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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이름없이 살다간 이들의 꿈, 절망 되살릴 수 있다면
-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임 철 우(소설가)
내 고향 마을 한 가운데 우물이 있었다. 유독 물이 귀한 섬 마을 사람들
에겐 하나 뿐인 그 우물이야말로 생명수였다.
어린 시절, 까치발을 하고 들여다보면 너무 깊어서 밑도 끝도 없이 마냥
까맣게 뚫려 있기만 하던 커다란 구멍. 우물 안쪽은 푸른 이끼풀과 축축한
냉기로 항상 적막했는데, 한겨울에도 하얀 김이 폴폴 솟아오르던 그 둥근
구멍은 내겐 마치 땅 밑 저편 또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비밀의 문 같기만
했다.
전기가 없어 밤이면 온 세상이 칠흑 어둠이던 시절, 아침은 언제나 그 우
물가에서 시작되었다. 동이 트기가 무섭게, 물동이를 머리에 인 아낙들에
서 주전자를 든 계집아이들까지, 온 동네 여자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텀벙 텀버덩, 물 위에 두레박 떨어뜨리는 소리. 좍좍, 동이에 물 붓는 소
리. 발자국 소리. 누군가의 걸쭉한 우스개 소리에 폭죽처럼 왁자하니 터지
는 웃음소리…. 집에서 우물까지는 가까웠으므로, 나는 날마다 곤한 새벽
잠에 취한 채 이불 속에서 그 온갖 소리들을 아련히 듣곤 했었다.
어째서인가. 이 순간, 내 귓가엔 불현듯 그들의 음성이며 웃음소리, 온갖
소리들이 우박 쏟아지듯 한바탕 일제히 되살아나고 있다. 알 수 없어라.
그 목소리들은 이렇듯 생생한데, 그 사람들, 그 시간들은 모두 어디로 가
버렸을까.
조부는 탁월한 이야기꾼이셨다. 간간이 대사 부분을 성우처럼 직접 모사
하기도 하면서 흥미진진하게 펼쳐나갈 때면 누구든 그 이야기 속에 흠뻑
빠져들었다. 어린 나는 곧잘 조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이따금 얼굴 위로
떨어지는 침방울을 주먹으로 훔쳐내면서, 긴 턱수염이 꼬리연처럼 눈앞에
서 흔들리는 것을 올려다보곤 했었다.
하지만 난 은혜 갚은 지네, 각시가 된 우렁이 따위 옛이야기보다도 어른
들끼리의 은밀한 이야기를 훨씬 많이 엿듣곤 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터에다 신문은 커녕 라디오조차 없던 섬이어서, 어른들의 화제는 대
개 전쟁 때의 일화들이었다.
적을 가장하고 신새벽에 읍내로 쏟아져 들어왔다는 경찰부대. 한밤중에
끌려나갔다가 며칠 후 굴비 두름처럼 팔 다리를 묶인 채 온몸이 퉁퉁 불어
한꺼번에 해안으로 떠밀리어 온 사람들. 인민군한테 육지의 포구까지 끌
려갔다가 겨우 돌아온 조부와 어머니.
산발한 머리채를 해파리처럼 혹은 부챗살처럼 수면에 한껏 펼쳐놓은 채
바다 멀리 엎드려 떠다니는 여자의 시신. 누구는 고구마 밭 거름더미 속
구덩이에 숨고, 누구는 누구를 밀고하고, 누구는 또 어떻게 끔찍한 죽임을
당하고…. 그리고 누구누구는 영영 행방을 알 수가 없고.
하나같이 흉흉하고 무서운 그 이야기들은 두려움과 기묘한 호기심에 온
몸을 떨며 내가 처음으로 엿보았던 어른들의 세계, 어른들의 역사였다.
그때마다 내 눈 앞 활동사진 속에서 낯익은 이웃사람들은 더러 쫓기는
토끼가 되기도 하고, 교활한 여우, 잔인한 늑대, 비겁한 뱀이 되기도 했다.
때문에 아침이면 나는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그들의 천연스런 얼굴을 새삼
스레 꼼꼼히 쳐다보곤 했다.
밤과 낮, 빛과 어둠. 어른들의 그 얼굴은 내겐 종내 풀리지 않는 수수께
끼였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이젠 이 세상에 없다. 이름 없는 그들 저마
다의 생의 연혁 역시 영영 수수께끼로 남겨져 있을 뿐.
사춘기, 열여섯 살 때던가. 늦겨울답지 않게 하늘 맑고 햇살 고운 토요
일. 책가방을 내려놓고 마루 끝에 걸터앉아 문득 담장 너머로 시선을 돌리
던 나는 아, 탄성을 터뜨렸다. 저만치 먼 산등성이 한쪽이 곱디고운 다홍
색으로 선연히 물들어 있었다.
거긴 양지쪽이라 봄도 빨리 왔을 테지. 돌연 가슴 터질 듯한 감격에 떨면
서 나는 벌떡 일어나 대문으로 달려 나갔다. “그래, 진달래 밭이야! 엄청나
게 넓은 면적이 온통 진달래꽃으로 뒤덮여 있는 거야.”
그 높은 산까지는 꽤 먼 길이었다. 두 시간 남짓, 풍선처럼 기대와 그리
움에 부풀어 들판을 건너고 야산을 몇 개 더 지난 다음 산골짜기를 허겁지
겁 걸어 올랐다. 이윽고 그 다홍색으로 뒤덮인 등성이에 다다랐을 때, 나
는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폐허. 아아, 폐허.
언제 거기 굉장한 산불이 났던 것인가. 사방이 온통 검은 재로 덮여 있는
죽음의 대지 위, 하나같이 밑동까지 숯덩이처럼 까맣게 타 죽은 채로 푸석
한 다홍색 이파리들을 달고 빽빽이 늘어서 있는 수천 수만 그루 소나무들.
그 푸석한 잿더미 한 가운데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나는 끝내 커다랗게 소
리내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도 억울하고 서러웠던가. 대체 그
선연한 진달래꽃들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여러 해 전, 변산반도 부근 이름 모를 마을 어귀. 숨을 고를 겸 잠시 차를
세운 그 길가에 외딴 농가 한 채가 빈집으로 버려져 있었다. 무너져 내리
는 기와지붕이며 좁은 마당 안엔 잡초 무성하고, 쥐 떼가 빈 돼지 울에서
몰려 나왔다. 빚에 쫓기어 한밤중 온 식구가 도망을 치기라도 했는지, 집
안엔 세간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풀 더미에 묻힌 장독대의 항아리들, 부엌엔 솥단지, 숟가락 몇, 간장병
그리고 주인 잃은 신발 일가족. 나는 발꿈치에 닳은 흔적이 아직 뚜렷한
마루 끝에 앉아, 반쯤 떨어져나간 세살문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벽
지에 남겨진 삐뚤삐뚤한 크레파스 낙서, 그리고 그 위쪽 선반에 반듯하게
걸린 가족사진 액자.
가난하지만 행복한 웃음을 띤 일가족의 시간들, 변색된 그 액자 속 이름
모를 얼굴들을 나는 오래도록 올려다보았다. 불현 그 빈집 여기저기서 그
들의 목소리, 웃음소리, 발소리가 수런수런 들려오고, 밥 짓는 냄새, 된장
국 끓이는 냄새가 일제히 되살아나는 듯한 착각에 난 자주 두리번거렸다.
이렇게 숱한 시간과 추억과 그리움을 여기 남겨둔 채로 그들은 왜 돌아오
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그들의 얼굴을 나는 팔십년 광주, 그 뜨거운 거리
에서 다시 만났다. 분노와 공포, 슬픔과 고통으로 뒤덮인 그들의 얼굴. 죽
음이 돌멩이처럼 흔하던 그 짐승의 시간 속에서, 오히려 온 천지에 빛살보
다 눈부시게 환히 피어나던 생명, 생명들….
어느 시인이 그날 거기서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고 노래했듯이, 나는 진
정한 인간의 빛나는 얼굴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날의 무수한 눈망울들, 슬
픔과 분노, 노래와 함성 그리고 눈물겨운 그리움은 이제 이 망각과 환멸의
시대, 저 초라한 모퉁이 어디쯤을 절룩거리며 떠나가고 있는 것인가.
“모든 묘비석 뒤에는 소설 한 편씩이 묻혀 있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나
는 사람들의 얼굴을 훔쳐보기를 좋아한다.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혹은 시
골 완행버스에서 마주치는 얼굴들 모두가 내겐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다.
그 수수께끼의 답을 풀고 싶은 불온한 욕망에 사로잡혀 나는 늘 몸이 뒤틀
린다. 그들의 눈빛과 잔주름 속에 고여 있는 저마다의 고유한 시간들을 나
는 탐욕스레 훔쳐보고, 사랑하고, 또 소유하고 싶다.
한때는 존재했으나 지금은 흐린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시간들. 그
시간 속의 목소리, 웃음, 빛깔, 체취, 움직임들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
다면! 시간의 흐름을 거침없이 거슬러 올라, 오래 전 지상에 머물렀다 떠
난 무수한 인간의 꿈과 절망, 사랑과 고통에 생명을 불어넣어 우리들의 눈
앞에 되살아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그들과 다시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날 수 있기를, 나는 꿈꾼다. 그 가당찮은 망상이, 혹은 끝내 버릴 수 없
는 소망이 내게 소설을 쓰게 한다.
<연보>
▲1954년 전남 완도 출생 ▲1981년 전남대 영문과 졸업ㆍ서울신문 신춘문
예에 단편 ‘개도둑’ 당선 등단 ▲1995년~현재 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 ▲
소설집 ‘아버지의 땅’ ‘그리운 남쪽’ ‘달빛 밟기’ ‘불임기’ ‘물그림자’ 장편 ‘
붉은 산, 흰 새’ ‘그 섬에 가고 싶다’ ‘황금 동전의 비밀’ ‘등대 아래서 휘파
람’ 등 ▲한국일보문학상(1985) 이상문학상(1988) 등 수상
한신대 캠퍼스에서 임철우씨를 만났다. 가을 햇볕이 그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것은 이토록 눈부신 세상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이 될 수 있는
지 고발해온 임씨의 작업을 떠올리게 했다./수원=홍인기기자
1985년 광주에서. 임철우씨는 1982년 5월 “내가 5ㆍ18 광주를 쓰겠다”고
결심, 단편 ‘동행’ ‘불임기’로부터 전5권의 장편 ‘봄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통해 광주를 증언했다.
한국일보 2002년 10월 9일 수록-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30. 임철우
처음 올린 날: 2002년 11월 1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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