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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회
걸레
유 정 탁
나를 보고 걸레라 부르지 마세요
보시다시피 이제 난 걸레만도 못한 몸
종량제 비닐봉투에 버려진 쓰레기예요
늙고 병들었다고, 문풍지처럼 찢어졌다고
주인의 측은한 눈빛은 그래도 위안이었죠
그런데 어찌 알았겠어요, 내 운명 이렇게 얄궂게 끝맺을 줄
어젯밤이었죠
"걸레가 와 이리 누렇노?"
나를 보고 이 집 여자가 한마디 뱉은 말,
그 말은 곧 사형선고였죠, 그땐 미처 몰랐지만
내 몸 이렇게 된 것 다 저희들 탓인 줄 모르고
더럽고 낡았다고 헌신짝 버리듯 쓰레기봉투에
툭, 미안하다 섭섭하단 말 한마디 없이 갖다 버렸죠
이 신세 걸레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죠
깨끗한 것 싫어하는 사람 있나요?
첨엔 나도 저희들 얼굴 닦아주며 귀염받을 땐 한 끗발 날렸죠
고성능 세제에 락스 심지어 빨래 솥에 담겨
가스레인지 위에서 보글보글 삶 킬 땐
나른한 육신이 풀리고 눈꺼풀은 스르르……
여기가 천국이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너무 잘난 것 뽐낼 일 아니대요
첨엔 잘났다고 눈에 띄면 좋은 줄 알았죠
근데 그것도 하루 이틀 지나고 보니
점점 야위어 가는 나를 느낄 수 있었죠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아침에 이 집 여자 머리 닦고 축축해진 나를
거울로 보니 뽀송뽀송하던 피부는 꺼칠해지고
마당 가 담장에 핀 꽃을 닮아 좋아라 했던 꽃송이,
그 발갛던 꽃잎들 허옇게 퇴색된 걸 보았죠
슬펐어요, 예전의 내가 아닌 나를 보며
흘릴 수 있다면 눈물이라도 수돗물처럼 콸콸 쏟고 싶었죠
그러나 그런 슬픔 오래가지 않았어요
걸레, 그래요 수건이 슬픔을 느낄 땐 걸레가 된다는 걸 그때 알았죠
빨랫줄이나 건조대 위에서 오수를 즐기던 내 삶에
검은 깨알 같은 마침표가 붙고 비틀어 쥐어짠 몸으로
이 방 저 방으로 뒹굴다 이 집 아이들 물을 쏟거나
우유를 흘리면 늘 나를 찾았어요
급할 땐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다니기도 하고
어쩔 땐 축구공이 되어 여자 앞에 툭 떨어지기도 했어요
발에는 발, 여자는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를 하다 흘린 물을
나를 밟은 채 쓰윽 닦았죠
아프지 않았지만 아팠어요
말 못하는 걸레라고 표정도 없는 줄 알고
발로 짓이기는 여자가 미웠어요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내가 세상에 나오면서
하나의 존재임을, 세상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어엿한 존재임을
알아주었으면 했어요 저희들 방 깨끗해지는 만큼
내 몸은 더 더러워지는 것을,
나로 인해 사람 사는 집이 되는 것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주기를 바랐어요
그래요, 어차피 걸레임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뭇 것들 다 받아준다고 생각하니 행복하기도 했어요
다만,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사람들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 더러운, 더러운……흐윽!
할 얘기 아직 남았는데, 나는 지금 어디로 가나요?
들리나요? 들리…….
*울산지회 회원 yj1015@korea.com
처음 올린 날: 2002년 9월 15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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