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제58회
하미*에서

이 승 철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증오의 흔적이 사라지고,
사랑만이 남아있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일은
이제 당신과 나의 몫이 아닌가.
베트남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베트남 시인, 탄타오의 말

그날 파도들이 저 멀리 수평선을 타고 새하얀 물갈퀴를 세우며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푸르딩딩
한 잉크빛 하미 바다, 은빛 모래알을 끊임없이 핥아대며 출렁이던 하미 앞바다, 그 푸르른 야자수 잎
새들…. 그날 나는 맹세도 서른번씩 하면서 누구라도 붙잡고 끊임없이 절하며, 고개 숙이고 싶었다.
작열하던 하미의 태양 아래 나뒹굴던 그날의 원혼들과 아비규환의 그 외침들에게도.
그날 아침 하미 마을의 인민들은 따이한 군인들의 말을 듣고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집결하였다. 그들
이 모두 모이자, 평상시 그토록 다정했던 남쥬틴 군인들이 느닷없이 돌변해 엠씩스틴을 미친 듯이
겨누며 방아쇠를 끝없이 당겼다 한다. 미제 엠씩스틴이 미친 듯이 탄피를 토해 내자, 마을 주민들은
삽시간에 핏빛에 젖어 대지의 들녘에서 잡목처럼, 혹은 짐승처럼 널브러져 나뒹굴었다. 아오자이를
곱게 차려 입은 처녀들뿐만이 아니었다. 세 살 짜리 혹은 일곱 살 짜리 코흘리개 아이들도 있었고,
젖먹이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채 쓰러져 간 어미들도 여럿 있었다. 그리고 환갑 진갑 다 넘은 칠순의
할배, 할매들도 또한 있었다. 그 쭈글쭈글한 잔주름에 파인 아우성소리가 눈 흡뜬 채 하늘을 응시하
다 이내 고요히 멎어버렸다. 아, 서글서글한 눈매에 가득 맺히던 떼죽음의 울부짖음들. 그날 키 큰
야자수들만이 침묵으로 뒤척이며 저 멀리 하미의 수평선을 끝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날 우리는 추모비에 붉은 글씨로 새겨진 일백삽십육명의 이름자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우리
또한 남쥬틴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화들짝 놀랐다. 끝내 헛헛한 마음뿐이었다. 땡볕 아래 서걱이
는 마른 풀잎들을 멀리 하고, 우리는 베트남 인민위원회 사람들을 한참 동안 기다렸다. 그들과 함께
어깨동무하며 하미 앞바다를 저 멀리 바라보았다. 헛헛하여 속절없이 못짬뻔짬*만을 외쳤다. 하지만
내 머리속은 온통 하미마을의 그 오솔길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아늑한 수평선 물결에 일렁이던
물새의 날개짓, 그리고 게의 발자국까지 저러이 사랑스럽고* 아름답던 하미였다.
*하미: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이 주둔했던 베트남 중부의 마을. 1968년 1월 26일 이 지역에서 따이
한(한국) 남쥬틴(남조선) 군대에 의해 민간인 136명이 학살당했다. 지금 이 학살 현장에는 희생자들
의 이름이 적힌 추모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나는 지난 2001년 10월 8일부터 13일까지 작가 방현석,
김정명 목사 등 KNCC 인권위원회 관계자들과 함께 하미를 비롯한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지
역 현장 여러 곳을 참회의 마음으로 답사한 적이 있다.
*탄타오 시인의「밀라이의 아이들」에서 인용.
*못짬뻔짬: '원샷'을 뜻하는 베트남 말.

이승철: 시인, 작가회의 자유실천위 부위원장, 시집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 외

처음 올린 날: 2002년 10월 24일(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