먹고 살기 위해서 자존심을 버리고 무슨 일이든지 닥치는 대로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출판사가 도산하고 나서 결국 자기 자신도 무너진 겁니다. 부잣집 아들이 비로소 세상의 쓴 맛을 보게 된 것이죠. 무차별적으로 좌절과 분노를 느끼고 세상과 인간을 불신했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왜곡되고 변질되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새 비겁하고 나약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끝내 지독한 패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가정을 돌보고 시부모를 봉양하며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서 다니던 대형 출판사의 책 디자인과 기획 편집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단녀가 된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사랑하고 책 읽기를 좋아했던, 그래서 저의 평생 꿈이었던 책을 편집하는 일을 그만두면서 그때부터 경력이, 제 인생이 단절된 것입니다. 그리고 미술 학원의 강사, 아주 가끔 영어로 된 외국 소설의 번역 일을 맡아 생계를 도왔습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원래 삽화를 세밀하게 잘 그리는 삽화 미술가였으므로 어린이들에게 그림 그리는 기초를 가르치는 미술 학원의 강사는 제 적성에 어느 정도 맞는 자리였습니다.

미술에는 데생이 먼저이고 기초이므로 그게 아주 중요합니다.

그때부터 집안일에 매달리면서 변변히 바깥 구경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해외여행은커녕 제주도 여행도 가본 적이 없고, 헬스, 골프, 그 출판사의 여러 모임, 동창회 모임, 음악회나 미술 전람회 등에 가본 일도 없었습니다.

저는 철저히 사회와 격리되었습니다.

저 자신 스스로 쓸모없다는 느낌이 들고 위축되고 고립되어 있어서 도저히 나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타인들의 관심이나 평가를 두려워하는 일종의 정신적 질환인 사회불안장애를 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집안의 대소사와 생활비는 모두 남편의 어머니가 관리했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벌어온 돈 한 푼 만진 적이 없습니다. 다행이랄까 그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모시고 있는 동안 좋은 시어머니라고 할 수는 있었습니다만 친손주들을 직접 일일이 챙기면서 저는 엄마의 역할을 박탈당했고 따라서 부부관계도 소원해졌습니다.

저는 완전히 소외됐습니다.

저는 시부모님이 나이가 들어서 거동이 극도로 불편했던 몇년간 지극 정성으로 간병을 했고 남편이 하던 국어학원과 식당 일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저를 아내로 존중하기는커녕 냉담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래서 실낱같은 애정조차 없이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지속해 왔습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완전히 껍데기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숨이 턱턱 막히는 그 집을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남친과 친밀하게 지낸 것을 트집 잡아서 순전히 남자의 오기로 이혼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은 제 자식이 아닌 거나 다름없습니다. 할머니가 키우면서 의도적으로 이간질을 해서 어머니로서 제 역할을 철저히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학생이 되었지만, 시대착오적인 가부장제의 남성중심주의에 찌들은 다 큰 아들은 한술 더 떠서 마치 아랫사람에게 야단을 치듯 “그동안 잘못한 것이 많으니 철저히 자숙하세요. 자식의 장래를 생각해보세요. 우린 이혼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자존심이 상한단 말입니다.”라며 어머니인 저에게 막말을 했습니다. “만약 집을 나가면 저희도 참을 수 없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습니다.”라며 협박까지 했습니다.

만남과 재회

가정법원 조사관이 철저히 조사한 끝에 밝혀진 진실은 다음과 같다.

원고는 그 무렵 집을 나온 후 안양 평촌동 한림대학교 성신병원 부근 어떤 오피스텔 203호에 거주하면서 서초동 남부터미널 부근 연립주택 101호에 살고 있는 그 남자 집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그들은 본격적으로 만났다. 옛날 첫사랑 연인 시절로 되돌아 간 것이다. 하지만 동거까지 나아가진 않았다.

각자 자기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 옛날 아름다웠던 시절을 잊지 못하고 애틋하게 그리워했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당시 20대 초반의 나이였고 원고는 H대 회화과 재학생이었으며 그 남자는 Y대 의대 본과생이었다.

그들은 신촌 부근에 있는 대학들의 재학생들이 회원 (삽십여명)으로 있는 연합 동아리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것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서로 완전히 잊고 살았다. 한창 중년의 나이에 무슨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그렇게 만난 것이다.

그는 어김없이 중년의 남자였다. 하지만 단정한 얼굴에 배는 나오지 않고 허리는 꼿꼿했으며 머리만 희끗희끗 반백의 모습이었다. 그 옛날 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 처음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다 잠시 눈을 감았고 눈을 뜨자 알듯 말듯 한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흘렸다.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들려주는 작은 미소였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큰맘 먹고 등산 모임에 회원으로 가입했으나, 신입 회원으로 서먹서먹했고 정처 없이 떠다니는 버림받은 사람 같고 혼자 남은 사람 같았다.

솔로몬의 젊은 여자 탐정이 등산 모임의 회원으로 가입한 후 여러 차례 함께 등산하면서 회원들을 은밀하게 접촉해서 아주 세밀한 사실까지 철저히 조사했다.

원고는 2021년 아직 산봉우리에 잔설이 남아있던 이른 봄 지리산 등산 모임에서 근 20년 만에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 후 거의 매일 핸드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친밀하게 지내 오던 중 집을 나온 후에는 자주 그 남자가 홀로 살고있는 집으로 찾아가 격렬하게 입맞춤을 하고 서로 뭄을 밀착시켜 쓰다듬고 더듬으며 남자는 여자의 몸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한 은밀한 사실은 타인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원고가 아주 친하게 지냈던 동료 여자 회원에게 털어놓았던 것을 그 여자가 친밀하게 접근하는 탐정에게 스스럼없이 말해준 것이다. 친한 여자들끼리 못할 말이 없었다. 피고는 탐정의 보고서를 통해 그런 사실을 알고나서 원고와 그 남자를 간통죄로 고소하고 싶었으나 2016년 1월 간통죄가 폐지되었다.)

그들이 등산 모임에서 운명적으로 다시 만난 후 약 3년간 서로 계속 연락을 취해왔고 특히 하루에 한두 번씩 핸드폰 통화를 계속하였고, 둘 사이에 금전적인 거래도 여러 차례 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금전적 거래라는 게 원고가 가출한 후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돈에 쪼들리는 첫사랑 애인을 위해서 자신이 받은 월급을 쪼개 준 것을 말한다) 원고는 안양 평촌동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밤늦은 시간임에도 독신남인 그 남자가 홀로 거주하는 집으로 찾아가 아침까지 있으면서 부정한 행위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 남자는 지금까지 독신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는 첫사랑 이후에도 몇 번인가 여자를 사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자와 본격적으로 교제하기 시작해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그때부터 결혼에 대한 불안 때문에 연인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결국 여자로부터 도망쳤다. 결혼은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었다.

그 남자 (엄해수, 49세)는 그 당시 유명 종합병원의 마취과 의사였다.

수술대에 누워있는 환자 머리맡 주변에는 튜브와 디스플레이가 연결된 인공호흡기, 케이블, 모니터 등이 복잡하게 늘어서 있다. 수술대 옆 작은 선반에는 크고 작은 주사기들이 모여 있다. 마취과 의사가 환자의 창백한 얼굴 위에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나서 마취제를 주입한다. 수술대에는 경험이 풍부한 응급팀과 외과 수술팀이 대기하고 있다. 응급팀은 환자의 장기 기능과 바이탈을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잘 유지하는 임무를 담당한다. 마취과 의사는 마법사처럼 환자를 잠들게 하고, 통증을 없애고, 심장박동을 조금 더 빠르게 또는 느리게 하며 혈압을 조금 높이거나 낮추고, 소변도 조금 더 많이 배출되게 조절한다. 마취과 의사는 환자를 잠시 재우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수술이 끝난 후에도 호흡기, 신경계, 신장, 호르몬, 심혈관 순환계, 그리고 가장 큰 기관인 혈액 등, 신체의 주요 시스템도 관리한다.

원고는 외도한 사실을 솔직히 인정했다. 그녀는 불행하게도 자신 때문에 죽은 첫사랑 애인을 저승으로 떠나보내는 일이 필요했다.

하지만 원고는 조사 과정에서 화를 벌컥 내며 소리를 질렀다. “꼴도 보기 싫은 인간이야. 인간도 아니야. 잔인한 사람이라니까.”라며 오열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박박 소리를 질렀다. “남편과 큰아들 녀석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악질적인 사람이란 말입니다. 이혼 못 해준다면서 수시로 협박했어요. 제가 합의이혼서에 도장을 찍은 후 제 의무는 모두 완전 무결하게 이행했단 말입니다. 남편과 저는 그 무렵 서울가정법원에 협의이혼신청을 하여 협의이혼의사 확인서의 등본을 교부받았고 이에 따라 이혼신고를 하려고 했으나 남편은 이혼할 의사가 없다며 이혼신고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 첫사랑 애인을 상대로 3억원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피고는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합의 이혼하기로 계약을 체결한 것도 맞고 원고가 계약상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 것도 인정합니다.

다시 돌이켜보았지만 도저히 이혼할 수 없었습니다. 이혼을 해주면 원고는 그 남자 곁으로 돌아가서 너무나 행복하게 잘 살 거 아닙니까. 너무 억울했습니다. 아내를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 마취과 의사를 응징해야 했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남자가 손편지를 보냈다.

유중필님께!!??

당신이 제게 소송을 제기한 것은 일종의 돈따먹기 게임 아닌가요? 당신은 제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찾아와 금 3억원을 요구하며 협박했습니다. 당연히 저는 거절했지요. 그러자 당신은 병원에 간통한 사실을 고지해서 나를 쫓아내겠다고 또다시 협박하였습니다. 왜 그때 병원 당국에 알리지 않았나요? 그래봤자 소용이 없었겠지요.

우리 사이에서 비극적으로 일어난 치킨게임 같은 막다른 게임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당신은 돈의 노예가 아닌가요?

인생은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어쨌거나 당신은 게임에서 졌단 말입니다. 내가 스스로 죽음으로 인해서 당신은 당신 아내에게 살인자라는 각인을 심어주게 될 겁니다.

당신은 살인자란 말입니다. 그런 후에도 과연 (일말의 희망이 남아있는 경우에도 말입니다) 당신 아내가 철천지 원수인 당신과 살려고 할까요? 그리고 이까짓 허접한 소송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겁니다.

당신은 일 원 한 푼 받을 수 없단 말입니다.

나는 첫사랑 애인과 헤어진 후 내 인생에 대해서 막대한 후회를 하였고 말할 수 없을만큼 지독한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지요. 대학병원 병원장 출신으로 권위주의적인 부친께서 한사코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아내 집안이 너무 형편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 집을 나왔고 가족들과는 완전히 단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독신으로 살고 있지요. 제 월급은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기고 희귀 난치병 환자를 도와주는 공익재단에 기부했지요. 이 연립주택의 전세보증금 역시 진즉 그 재단에 기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단 한 푼도 받을 수 없단 말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수치심과 모욕을 안겨 주었죠.

당신은 서울지방법원 법정에서 손해배상소송의 원고가 아니라 당신의 정신 속에 있는 내면의 법정에서 진행되고 있는 양심의 소송에서 피고로 서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피할 수 없어요.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당신은 우리 모두가 처해있는 이 어려운 상황을 악용해서 돈을 뜯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요.

복수는 부질없는 짓입니다.

복수는 꿀보다 감미로운 게 아닙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하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복수는 용서와 화해입니다.

저는 끝내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은 사랑이 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