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창문으로 스민 달빛이 운전대에 얼굴을 묻고 있는 여자를 비추었다. 규칙적으로 감지되는
미세한 등의 흔들림으로 봐서 흐느끼는 것은 아닌 듯 했다. 그는 비로소 안심했다. 사실 낯선 여자
의 눈물이란 그가 감당하고픈 게 아니었다. 그는 조금 피곤했고, 술기운과 함께 깊은 잠 속으로 빠
져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여자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불편한 차안에서
자게 한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그 보다도 여자가 만약 외딴집에 살았던 사내와 아는 사이라
면 건네줘야 할 유품이 있었다. 사내는 죽기 전에 어딘 가로 떠날 생각이었는지 문지방 바로 앞에
가방을 놔두고 있었다. 집을 불사르기 전에 가방을 미리 빼놓았는데 며칠 지나 안을 살펴보니, 허
름한 옷가지와 두어 권의 시집, 낡은 잡기장, 그리고 맨 아래에 여자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잡기
장을 들춰보았지만 신원을 확인할 만한 것은 마땅히 없었고 부치지 않은 편지가 한 통 끼워져 있
었다. 수신인 이름 끝 자가 '남'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런 저런 핑계로 편지를 부치지 못
하고 있다가 얼마 전에야 읍내로 나가는 대원에게 맡겼었다. 여자가 처음 마당에 들어섰을 때 곧
바로 사내를 기억하지 못한 건 바로 그 '남'자가 들어가는 수신인의 이름 때문이었다.
 그가 말 걸기를 망설이는 사이 여자가 상체를 일으켰다. 이마에서부터 희고 갸름한 턱 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 탓인지 어떤 비극적 운명, 슬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었다. 서
른 안팎으로 보이는 여자의 눈은 약간 젖어 있었다.
 그는 이불이 놓인 방 귀퉁이에, 여자는 책상 앞에 앉았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은 여자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놓고 있었는데, 사내의 죽음과 집을 태우게 된 과정을 듣는 동안 손가락으로 원피
스 자락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울지는 않았다. 이야기를 다 끝내고 나자 그녀와 대면
하고 있기가 좀 거북했다. 이불을 펴고 자리에 누웠더니 그것 역시 불편했다. 다른 방은 유물로 가
득 한데다 너무 차고 눅눅해서 부득이한 일이었다. 어느새 밤이면 불을 때야할 정도로 가을이 깊
어 있었다. 여자는 그가 넘겨준 가방에서 잡기장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가끔씩 가창오리 떼 울음
소리가 어둠을 찢으며 날카롭게 들려왔다. 그러나 밤의 균열은 한 순간에 회복되어 갈수록 어둠의
깊이를 더해갔다. 그는 잠들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무렵부턴가 여자의 잡기장 넘기는 소리를 흘
려들으며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새벽녘에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여자가 떠나는
가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자줏빛 자동차는 여전히 아그배나무 아래 서 있었
다. 본네트가 열려있었고 여자가 무언가 열심히 만져보고 있었다.
 "고장이 났어요."
 여자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여자보다 더욱 난처해졌다. 자동차 정비에 관해서 그가 아
는 지식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조치라고는 정비센터에 전화를 거는 정도였
다. 그러나 읍내에 유일하게 있는 정비센터 주인은 연휴라서 기술자가 없다고 했다. 그는 언제든
기술자가 돌아오면 연락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오후가 다 지나도록 정비센터에서는 아무런 연락
이 없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그는 작은 방의 유물을 마루로 옮기고 나무장작을 팼다. 숙소 역
시 오래된 집이어서 안 방 이외에는 여전히 군불을 때게끔 아궁이가 남아있었다. 전신에 땀이 나
도록 열심히 도끼를 휘둘렀지만 매 번 빗나가곤 했다. 봉당에 쪼그리고 앉았던 여자가 손으로 입
을 가리며 처음으로 웃었다. 그는 동작을 멈추고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여자가 말했다.
 "오빠는 장작을 아주 잘 팼어요."
 "오빠라면……"
 죽은 사내를 뜻하느냐고 묻는 그에게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게 자른 장작을 차곡차곡 쌓아 놓으면 참 보기 좋았어요. 그 장작에 눈이 쌓이면 얼마나 소담
스러웠던지. 그래서 아버지한테 늘 칭찬을 들었지요."
 "그랬군요. 오누이간이었나 봅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
 "제가 열 일곱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오빠를 데려왔
어요. 친 오누이처럼 지내라고 하더군요. 오빠는 남쪽 항구도시에서 살았는데 부모님이 교통사고
로 돌아가셔서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가 봐요. 저 보다 두 살이 많았지요. 이런 경우, 그러니까…
… 자라면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오빠가 되었다면……."
 "받아들일 수 없었겠군요. 그런가요?"
 그가 넘겨짚으며 말했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멀리 바다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가창오리 떼가
저물어 가는 수평선 위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시월 중순 이후 계속해서 불어난 오리 떼는 이제 수
천 마리에까지 이르렀다. 마을 사람들이 미처 거둬들이지 못하고 떠나버린 들녘의 낱알들이 그토
록 많은 오리 떼를 불러모으는 모양이었다. 가창오리 떼는 구름처럼 겹쳐졌다 흩어지기를 반복하
며 삘간 노을 속에서 유려한 군무를 펼쳤다. 그 때 굉음을 내는 비행기가 날아와 새들을 쫓아냈다.
 "어머, 저건 진짜 비행긴가요?"
 "웬걸요. 근처 공군비행장에서 보내는 모형비행깁니다. 새들이 비행기 엔진 속으로 들어가면서
내는 엔진 사고를 막기 위해서라더군요."
 "새들도 자살을 하나요?"
 매우 놀란 표정으로 물어오는 여자 얼굴에서 언뜻 사진 속의 앳된 모습이 엿보였다.
 "그럴 리가 있나요. 프로펠라에 자기도 모르게 빨려 들어간다지요, 아마."
 대답하고 나서 그는 희경을 생각했다. 희경이 역시 강한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갔다. 그 해 팔
월, 그 엄청난 주장과 폭력과 아우성이 햇빛 속에서 소용돌이 치던 날에. 여자가 다시 한마디 했
다.
"사람들은 왜 새를 쫓으려 드나 몰라, 공군 비행기를 없앨 생각은 않고."
 서툰 도끼질로 얻어낸 몇 개의 나무 조각을 모아 그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연기가 어찌나 심하
던지 지켜보던 여자가 달려와서 마른 솔가지를 넣고 풀무질을 했다. 쇠부엉이가 울고 묻어둔 감자
가 익을 무렵, 아궁이 앞에서 불을 쬐던 여자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녀에게는 오빠 둘이 있었는데 그녀가 태어자던 해에 강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뒤늦게
낳은 그녀에게 아버지는 남자동생을 보라고 정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어머니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녀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아버지는 고아가 된 친구의 아들을 데려와 아
들 삼아 키우겠노라고 했다. 아버지는 민수오빠를 학교에 보내 고등학교를 마치게 한 뒤 농사일을
가르치면서 무척 정을 주었다. 시를 쓰는 농부가 되는 게 꿈이었던 오빠는 부지런하고 마음이 깊
어 늘 아버지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적어도 그녀와 뒷산 두렁바위에서 만나는 걸 들키기 전까
지는.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이 기껏 남의 집 농사나 지으면서 살아갈 놈하
고 붙어사는 꼴은 죽어도 못 본다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밖에서 아버지 말을 듣고있던 사내는
말없이 집을 나갔다. 그리고는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낡은 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채로 나간 사내를 찾아 그녀 역시 무작정 집을 나섰다. 하지만 어디서
도 사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몸져누워 있었고, 이듬해 봄
에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단 둘이 짐을 싸서 마을을 떠나던 새벽, 온 마을은 자욱한 안개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가 아닌들 우리 모녀를 배웅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만은……"
여자는 장작을 올려놓으며 힘없이 말했다. 그리고 잠시 뒤엔 심하게 어깨를 떨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그녀는 죽기 전의 사내를 봤느냐고 물었다.
"어땠어요? 예전에는 건장한 체격에 혈색이 좋았는데… 어댔어요?"
그는 언젠가 발정기가 되어 며칠 째 돌아오지 않는 방울이를 찾으러 외딴 집 쪽으로 갔다가 먼발
치에서 본 사내를 떠올렸다. 등이 굽고 검은 수염으로 얼굴이 가려진, 손가락 세 개가 잘려나간,
끝내 마을 사람들조차 알아보지 못하도록 망가져 버린 육체를.
"늘 오빠와 함께 있는 기분이었어요. 몰아내려 하면 할수록 오빠에 대한 기억은 더욱 더 끈질기게
매달렸지요. 어느 날,골목길을 막 꺾어 돌자마자 뒤돌아 서서 소리쳤어요. 꺼져버려, 제발! 가로
등 아래 주저앉아 한참을 울다가 발 밑에서 웅크리고 있는 제 그림자를 발견했어요. 그 뒤로 오빠
를 그림자라고 생각했지요. 누구든 제 그림자를 떨구어내려고 애쓰지는 않잖아요?"
 여자가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바다처럼 젖어있는 여자의 눈동자에는 기이한
힘이 있었다. 바라다보는 자의 마음을 되비치는,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힘
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세파 속에서도 쉬 사라지지 않는 선천적인 것일 수도 있고, 슬픈 사랑을 앓
아버린 결과일 수도 있었다. 그는 여자의 눈동자에 희경을 던졌다.
 그날 밤, 낯설지만 낯설지만은 않은 여자와 어떻게 잠자리를 할 수 있었는지그로서도 알 수 없
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수면에 이르는 길을 잘 모르더라도 잠들 수 있는 것과 같았다. 그는 오랜만
에 희경이 꿈을 꾸었다. 젊은이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였는데 희경은 쉬지 않고 걷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희경은 옆구리에서 하얀 새털을 뽑아 공중에 뿌렸다. 깃털에 쓰인 어떤 글자에 놀란 사람
들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어떤 젊은이들은 깃털을 짓밟고, 침 뱉고, 하수구에 처박아버렸다. 그는
희경을 쫓아가려 발버둥쳤지만, 희경은 앞으로만 앞으로만 걸어가 차츰 멀어져갔다. 그는 희경을
불러댔고, 목이 터져라 불러댔고, 또 불러댔다.마로니에 공원과 맥도날드와 소극장과 오락실과
카페와 노래방 앞을 지난 희경이 갑자기 몸을 돌려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 순간 그녀의 몸
이 검은 맨홀로 빨려들더니 결국 그의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다음날 오전에 그는 깍지벌레들이 알을 낳는 갈대밭을 지나 바닷가로 산책을 갔다. 죽은 가창오
리 수천 마리가 수면 위에 까맣게 떠있었다. 급파된 수의과학 검역원과 환경연구원들이 죽은 새들
의 사인을 밝히려고 내장을 들춰보고 있었다. 물컹대는 검붉은 내장을 하얀 핀셋이 마구 휘저어
댔다. 그들은 장과 심장 파열이 있을 뿐 떼죽음의 원인을 알기 힘들다면서 정밀검사용으로 쓸 죽
은 새들을 비닐봉지에 담았다. 옆에 서있던 혹냄댁은 연신 천벌인가 보네, 천벌인가 봐, 하며 공포
에 찬 눈길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숙소로 돌아오니 자동차는 이미 고쳐져 있었다. 아주 간단한
고장이었던지 정비공이 핀잔을 주더라고 했다. 떠날 준비를 마친 여자가 마지막 인사를 했다.
 
 오후에 현장으로 올라가 흙을 만지면서 그는 평소처럼 세월을 거두어 내는 기분을 느꼈다. 모든
것을 덮어버린 흙이었다. 고대인들이 불을 지피고, 곡식을 찧고, 사냥을 나가고, 밤이면 골아 떨어
진 아이들을 옆으로 밀쳐내고 숨죽이며 사랑을 나누었을 집자리. 그 위로 갈대 지붕이 무너져 내
리고, 햇빛과 바람과 별빛이 지나고, 흙이 쌓이고, 쑥이 돋고, 나무가 자랐으리라. 그리고 수 천년
동안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한 때 그곳에서 있었던 모든 비밀들을.
 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왔다. 날개의 옅은 그림자가 주거지 바닥 여기저기에서 하늘댔다. 수 십억
년 전부터 지구상에 살고있다는 잠자리는 공룡이 소멸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듯이 인류의 탄
생과 번영의 끝을 지켜보려는 걸까. 잠자리는 트롤을 쥔 그의 손등을 스치며 공중으로 날아올랐
다. 날개의 부드럽고도 날카로운 접촉에 그는 짧은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희열의 순간이란 눈을
감았다 뜨는 찰라 사라지고 다시 지루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현실이 이어진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잠자리는 멀어져 갔다. 가을 저녁을 향해 휘발되어 가는 시간의 그물 망을 유유히 헤쳐가
며. 멀리 해안도로를 달려오는 대원들의 자동차가 보였다.
 
 비가 내리는 성탄절 전야에 발굴조사단은 해단식을 한 뒤 읍내로 갔다. 상점바깥에 내 놓은 인조
잣나무의 하얀 솜이 비에 젖어 축축 늘어져 있었다. 원치 않는 현실의 빗방울이 비현실의 눈 위로
떨어지는 광경은 그에게 인간이란 진실보다는 진실을 흉내내기에 더 익숙한 존재일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취기가 돌자 대원들은 매부리코에 대한 욕설을 쏟아냈다. 그들은 매부리코가
권력층을 끌어들이고 상부를 매수해 발굴을 조기종결 시켰다고 믿고 있었다. 내막이야 알 수 없지
만 십이월에 접어들어 내려진 상부의 최종 결정은 그런 의혹을 사게 했다. 그가 수 차례에 걸쳐 간
곡하게 요청했던 걸 감안해 농경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지역에 포크레인으로 몇 번 시굴하
도록 허락한다는 것뿐이었다. 형식적이고 거친 시굴의 결과는 뻔한 거였다. 성탄절 전야인데도 거
리의 사람들 표정은 밝지 않아 보였다. 쓸쓸한 남자들이 뒷골목을 서성이는 한 밤에 단원들은 섬
과 육지를 잇는 다리를 건너 완전히 흩어졌다.
그는 새벽이 내리는 한 겨울의 바닷가 마을을, 새와 사람과 고대인들의 유적마저 상실한 불임의
땅을, 아득한 고독의 수평선을 한참 동안 서서 바라보았다.
(출처: [작가] 2001년 가을호)
 
김재영 1966년 경기도 여주 출생. 2000년 「내일을 여는 작가」1회 신인 상으로 등단. 작품으로
'치어들의 꿈', '미조(迷鳥), '또다른 계절'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