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미니 쵸코파이
이명랑
 

 
1
미니 초코파이의 포장을 벗긴다. 1999년 2월 06일. 유통 기한 12개월. 오리온. 1박스 12개 입. 낱개 포장.
미니 초코파이를 먹는다. 혀끝에 달콤한 초코렛이 묻어 나온다. 입 안 가득 초코렛향이 퍼진다. 입 안 가
득 퍼지는 초코렛향을 꼭꼭 씹는다. 곧 부서지는 향기.
세상은 아주 무서워. 그건 고래 같은 거야. 백경에 나오는 그 흰 고래말야. 유령처럼 끈질기게 쫓아오고
또 쫓아가야 해. 암, 그렇고 말고. 그래서 그놈의 등짝에다 죽창을 꽂고 그놈이 죽어가며 요동칠 때마다
갈라지는 파도를 타는 거야. 그 높은 파도를 말이야. 그가 어른처럼 말하면, 나는 그의 품속에 안겨 내
손바닥 밑에서 커지고 있는 그의 것이 고래일까, 생각하곤 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면, 그는
죽어 가는 고래 등짝에 죽창을 꽂은 승리자가 큰 파도에 흔들리는 것처럼 몸을 떨며 방바닥의 일부처럼
늘 깔려 있는 이불 위로 하얀 정액을 뿌려 대곤 했다.
그는 세상이라는 고래의 등짝에 정말로 죽창을 꽂아 버릴지도 몰라. 축 풀어진 그의 다리가 내 허벅지에
올려지고 쉴새없이 떠들던 그의 입이 허공을 향해 벌어지면, 그의 배 밑에 깔린 난 상상하곤 했다. 지금
난 뗏목이야. 개줄처럼 그의 허리을 졸라 메고 있는 허리띠를 풀어 죽창처럼 휘두르며 고래를 잡으러 가
는 거지. 그럼 난 내 등에 매달린 그를 안심시키고 인디언처럼 용감하게 죽창을 휘두르며 고래를 향해
전진, 전진, 전진을 하는 거야. 그럼 그 거대한 흰 고래가 줄행랑을 치고 나는 계속 뒤쫓아가지. 그런데,
꼭 거기서가 문제야. 약삭빠른 그 놈은 도망을 치다가도 옆으로 돌아서는 꼭 우리 방으로 뛰어들어와 방
문턱을 훌쩍 넘어가 버리는 거야.
그럼 난 죽창을 휘두르며 뒤쫓아가다가도 늘 거기에서 그놈을 놓쳐 버리곤 했다. 방문턱을 넘는다는 건
상상 속에서도 금지된 일이기 때문이다. 문턱을 넘어서면 그곳엔 진짜 무서운 세상이라는 고래가 있기
때문이다. 또 나는 한번도 저 문턱을 넘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미니 초코파이의 포장을 벗긴다.
나는 식탁이랄 것도 없는 밥상 위에 떨어진, 초코렛이 조금 묻어 있는 빵부스러기를 줍는다. 손가락에
묻는 초코렛. 끈적끈적한 느낌. 이런 걸 촉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순간 나는 멍해진다. 미니 초코
파이에 묻어 있는 초코렛 따위도 마지막까지 매달리며 끈질기게 살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 난 매
달려야 했어. 우리가 숨어 있던 방, 넘어서는 안될 선, 그 방의 문턱을 그가 넘어서려 할 때 울며 매달려
야 했던 거야. 그날, 우리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은 어쩜 그렇게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을까?
미니 초코파이 정도야 하나 더 먹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이젠 저 문턱을 넘어 들어올 사람은 없는 걸. 나
는, 정말? 이라고 되묻는다. 그래, 이제 저 문턱을 넘어 올 사람은 없는 거야. 그날 뗏목을 만들어 타고
흰 고래를 잡으러 지중해의 바다까지 갔다가 쫓기던 고래가 문턱만 넘어가지 않았어도 그는 떠나지 않
았을 텐데. 늘 해 오던 상상이었는데, 왜 그날은 유독 그렇게도 그 고래를 쫓아가고 싶었는지.
 
2
 "세상이 뭔지 알아? 세상은 신문이야."
그와 난 우리들의 방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를 위해 눈까지 말라버린 멸치의 배를 가르고 그를 위
해 파란 福자가 써진 수저를 챙겼다. 그의 손가락에 들린 수저와 그의 입술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세상,
신문 속에 있다는 그의 세상은 우걱우걱 소리를 내며 하얀 밥알들을 씹어 삼켰다. 스텐레스 수저 속의
밥, 그의 입술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세상의 부스러기들. 나는 갑자기 배가 아팠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스텐레스 수저를 들고, 왜? 라고 물었다.
"배가 아파."
내가 말했다. 곧 후회했지만 이미 내 입 속에서 튀어 나가 그 말의 파편 몇 개가 그의 귓속에 자리를 잡
아 버린 후였다.
"지금, 밥상 앞에서 배가 아프다고 말하는 거야? 내 밥이 아직 이렇게 남았는데, 배가 아프다고 말한 거
야?"
황급히, 나는 다시 밥상 앞에 가 앉았다. 그는 파란 福자가 써진 스텐레스 수저를 다시 입 속에 밀어 넣
었다. 그가 밥공기를 싹싹 비울 때까지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하얀 밥알을 보며 나는 웃고 있었다.
배가 아픈 건 이유가 될 수 없어. 난 그가 원하는 곳에 있어야만해. 그는, 아직 밥을 다 먹지 않았잖아.
 
3
나의 아버지는 나의 엄마를 사랑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차를 대하듯 나의 엄마를 대하셨다. 아
버지의 타이탄 트럭은 아버지의 발이 브레이크를 밟으면 곧 멈춰서고 아버지의 발이 액셀을 밟으면 앞
으로 나아갔다. 아버지의 손이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으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꺾으면 왼쪽으로.
아버지의 트럭은 내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온전히 아버지의 것이었다. 아침이면 나의 엄마는 아버지의
손과 발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아버지의 차를 타고 어딘가로 함께 떠나셨다. 아버지의 트럭이 시장 밖
으로 사라지면 여름의 건조한 먼지가 문 앞에서 흩어지곤 했다. 그런 날 비가 내린 기억은 없다. 그래서
일까? 아버지의 타이탄 트럭은 늘 뿌연 먼지와 함께 기억 속에 나타난다.
아버지의 차. 밤이면 늘 진흙을 묻히고 돌아오던 아버지의 트럭은 지친 적이 없다. 그것은 늘 지치지 않
고 진흙을 묻히고 돌아왔다. 아버지의 트럭이 문 앞에 서면 지친 얼굴로 트럭에서 내린 나의 엄마와 나
는 이빨을 닦듯 아버지의 차를 닦았다. 밤이면 아버지의 트럭에서 하얀 비누 거품들이 까맣게 변해서 흘
러내리는 걸 보곤 했다. 엄마와 나는 아버지의 트럭에서 흘러내린 검은 물을 바케쓰에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4
그가 밖으로 나가고 나면, 나는 우리들의 방에 남아 그가 남기고 간 신문을 뒤적였다. 거기 세상이 있어.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가 흘리고 간 세상이 있나 몰래 신문을 뒤져보곤 했다. 그가 말한 세상은 꺼
끌꺼끌한 촉감으로 손끝에 닿았다. 그러면 난, 그가 말한 세상이 어디 있나 보려고 신문을 뒤적이다가도
곧 다시 그를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이 뭔지 알아? 세상은 신문이야. "
우리들의 방에 앉아 그는 늘 그렇게 소리쳤다. 그렇게 소리치다 그가, 보던 신문을 집어던지고 그 위에
나를 내동댕이치면 나는 그 신문 위에서 그를 받아들이곤 했다. 그럴 때면 기분이 좋았다. 내 눈에는 보
이지 않는, 신문 속에 있다는 세상이 내 등에 닿는 꺼끌꺼끌한 느낌이 나를 기분 좋게 했다. 그가 심하게
요동치며 나를 내리누를 때면 나는 좋아서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좀 더 쎄게 나를 내리눌러 주었
으면. 그래서 신문지 위에 검은 글자들이 등 뒤에 문신처럼 박히게 되면 신문지 속의 글자들이, 그 속의
세상이 모두 내 것이 아니겠어?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호호호 웃음이 나오곤 했다. 그렇지만 단
한번도 소리내어 웃어 본 적은 없다. 섹스 도중에 웃다니. 그건 그야말로 무식한 짓이다. 그는 무식한 여
자를 싫어한다. 섹스 도중에 신음 소리를 내는 여자도 그는 용서하지 못한다. 섹스 도중에 신음 소리를
내는 건 배우지 못한 여자의 짓이다. 그리고 그는 그 생각에 믿음을 갖고 있다. 어쩌다 나의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오는 날이면 그는 용서하지 않았다. 그의 늠름한 주먹이 얼굴로 날아오곤
했다. 물론 그의 주먹질이 싫은 건 아니다. 그의 손은 주먹을 꼭 쥐면 파란 힘줄이 울퉁불퉁 튀어나오는
게 여간 늠름한 게 아니어서 나는 그 파란 힘줄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라도 맞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그
런 날이면, 그의 늠름한 주먹이 남긴 시퍼런 멍자국은 참을 수가 있었지만 그가, 나를 무식한 여자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5
엄마는 내 머리를 빗겨 주시길 좋아했다. 엄마의 빗이 내 머리카락을 헤치고 들어와 머리카락 속에 엉켜
있는 머리카락들을 빗어 내리면 머리카락들이 풀어지는 소리가 났다. 엉켜 있던 머리카락들이 풀어지는
소리는 가끔 옷 벗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옷을 벗고 싶었다. 엄마의 빗질에 풀어지는 머리카
락들처럼 나도 그렇게 옷을 훌훌 벗어 버리고 싶었다. 엄마의 볼에 엄마의 가슴에 맨살을 부벼보고도 싶
었다.
어느 날인가 나는 엄마의 손에 들려 있던 내 엄마의 빗을 뺏어 들었다. 엄마의 빗으로 내 엄마의 머리를
빗겨 드리고 싶었다. 나는 내 엄마가 머리를 빗는 걸 본 적이 없다. 엄마는 늘 빗질이 필요 없는 짧은 머
리에 파마를 하고 계셨다. 엄마의 머리를 빗겨 드리고 싶었지만 엄마는 내게서 빗을 뺏어 들고 다시 내
머리를 빗기 시작하셨다. 왜 엄마는 머리를 빗지 않으셨던 걸까? 아니, 엄마는 왜 내가 그분의 머리를 빗
게 놔두지 않으셨을까?
나의 아버지는 엄마를 사랑하셨고 그 분 곁에는 늘 온전히 그 분 것인 타이탄 트럭과 부르릉 소리를 내
며 흩어지는 뿌연 먼지와 엄마가 있었다.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아침이면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트럭 속
에 앉아 있던 엄마의 머리는 그렇게 늘 엉켜 있었다.
 
6
"그대로 놔둬. 방이 환해지는 거, 뭔가가 이 방으로 들어오는 거 모두 귀찮아졌어."
유진은 자꾸만 블라인드를 걷어올리려고 한다. 유진이 블라인드를 걷어올리려고 했을 때 유진 곁에선
어쩌면 늘 햇빛 냄새가 났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은 방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이다. 그
리고 또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 왜 너는 그리 쉽게 갖을 수 있었니?
유진과 난 초등학교 때부터 단짝 친구였다. 나무 책상에 금을 그어 놓고 어쩌다 그 금을 넘기라도 할 때
면 공책이며 옷이며 마구잡이로 칼로 잘라 대던 내 남자 짝에게서 나를 지켜 준 것도, 아버지의 트럭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고 떠나간 문 앞에 늘 혼자 앉아 있던 나를 동네 계집아이들의 고무줄 놀이에 끼워
준 것도 유진이었다. 그 후로, 나는 늘상 유진 곁을 맴돌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유진의 책상에 도시락을 가지고 둘러앉는 아이들 속에 내가 끼게 되기를, 혹시라도 늑
장을 부리다가 유진 곁에 못 앉게 되는 건 아닐까 조바심을 내며 4교시 수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책
상 밑으로 도시락 주머니를 챙겨 들고 있던 나는, 늘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던 유진, 그런 유진이 내 친구
라는 사실에 뿌듯해 했다. 유진 곁에만 있으면 나는 행복했다. 유진이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나는 늘
그녀를 쫓아 다녔다.
"블라인드는 걷지마."
햇빛, 아기, 유진, 그리고 그, 모두 방 바깥에서 온 사람들. 잠시 들렀다 갈 사람들.
유진은 고개를 끄덕인다.
유진의 고개 짓은 무얼 알았다는 뜻일까?
나는 유진의 고개 짓에 왜 가슴 한켠이 싸하게 저려 오는지, 그런 내가 못마땅하다. 아직도 유진이, 그
가, 걷어 주기 전에는 감히 내 방 안의 블라인드조차 걷어올리지 못하는 그런 내가 못마땅하다.
"너, 아직도 이런 것만 먹고 있는 거야? 세상에 남자는 많아. 신문을 봐. 요즘 남자들이 어떤지......"
방바닥에 널려 있는 미니 초코파이를 들고 유진은 말한다. 신문을 봐. 유진에게서 햇빛 냄새가 난다. 방
바깥에서 들어온 여자에게서는 저런 냄새가 나는구나. 유진이 쉴새없이 떠드는 동안 나는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햇빛 냄새를 맡아본다. 그에게서도 이런 냄새가 났었다. 우리가 함께 사랑 - 나는 그걸 사랑
이라고 생각했다 - 을 나누고 난 후에 그의 등에 송글송글 맺혀 있던 땀방울에서 배어 나오던 냄새. 그
작은 땀방울들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내 손바닥으로 스며드는 그의 땀방울에 나는 전율했고, 손바닥
으로 스며드는 그의 땀방울들처럼 그의 몸 속에 내가, 내 몸 속에 그가 스며들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
다. 나는 그의 땀방울에서 배어 나오던 그 냄새 속에서 햇빛 냄새를 맡곤 했다. 그것들이 만들어 주는 휘
황한 빛무리 속에, 그 빛 한가운데 내가 안겨 있는 거라고.
"내 얘기 듣는 거니? 여기, 이 집, 이제 그만 버려. 그 사람 이제 돌아오지 않아. 지금까지 그렇게 기다렸
는데 네 아버지란 사람은 또 어땠니? 이제 그만해."
유진은 여기에 와서 왜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 걸까? 유진은 왜 화를 내는 걸까? 신문을 보지 않는 내가,
떠났던 이들, 아무도 돌아온 적 없는 이 집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내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있
는 지 잘 알지 못하는 내가 못마땅한 걸까?
나는 그녀에게서 나는 햇빛 냄새가 싫어졌다.
방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은 그렇게 한바탕 소리를 지르다 나가 버린다.
 
7
아버지가 밥을 드실 때면 엄마는 아버지의 밥공기 가득 수북히 담겨 있는 하얀 밥알을 세고 계셨다. 파
란 福자가 써진 아버지의 수저 속에 들어 있던 한 톨의 밥알까지도 세고 계셨던 게 틀림없다. 아버지와
엄마가 나란히 수저를 들고 함께 밥을 드신 적은 없다. 아버지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파란 福자와 하얀
밥알들을 세며 밥을 드시는 아버지의 밥상 앞에 앉아 있던 엄마. 나는 파란 福자가 써진 수저를 갖고 싶
었다. 나의 아버지와 내 엄마가 앉아 있는 밥상 앞에 나도 가 앉고 싶었지만 엄마는 내게 파란 福자가 써
진 수저도 아버지의 방에서 저녁을 먹는 것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차를 닦고 난 후 검게 변해 버린 비눗물을 바케쓰에 담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뒤돌아
보는 법 없이 곧장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셨다. 방문 앞에 남겨진 나는 방문 앞에 놓여진 그분들의 신
발을 쳐다보곤 했다. 그런 밤이면 아버지의 방에서 노란 전구 불빛이 흘러 나왔다. 하얀 창호지를 뚫고
나온 전구 불빛이 아버지와 엄마의 신발을 비췄다. 노란 전구 불빛이 신발을 비추면 신발 속에서는 행복
이라는 단어가 꼼지락거리며 피어오르는 듯했다. 노란 전구 불빛이 가 머무는 그 곁에 내 신발도 같이
놓아두고 싶었다.나는 갖고 싶었다. 나의 아버지와 내 엄마의 신발 사이에 놓여 있는 내 신발. 나란히 놓
인 세 켤레의 신발 위에서 노란 전구 불빛이 꾸벅꾸벅 졸다가 잠에 빠져드는 모습, 그런 저녁의 기억을.

 
8
간호원이 들고 나온 컵은 투명한 비닐 컵이었다. 간호원이 내게 건네준 투명한 비닐 컵을 들고 화장실까
지 뻗어 있는 복도를 걸어갔다. 병원 복도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병원 복도에 앉아 저마다 무
슨 병명 한 가지씩 얻어 가지고 가려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등뒤로 쫓아왔다.
일은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간호원이 준 비닐 컵이 너무 하얗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하얀
비누 거품들이 아버지의 차에서 까맣게 변해 가던 기억을 들춰야 했다. 투명한 비닐 컵에 노란 오줌 방
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곧 비닐 컵은 노랗게 변했다.
노란 오줌이 든 비닐 컵을 들고 복도에 앉아 있는 사람들 앞을 지나쳤다. 얼굴을 돌리거나 고개를 떨구
는 사람들. 남 앞에 내 오줌을 보이는 것은 생각 밖으로 유쾌한 일이었다. 남자들이 노상 방뇨를 하는 이
유를 알 것도 같았다. 리어커 뒤 또는 전봇대 뒤에 착 달라붙어 오줌을 누고 있던 남자들은 전봇대를 타
고 내려가는 자신의 오줌 방울을 내려다 보면서 혹시 지나가는 젊은 아가씨나 늙은 할머니가 자신의 물
건을 보게 되지는 않나 그런 기대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개중에는 바지를 통째로 내리고 서서 오줌을
누는 남자들도 있었다. 처음 그런 남자들을 보았을 땐 얼마나 얼굴이 달아올랐었는지. 그런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지는 걸 보고 싶은 건지도. 그래서 전봇대에다 세차가 오줌
방울을 뿌려 대는 건지도. 그리곤 보란 듯이 자신의 물건을 털털털 털고는 꼭 이 쪽으로 돌아서서 바지
쟈크를 올리는 건지도 모른다.
얼굴을 찡그리거나, 보았으면서도 보지 않은 척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의 얼굴은 너무 우스웠다. 간호원
옷을 입은 아가씨들이 쭉 앉아 있는 접수계 앞을 지나 내 몸에서 나온 노란 오줌 방울들이 들어 있는 비
닐 컵을 들고 진찰실로 들어갈 땐 정말이지 큰 소리로 웃고 싶었다.
그가 방에 들어오면 나는 늘 다소곳이 앉아 고개를 떨구고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앉아 있었다. 그는 다
소곳이 앉아 있는 여자를 좋아했다. 그가 우리들의 방으로 돌아오면 변기 속에 떨어지는 나의 오줌 방울
들이 변기 속의 물과 부딪치며 내는 소리에도 나는 숨을 죽였다. 그는 그런 소리는 용서하지 않는다. 그
리고 그는 그것에 확신을 갖고 있다.
내 앞에서 고개를 떨구는 사람들. 나의 오줌 방울들이 변기 속의 물과 부딪치며 내는 소리에도 숨을 죽
이는 나, 그런 나에게도 고개를 떨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왠지 나를 기분 좋게 했다.
의사의 말은 간단했다. 나는 또 아이를 갖지 못했다.
 
9
아침이면 아버지는 아버지의 트럭에 생선을 가득 싣고 시장 밖으로 트럭을 몰았다. 아버지의 트럭에 실
린 생선들은 다들 하나같이 풀린 눈을 한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린 나는 아버지의 트럭을 올려다보
며 퀭한 눈의 생선들이 내게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일까, 하고 하루종일 생각해 보기도 했다.
사람들은 30년 만에 돌아온 무더위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트럭이 집 문 앞에서 부르릉 소리를 내며 시동
을 걸고 있으면 온 동네가 뿌연 안개에 쌓이곤 하던 여름 어느 날부터인가 엄마는 아버지의 트럭에 오를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의 트럭 바퀴가 노란 흙 위에 바퀴 자국을 새기는 소리가 들리면 엄마는 이불 위
에 일어나 앉아 그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없는 방에서 엄마는 혼자 이불 속에 등을 구부리고 누워 계셨다. 아버지의 방, 아버지의 이불
속에 내 엄마의 팔을 베고 누워 있으면 무더운 여름이 우리 집을 감싸고 있는 그 무엇들을 다 녹여 줄 것
도 같았지만 엄마는 아버지가 없는 방에서도 내 몫을 주지 않으셨다.
"나가 놀아라."
아버지의 이불 속에 누운 엄마는 등을 돌린 채로 방문 밖에 있는 내게 말하곤 하셨다. 그럼 난, 마루에
앉아 있다 밖으로 나가는 시늉을 하느라 대문을 쾅 하고 닫곤 했지만 곧 다시 엄마가 있는 방문 앞으로
돌아오곤 했다. 엄마의 빗을 손에 들고 머리를 빗으면서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하루 종일 마루에 앉
아 있기도 했다.
그 여름은 너무 더웠다. 그 여름, 비가 왔었더라면 엄마도 한번쯤은 아버지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지붕 처마를 타고 내려오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마루에 앉아 내가 엄마의 엉클어진 머리를 빗어 주며 같
이 아버지를 기다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10
곧 배가 불러오겠지. 동그랗게 불러오는 내 배를 보고 그는 뭐라고 할까? 그도 좋아할 거야. 늘 내 작은
젖가슴에 불만이었잖아. 이제 아이를 낳게 되면 내 가슴은 밀가루 반죽처럼 하얗게 부풀어 오를 거야.
그럼 그 하얀 젖으로 아이의 조그만 입 속을 꽉 채우고, 아이의 입 속을 타고 내려가 아이의 배꼽 밑에서
모락모락 김을 내며 내 작은 아가를 키워 줄 거야. 그럼 난, 풍만한 가슴을 가진 진짜 여자가 되는 걸.
철교를 지나는 전철 창 밖으로 한강이 내려다 보였다. 아이를 꿈꾸며 내려다보는 강의 물빛은 달랐다.
검은 강물 속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작은 물살들 속에서 나는 내 안의 자궁을 보았다. 어두컴컴
한 자궁 속에서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헤매이고 있을 내 작은 아기를 보았다. 얼마나 많이 헤엄쳐 다
니고 있을까? 팔 다리도 없는 몸으로 어미의 몸 속에 자리를 잡겠다고 내 작은 아기는 어두컴컴한 자궁
속을 혼자 헤매이고 있는 것이다. 내게 닿기 위해 혼자서 많은 시간을 견디고 있을 그 작은 아기를 이렇
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거야. 썩어 가는 한강의 물 속에서 허부적 거리며 아직 이 강은 살아 있어요,
살아 있어요, 외쳐 대는 것만 같은 작은 물살들처럼 내 작은 아가는 여자가 되어 보지 못하고 죽어 가고
있는 내 어두컴컴한 자궁 속에서 아직 엄마는 살아 있어요, 살아 있어요, 외쳐대고 있을 거야.
나는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그와 결혼을 하고 혼인신고를 하고 그와 함께 우리 둘이서 손을 꼭 잡고 아이의 출
생신고를 하러 갈 것이다.
그래, 그럴 거야.
 
11
아버지는 아버지의 트럭에 엄마의 관을 싣고 아주 오랫동안 차에 시동을 걸으셨다. 아버지의 트럭 뒤에
서 있던 나는, 아버지의 트럭 뒤로 뿌옇게 이는 먼지를 바라보며 어쩌면 아버지는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아버지의 트럭은 엄마의 관을 싣고 떠났다.
"아버지의 방엔 들어가지 마라."
아버지의 이불 속에서 등을 돌린 채로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내 엄마가 마지막 남긴 말.
아버지의 트럭이 내가 가본 적 없는 어디에선가 바퀴 자국을 새기고 있을 동안 나는 마루에 앉아 있었
다. 엄마의 빗으로 머리를 빗어 보기도 했다. 아버지의 방엔 아무도 없었다. 마루에 앉아 아버지의 방문
을 열었다. 그 곳엔 엄마가 누워 있던 이불이 깔려 있었다. 엄마의 베개 위에 꼬불거리는 몇 가닥의 머리
카락들이 묻어 있었다. 엄마의 굽은 머리카락들을 주워 와 빗어 내리고 싶었다. 늘 엄마의 뒷머리 속에
서 엉켜 있던 머리카락들을 올곧게 빗어 펴드리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방엔 들어가지 마라."
곧 다시 나는 아버지의 방문을 닫았다. 아버지의 방은 내가 들어갈 수 없는 곳. 나는 내 엄마가 내게 그
어주신 마루라는 금 안에 앉아 아버지의 트럭이 돌아오나 문 밖을 내다보았다.

12
그는 신문을 집어던졌다. 신문 위에 나를 집어던졌다. 그와 난 우리들의 방에 있었다. 나는 그가 던진 신
문 위에 있었다.
"세상은 신문이야."
신문 위의 글자들이 등에 와 박혔다. 신문지 속의 글자들은 하나같이 날이 시퍼렇게 서 있었다. 위에서
그가 내리누를 때마다 시퍼렇게 날이 선 글자들이 등에 와 박혔다. 이제 신문지 속의 글자들이, 그 속에
있는 세상이 모두 내 것이 되려나봐. 등이 따가웠다. 그 순간 아주 조그만 아이가 떠올랐다. 내게 닿으려
고 어두컴컴한 자궁 속을 헤메이고 있을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신문지 위에 글자들이 내 등을 할퀴고 지나가 내 작은 아가의 등에 꺼끌꺼끌한 검은 글자들을 새기게 될
지도 몰라. 그래서 아이가 생기지 않고 있었나봐. 그래, 아기는 아직 신문지 위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검은 잉크 자국이 자기 입술을 검붉게 물들이는 게 싫은 거야. 나는 아이를 흰 고래의 등에 태워 보냈다.
아이와 아이를 태운 흰 고래는 아주 멀리 헤엄쳐갔고 햇빛에 반짝이고 있는 지중해로 나아갔다. 잔잔한
수면 위에서 아이와 흰 고래는 말할 수 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나는 방긋거리는 아이의 앞 이빨이 너무
하얗고 이뻐 아이가 그 하얀 이빨로 내 볼을 깨물어 주었으면 싶었다.
"세상은 신문이야. 신문."
거친 숨을 토하며 그가 온 몸을 흔들어댔다. 그 순간, 그의 입 속에서 쏟아져 나온 거친 숨결이 아이와
아이를 태운 흰 고래와 햇빛에 반짝하고 빛나던 지중해 파란 바다까지 모두 함께 방문턱으로 쫓아내 버
렸다.
갑자기 아이를 잃고 당황한 나는 아이를 태우고 방문턱을 훌쩍 뛰어 넘어가 버린 흰 고래를 뒤쫓아갔다.
그 때였다. 배 위에 있던 그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것은.
"지금 날 밀어낸거야? 그 잘난 몸으로?"
그는 화를 냈다. 왜 화를 내는 걸까?내 작은 아가가 아빠하고, 그 조그만 입술로 아빠하고, 아직 그렇게
불러 주지 않았기 때문일거야.
"아기를 갖을 거예요. 당신 아기를 말예요."
그의 주먹이 날아왔다. 파란 힘줄이 울퉁불퉁한 그의 늠름한 주먹이. 나는 타이탄 트럭을 몰고 다니던
아버지의 팔목에서 솟아 나오던 굵은 힘줄같이 늠름한 그의 주먹이 좋아 일부러라도 맞고 싶었는데......
아직, 아빠하고 그 다정한 말을 들어보지 못한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우리의 방, 그 문턱을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말을 해야해.
언젠간 토실토실 솜털이 뽀얀 햇살들이 이 방 안에 들어와 이제 곧 잠자는 우리 아가의 눈꺼풀 위에, 당
신과 내가 사랑을 나누던 그 땀방울들 위에 노란 빛무리들을 가득 실어 올 거라고.
나는, 아직, 말을 하지 못했잖아.
 
13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트럭에 실려 나를 내려다보던 퀭한 눈의 생선들과 함께, 머리를 빗
지 않는 엄마와 함께 떠나간 아버지. 뿌연 연기를 내뿜는 트럭 위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던 아버지. 처음
으로 나를 바라봐 주셨다.
"나는 내 자식을 원했다."
"다신 안그럴께요. 딱 한번만 그랬어요. 엄마 베개 위에 머리카락들이 너무 많아서.....다신 아버지 방에
들어가지 않을게요."
처음 아버지의 눈과 마주쳤을 때 나는 움츠러들었다. 아버지의 방엔 들어가지 말라던 엄마의 말을 어기
고 아버지의 방에 들어갔던 내게 많이 화가 나신 거라고 나는 그렇게 자꾸 변명을 했지만 아버지는 트럭
의 시동을 걸었다.
"나는 아이를 갖을 수가 없었단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하려고 하는 말이 무엇인지 그 말뜻을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어 트럭 위에 올라 앉
아있던 아버지의 얼굴만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의 트럭이 시장 밖을 벗어나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어린 나는 텅 빈 집에 남아 아버지가 남기고 간
수수께끼 같은 말을 입 속에 넣고 되새김질했다. 하루......이틀...... 아버지의 방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와 시름하며 아버지를 기다렸다. 또 하루...... 이틀.......
 
14
"아기라고? 아기? 넌 자궁이 없어."
"아직 자라지 않은 것 뿐이래요."
"자라지 않았다고? 네 나이가 몇 인데 아직도 자라지 않았다는 거야?
"곧 자랄 거예요. 의사도 그랬어요. 언젠가는 자랄 거라고 말예요."
"곧 자랄 거라고?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고 하면 다 말인 줄 알아? 언제 자랄지도 모르는 자궁도 자궁
이라고 그걸 믿고 기다리라는 거야? 난 우리집 장손이야. 네가 내 아들을 낳아줄 수 있어? 나는, 이 놈
저 놈 아무한테나 다리를 쫙쫙 벌리는 년이 아니라 내 자식 낳아줄 여자가 필요하다구."
"곧 자란다고 했어요. 의사도 그렇게 말했다니까요."
"의사? 의사가 뭐랬다고? 남들은 한 달에 한번씩 다 하는 생리를 너는 왜 일년이 넘도록 한 번도 안하는
데? 내가 병신인줄 알아? 언제까지 너한테 속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 했냐구?"
"아직 자궁이 크지 않아서 그런 거래요. 이제 조금만 있으면 커질 거예요. 그럼 남들처럼 생리도 할 수
있을 거예요."
"남들처럼? 남들처럼 생리를 할거라구? 생리 좋아하네. 너 하는 짓이 하도 이상해서 나도 다 알아봤어.
네가 다닌다는 산부인과 그거 서울 산부인과지? 의사 말로는 네 자궁은 언제 자랄지 아무도 모른다는
대? 아니, 네 자궁은 자궁 구실도 못하는 거라던대? 스물 두 살이 넘도록 생리 한 번 안해본 여자, 여덟
살 아홉 살 계집애 자궁만한 자궁도 자궁이라고 속에 넣고 있는 여자, 그게 바로 너야."
 
15
나는 엄마의 빗을 품고, 내 엄마의 관을 싣고서 뿌연 먼지를 흩뿌리며 사라진 아버지의 트럭을 찾아 나
섰다. 그러나 여름은 우리 집을 감싸고 있던 그 무엇도 녹여 주지 않았다. 그 여름의 무더운 열기 속을
헤매며 엄마의 관을 싣고 떠난 아버지의 트럭을 찾아 나섰지만 아버지를 찾아 나선 길은 여름 공기 속으
로 하얗게 증발해 버렸다.
그 여름, 빈 집을 기웃거리며 안을 살피던 시장 사람들.
"지 새끼가 아니라고 해도 그렇지 어린것을 저렇게 두고 떠나야?"
"혼자라도 이 악물고 살아야한다. 알았지?"
"아줌마랑 같이 살래?"
세상에는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소리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16
그가 우리의 방, 그 문턱을 넘어 서려고 했을 때, 순간 나는 늘 놓쳐 버리곤 했던 내 상상 속의 그 흰 고
래를 보았다. 한번도 내 것이 되어 본 적 없는 그 흰 고래를. 아침이면 온전히 아버지의 것인 아버지의
트럭 안에 몹시도 지친 눈으로 앉아 있던 엄마. 엄마를 싣고 떠난 아버지. 아버지가 남긴 뿌연 먼지 뒤에
혼자 남겨져 있던 나.
"나는 내 자식을 원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매캐한 먼지 속에는 늘 어디론가 내가 뒤쫓아 갈 수 없는 곳으로 달아나 버리던 그
흰 고래가 있었다.
"아버지의 방엔 들어가지 마라."
나는 빗을 든 채로 방문 밖에 앉아 아버지의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 엄마의 베개 위에 흩트려져 있
던 몇 가닥의 굽은 머리카락들을 빗어 드리고 싶었다.
"아버지의 방엔 들어가지 마라."
엄마의 베개 위에 흩트려져 있던 굽은 머리카락들이 말했다. 나는 서둘러 아버지의 방문을 닫았다. 그래
도 아버지의 트럭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트럭, 네 개의 바퀴들이 까만 발자국을 새기며 달려갔던
길을 바라보며 서 있으면 뿌연 먼지들이 나타났다가는 증발해 버리곤 했다.
그가 우리의 방, 그 문턱을 넘어서고 있을 때, 엄마의 관을 싣고 떠나 버린 아버지의 트럭이, 기다려도
내겐 오지 않은 작은 아기가 보였다. 늘 방문턱을 넘어 도망가 버리던 그 흰 고래가.
지금......쫓아 가야해. 저 흰 고래를......
나는 방을 뛰쳐나갔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아침이면 골목 가득 시동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를 내뿜고 사라졌다 저녁이면 한
두 명의 남자들을 태우고 돌아오던 그의 흰 차는 보이지 않았다.
고물상 골목 리어카 뒤에, 아마 거기 서 있을지도 몰라. 나는 리어카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그
는 거기 없었다.
현대 슈퍼 앞 거기 파라솔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 사람 늘 거기서 담배를 사오잖아. 그
래, 그 사람 가지 않아. 우리 아기가 태어나면 그때 결혼하자고, 결혼해서 우리 둘이 죽을 때까지 함께
살 거라고 그 사람 그렇게 말했었잖아.
나는 현대 슈퍼에 가 보았다. 그는 거기 없었다.
내 고래는 방문턱을 넘어 또 어디로 달아나 버린 걸까?
 
17
미니 초코파이를 먹는다. 아직 손가락이 생기지 않은 작은 아기를 먹는다. 작은 아가의 꼬물거리는 발가
락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내 꼭꼭 씹는다. 삼켜지지 않는다. 나는 이제 미니 초코파이 하나도 삼키지 못
하게 되려나 보다. 언젠가 허름한 산부인과 한 켠에서 누군가 내게 고개를 숙이게 해주었던 아이, 그 작
은 아이는 없다. 이제 아무도 내게 고개를 숙이지 않겠지.
미니 초코파이의 포장을 또 한 개 벗긴다. 밥상 위에 떨어진, 초코렛이 조금 묻어 있는 빵부수러기를 줍
는다. 손가락에 묻는 초코렛. 순간 나는 멍해진다. 미니 초코파이에 붙어 있는 초코렛따위도 마지막까지
매달리며 끈질기게 살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직 자라지 않은 내 속의 자궁. 언제 자랄지도 그런 날이
올 건지도 확신할 수 없는 불임의 자궁. 그런데도 너도 아직은 살아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니? 생
기지도 않았을 손가락으로 발가락으로 꼬물대며 내게 말 걸어 오던 그 작은 아가는, 아직, 그렇게, 살아
있다고 너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니?
이제 그만 자라주렴. 언제까지고 자라지 않는 너를 이렇게 기다려야만 하는 건 내겐 너무 벅차. 기다리
라구? 언제나처럼 그렇게 기다리라구? 아니, 이젠 싫어. 아버지가 떠났을 때도,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소리들을 듣지 않으려고 집 밖으론 나가지도 않았어. 그렇게 오랜 세월 기다렸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어. 그의 주먹질에 배가 아파도 시퍼렇게 멍든 볼을 어루만지며 몇 번이고 이불을 깔고 그 위에 누
워 다리를 벌렸어. 아버지의 방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아버지는 돌아올 거라고 믿었던 것처럼 그가 시키
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어. 저녁이면 술에 취해 들어와 돈을 보채는 그를 위
해 몸을 팔기도 했고 때로는 그가 데려온 남자들을 위해 술을 따르기도 했어. 그래도, 그래도 너는 내게
오지 않았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니?
손가락에 묻어 있는 초코렛을 핥는다. 혀끝에, 밥상 위에 버려져 있던 초코렛 조각의 달콤한 향기가 와
닿는다. 달콤한 맛이 느껴진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초코렛향을 꼭꼭 씹는다. 곧 부서지는 향기. 잠시 내
안에 들렀다 간 작은 아이의 꿈, 그 향기는 달콤했다. 너를 꿈꾸지 않았더라면, 늘 방문턱을 넘어 도망치
기만 하던 그 흰 고래를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떠나지 않았을까? 아니, 처음
부터 그는 알고 있었던 거다. 내 몸 속엔 자라지 않는 자궁뿐이라는 것을. 그래, 그랬던 거야. 그래서 그
리 쉽게 내 몸을 허락했던 거야, 세상 모든 남자들에게. 그가 아닌 다른 이의 품에 안겨도, 다른 남자들
의 정액이 내 몸 속에 들어와도 나는 아이를 갖을 수 없는 여자니까, 마음..... 놓았겠지. 안심했겠지.
빛을 가로막고 있는 블라인드를 본다. 이제 저 블라인드를 걷어올리는 일은 없을 거야. 상상 속의 고래
가 늘 훌쩍 뛰어 넘어가 버리곤 했던 그 문턱을 본다. 방문은 닫혀 있다. 문은 꼭 잠겨 있다. 꼭 잠가 놓
았는데도 문틈으로, 누군가 찔러 넣고 간 석간 신문이 보인다. 이제 나는 저 신문 속의 글자들이 어떤 모
양인지 알고 있다. 내 등에 그가 꼭꼭 눌러 새겨 준 그 검은 글자들이 아프게 아로새기고 있는 무늬가 무
엇인지 안다. 그는 지금도 날카로운 조각칼을 들고 어디선가 무늬를 새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저 블라인드를 걷어올리는 일은 없을 거야, 미니 초코파이를 한 입 베어 문다. 꼭꼭 씹는다. 미니
초코파이가 목울대를 넘어가 꿈틀거리며 사라질 때까지 꼭꼭 씹는다. 꿈에서만 존재하는 아기, 그 작은
발길질과 옹아리와 누군가 내 앞에 깊게 내려놓았던 블라인드, 그 속에 가리워져 있던 나를 씹는다.
이제 아무도 내게 금을 긋지는 못해. 난 두꺼운 블라인드를 방 끝까지 늘어뜨리고 있을 테니까. 저 방문
을 꼭꼭 걸어 잠글 거니까. 누군가 다듬은 조각도를 가져와 예쁜 무늬들을 아로새겨 준다고 해도 이 방
밖으로는 나가지 않을 테니까. 혹여 누군가 굳게 잠겨 있는 문을 부수고 들어와 블라인드를 걷어올린다
고 해도 그 땐 이미 늦을 걸. 이 미니 초코파이들을 모두 다 꼭꼭 씹어 버리고 나면, 오물거리며 엄마하
고 부르던 내 작은 아가를 꼭꼭 다 씹어 버리고 나면 난 아주 작아져 있을 테니까. 난...... 아주, 잘게 잘
게 나를 씹어 버릴 거니까.
또 한 개, 미니 초코파이의 포장을 벗긴다.
(출처: 작가세계 1999년 여름호)
 
이명랑 1997년 문학 무크지 『새로운』에 '에피스와르의 꽃' 외 2편의 시를 발표하여 등단.
1998년 장편소설 『꽃을 던지고 싶다』를 펴낸 후 소설 쓰기에 전념. 이화여대 교육대학원을 졸
업. 1973년 영등포시장에서 태어나 지금도 영등포시장에 살면서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얼마전
에세이집 『행복한 과일가게』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