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다섯의 순덕이가 열다섯의 순덕에게
―후배 순덕이를 위하여
정여운
그해, 겨울은 참 더디게 지나갔었지. 잔설이 녹지 않은
산비탈, 먹구름이 온통 하늘을 덮고 있었어. 하얀 오후가 빼꼼히
병실 커튼을 열고 들어왔었어. 내 몸속에는 돌 하나 자라고 있었지.
55: 시간이 참 많이도 흘렀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너를 불러서 마주한다. 미안해.
15: 미안하긴. 그땐 엄마 아버지 얼굴 볼 새도 없이 사는 게 바빴잖아.
55: 너를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 저리단다. 그게 네 잘못이 아니었는데.
15: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 안 했어. 엄마 아버지도 내가 큰오빠한테 맞은 거 몰랐어. 이유도 없이 학교 가기 전에 매일 맞았어. 집은 감옥이고 공포의 도가니였어.
55: 어린 애를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너보다 몇 살 많은데 때렸어?
15: 큰오빠는 나보다 열 살이 많아. 제대하고 집에서 같이 지냈어.
55: 오빠는 무슨, 요즘 같으면 아동학대로 신고하면 처벌 대상이야.
15: 아침마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뺨이 시뻘게지도록 맞았어.
친구들이 몰려다니며 수군거렸어. 중학교 다니는 3년 동안 매일 맞았어.
55: 엄마 아버지한테 일러주지 그랬냐?
15: 창피해서, 엄마 아버지는 하루 종일 들에서 사느라 큰오빠한테 맞는지도 몰랐었어. 동네 사 람들이 ‘들춘이’라 할 정도로 들에 살았었어. 땡볕에 엎드려 참외 순을 땄어.
55: 너도 참 답답하다. 그렇게 패는데도 참고 있었어? 경찰에 신고하지.
15: 아침마다 솔가지로 불 때면서 소죽을 끓였지. 불길이 활활 내 얼굴로 달려들면 매캐한 연기 에 눈물이 났어. 그리고 참외밭에 가서 거적을 열어놓고 학교에 갔지.
55: 노는 사람이 좀 하지. 너는 시킨다고 다 하냐? 학교에 가 버리지. 왜 말도 못하고 도망도
안 가고 맞고만 있었어? 바보같이.
15: 난 바보였어. 가출을 한 번 했는데 하루 만에 잡혀 왔어. ‘내가 사라지면 되겠구나’ 생각 했어. 창고에 굴러다니는 농약병이 보였어. 손이 떨렸고 심장이 쿵쾅거렸어. 엄마 아버지 얼
굴이 떠올랐고 눈물이 흘러내렸어. 눈 딱 감고 마셨지.
55: 왜 그렇게 나약한 생각을 했어? 누가 들어봐도 네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그렇게 쉽게 목숨 을 버리려고 했냐고.
15: 깨어보니 병실이었어. 다음날이 졸업식이었는데, 병실에서 눈 내리는 겨울 끝자락을 보고 있
었어. 그 후, 나는 큰오빠한테 내가 맞아서 농약 마신 일, 덮자고 했었지.
55: 얼마나 때렸으면 그 어린 애가 못 견디고 죽으려고 했을까. 네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그 일을 덮자고 했어? 엄마 아버지한테, 다른 오빠들한테도 말했어야지.
15: 그럴 용기도 없었어. 매일 맞다 보니 기가 죽었어. 그런 내가 싫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
어. 그 후 야간고등학교 다니면서 번 돈, 세 오빠 대학 등록금으로 생활비로 다 썼어. 나를 위해 써본 적 없었어. 오빠들 밥해주며 뒷바라지했었어.
55: 어린 나이에 고생이 참 많았구나. 식구들이 아무도 몰랐다니 더 마음이 아프네.
15: 큰오빠가 요즘 너를 많이 무시하더라. 덜 배웠다고 막말하는 거 보고 속상했어.
55: 오십이 넘은 동생을 학력으로 무시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냐? 학력보다 중요한 건 인간성이
라 생각해. 학력만 높고 인성이 바닥이면 무슨 소용 있어? 대학 졸업장만 없을 뿐이지 나도 그동안 오빠들만큼 책도 읽고 공부도 했어.
15: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이제부터 너도 할 말 하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으면 해. 지나간 시간은 돌아올 수 없지만, 앞으로의 시간은 네가 주인이었으면 해.
55: 너도 그동안 오빠들한테 엄마 아버지한테 희생만 했잖아. 이제는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15: 어제 선배랑 얘기하고 나니 많이 시원해졌어. 심장에 박힌 큰 돌이 빠져나간 기분이야.
55: 억눌린 말을 하고 나니 많이 편해졌구나? 다행이다. 무조건 참는 게 능사는 아니야.
가엾은 열다섯이여, 쉰다섯이여!
가엾은 오빠들이여,
지금도 참외밭에 엎드려 일어날 줄 모르는
어미여 아비여!
―2시집 『녹슨 글라디올러스』(지혜, 2024) 발표
▲정여운
대구에서 태어나 숙명여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서울시립대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
2013년『한국수필』로 수필, 2020년『서정시학』에 시「문에도 멍이 든다」외 2편으로 등단. 2019년
불교신문 10·27법난 문예공모전 산문 부문 대상 수상. 시집『문에도 멍이 든다』(2021)『녹슨 글라디올러스』
(2024) 공저 시집『서러울수록 그리울수록 붉어지는』(2023) 외 다수, 詩에세이집『다알리아 에스프리』(2023) 출간. 2024년 인천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사업 시 부문 선정. 서정시학회, ‘새얼문학’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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