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사라져 버린 날들
김재영

 
 
 그는 산그늘이 드리워진 언덕의 경사면을 천천히 올라갔다. 발굴로 파헤쳐진 황토를 밟을 때마다 어깨
에 멘 두 대의 사진기가 규칙적으로 부딪쳤다. 갈 지 자로 된 비탈길을 반쯤 오르자 뒤에서 자동차 시동
소리가 들렸다. 이어 날카로운 클랙슨 소리가 울려왔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서서 숙소를 떠나는
대원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대원들은 자동차 창문을 열고 상체를 내밀며 아우성으로 한마디씩
했다. 아그배나무 밑에 서있는 자동차 위로 비에 젖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후두둑 떨어졌다. 그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다. 아마도 잘 지내라는 인사이거나, 절대 혼자서 발굴작
업을 계속 하는 고생은 하지 말라는 당부, 그도 아니면 애증의 청동기 유구들이여 부디 안녕히-, 식의 농
담이었으리라. 아침나절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발굴현장을 항공촬영 하느라 매우 분주했을 시
간이었다. 뜻밖의 비에 항공촬영이 취소되자 대원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발굴단장인 그가 연휴 내내
혼자 현장을 지켜야 한다는 걸 알고서야 그들은 뒤늦게 머리를 긁적이고, 서로의 배를 이유없이 때려대
면서 웃음을 참았다. 정오가 되어 해가 났지만 대원들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친 뒤였다. 좁은 길을 빠져
나가는 자동차가 덜컹댈 때마다 햇빛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막내는 여전히 손을 흔들어 댔다. 차가
마을길을 지나 해안도로로 접어드는 걸 지켜본 뒤 그는 다시 언덕을 올랐다. 숙소에서 멀어질수록 짙은
숲 향이 맡아졌다.
 산등성이에 다다르자 이마에 자잘한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멀리 해안도로 쪽을 내려다봤다. 막내가 끝
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수개월을 발굴현장에서 보낸 어린 사학도는 못내 아쉬움이 남는가 보다. 연휴
다음날 곧바로 입대한다고 했으니 어쩌면 평생 이곳을 잊지 못할 지 모른다. 입대 직전의 경험이란 시시
한 일조차 또렷하게 기억나기 마련이다. 땅 속에 묻혀 화석이 된 동식물의 유체나 인간의 기억이나 같은
구조가 아닐까. 초원을 달리던 공룡의 육신을 덮친 용암이나, 감정이 푸릇푸릇 살아있는 순간에 들이닥
친 연인과의 이별이나.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란……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 불행이다. 그것은 이를테
면 퇴행의 성질을 지녔다. 이 순간 벌써 그는 십 여 년 전의 자신을, 군에서 제대하던 해에 머물렀던 첫
발굴 현장을, 그 시절을, 그 열정을 떠올려야하지 않는가. 어쩌면 그가 이제 발굴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
각하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간의 퇴적층을 걷어내고 과거를 고스란히 품은 채 잠들어 있던 유물
들을 세상의 빛 속으로 끄집어내는 작업은 갈수록 그를 힘들게 했다. 누군가 깊이 잠들어 있는 자신을
흔들어 깨운다고 생각해 보라, 그 고통스런 순간을, 거대한 포크레인까지 동원해 수천, 수만 년의 그 고
요하고 평화로운 퇴적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문명의 거친 손을. 물론 많은 고고학자들은 개발이란 명
분으로 이루어지는 전국의 현장에서 구제발굴을 하느라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있다. 하지만 어차피 불완
전한 발굴일 수밖에 없다. 발굴이 끝나기 무섭게 대부분의 유적지는 짓이겨지고, 그 위에 콘크리트덩이
가 얹혀지고, 그리고 영원히 유실되는 것이다. 그런 악순환 속에 놓여있는 자신을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가 없었다. 이번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건설업자와의 심한 마찰도 그를 지치게 했다. 무조건 빨리 발굴
을 끝내달라고 억지부리는 매부리코 사내와 실강이를 벌이는 것만큼 피곤한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그
는 이제 곧 마흔이었다. 다시 새로운 직업을 찾아내기에는 삶에 대한 정열이 식어버렸고, 세상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도 눈치 채 버린 나이였다.
 차가 산모퉁이를 끼고 휘돌아가자 갑자기 정적이 들이닥쳤다. 드문드문 서있는 자연촌락의 쓰러져 가
는 집들, 오래된 초등학교 건물, 버스 정거장, 개발을 앞두고 버려진 잡초더미의 논 밭 위로 저녁나절의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닷물이 다시 들어오고 있었다. 그 거대한 고독의 수평선은
끊임없이 새로운 물결을 만들며 천천히 다가왔다. 종일 빨아들인 빛을 일시에 뿜어내듯 바다표면은 은
빛으로 빛났고 검은 갯벌과 먼 하늘조차 환해져 있었다. 그는 눈부심을 이기지 못해 눈을 감았다. 아주
가느다란 빛이 망막에 남아 존재의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었다. 젊은 날에 만났던 몇몇 친구들이 떠올랐
다. 그리고 또다시 기억해 냈다. 엄청난 주장과 폭력과 아우성이 햇빛 속에서 뒤엉켰던, 도망치듯 도시
를 떠나 서해안의 발굴현장으로 숨어 들어갔던 그 해 팔월을, 그 시절을, 그 열정을.
 "그러고도 십 년을 살았어. "
 어깨에 멘 두 대의 카메라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그는 자조하듯 말했다. 모래자루를 걷어내고 유구를 보
존하려고 덮어두었던 비닐을 들췄다. 오후 빛이 청동기인들의 주거지를 밝게 비췄다. 빛은 흙 색의 미세
한 차이를 잘 드러내 주었다. 진흙을 다져 미장한 흔적이 있는 생토바닥, 움막을 버티던 기둥자리, 붉은
빛이 도는 아궁이 자리가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그는 들고있던 카메라로 유구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몇 개의 구름이 그의 등을 지나 동쪽으로 이동해 갔다. 그는 촬영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흐물대는 금속
같은 바다는 어느새 마을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바닷새 우짖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일몰직전의 빛나
는 수평선을 넘어 고깃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마을길을 가로질러 숙소 쪽으로 달
려오는 자동차 한 대를 발견했다.
 자줏빛 자동차는 아그배나무 밑에서 멈추었다. 꽤 시간이 지나도록 차에서는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그
는 언덕을 내려갔다. 소음이라곤 거의 없는 곳이어서 자동차 안에서 나는 음악소리, 누군가 흐느끼는 듯
한 소리, 자동차 시동을 완전히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당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 운전석에서
어떤 여자가 나왔다. 보통 키에 호리호리한 편인 여자는 하얀 원피스 차림이었다. 고요한 바닷가 마을,
텅 빈 시골집 마당의 잎새를 뒤척이는 아그배나무 아래 문득 달빛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여자는 침묵 속
에 서 있었다.
 여자는 멀리 바다 쪽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검푸르게 변해 가는 하늘로 가창오리 떼가 날아오르고 있
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데도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
는 하지만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는 여자에게 약간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는 여자가 어
떤 식으로든 말을 걸어오길 기다렸다. 길을 잘 못 들어섰다던가, 근처 바닷가에 들렀다가 민박집을 구하
지 못했다던가, 하다못해 지방 신문사에서 취재 차 왔다는 따위의 말이라도. 여자는 말을 건넬 듯 말 듯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천천히 걸었는데도 그는 아그배나무 밑을 금세 지나쳐버렸다. 방문 앞에
이르러 그는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 지 보려고 몸을 돌렸다. 여자는 어둠이 내려앉은 풀섶을 흔들며 산길
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녁에 그는 간단히 요기를 하고 곧바로 유물 실측을 했다. 책상 위에 꺼내놓은 반달모양 돌칼과 점토
대토기, 그리고 농경문 청동의기가 갓 태어난 아이처럼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게 일이 진척되지 않았다. 청동기 3호 무덤에서 출토된 점토대토기를 실사하는 데 옆선이 의도대로 매
끄럽게 그려지지 않았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그리다보니 선은 몹시 두텁고 거칠어졌다. 고양이가 책상
위로 올라와 발톱으로 종이와 연필을 건드리며 장난을 쳐댔다. 그는 연필을 내려놓고 고양이 등을 쓰다
듬으며 생각에 잠겨버렸다. 손이 무뎌진 것은 요 며칠 대원들과 함께 밤늦도록 술을 마신 탓만은 아니었
다. 저녁나절에 잠깐 마주친 여자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뭐 하는 여자인지. 어쩌자고 이 어두운 밤에
산길로 들어간 건지. 정말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여자인지. 혹시 어떤 위험한 짓을, 말하자면 억지로 생
을 마치려 드는 건 아닌지. 고양이는 심연의 바다 빛 눈을 감으며 기분 좋게 그르렁거렸다. 순간,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갈래머리를 하고 햇빛에 눈을 찡그리며 웃고 있던, 숙소를 지나
산길을 더 올라가면 외따로 서있는 집에서 보았던 처녀가 분명했다.
 외딴집에 처음 들른 것은 지난 봄이었다. 이곳 진배마을의 발굴책임을 맡고 현장으로 내려온 지 일주일
쯤 지났을까. 발굴장비들을 점검하고 있는 데 한밤중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신발을 신은 채 뛰어들어
온 경찰은 총을 겨누며 대원들을 한 곳으로 몰아놓더니 집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대원들이 왜 이러냐고 항의를 하고 경찰들의 몽둥이질에 대원들이 여기저기 고꾸라진 뒤에야 소란은 끝
이 났다. 마을 주민들이 신고를 했다는 거였다. 웬 젊은 사내들이 시골집에 모여 사는데 조직깡패 소굴
인 것 같다고 했다던가. 다음 날 시루떡과 삶은 돼지머리를 들고 집집마다 찾아가 인사하고 협조를 구했
다. 그때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그 외딴집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허술한 가겟집을 열고 있는 혹
냄댁한테 들은 대로라면 오래 전에 외지로 나갔다가 돌아온 사내가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마침 현장에
서 일할 인부를 구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기대감을 갖고 찾아갔다.
 벽오동 나무에 둘러 쌓인,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집은 한 낮인데도 방문과 창문을 꼭 닫아놓은 채였
다. 돌쩌귀가 떨어져나간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마당가에서 낮잠을 자던 여러 마리의 고양이들이 번쩍
눈을 뜨면서 일제히 울어댔다. 온갖 잡초들로 우거진 마당은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잡초들이 내뿜는
질식할 듯한 풀 내와 발정 난 고양이 특유의 암내, 나날이 무너져 내리는 게 분명한 집의 썩어 가는 벽지
에서 나는 곰팡내, 그리고 오두막집을 둘러싸고 있는 벽오동 나무 향이 뒤섞인 냄새였다. 잠시 뒤 집안
에서 쿨럭 대는 기침 소리가 나더니 왜 이리 소란이야, 하는 사내의 렙토스피라를 앓는 들개 같은 목소
리가 들렸다.
 그는 마루로 다가갔다.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주인 계시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군데
군데 널빤지가 빠지고 못이 튀어나온 마루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물주전자와 소주병, 찌그러진 냄비,
밥 주발이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한쪽 벽에는 건드리면 그대로 산산이 부서져 먼지가 될 듯 보이는 낡은
어망이 바람이 불 때마다 무심히 흔들렸다. 그 뒤로 반쯤 가려진 사진틀이 어망이 흔들릴 때마다 간간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 티를 갓 벗어난 처녀가 갈래머리를 하고 햇빛에 눈을 찡그리며 웃고 있었
다. 청신한 포도 알이 햇빛에 막 익어가기 시작하는 초여름의 뜰이었다. 열 일곱이나 여덟쯤 되었을까.
어쩌면 그보다 더 되었을 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아직 잔인한 운명이 깊은 상흔을 남기기 이전의, 어떤
소중한 믿음 따위를 간직한 얼굴이었다. 누렇게 색이 바래있는 걸 보면 꽤 오래 전 찍은 거였다. 처녀는
이제 그 아름다움을 어느 만큼은 잃어갈 나이겠구나, 생각하며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 때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그의 손등을 덮치더니 들고있던 돼지고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배를 제외하고 온통 검은,
꼬리 끝이 한 쪽으로 꺾인 수코양이 짓이었다. 대장으로 보이는 그 덩치 큰 놈은 노려보는 그의 눈길을
귀찮다는 듯이 무시해버리고는 유유히 고깃덩이를 물고 벽오동 나무 그늘로 가버렸다. 그러자 나머지
고양이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더니 고깃덩이를 삽시간에 먹어치웠다. 고양이들은 야생성을 완전히 회복
한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가 마당을 지나 다시 낡은 대문 밖으로 나가는 걸 지켜본 뒤에야 고
양이들은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런 소동이 났는데도 사내는 끝내 나와보지 않았다. 대신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그를 따라왔다. 그가
삐그덕대는 대문을 겨우 닫고 막 돌아서려는 데 발 밑에서 가녀린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연한 갈색
줄무늬와 초록빛 눈을 지닌 어린 고양이였다. 그는 고양이를 숙소로 데려와 우유 한 잔을 먹여 보냈다.
그 뒤로 고양이는 매일 정오가 되면 숙소로 찾아왔다. 대원들은 고양이를 몹시 귀여워했다. 특히 막내는
우유나 생선, 고기반찬 따위를 남겼다가 먹였고 초록빛 둥근 눈이 청동방울 같다면서 방울이란 이름까
지 지어줬다. 고양이는 차차 숙소에서 노는 시간이 길어졌고 마침내 헌 옷을 넣어 만든 상자에서 낮잠을
즐기다가 가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두어 달쯤 지났을까. 비바람이 몹시 불던 날 저녁이었다. 강렬한 벽오동 꽃 향은 바람이 불
때마다 사방으로 빠르게 퍼졌다. 절규하듯 퍼지는 꽃향기는 알 수 없는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대원들은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지만 아무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밤이 깊을 대로 깊어서야 이부자리 속에서 남몰
래 손장난을 하다가 하나 둘 쓸쓸히 잠들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십 년 전에 끝나버린 사랑은 망령과도
같이 살아나 그의 육체를 휘저어 놓았다. 십 년 전 유월, 저녁 여섯 시 삼 십 분에서 삼십 오 분 사이에
그가 잠깐 손을 놓은 동안 완전히 떠나버린 여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 입술,
그 눈동자, 그 손길의 생생한 느낌은 언제까지 남아 그를 붙들어 매놓고 있었다. 새벽녘이 되어 폭풍이
수그러들자 사내의 거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에 바람 지나는 소리를 잘못 들은 걸까. 아니면
사내는 매일 밤 그렇게 신음하며 혼자 앓고 있었던 걸까. 그는 한 번 쯤 다시 그 집에 들러봐야겠다고 생
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부터 일정이 빨라졌다. 바람은 잔잔하고 흙은 충분히 젖어 발굴작업을 진행하기에
는 드물게 좋은 조건이었다. 정오가 되면서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주거지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작업은 매우 세밀하게 진행되었다. 갑자기 공기 중에 노출된 유물이 파열되거나 변색되는 것을 막기 위
해 알코올과 방습제, 증류수 등을 준비해 놓았고 흙은 5센티미터 단위로 나누어 평삭했다. 토층의 변화
에 따라 파괴되기 전의 흙 상태도 자세히 기록됐다. 오후에는농경이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반달돌칼
과 돌보습, 한강 이남에선 드물게 발견되는 비파형청동검의 거푸집, 그리고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농경
무늬 청동의기가 출토되는 계가가 있었다. 이것은 당대의 농경수준과 계급사회의 출현을 연구하는 중대
한 유물들로 학계에 보고될 만한 것들이었다. 발굴단 전체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언덕 위에 많은
주거지가 발견되고 동쪽 경사면으로 무덤이 여러 구 출토되는 걸로 봐서 언덕 아래의, 계곡이 끝나는 지
점에 부채꼴로 펼쳐진 땅에 청동기 농경지 유적이 남아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된 이상 발굴지
역을 좀 더 넓게 설정하고 기간을 더 늘려 잡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그는 상부에 상황을 보고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매부리코를 위시한 업자들과 이 지역 개발을 주관하는 지방관료들이 벌떼처럼 몰려
왔다. 유적지를 함부로 밟고 다니며 유물 보기를 무슨 원수처럼 여기는 그들과 대원들간에 거친 말이 오
고갔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그는 사내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여자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는 무릎에서 잠든 고양이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밖으로 나
왔다. 자주색 승용차는 여전히 아그배나무 밑에 세워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유리창 안쪽을 들여다보
았다. 아무도 없었다. 조수석 시트 위로 여러 장의 CD와 책, 휴지, 음료수병 따위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
는 게 보였다. 그는 손잡이를 잡아당겨 보았다. 철컥 소리가 나더니 아무 저항 없이 문이 열렸다. 당황한
그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이 여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산길로 접어
들었다. 길 왼편으로는 흩어져 있는 고대인 무덤들이 달빛에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직접 흙을
드러내고 껴묻거리로 들어있던 토기와 구슬 따위를 수습했는데도 제법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열 세 살
무렵에 그는 공동묘지 근처의 마을에서 살았다. 저녁이면 산 그림자가 마을을 덮치듯 죽은 망령들이 되
살아나 산 자들을 덮칠 것 같은 두려움에 떨곤 했었다. 하지만 한낮의 묘지공원은 매우 아름다운 야생화
들로 가득했다. 여름날의 산나리, 패랭이, 원추리는 빛깔이 유난히 곱고 선명해서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
거들어 그렇다고 했다. 죽은 자의 영혼이 거들어 피어난 화려한 야생화들……. 외딴집의 마당에 서있던
벽오동 역시 사내의 영혼이 거들어 그토록 진하고 슬픈 향기를 뿜어냈던 걸까.
 그가 외딴집에 다시 찾아간 것은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연내에 최첨단 벤처단지 조성실
적을 기필코 달성하려는 지방공단 관계자들과 건설업자의 성화에 못 이겨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땡볕
발굴작업을 강행했다. 대원들이 한차례씩 병치레를 했고 인부들 역시 박한 임금과 힘든 노역에 걸핏하
면 하나 둘 떨어져 나가 완전한 발굴은 멀어져만 갔다. 일손이라면 병아리 손이라도 빌릴 참이었다. 그
나마 사내를 다시 생각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외딴 집 앞마당에는 풀들이 한껏 자라있었다. 무릎 위까지 올라온 풀들은 기울어진 문설주를, 서까래
를, 숫막새가 떨어져 나간 기와지붕을 삼켜버릴 듯 했다. 사랑채와 녹슨 수돗가 사이에 있는 벽오동 나
무 역시 한밤만큼 짙게 우거져 있었는데, 크고 넓적한 잎새 사이로 훨씬 수가 늘어난 고양이들이 기어오
르거나서로 엉키어 장난질하는 게 보였다. 도대체 저 놈들은 어디서 먹이를 구하는 걸까? 발굴단 숙소
부엌으로 숨어들거나 뒷마당 수돗가의 버려진 생선 내장 따위를 핥는 정도로는 어림없을 먹이 양인데.
벽오동 나무 그늘 여기저기에 수없이 많은 깃털이 흩어져 있는 게 보였다. 바다로 흘러드는 강의 하류와
드넓은 갯벌로 문득 계절이 바뀌었음을 알려주려는 듯 눈부신 깃털을 펼치며 찾아드는 철새들, 아마도
그 철새들이 수 십 마리에 달하는 무리를 먹여 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양이들이 요란스레 야옹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들어 두려움에 찬 눈길로 집안을 둘러보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꼭 닫힌 방문과 힘겹게 지붕을 버티고 있
는 나무기둥, 그리고 잠들어 버린 듯한 수도꼭지뿐이었다. 풀밭을 헤치며 그는 조심스레 마루로 다가갔
다. 마루 끝에는 여전히 주전자와 플라스틱 물잔, 희끗희끗 바랜 라면 봉지 따위가 나뒹굴고 있었다. 먼
지 자욱한 낡은 어망은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날이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늘게 숨죽이는 듯한 소리마
저 사라진 완벽한 고요가, 죽음이 아니라면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침묵이 온 집안을 채우고 있었다. 불
길한 예감이 그의 신경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그는 닫힌 띠살무늬 문의 둥근 쇠고리를 조심스레 잡아
당겼다. 순간 숨막힐 듯한 악취가 훅, 쏟아졌다.
 그리고는 어떻게 숙소까지 돌아왔는 지 기억에 없다. 대원 중 한 명이 깨진 무릎이며 풀줄기에 쓸린 종
아리에다 덕지덕지 머큐롬을 발라줬던 것만이 생각날 따름이다. 다음날 경찰이 다녀간 뒤 나이든 인부
들과 대원들이 사내의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워낙 부패가 심해 할 수 없이 집에 불을 질러버렸다. 한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아래 바짝 말라있던 나무기둥은 하늘을 덮칠 기세로 타올랐다. 시신 타는 냄새가
나고 무너져 내린 지붕에서 기왓장이 땅땅 터지는 소리가 났다. 확확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겁먹은 고양
이들은 목 울음소리를 쉬지 않고 내더니 어느 틈에 도망쳐 버렸다. 불길이 수그러들자 사람들은 준비해
온 물을 일제히 부었다. 마지막으로 까만 재가 아지랑이처럼 피워 올랐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맞서며
서 있었을 외딴 집의 존재는 그렇게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마을 노인 중 한 사람이 회한의 탄식을 두어
번 내뱉었다. 세상일이란 참, 그 짱짱하던 윤가네 집이 이렇게 끝장나는구먼.
 그는 외딴집이 서있던 곳을 먼발치로 바라보았다. 커다란 벽오동 나무만이 검은 실루엣으로 우뚝 서있
었다. 그 나무 아래 어딘가에 여자가 서 있을 게다. 한 때 그 공간에서 살았을 자신과 가족, 이른 아침 늘
어지게 하품을 해대던 수돗가, 양동이 물에 비치는 햇빛을 헤집고 손을 쑥 집어넣어 담궈 두었던 참외를
꺼내 먹던 오후, 띠살무늬 창호지 사이로 쇠부엉이 소리를 들으며 안나 까레니나 따위의 소설책에 열중
하던 겨울밤을 떠올리며. 어쩌면 사진기를 새로 산 뒤 포도 덩굴 속으로 들어가 까르르 웃어대며 사진
찍던 날을, 혹은 그 햇살과 포도 향을, 맞은 편에서 렌즈에 눈을 대고 서있는 그 어떤 사람을 떠올릴 지
도 모르지. 그는 여자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발길을 돌려 숙소로 되돌아갔다.
 
 밤이 깊도록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청동의기를 실사했다. 한동안 정신없이 일에 몰두했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제출해야 할 발굴 보고서였다. 그는 그 일을 제대로 해내고 싶었다. 어쩌면 학계에 새로운
실적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는 작업이라 더욱 세심한 신경이 쓰였다. 잠들어 있던 방울이가 갑자기 고개
를 번쩍 들더니 손톱을 날카롭게 세워 허공을 할퀴었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나서 스르륵 다시 눈을 감았다. 멧새 잡는 꿈이라도 꾼 걸까. 그는 고양이 머리 위에 놓인, 농경문 청동
의기 뒷면에 음각 된 새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목이 길고 몸이 뭉툭한 여러 마리의 오리들이 고개를
들어 한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대편 높은 나뭇가지에는 아주 볼품없는 새가 앉아있는데 안타깝
게도 꼬리와 한 쪽 다리는 깨어져 나간 것이었다. 어디서 날아온 새들일까. 무슨 뜻을 담고 있는 그림일
까. 따돌림이거나 질시, 또는 공동체 내 계급이나 순위다툼 따위를 상징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저 이지러진 새에 대한 다른 놈들의 응시는 무언가. 수 천년 세월동안 깊은 땅 속에서 갇혀있다 나온 새
들은 그에게 마치 어떤 비밀스러운 말을 건네려는 듯 주둥이를 벌리고 있었으나, 끝내 침묵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는데 전화벨이 크게 울렸다. 컴퓨터와 연결된 전선줄에 발이 걸려 지체하는 동
안에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울려댔다. 이토록 늦은 밤 시간, 그것도 휴일 저녁에 전화를 걸 사람이 누굴
까 짐작해보았지만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휴대전화로 걸려오지 않는 걸 보면 멀리 이국 땅으로 이주
해간 형이나 부모, 혹은 가까운 친구의 사사로운 전화는 아니었다. 흥청대는 경음악과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소리가 뒤엉킨 속에서 잘 돌아가지도 않는 혀로 고함을 질러대고 있는 것은 바로 매부리코 박이었
다. "염병할, 잘 들어." 박은 잔뜩 취해 있었다. "그깟 유물 때문에 공사 일정이 미뤄지면 매달 이자손실
만도 얼마나 되는 줄 아나?" 음악이 흐느적대는 재즈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참은 것만도 복장 터지는데
기간을 연장하겠다고 또 신청했다면서?" "사정은 압니다만 아무래도 고대 농경 흔적이……."박이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짓던 농사도 팽개치고 떠나는 마당에 그깟 흔적이 뭔 말라빠진 소리야? 최첨단 시설
이 들어설 거라구, 최, 최첨단 산업단지가. 거 노래 그만 부르고 조용히들 해." 격정적인 음악이 갑자기
멈췄다. "배지 부르니까 땅이나 뒤적이는 땅강아지 새끼들아, 돈이 어디서 나오는 지도 모르고……." "뭐
요? 너무 지나친 거 아닙니까?"그가 미간 주름을 깊게 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박
은 빨리 발굴을 끝내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책임 못 진다는 협박과 아주 더러운 욕을 잔뜩 퍼부
은 뒤 전화를 툭 끊었다. 그는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제는 무던하게 속을 삭
일 때가 된 것도 같은데 이런 따위의 협박을 받으면,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
 왜 그랬을까? 그는 발굴현장에서 일하게 된 까닭을 스스로에게 다시 물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는
금융회사에 다녔었다. 상부의 지시에 따라 하루종일 일하다보면 그의 창의력이란 휴일 오후 어디로 놀
러 갈까 고민하는 정도에만 발휘되었다. 그는 몹시 우울해져 버렸다. 어느 날부턴가 우울할 때면 서해안
의 패총발굴 현장이 떠올랐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 희경을 잃고,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로 아수라장이 된
도시를 떠나 발굴단장으로 있는 선배를 만나러 갔다가 머물게 된 곳이었다.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온 종일 삽질을 하다보면 그는 때때로 조개무덤 속으로 파고들어 묻혀 버리고픈 충동을 느끼곤 했다. 학
생과 노동자들의 주장이 그토록 불온하게 여겨질 줄 몰랐고, 경찰이 그토록 무자비하게 나올 줄 몰랐고,
도망치는 군중들 틈에서 잠시 손을 놓았던 여자가 그날 밤 뺑소니차에 치여 주검으로 발견될 줄은 꿈에
도 몰랐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기계로는 절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구덩이, 오로지
육체만을 필요로 하는 구덩이, 파도 파도 조개껍질만 나오는 구덩이는 결코 그를 묻어주지 않았다. 그렇
게 서너 달이 지나갔다. 어느 날부턴가 패총에서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인들이 먹고 버린 조개
껍질의 강한 알칼리성 때문에 거의 손상되지 않은 저울돌추, 뼈바늘과 낚시도구, 무문토기, 그리고 여러
호의 주거지가 발견됐다. 낡고 죽은 조개무덤으로부터 새롭고 싱싱한 문화가 발굴된다는 흥분이 심한
우울증으로부터 그를 구원했다.
 그 최초의 경험, 자신의 육체를 소진시킴으로써 절망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던 경험이 그를 다시 발굴현
장으로 불러들인 걸까. 하지만 이제 그는 대원들 틈에 섞여 정신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처지로부터 벗
어나 있었다. 그는 현장 상황을 파악하고, 지휘하고, 보고하고, 협상하고, 또 때론 업자들과 혹은 행정담
당자와 싸움질을 해야하는 것이다.
 발굴작업에 대한 회의가 밀려들었다. 어차피 완전한 발굴이 아닌 바에야 땅속에 조용히 살아 숨쉬도록
유물을 놔두었다가 먼 훗날, 어느 좋은 날에 찬연한 고대유적으로 되살아나게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
다. 그러나 현실은 유적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요즈음 유적이란, 고집스런 고고학자의 발굴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개발업자들의 불도저에 의해서 더 많이 세상에 드러난다. 그것도 경외와 축복이 아니라
'재수 옴 붙었다'는 더러운 멸시와 함께. 한 마디로 유적지 발견은 돈커녕, 사업을 망치는 보증수표일 뿐
이다. 그러고 보면 매부리코만 탓할 일도 아니었다. 문화재관리청의 보상이란 게 고작 소주 몇 잔 푼이
전부인 판에 개발에 목숨을 건 업자들이 문화유적에 경외를 표할 수 있겠는가.
 창문을 열고 그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마을 입구의 하나 남은 불빛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혹냄댁의
가겟집이었다. 귀 뒤로 콩알만한 혹을 달고 태어나 그렇게 불려왔다는 혹냄댁은 이틀에 한 번 씩 숙소에
들러 청소와 음식을 해 주고 있는데 일을 시원스럽게 잘 하는 데다 인정도 많아 대원들이 모두 좋아한
다. 그는 불이 켜진 가겟집으로 향했다. 술이라도 한 잔 해야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을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가끔씩 가창오리 떼가 울어댔다. 가겟집이 가까워지자 흥얼대
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가게문을 열고 들어서니 혹냄댁은 개다리소반 위에 풋
고추와 된장, 말린 가자미 구이를 안주 삼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소주 반병이 비워져 있었다.
 "아주머니, 어쩐 일이세요?"
 "단장님두, 일은 무슨 일유. 하도 적적해 마셨지. 으쩌다 말 한마디 건넬 사람도 없는 동네가 되었대유?"
 간이 의자를 끌어다 맞은편에 앉는 그에게 혹냄댁이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이웃들이 생각나서 그러세요?"
 "생각이 다 뭐여유. 잠은 안 오고 사람덜 얼굴이 막 디밀쳐 겹치는 기 미치겠시유. 지가 가겟방을 오래
하다보니 마을 사람덜 부엌에 숟가락 이 멫인지꺼정 죄 알았잖유. 애고 으른이고 죄 우리집엘 들르니
까."
 "누가 제일 생각나세요?"
 "질이고 뭐고 읍슈우. 그저 예산댁도 생각나구, 이 동네서 길쌈을 질 잘하던 여편네였는데, 거도 생각나
고 또 아들이 많아서 늘상 손주를 엎고 댕기다가 허리가 꼬부라진 진태할머니도 생각나구, 또 뭐시냐,
요 앞 핵교 선생님도 생각나구. 그 선상님은 참 누구던지 보며는 깍듯이 인사하고, 동네 코흘리개들이
인사하면 한결같이 답을 주시곤 했지유. 멩호구나, 그래, 순철이, 그래 명숙이, 해면서. 지 하고는 외당
숙 지간이었던 아저씨두 생각키고. 나 어렸을 때만도 부자로 살었는데 아들이 사업한다고 전답 다 팔아
묵고 늘그막에는 방앗간을 했시유. 거기서쌀 많이 갖다 먹었지유. 그 집 막내 아들이 오토바이 타고 댕
기다가 난중에 읍내서 아가씨를 델꼬와 살았는데, 새댁이 애를 났어유. 애기가 아주 이뻤시유. 몽실몽실
헌게. 개눈박이 송가는 요 앞지비서 살았는시유. 동니서 아매 고기를 질 잘 잡았을 걸유? 또 장구쟁이 칠
복이 영감. 칠복이 영감님은유, 키가 크고 늘상 술이 곤드레가 되서 다녔지만 장구치구 타령 뽑는 것만
은 기맥혔지유. 그 영감탱이가 저녁마다 찾아와서는 술 먹자 해서 지도 그 영감한테 술 배웠지유. 암튼
사람덜 생각이 똑 몰개 밀어닥치득기 하더란 게유. 도통 잠이 않와 이러구 앉았는 거유. 저놈의 오리 떼
소리 땜에 맘이 더 싱숭생숭헌가 봐유. 지놈들도 서운헌 게 있넌지."
 "오리 떼가 유난한 것 같지요?"
 "유난할 뿐유? 아매도 예년보담 열 배는 더 왔는가뷰. 어디서들 그리 날아오는 겐지. 지가 어려선유, 오
리 떼가 많이 오믄 풍년든다구 좋아했슈. 당산에 솟대 걸어놓고 동네잔치허고 했지유. 근디 웬 풍년이래
유, 짓던 농사 다 내팽개치고 이사 가 뿌렀는디."
 그는 묵묵히 술잔을 넘겼다. 혹냄댁은 그 뒤에도 한참동안 동네 사람들이나 전해내려오는 옛이야기 따
위에 대해 들뜬 표정으로 끝없이 늘어놓았다. 그 중에 천둥새라는 이 고장 전설이 흥미를 끌었다. 날 때
부터 병신이었던 새끼오리가 시난고난 끝에 까마득한 우주를 날아가 인간세상의 바람, 가뭄에는 비가
내리게 하고 홍수에는 떠내려가지 않기를 비는 마음을 하늘에 전하는 천둥새가 되었다던가. 문득 청동
의기 속의 이그러진 새가 바로 그 천둥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숙소
로 발길을 돌렸다.
 마을길 양편의 버려진 논밭에는 다시 찾아온 괭이밥과 쐐기풀, 명아주, 쑥부쟁이가 어둠 속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생각에 잠기어 마을길을 올랐다. 수 천년 전, 이 산야에 터를 잡고 농경을 시작했을
고대인들. 푸른 청동 의기에 농경 그림을, 그 뒷면에는 하늘과 땅과 물 속을 사는 바다오리를 그려 넣음
으로서 풍요를 기대했던 사람들. 가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철새를 보며 천둥새 전설을 만들어낸 사
람들. 그들은 농경으로 얻은 놀라운 수확물에 얼마나 찬탄했을까. 더 많은 양식이 언젠가 자신들을, 혹
은 그 자손들을 풍요와 행복 속에 살아가게 해 줄 거라고 믿었을까. 그랬겠지. 남아도는 양식이 폭풍과
도 같이 돌변해 평화로운 공동체를 파괴하고, 지배자와 노예를, 전쟁과 기아를 낳게 된다는 걸 상상인들
했겠는가. 까마득한 우주로 날아가 인간의 소망을 하늘에 전했다는 천둥새. 그 오리의 후예인 가창오리
떼는 어쩌자고 이 어두운 밤 난데없이 울어대는 걸까. 최첨단 시설물에게 서식지를 빼앗기게 된다는 걸
이미 아는 것일까. 익어 가는 풀씨들이 발 밑에서 사르락 댔다. 다음 해 봄이면 시멘트와 콜타르 속에 갇
혀 버릴 씨앗들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는 안산의 짙은 윤곽선 너머, 마을 사람들이 이주해 간 동
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괴된 어둠이 네온 빛에 부옇게 들떠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