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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3회 푸른작가 청소년 문학상, 고등부 산문당선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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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부 산문 우수상>
서아람
서초고등학교 2학년


열리지 않는 문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는 습관처럼 나른한 기지개를 켜면서 부엌으로 나왔다. 여느 때처럼 고요한 세 가족의 아침이 푹 익은 쌀 냄새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엄마가 달걀 후라이를 부쳐내는 사이, 아빠는 신문을 샅샅이 훑으며 밥술을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살이 하나도 붙지 않은 탓에 음식을 씹을수록 피부가 패여 턱뼈와 광대뼈가 드러나는 기이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무심코 식탁 맞은편을 넘겨다보며 의자에 걸터앉던 나의 동작은, 순간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언니의 동그스름한 얼굴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갓 마른 빨래처럼 얇고 창백한 살결, 짙게 음영이 패인 눈동자, 코잔등에 깨알만하게 돋아 있는 점,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 꼭 다물어진 입술과 귀밑으로 무심하게 흘러내린 다갈색 머리카락까지, 모든 것이 살아 있을 적 모습 그대로였다. 수능 시험날 아침, 너무도 자연스럽게 눈앞에 놓여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밥그릇을 떨어뜨렸다. 쨍강, 사기가 깨지는 둔탁한 소리가 귀를 때리자마자 언니의 환영도 삽시간에 사라졌다.
아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탁 중앙에 놓인 찌개 냄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묵묵히 젓가락질을 할 뿐이었다. 엄마는 들릴락 말락하게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흩어진 파편 섞인 밥알들을 주워모았다. 내가 일으킨 이 작은 소동에도 불구하고, 물낯처럼 무겁게 침잠해 온 부엌의 공기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진력이 나 버린 이물감이 텅 비어 있던 내 위벽을 통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나는 찬장에서 꺼내온 시리얼과 우유로 대충 배를 채웠다. 잔뜩 긴장한 탓에 어젯밤은 잠이 쉽게 오지 않아, 늦은 시각까지 오늘 입고 갈 옷과 책가방을 미리 다 챙겨두었었다. 덕분에 나갈 채비를 마치고 현관문 앞에 서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독서실 신발’이라는 별명이 붙은 회색 스니커즈 속에 발을 구겨넣고 나서야 엄마와 아빠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프로듀서의 큐 사인을 기다리는 단막극 배우들처럼, 어색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마지못해 희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 잘보고 올게요.”
“일찍 와.” 문을 닫으려는 찰나, 퉁명스러운 아빠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젯밤, 승용차를 몰고 시험장에 따라와 시험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 했던 부모님의 계획을 두고 아빠와 나 사이에는 한바탕 실갱이가 벌어졌었다. 내가 지나치게 고집을 부린게 아닌가 싶었다.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오늘에 대한 부모님의 염려와 걱정이 얼마나 클지는 나도 짐작할 수 있었다. 11월의 다섯 번째 날, 언니의 기일이기도 하다. 나보다 일 년 먼저 태어난 언니는 어렸을 때 척수 신경을 다쳐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우리 가족의 삶은 아주 잘 짜여진 한 편의 휴먼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엄마 아빠의 에너지는 절망과 낙담이 아닌 무한한 헌신과 애정, 그리고 낙천적인 희망으로 구현되었다. 특히 끊임없는 탄원과 호소를 거쳐 언니의 일반 학교 입학증을 따내고, 휠체어의 세 번째 바퀴가 되어 십여년간 결석 한번 없이 언니를 통학시킨 엄마의 노력은 거의 희생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어떤 격려와 위안의 단어도, 마지막을 향해 바퀴를 돌려버린 언니의 선택을 막을 수는 없었다.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후,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잠시 망설이다가 문자 수신함을 열었다. 받은 메시지 1개, 문자 메시지는 받아서 확인하는 즉시 지운다는 게 내 원칙에서 구제받은 유일한 메시지. 수신 날짜에는 1년 전의 11월 6일, 새벽 2시 30분이 찍혀 있었다. 내가 잠든 사이, 언니에게서 날아온 것이었다.
‘내 생존의 길 앞에 모든 문들은 잠기어 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이 절박한 지대에서,
나는 몸부림을 치며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 유언의 수수께끼를 풀게 해준 실마리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되었다. 3학년 첫 모의고사 이후 수능 시험 준비를 시작하기 위해 꺼내온 언니의 현대문학 참고서 갈피 사이였다. 황금찬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시인이 쓴, ‘문’이라는 짤막한 시였다.
띵, 투명한 전자음을 내며 엘리베이터는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나는 사방이 거울로 에워싸인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핸드폰을 두드렸다. 문자 메시지를 삭제할까요, 아니오. 나는 아직도 답신을 보내지 못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반드시 언니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아니야, 문은 닫히지 않았어. 열쇠를 다른 방향으로 넣었다면, 문을 더 세게 밀어 보았다면, 언니가 포기하지만 않았다면 기회는 있었어. 언니의 죽음과 대면했을 때, 남은 세 가족이 맞닥뜨려야 했던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배신감이었다. 언니는 채 인화되지도 않은 상태로 쏟아지는 빛줄기 속으로 몸을 던져버렸고, 이제 엄마와 아빠는 언니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림으로써 생명력 잃은 가정을 애써 지탱해내고 있었다. 가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려오던 언니의 이름은 초라하게 마모된 옛 주화의 양각처럼 그렇게 서서히 결빙되어 갔다.
덜컹 하는 둔중하고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 서슬에 나는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갑자기 엘리베이터 안의 조명이 꺼지면서 철제 공간은 비좁은 토굴로 변했다. 어떠한 형체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에서 빨간 비상등만이 홀로 불을 켜고 있었다. 나는 계기판에 바싹 달라붙어 경비실로 연결되는 인터폰 버튼을 두들겨 댔다. 그러나 연분홍색 껌딱지가 달라붙어 있는 스피커에서는 녹슨 비린내가 풍겨올 뿐 아무런 응답도 들리지 않았다. 핏줄이 팽팽하게 곤두서더니 쉴새없이 버튼을 두들기던 손가락이 그만 땀에 젖어 미끄러졌다. 나는 책가방을 벗어 바닥에 내팽개쳐 놓고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문 문을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초조하고 불안한 나머지 고목나무 껍질처럼 투박하게 갈라진 음성이 터져나왔다.
“문 좀 열어주세요! 사람이 갇혀 있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그러나 감옥처럼 단호하게 막힌 문 너머에는 야멸차고 음산한 어둠만이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암호를 잊어버린 탓에 도적들의 도끼자루 앞에 옴짝달싹 못하게 된 알리바바의 형이 된 기분이었다. 약올리기라도 하듯 일초일초 착실하게 숫자를 더해나가는 휴대폰 액정 속의 시계와, 연두색 조명 속에서 깜박이는 통화 불능 사인을 노려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수밖에 없었다. 160센티미터의 여고생이 낼 수 있는 가장 요란한 소리를 내 보려고 발을 쾅쾅 구르며 두 평 남짓한 엘리베이터 안을 뛰어다니다가, 결국은 지쳐서 털썩주저앉고야 말았다. 피가 역류하면서 정수리를 파고드는 듯 아득하고 어이가 없었다.
나는 식은 땀에 흥건히 젖은 손바닥으로 뺨을 감싸쥐면서 거울로 망연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유리막 위에는 어설픈 요리사의 칼날이 닿은 것처럼 물고기 비늘처럼 투명한 은결 무늬가 쟁강쟁강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내가 기대했던, 풀무처럼 벌겋게 상기된 낯빛을 베이지색 코트 속에 파묻은 소녀는 비춰지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 엑스레이 필름을 관찰하기 위해 스탠드를 켠 것처럼, 거짓말처럼 그 한 면의 거울 속만 차츰차츰 밝아지기 시작했다. 내 눈을 의심하면서 연거푸 눈꺼풀을 비벼보는 동안, 마침내 거울의 벽은 구식 영사기를 투영시킨 것처럼 한 장의 희뿌염한 영상을 띄워냈다. 처음에는 흑백의 산만한 점들에 불과했던 형체들은 곧 선명하게 착색되어 살아 움직이는 한 편의 작은 영화가 되었다. 그리고 은막의 중앙에 덩그라니 놓여진 주인공의 뒷모습은 이상하리만큼 친숙했다. 암회색 반코트 위로 늘어뜨린 고수머리, 섬세하게 짜여진 우유빛 털목도리, 그리고 지금 엘리베이터 바닥에 고정된 매끄럽게 닦인 휠체어까지. 언니였다. 언니는 지금 나를 떠받치고 있는 바로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다. 내가 처한 현실과 달리 화면 속의 엘리베이터는 정확하게 1층에서 멎었고, 언니는 휠체어 바퀴를 부지런히 손으로 굴리며 아파트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승용차 좌석에 들어차고도 남을 만큼 몸집이 좋은 아빠가, 후덕한 웃음을 지으며 차에 덥혀 놓은 채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연아, 춥지 않지?”
“네. 이러다 늦겠어요, 빨리 가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 영화의 제작자는, 설정상의 복선이나 암시라는 개념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 했다. 언니를 태운 차는 신호 한 번 걸리지 않고 순조롭게 달려 시험장인 여자고등학교에 도착했다. 아빠는 신속하게 휠체어를 조립해 언니를 태우고, 가방을 목에 걸고 힘차고 노련하게 휠체어를 밀었다. 학교측은 언니를 특별 보호 대상자로 분류해서 양호실에서 시험을 볼 수 있게 해 주려고 했다. 그러나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항상 다른 학생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싶어했던 언니는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교실에서 시험을 치르되, 일층 교실에 배정해 줄 것을 요청했었다. 언니는 빈번히 뒤통수에 와서 꽂히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아빠는 언니의 휠체어를 책상 앞으로 밀어 놓고, 앞뒤에서 꼼꼼하게 살펴 가면서 언니의 위치를 재조정해 주었다. 필기구와 보온병을 챙겨주고,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억지로 참지 말고 시험 감독관의 도움을 받으라고 몇 번이나 일러 주기도 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아빠는 언니의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가연아, 아빠가 교실 뒤에 계속 서 있을까? 너 정 힘들어지면 그 때….”
“아빠,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러지 말고 시험 끝날 때 데리러 오세요. 아셨죠?”
“그래도….”
언니의 활기찬 손짓에도 마음을 놓지 못한 듯, 고지식한 뿔테 안경 한 쌍은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칠 때까지 창문 너머에서 떠 다녔다. 언니는 샤프 펜슬 속에 샤프심을 채워 넣으면서 긴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창 쪽으로 목을 길게 뺐다. 엷게 고이는 안개를 덮은 시린 하늘은 방금이라도 무언가 비집고 나올 듯 생생한 빛을 띤 채 일렁이고 있었다. 망망한 창공의 가장자리에는 길을 잃은 섬처럼 왜소한 낮달이 손톱 모양으로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교문 앞에 떼지어 서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머뭇거리고 있었다.
1교시, 언어 영역 시험지가 넘어왔다. 언니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정신을 집중해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개요 짜기, 주제를 통한 자유 연상하기의 개념을 응용한 쓰기 문제는 비교적 쉬워 보였다. 언니가 자주 헷갈려 하던 맞춤법 문제도 무사히 풀어냈고, 15번대로 들어서자 시험지 한 쪽을 전부 차지한 문학 지문이 등장했다. 이용악의 시 ‘낡은 집’, 이미 공부한 적이 있는지 언니의 입가에는 은근한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어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 소설로는 오상원의 ‘유예’가 출제되었다. 모두 문학 공부를 좋아하는 언니의 손을 이미 거쳐간 작품들이었다. 시험이 치러지는 내내, 으레 교내에 반주곡처럼 깔리기 마련인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경쾌하게 울리는 구둣발의 장단, 골대 그물에 시원스레 꽂히는 공의 비명소리는 능청스럽게 숨어버렸다. 간혹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시험지 위에서 날카롭게 서걱이는 하이테크의 마찰음과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한숨뿐이었다. 귓바퀴에서 윙윙거리는 그 일련의 음악은 언니에게 있어서 실패가 불어대는 경고의 휘파람과도 같았다. 그것은 다른 학생들이 행여 발을 헛디딜까 노심초사하며 위태롭게 난간을 건너는 소리이기도 했다, 언니에게는 언제나 동경의 대상으로만 머물렀던, 건강한 육체를 소유한 이들조차도 걺어지기 힘든 막대한 짐을 지고 소리없는 탄식을 내뱉고 있었다. 언니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잡념을 떨쳐 냈다.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듣기 평가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언어 영역 듣기 평가 방송을 시작합니다. 방송은 한 번만 들려드립니다. 일 번, 이제 여러분은 어느 르포 기자의 비무장 지대 탐방기를 듣게 됩니다. 잘 듣고 물음에 답하십시오.”
언니는 볼펜을 두 손가락으로 꽉 움켜쥐고 있다가, 문제로 나올 만한 어절이 나올 때마다 간략한 메모를 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세계 제일 중무장 지역, 천연 기념물, 야생 동물 생태, 그리고 르포의 주제였던 재두루미의 이름을 받아 적으려는 순간, 언니는 갑자기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가냘픈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면서 빗나간 펜촉이 지문 위에 빗장을 내질렀다. 눈앞이 아찔할 만큼 격렬한 복통에 사지가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언니는 허리에 왼손을 얹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통증을 무시하려 애썼다. 지문을 읽는 데 오랜 시간을 소요하지 않고 최대한 신속하게 문제를 풀어나가는 굳은살 박힌 오른손이 파르르 떨렸다. 듣기 평가는 금세 끝나고, 이제 주어진 시간은 20분도 남지 않았지만 통증은 극심해지기만 했다. 밀랍처럼 파리하게 상기된 언니의 이마에는 내천자의 주름살이 파고들었다. 언니는 비어 있는 답안지에 미친 듯이 바둑 무늬를 찍어내려 갔다. 60개의 동그라미를 모두 채웠음을 확인하자마자, 언니는 경련에 가까운 애처로운 미소를 지으며 오그라진 두 팔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험 감독관을 맡은 40대의 남자는 때마침 언니의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언니의 존재조차 감식하지 못한 듯 냉정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구원의 종소리가 언니를 깨웠을 때, 부모님과 떨어진 언니가 유일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남자뿐이었다. 중키에 딱 벌어진 어깨, 누군가 성의 없이 깎아 놓은 듯 거의 직사각형에 가까운 이마를 겨우 가린 짧은 머리의 남자는, 신음소리에 묻혀 자꾸만 잦아들어가는 언니의 목소리를 듣고 비열하게 웃었다.
“내 진작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지. 어디 보자, 수험번호 3010, 유 가연. 정상인들이랑 같이 시험을 봐야겠다고 박박 우겨서 교실배치까지 바꿨다는 그 유명한 학생이로구만. 나 원 참, 이렇게 귀찮게 굴려면 진작부터 양호실에서 시험을 봤어야지. 그래서, 시험을 이만 포기하고 집에 가셔야겠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불지짐처럼 잔혹하게 뱃속을 쑤셔대는 아픔에 언니는 평소의 당당함을 잃어버리고, 붉어진 낯빛으로 말까지 더듬거렸다. 언니는 휠체어를 돌려 혹시 자기를 도와줄 만한 동급생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그나마 군중 속에 섞여 있던 낯익은 얼굴들은 2교시 시험 과목인 수리 영역 참고서 속으로 재빨리 고개를 파묻으며 언니의 간절한 시선을 외면했다. 언니는 어쩔 수 없이 감독관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화장실에 좀 데려다주시겠어요.”
“아니, 점심 시간도 아니고. 1교시 쉬는 시간부터 이렇게 나오면 곤란해. 우리 학교 본관에는 장애인용 화장실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 건너편 신관까지 다녀와야 하는데. 나는 바로 다음 시간에도 3층 교실에서 감독을 해야 한다고.”
 “죄송합니다, 늦지 않게 빨리 처리할게요. 부탁드려요.”
 “아니, 아무리 빨리 끊는다고 해도 그렇지 볼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나. 혹시 큰일을 치루고 오는 건 아니겠지?”
남자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느릿느릿 휠체어를 잡아 끌었다. 옆분단에서 서로 답안을 맞춰보고 있던 한무리의 남학생들이 참지 못하고 킥킥거리자, 언니의 얼굴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언니는 광장 한복판에서 벌거벗겨진 듯한 수치심에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안에까지 바래다 줄까?”
남자의 짓궂은 이죽거림은 여자 화장실 문 앞에서까지 계속되었다. 언니는 말없이 휠체어를 끌고 장애인용 화장실로 들어가 끙끙거리며 변기에 옮겨 앉았지만, 아무리 힘을 써봐도 소변은커녕 욕의조차도 생기지 않았다. 급체가 아니라면 단순한 신경성 복통인가, 언니는 양호실에 들러 진통제라도 얻어가고 싶었지만, 통증의 원인을 진단할 막간의 시간적 여유조차도 없었다. 야멸찬 남자는 틀림없이 손목시계를 보며 혀를 쯧쯧 차고 있을 터였다. 언니는 울며 겨자먹기로 힘겹게 휠체어에 옮겨 앉아 한층 심해진 통증을 안고 시험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2교시 수리영역, 이미 언니의 시야는 비눗물로 한차례 헹궈낸 것처럼 뿌옇게 흐려져 가고 있었다. 단정하게 인쇄된 10 포인트의 글씨체들이 가물거리며 춤을 추는 듯 보였다. 문제 13번, 지상으로부터 20미터의 높이에서 초속 49미터의 속도로 똑바로 위로 쏘아 올린 물체의 t초 후의 속도는 v=19-9.8t라고 한다. 발사 후 7초가 지나는 순간까지 물체가 운동한 거리는 얼마인가. 언니는 스르르 감기려고 하는 눈을 필사적으로 치켜뜨면서 반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답을 휘갈겨 쓰고 있었다. 시험지를 뒤집으면서 허리께를 조금 펴 보려고 하는 찰나, 인정사정없이 위장을 잡아 뜯는 듯한 뜨거운 전율이 확 밀려들어왔다. 이제는 잿빛의 찰흙처럼 굳어버리고 만 동그스름한 얼굴의 움푹한 곳에서 입술이 확 벌어졌다. 그러더니 곧 외마디의, 성대를 쥐어짜는 듯한 신음소리가 억양도 없이 새어나왔다.
“학생, 어디 아파요?”
2교시 시험을 감독하기 위해 들어온, 젊은 여교사가 황급히 언니에게로 달려왔다. 여교사의 손가락이 어깨의 뼈대를 그러쥐자마자 언니는 터져나오는 비명을 막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단속적으로 짧아지는 호흡에 푸르죽죽하게 변한 입술은 녹아내리는 촛농을 연상시켰다. 질식할 듯한 고통의 폭발 속에서 몸부림치던 언니의 눈동자에,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신경질을 내며 나지막하게 욕설을 뇌까리는 모습이 박혔다. 그 여학생은 책상을 앞으로 확 밀쳐내더니, 필통 속에서 주황색 귀마개를 꺼내 귓구멍을 단단히 틀어막고 하고 있던 계산에 다시 집중했다. 언니는 초라하게 몸을 접은 채 광풍에 시달리는 나무처럼 온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힘이 전부 빠져나가 흐물거리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축축하고 독기 있는 모래사장 위에 내팽개쳐진 채 뒹굴고 있었다. 뜨거워진 눈꺼풀 밑에서 솟아나오는 굵은 눈물이 납빛깔이 된 얼굴 위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언니는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는 같은 학교 남학생을 바라보았다. 의대 수석 입학을 목표로 하고 있는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꼿꼿이 등을 세워 앉은 채 시험지의 여백에 완강한 포물선 그래프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너무도 무자비한 통증에 언니의 홍채는 색채 감각조차도 잃어버린 듯 했다. 빈틈없이 줄을 선 책상 위에 펼쳐진 몇십 권의 시험지들이 때로는 흰색으로, 때로는 보라색으로, 때로는 소름끼치게 선명한 핏빛으로 눈이 따가울 정도로 번뜩거렸다. 보이지 않는 실에 매인 꼭두각시 인형처럼, 언니의 고개는 벽을 향해 느릿느릿 기울어져갔다. 독도는 우리 땅, 담임을 납치하는 자에게 후사하겠음, 지구과학 또라이, 늙은 여우 죽어라, 8반은 병신들의 천국…. 천진난만함인지, 아니면 타고난 잔인함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무책임한 낙서들로 뒤덮인 가무파리한 벽 안에서, 언니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금당한 죄수가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출구는 없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언니는 전 생애를 걸고 숨가쁘게 여기까지 달려왔다. 발목에 검붉은 인장을 새기며 자신을 속박하던 천근처럼 무거운 사슬이 끊어지는 곳. 소박한 희망이 설화로 피어나 삭정이처럼 타고 남은 가슴에 맺힐 것만 같은, 생명과 삶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종착점은 다름아닌 이 곳이라고 의심없이 믿어왔다. 그러나 마지막트랙에 발을 디딘 주자의 앞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비정한 진실은, 애초부터 종착지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새파랗게 날이 선 정으로 두개골을 쪼개듯, 묵직한 충격이 언니의 육신을 뒤흔들었다. 메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며 벼락맞은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쓰러지는 언니의 옆자리에서는, 깡마르고 하관이 긴 남학생 하나가 삼각꼴의 눈을 교활하게 빛내며 언니의 답안지에 칠해진 숫자들을 부지런히 자신의 답안지에 복사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아 보는 이를 더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낡아빠진 흑백 텔레비전의 그것처럼, 엘리베이터 벽에 비춘 화면은 잠시 치지직거리며 영상을 먹어삼켰다. 나는 새벽을 맞은 유령처럼 어깨를 파닥이면서 헛구역질을 했다. 이제 곧 은막 위에 떠오를 영상의 한 점, 한 점들이 우박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내 몸을 짓누를 것만 같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언니는 한 손에 담요를 꼭 움켜쥔 채, 병원의 푸른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왁스 냄새가 소독약 냄새와 뒤섞여 속이 울렁거렸다. 쿡쿡 찌르는 듯한 미약한 통증과 탈진한 후의 피로는 남아 있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언니는 적멸궁처럼 텅 비어버린 눈으로 침대 옆에 서서 울고 있는 엄마와, 화석처럼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빠를 응시했다. 언니가 눈을 뜬 것을 눈치채자마자, 엄마와 아빠는 감쪽같이 가면을 쓰고 틀에 박힌 연기를 펼쳐 내었다.
“급성 맹장염이었대, 가연아. 네 탓이 아니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어.”
“오히려 이게 기회일 수도 있어. 기왕 이렇게 된 거 일 년만 더 고생해서, 훨씬 좋은 대학 보란 듯이 붙어주면 되잖아. 기운내, 응?”
언니는 크롬으로 옅게 칠한 도자기 인형처럼, 잔상처럼 유약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선량한 엄마와 아빠는, 아까까지만 해도 엿볼 수 있었던 삶에 대한 관태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빛바랜 희망으로 재무장하며 언니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언니는 한결 가벼워진 듯한 하반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사방에 못이 박힌 무기력한 육신에서 탈출해 바깥 공기를 쐬고 있을 한 토막의 맹장을 생각했다.
그리고 새벽 2시 반, 잠든 척 하면서 끈질기게 의식의 끈을 붙잡고 있던 언니는 아빠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럽게 담요를 걷어내었다. 철저한 안식과 평화의 어둠 속에 잠식된 밤물결 속에서, 베개맡에 누운 핸드폰만이 미약하게나마 연둣빛 얼굴을 반짝이고 있었다. 언니는 핸드폰의 폴더를 열었다. 친숙한 번호를 누르고, 그 순간 언니의 뇌리를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어떤 시인의 이야기를 기억나는 대로 적어 내려간다.
기울어지는 시각, 싸늘한 거리에 비가 내린다. 운명처럼 마련된 내 생존의 길 앞에 모든 문들은 잠기어 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이 절박한 지대에서 나는 몸부림을 치며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는다. 가슴 박히는 수없는 상처, 이것은 너무 심한 장난같다.
사람은 평생을 두고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인가 보다.
언니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면서, 팔에 온힘을 실어 휠체어로 옮겨 앉았다. 간병인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세우잠을 자고 있던 엄마가 몸을 뒤척이는 바람에 잠시 멈칫거리기는 했지만, 언니는 주저없이 휠체어 바퀴를 돌려 병실 밖으로 빠져 나왔다. 숨쉴 구멍 하나 터놓지 않고 완벽하게 칠해놓은 까만 필름 상자 속에서, 새하얗게 닦인 병원의 복도만이 광목천처럼 곧게 감겨 너울거리고 있었다. 언니는 복도를 가로지르면서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했다.
“나는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하지만 그것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라면, 진작에 두드림을 그만두었어야만 했어. 엄마, 아빠. 정말 미안. 난 지쳤어.”
언니는 핸드폰을 복도에 살며시 내려놓고는, 밤공기에 차갑게 식은 양 손을 품에 안았다. 언제 묻었는지도 기억할 수 없는 컴퓨터 사인펜용 잉크가 흰 손 위에 어지럽게 악보를 그려놓았다. 언니는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나서도, 계기판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검은 우물 속의 낯선 음화상처럼 둥실 떠올라 있는 하얀 손바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손이, 너무 아파요.”
그리고 언니의 발 밑에서, 승강기 출입구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는 언니를 불렀다. 언니는 흠칫 하면서 계기판을 다시 확인했다. 층 표시등은 꺼져 있었다. 벽에 달린 도착등도 켜지지 않은 상태였다. 언니는 오한이 들 만큼 새하얗게 빛나는 팔을 뻗어 장님처럼 멍하니 심연의 어둠 속을 더듬거렸다. 지팡이를 촉수로 삼는 것처럼, 어둠을 빛으로 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휠체어를 밀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언니는 한낱 껍질에 불과했던 하반신의 세포들이 환희에 들떠 톡톡 터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의 반동으로 몸 속에 주렁주렁 매달린 크고 작은 주머니와 창자들이 힘차게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다리에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지느러미가 돋아, 어디든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봉분처럼 혈관 줄기를 덮은 피부의 융단 바로 밑에서, 물구슬처럼 유연하게 돋아나면서 무슨 말인가를 속삭여대는 생명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언니는 더 이상 열리지 않는 문에 매달려 몸부림칠 필요가 없었다. 언니는 성모 마리아처럼 편안한 얼굴로 휠체어를 굴렸다. 우아한 비로드 치마처럼 드리워져 있던 어둠은 은밀하고 신속하게 언니를 빨아들였다. 떨어졌다기보다는, 그냥 스윽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난, 억센 손에 떠밀려 잠 밖으로 퉁겨나오듯 눈을 떴다.
“7시 반이야, 아침 먹고 갈 준비 해야지.”
햇빛이 떨어뜨리고 간 치자빛 깃털들이 젖혀진 블라인드를 넘실넘실 타고 들어왔다. 앞치마를 걸친 엄마는 여전히 소심하고 긴장된 얼굴로 침대 맡에 서 있었다. 기지개를 켜는 대신, 식사 준비를 마치기 위해 부엌으로 나가려는 엄마의 허리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나를 마주 보듬어 안아주는 엄마의 손길은 옛날과는 달리 어딘가 어색하고, 죄책감에 떠는 듯 했다. 해묵은 빨래판의 켠켠마다 암갈색의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 낙진이 되듯이, 언니의 존재는 결코 소멸되지 않고 엄마의 마음자리마다 묻어 있었다. 나는 언니가 죽은 후 처음으로, 우유를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울고 싶은 맑고 순수한 슬픔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그것은 조각난 거울을 다시 맞춘 것처럼 순전히 나의 상상의 콜라주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문이 없는 세상을 향해 여행을 떠난 언니의 마지막 메시지를, 나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빠, 엄마. 있다가 시험 끝나면 차 타고 꼭 데리러 오세요. 우리 같이 저녁 먹으러 가요. 알았죠? 약속이에요.”
나는 식탁에 앉으면서, 전에 없이 활달한 말투로 조잘거렸다. 늙은 거북이처럼 굼뜬 동작으로 된장찌개를 떠먹고 있던 아빠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뚜껑 표면까지 끓어오른 주전자 안의 물처럼, 주책맞게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뺨을 타고 주루룩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숟가락으로 난폭하게 밥을 떠먹었다.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
“엄마, 아빠. 시침바느질로 꿰매 놓은 것처럼 얼기설기 묶어놓은 이런 균형은, 한군데만 튿어져도 모든 실밥들이 연달아 풀려버리고 말아요. 그렇게 어차피 언젠가 깨어져 버릴 균형을 가장하기보다는, 혼란스럽고 막막하다고 해도 차라리 균열을 겪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우리 가족도, 이제 조금은 솔직해져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동안 무척 많이 참았잖아요. 저 한가지 고백할 게 있어요. 언니가,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불쌍한 우리 언니가, 가연이 언니가 보고 싶어요. 이 집안 구석구석 찍혀져 있는 언니의 발자국을 일일이 찾아내 지우는 이기적인 일, 저는 더 이상 할 수 없어요. 언니가 보고 싶어요. 엄마 아빠도 그렇죠?”
엄마와 아빠는, 이른 아침부터 식탁에 앉아 눈물을 줄줄 흘려대는 딸의 행동을 황당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나는 울다가 웃다가, 다시 울면서 핸드폰을 꺼내 수신함에 남겨진, 일 년전에 풀었어야 했을 숙제를 끝냈다. 메시지를 삭제할까요, 예.





<고등부 산문 가작>
김지영
울산여자고등학교 3학년

연가시


정사각형의 공간에는 봄날의 졸음을 함뿍 담은 빛이 가득 차 있었다. 베란다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아지랑이같은 빛들이 집 구석구석에 퍼져들고 있다. 금방이라도 햇살에 녹아내릴 것 같은 창이 우울한 순백색으로 번뜩였다. 그 창을 통해 미끄러져 내려온 햇살이 희주의 목덜미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관자놀이에 맞닿은 바닥이 햇빛에 달아올라 있었다. 희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진공상태인 그녀의 머릿속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처럼 부스스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손에는 소매를 짓다 만 자그마한 상의가 바늘과 함께 쥐여져 있었다.
기면증을 앓은지 삼년이 되어가는 그녀는 최근들어 유독 쓰러지듯 잠들어 버리는 일이 많아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졸음이 오는 것을 자각하고,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의 병세였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녀의 시간만이 뚝 끊어져버리는 것처럼 픽 픽 쓰러지고 있었다. 횟수마저도 잦아서 목욕을 할 때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심지어는 길을 걷다가도 잠이 들었다.
희주의 흐릿하게 들어올린 눈꺼풀 사이로 조각조각 갈라진 빛의 입자들이 번져나갔다. 물방울같은 먼지조각을 쫓던 그녀의 희뿌연 시선이 베란다 창틀에 닿았다. 창틀 위에 검푸른 물체가 앉아있었다. 희주는 순간 목덜미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나비였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나비가 검은 날개를 팔랑이며 희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희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검은 날개를 천천히 움직이는 나비를 보던 희주는 날카로운 섬뜩함을 느끼며 천천히 손을 뻗어 나비의 날개를 잡았다. 묘한 향내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던 희주는 나비의 날개를 쥔 채로 베란다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나비를 날렸다. 하지만 몇번 제자리에서 날개짓을 하던 나비는 힘없이 휘청거리더니 다시 베란다 난간으로 돌아와 앉았다. 희주는 다시 나비를 잡아 날렸지만, 몇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의아한 나비의 행동에 답답해져서 날개라도 찢어졌나 살피던 희주의 시선이 한순간 멈췄다. 나비의 꼬리에 새빨간 핏방울이 점점이 묻어있었다.
검은 날개가 음산하게 팔랑거렸다.
“사향제비나비네.”
사육상자안에서 음산한 날개짓을 하고있는 나비를 보며 연경이 말했다. 희주는 그녀의 블라우스에 묻은 붉은 얼룩을 바라보며 그녀의 점심메뉴를 상상하고 있었다. 연경은 다소 상기된 얼굴로 희주를 마주보았다.
“나 자취할 때, 자취방근처에 이 나비가 많이 날아다녔었거든. 그래서 알아.”
희주는 나비의 날개를 잡았을 때 풍겼던 그윽한 향내를 떠올렸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몽롱하고 힘이 빠질 정도로 아득했던 향내. 사향이라는 이름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일까.
희주는 조각낸 사과를 연경의 앞에 놓았다.
“혹시 이 나비 기를거니?”
희주는 설탕 한 스푼을 물에 넣고 단정하게 저었다. 반짝이는 설탕입자가 조용히 물에 녹아들었다.
“......그럴까봐.”
“얘, 나비는 이렇게 좁은데서는 못 길러. 그리고 이렇게 음산한 나비는 길러서 뭐하게?”
기겁을 하며 바라보는 연경의 눈을 잠시 마주봤던 희주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놔줘도 날아가지를 않아. 날개를 다친 것 같애.”
“그래도 날려보내, 어떻게 기르려고 그래. 살고 죽는건 지 복이지 니가 데리고 키운다고 되는게 아니야. 솔직히 좀 찜찜하잖아.”
“이렇게 집에 날아든 것도 인연이겠지......”
“......너 혹시 민재 때문에 그러니?”
희주는 대답없이 나비에게 먹일 설탕물에 솜을 적셨다. 희주가 하는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연경은 희주의 옆에 놓인 헝겊조각들을 발견하곤, 표정을 굳혔다. 연경의 시선이 반창고 투성이인 희주의 손가락에 머물렀다. 연경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민재 옷이야......?”
희주는 사육상자를 열어 나비를 꺼내었다. 주둥이에 설탕물을 적신 솜을 들이대자 나비가 빨기 시작했다. 희주는 나비의 꼬리에 새겨진 붉은 핏방울 무늬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잠시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하던 연경은 습한 한숨을 내쉬었다.
“승진씨...... 많이 후회하더라.”
시선은 희주와 반대편에 둔 연경은 중얼거리듯 말을 흘렸다.
“자기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대. 너한테도 많이 미안해하고 있어.”
나비의 주둥이가 어미의 젖을 빠는 어린 짐승처럼 부지런히 설탕물을 빨아들였다. 희주의 시선이 아득해졌다.
“연경아.”
연경이 희주를 바라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희주의 콧잔등에 덕지덕지 묻어있다. 희주의 흐릿한 시선이 거실 바닥위를 걸었다. 희주의 옅은 속눈썹 위에 미세한 먼지조각이 쌓여갔다. 한순간, 그녀의 쇠된 한숨이 들렸던 것도 같았다.
“그 애가 죽은 게 정말 내 탓일까......?”
“희주야.”
연경의 미간에 크게 주름이 잡혔다. 견딜 수 없는 연민을 가득 담은 연경의 눈동자가 희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비의 검은 날개가 팔랑였다. 아득한 향내가 희주를 감쌌다.
그 봄날, 막 첫돌이 지난 민재를 유모차에 태워 봄 햇살을 쐬러 나갔던 희주는 꽃이 만발한 정향나무처럼 향기롭고 온화했다. 꽃잎이 풍성하게 날리던 봄날의 평일 오후, 여유를 즐기는 노부부와 몇몇의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조용한 풍경을 바라보던 희주는 정수리를 짓누르는 졸음을 느꼈다. 벤치에 앉아 민재의 유모차를 밀어주던 희주는 연신 눈을 비비며 잠을 떨치려 애썼지만, 무거운 수면욕은 희주를 사정없이 압박했다. 몇 달간 잠잠했던 기면증이었다. 그 날, 그렇게 잠이 들고 말았던 희주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민재가 없는 유모차를 발견해야했다.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으며 공원은 물론이고, 인근을 샅샅이 뒤졌지만 민재의 체취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손톱만한 단추를 옷감 위에 고정한 손가락이 계속해서 미끄러졌다. 희주는 손톱 끝으로 조심스럽게 단추를 누른 뒤 바늘을 찔러 넣었다. 얇은 바늘끝이 단춧구멍을 통과하여 희주의 눈앞을 지나갔다. 다시 한번 찔러넣은 바늘이 멍하니 옷감 위에 올려져 있던 왼손 검지를 찔렀다. 먹먹한 통증이 명치에 번졌다. 희주는 손가락을 거두어 들여 가만히 매만졌다.
아이가 없는 나날은 수십개의 도끼가 가슴을 찍어누르는 듯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거의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정신나간 여자처럼 발작을 일으켰던 희주에겐 매일매일이 지옥과도 같았다. 하루에도 몇번이고 졸도를 했고, 벌겋게 충혈된 눈에선 혈관이 터져 피눈물이 흘렀다. 아이가 없는 일분 일초가 희주에겐 죽음보다도 잔혹하고 고통스러웠다. 희주의 심장은 얼어가고 있었다.
동네 주민의 제보로 유괴범이 잡힌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희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따뜻한 아이의 체온이 아닌 싸늘하게 식은 아이의 시체였다.
범인은 정신병을 앓고있는 30대 초반의 여자였다. 희주의 심장을 뜯어내고 사지를 조각내버린 그녀는 심신상실로 책임이 조각되어 무죄판결을 받고, 무기한 치료감호 처분을 받았다.
법은 그렇게 희주에겐 가혹하디 가혹하기만 했다.
하얀 레이스가 오목조목 매달린 커튼이 바람에 흩날렸다. 오래된 좀냄새가 희미하게 공기중에 퍼져나갔다. 희주는 단추 다섯 개가 모두 달린 옷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옷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희미한 젖내도 맡을 수 없는 옷에 얼굴을 파묻은 희주의 무릎이 움츠러들었다. 사향제비나비가 사육상자 안에서 파닥파닥 날개짓을 했다. 희주는 사육상자를 열어 사향제비나비를 꺼내주었다. 어설픈 날개짓으로 공중을 한바퀴 돈 사향제비나비가 옷 위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희주의 관자놀이에 묵직한 통증이 전해져왔다.
민재가 죽은 뒤, 남편 승진은 오랫동안 마음을 잡지 못했다. 민재의 장례를 치르는 내내 넋나간 사람처럼 말 한마디 하지않았던 승진은 희주에게 어떤 위로도 질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희주와의 대면을 최대한 피했고 그녀가 지은 밥에 손을 대지 않음으로서 그녀를 고문했다. 민재가 태어났을 때 희주보다도 더 기뻐했던 승진이었기에 그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의 그런 태도는 희주를 절망의 끝까지 몰아갔다.
유충같은 시간이 꿈틀거리며 지나가던 어느날, 승진의 폭발한 절망이 희주와 마주쳤다. 술에먹힐대로 먹힌 남편의 생경한 눈을 보았을 때 희주는 관자놀이가 지끈 아파오는 것을 느꼈었다. 지금까지 남편이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그 남자는 희주의 머리채를 잡았고 그녀의 정강이를 걷어찼으며 따귀를 때렸다. 남자는 민재가 그렇게 된 책임을 모두 희주에게 물었고, 여자에게 내려지지 않은 벌을 희주에게 대신 내리기라도 하려는 듯 끊임없이 희주를 고문하고 자신을 고문했다. 내성적이고 어눌하다고만 생각했던 남편의 급변한 모습에 경악하고 또 경악한 희주는 남편의 폭력을 견디며 몇번이나 탈력발작을 일으켰다. 폭력과 기절, 발작과도 같은 수면과 고통들이 잠식한 시간들이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날, 승진은 돌연 회사에 해외파견근무 신청을 내더니 얼마 후 리비아로 떠나버렸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희주는 매달 승진이 부쳐오는 생활비를 붕어처럼 뻐끔뻐끔 받아먹으며 가시밭길 같은 시간 위를 근근히 연명해나갔다. 혼자가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고독에 온몸을 던진 희주의 삶은 견뎌내기에 버거운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만 같던 기억도 시간이 지날수록 곪아버린 상처에 너무 깊이 박혀버려서 애초에 자신의 살덩이였던 마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인간이 혼자가 된다는 건 정말 한순간의 일이었다. 자석의 같은 극을 억지로 붙여놓은 밀랍이 햇빛에 녹아내리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듯, 인간과 인간의 관계란 그렇게나 위태로운 것이었다. 화살 같은 햇살이 언제나 정수리 위를 찔러오는 한 언젠가는 밀랍은 녹게 마련이었다.

희주는 자색 꽃잎을 활짝 벌리고 있는 자목련 위에 사향제비나비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비틀거리며 중심을 못잡던 사향제비나비는 이내 몇번 날갯짓을 하더니 꽃 위에 내려앉아 꿀을 빨았다. 늘 집안에서 설탕물만 먹였더니 힘없이 늘어져만 있어서 꽃이 만발한 공원으로 데리고 나오긴 했지만, 공원으로의 외출은 희주에겐 더없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오늘처럼 인적이 드문 공원은 더욱이나 그러했다. 여기저기 놓여있는 바위, 질서정연하게 심어져있는 꽃나무와 한참 만발해있는 꽃잎까지 희주를 괴롭게 만들었다.
자목련향과 나비의 사향이 묘하게 섞여 희주의 코끝에 묻었다. 희주는 가만히 돌 위에 엉덩이를 깔았다. 세발자전거를 탄 어린 남자아이가 희주의 앞을 지나갔다. 공원에 자리잡은 나무들이 뱉어내는 꽃향기 때문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희주는 고개를 들어 사향제비나비를 바라보았다. 몇일 굶주린 걸인처럼 정신없이 꿀을 빨아먹고 있는 모습이 새삼 안스러웠다.
가득 넘치는 졸음이 볼을 따라 줄줄 흘러내렸다. 희주는 잠을 밀쳐 낼 생각이 들지 않아 가만히 무릎 사이에 이마를 타려박았다.
사방이 옅은 붉은빛을 띄는 공간에 희미하게 안개가 끼어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희주가 사방을 둘러보려 고개를 돌리자 묵직한 머리카락이 천천히 뒤를 따랐다. 물 속인 것 같았다. 희주의 팔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묵직한 기포들이 움직임을 쫓았다.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물의 흐름을 바라보며 야릇한 숨막힘을 느낀 희주는 천천히 팔과 다리를 뻗었다. 묵직한 중압감이 희주를 감싸고 있었다. 희주는 팔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헤엄쳐나갔다. 조금씩이었지만 차차 숨이 막혀옴에 희주는 수면 위로 올라가기 위해 열심히 팔다리를 움직였다. 한참을 헤엄친 끝에 수면이 눈에 보였고, 희주는 적극적으로 헤엄쳐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수면 밖으로 손이 닿으려 할 때였다. 뼈만 남은 앙상한 손가락이 희주의 머리를 엄청난 힘으로 짓눌렀다. 소스라치게 놀란 희주의 팔이 가쁘게 움직였지만,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겨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정수리를 짓누르고 있는 손 때문에 허우적거리던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극심한 호흡곤란으로 명치가 아파 입을 벌리자 시큼한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런 가위눌림도 있었던가. 희주는 온몸이 해파리의 촉수에 쏘인 듯이 꼼작할 수가 없었다.위태롭게 둥둥 떠있던 정신이 점점 멀어져갔다.
그 때, 강렬한 사향이 희주의 코를 찔렀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지독한 사향이.
꾹 닫겨있던 희주의 눈꺼풀이 들어올려졌다. 하수구를 막아놓았던 마개를 뽑아 낸 듯 희주의 몸에 찬 고통이 한번에 빠져나갔다.
......
“아줌마, 괜찮아요?”
눈 시린 파란색이 희주의 눈앞을 감싸고 있었다. 얼음조각이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은 냉랭한 하늘이었다. 팔다리가 쥐가 난 것처럼 저릿저릿했다. 볼을 할퀴는 잔디에서 축축한 흙내음이 났다. 얼굴에 장난끼가 가득 묻은 남자아이가 희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 큰 어른이 자다가 바위에서 떨어진 게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마에 흥건한 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퍼져오는 향내에 희주는 고개를 눕혔다. 자목련 나무에서 떨어진 사향제비나비가 꽃잎 위에서 파닥거리고 있었다. 끝이 반쯤 찢어진 꼬리가 눈썹앞에서 팔랑였다. 피가 번진듯한 위태로운 꼬리.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이 불안한 꼬리 위에 퍼져있는 소름끼치는 붉은 빛. 그 음산함이, 그 불안함이 희주를 견딜 수 없이 안타깝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끌어안지 않을래야 끌어안지 않을 수 없는 상처였다. 나비의 꼬리에 퍼진 붉은 무늬를 멍하니 바라보던 희주의 가슴이 순간 미어질 듯 아파왔다.
아이를 덮고 있던 하얀 천을 내렸을 때, 훅 하고 끼쳤던 비릿한 살 냄새를 희주는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 생선배같이 창백하고 푸르렀던 아이의 얼굴은 남의 자식인마냥 한없이 낯설기만 했다. 이 새파랗게 굳어버린 아이가 내 배에서 나왔던가. 내 아이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가.......희주는 아이의 얼굴을 만지면서도 어떤 느낌도 받을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는 상황에 진절머리를 치고 있을 때, 담당 형사가 작은 헝겊조각을 희주의 앞에 내밀었다. 그것은 흐릿한 연둣빛을 띄고 있는 손바닥만한 배냇저고리였다. 발견되었을 때, 아이가 입고 있던 옷이었다. 그리고 아이를 빼앗기기 싫었던 여자에 의해 아이가 장롱 속에 숨겨져 있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호흡곤란으로 인한 질식사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희주는 현실을 바로 볼 수 있었다. 희주의 동공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희주가 받아든 배냇저고리에서 희미한 피냄새가 났다. 순간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몇번 헛구역질을 하던 희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이내 멀건 위액이 입천장을 할퀴며 올라왔다. 헝크러진 머리카락에 대롱대롱 매달린 위액에서 심한 악취가 풍겼다. 끔찍하게도 현실감이 없는 상황들이 희주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아이가 없는 내내 지겹게도 흘려댔던 눈물이 이상하게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속에 든 모든 내용물을 깨끗하게 토해냈을 때쯤, 희주는 그 여자를 만났다. 경찰들에게 양팔을 맡긴 여자는 빗지 않아 엉킨 머리카락을 훤히 내보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순간, 희주는 담당 형사의 부축을 받고도 차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팔과 다리 손가락과 손톱 그리고 온 몸의 모든 세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 눈을 힘들게 들어올렸을 때 희주는 그녀의 쳐진 눈과 마주쳤다. 눈꼬리가 하염없이 아래를 향한 악의라고는 추호도 발견할 수 없는 여자의 흐린 눈이 희주를 바라보고 있었고, 희주는 명치에 뭉쳐있던 슬픔과 분노가 한꺼번에 터지는 것을 느꼈다. 천장이 역회전을 하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눈앞이 새하얘지더니, 곧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삼주 뒤였을 것이다. 희주가 민재의 옷을 짓기 시작한 것은......
아파트 앞 상점에 설탕과 꿀을 사러갔던 희주는 집안으로 스미는 칼칼한 공기를 의아해하며 거실로 들어섰다. 사온 물건들을 부엌에 대충 정리해두고 솜에 설탕물을 적셔 베란다로 향했다. 베란다 앞 햇빛이 잘 드는곳에 놓아둔 사육상자가 먼지에 덮인 것처럼 뿌옇게 흐려져있었다. 희주는 사육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사향제비나비가 날개를 접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잠시 숨을 멈췄던 희주는 사육상자를 기울여보았다.
사향제비나비에게서 더 이상 사향이 풍기지 않았다. 비처럼 내리던 햇살이 허공에서 부서졌다. 공기의 진동이 멈춰버린 순간이었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연경이었다. 한참을 난감한 듯 뜸을 들이던 목소리가 한숨과 함께 흘렀다.
어제 그 여자 엄마랑 만났어.
니가 전혀 안 만나주니까, 어떻게 수소문해서 나한테 연락을 했나 보더라구. 니 입장도 있고 해서 안 만나겠다고 하는데도 어찌나 통사정을 하던지 어쩔 수 없이 만났어.
희주야, 그 여자 말이야...... 낳자마자 안아보지도 못하고 애가 죽었대. 민재 죽었을 때는 너한테 차마 얘기할 경황이 없어서 말못했는데...... 그것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네. 미치고 난 다음에 남편도 다른 여자 찾아서 재혼해버렸대. 민재가 입고있던 옷도 원래 자기 애 입힐 거라고 그 여자가 몇 달 걸려서 직접 지었단다. 민재를 자기애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자기가 그런것도 아닌데 어찌나 고개를 조아리던지...... 널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아주 싹싹 빌더라니까. 나도 한번에 거절하고 싶었는데 엄마뻘 되는 여자가 비니까 마음이 좀 그렇더라. 듣고있니, 희주야?
어린 시절, 동네 남자아이들의 발에 밟혀 배가 터져버린 사마귀를 본 적이 있었다. 모래와 흙에 범벅이 된 섬뜩한 죽은 사마귀를 보고있던 희주는 사마귀의 항문에서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검은 실뱀을 보고 기겁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 실뱀은 연가시라고 하는 기생충이었다. 사마귀의 칠십 퍼센트 이상의 몸에 기생하여 숙주의 영양분을 흡수하는 생물이었다. 이 연가시는 알 상태로 곤충에게 먹혀 성충이 될 때까지 숙주의 영양분을 흡수하고, 후에 숙주를 물 근처로 유인하여 몸에서 빠져 나온다. 이런 연가시에게 기생당한 사마귀는 대부분 생식능력을 잃고, 기생충이 몸에서 떠나면 죽게되는 경우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이 연가시는 잔인할만큼 숙주의 영양분을 흡수하기 때문에 사마귀는 언제나 배고픔에 허덕이곤 한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 결국 자신의 몸까지 뜯어먹게 되었다는 에리식톤처럼 사마귀의 게걸스러울 만큼의 잔인한 식욕도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희주는 자신의 몸 안에 기생하고있는, 자신의 몸을 점령해버린 어떤 존재에 의해 끝없이 나비를 잡아먹는 사마귀를 어느 순간부터 경멸할 수만은 없었다. 그것은 희주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민재와 승진이 떠나가버린 그 순간부터 이미 삶을 잃어버린 그녀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게 해주었던 것은 분노와 슬픔이었다. 여자를 증오하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고,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신의 심장이 아직 뛰고있음을 느꼈다. 온몸에 들어찬 비애감과 끝없는 분노가 희주를 살게 하고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희주는 이 분노가, 이 절망이 사라진다면 자신 역시 연가시가 빠져나간 사마귀처럼 죽게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희주를 살게 하는 것이 분노와 고통인지, 실낱만큼 남아있는 삶에 대한 열망인지는 희주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희주는 막연한 두려움에 이끌려 희미해지려는 슬픔과 분노를 붙잡으려하고 있었다. 그럴때마다 희주는 끝없이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연가시에게 육체의 대부분을 점령당한 사마귀를 과연 사마귀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생명이 아닌 연가시의 생명을 살아줘야만 하는 사마귀는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걸까.......?


연경이 일러준 병원 안으로 들어선 희주의 발걸음이 지독한 소독냄새에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침침해지는 눈을 깜빡이고, 계속해서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바로잡았다. 자기도 모르게 떨리려하는 입술을 꾹 깨문 희주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묵직한 중력이 발목을 놓았다. 연경에게 병원의 위치와 여자가 감금된 정신병동에 대해 듣고 병원까지 찾아온 지금도 희주는 자신의 결정에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희주의 눈앞에 사향제비나비의 검은 날개가 팔락였다. 희주는 고개를 저어 잔상을 떨쳐내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저만치 앞에 철창으로 둘러싸인 병동이 사마귀의 눈처럼 버티고 있었다. 희주의 목이 바싹 말라왔다. 그 때, 야윈 목소리 하나가 희주의 등을 건드렸다.
“저, 저기......”
희주가 눈을 돌린 곳에는 마를대로 마른 초라한 늙은 여자가 누런 눈동자를 들어 희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희주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짧은 순간, 경기를 하더니 이내 희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숱 없는 머리카락에 측은한 정수리가 드러났다.
“저.....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희주는 자신의 발치에 이마가 닿을만큼 고개를 조아리는 여자를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여자의 엄마였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사모님. 이년이 업이 많아서 그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파충류의 가죽같은 두 손을 모은 여자가 울음을 터트렸다. 이렇게나 짧은 시간에 금방 눈물을 터트려 버리는 그녀가 희주는 문득 부러워졌다. 희주는 덜덜 떨리는 손을 열심히 비비며 빌어대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희주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은 채 변하지 않았다. 희주는 아랫입술을 짓누르고있던 이빨을 열었다.
“그 분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
차가운 철창 앞에 선 희주의 발을 타고 차가운 긴장이 기어올라왔다. 여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가시지옥처럼 희주의 발 밑에 깔려있다.
무엇이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만든 것일까.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과거를 그대로 보여줄 이곳까지 와버린 자신의 진의가 의심스러웠다.
‘나는 정말 뭘 원하는 것일까.’
희주는 가만히 이마를 짚었다. 그 여자의 멍한 눈을 보고도 끓어오르는 살의를 참아낼 수 있을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인정사정없이 부숴버린 여자의 머리를 핸드백으로 내리치고싶은 욕망을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희주는 떨리는 손가락을 깍지를 껴 감추었다.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희주의 등에 업힌 채 내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간호사의 부축을 받고 뼈밖에 안남은 손목엔 수갑을 찬 여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희주는 핸드백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마치 귀신이 다가오기라도 하는듯한 위화감이 공기에 섞여들어 숨을 쉬기가 힘이 들었다. 희주는 철창문을 열려는 간호사를 가만히 저지했다
“이대로 얘기하게 해주세요.”
희주를 버린 법에 대한 보복이기라도 한 것일까. 하얀 병원복을 입고 철창 안에 갇힌 그녀를 보면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질거라 생각했던 가슴에는 조금의 변화도 일지 않았다. 젓가락같은 두 다리가 덜덜덜 떨리고있었다. 희주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여자의 선하게 가라앉은 눈이 희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을 움찔 떨었던 희주는 잠시 뒷걸음질을 쳤다가 눈을 똑바로 떴다. 희주를 가만히 누르듯 바라보는 여자의 눈이 고정되어 있었다. 이미 혼이 빠져 나가버린 눈동자가 희주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한순간, 여자의 얼굴이 떨구어졌다.
“미안합니다......”
아이 같은 어린 음성이 알을 깨고 나왔다. 측은할만큼 떨리는 음성에 희주는 순간 시간의 존재를 의심했다. 다시 들어올려진 여자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희주는 누군가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긴 듯한 통증을 느꼈다. 희주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여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설익은 과일처럼 불안한 음성은 여자의 음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아이의 음성에 가까웠다. 되새김질을 하듯 연신 고개를 숙이는 여자의 음성이 빗물처럼 흩어졌다. 가늘게 수갑이 차인 여자의 손목이 철컥 철컥 소리를 내었다.
희주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은 분노와 절망이 사라져버린 스스로가 과연 살 수 있을지를 시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온몸에 들어찬 분노가 사라져서 연가시가 빠져나간 사마귀처럼 죽어버린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희주는 단지 자신의 몸에 기생하고 있던 연가시를 이제는 죽게되는 한이 있더라도 떼어내고 싶었다. 단지 그 희미한 열망이 희주를 이 여자의 앞에까지 세워놓은 것이었다.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던 희주의 입에서 한참 뒤, 울음이 터져 나왔다. 민재가 죽었을 때에도 울지 못했던 그녀의 온몸이 절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희주는 철창을 붙잡은 채 가슴 깊숙한 곳에 묵혀두었던 울음을 사정없이 토해내었다. 그녀의 비명같은 울음소리가 병동에 숙연하게 울리고 있었다.
희주는 민재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납골당 앞에 섰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이 없는 납골당 안은 묘한 정적이 깔려 있었다. 가만히 납골당 내부를 바라보고 있던 희주는 핸드백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사향제비나비에게 정을 준 희주의 마음을 알았던 연경은 희주에게 박제를 해서 보관할 것을 권했지만 희주는 그냥 나비를 태워주었다. 타 들어가는 검은 날개를 보며 아련한 감정을 접어야했던 희주는 상자에 나비의 재를 담았었다.
희주는 가만히 민재의 납골상자를 쓰다듬었다. 아릿한 슬픔이 심장을 두드렸다. 희주는 납골상자의 앞에 지금까지 지었던 다섯벌의 옷과 사향제비나비의 재가 담긴 상자를 놓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가슴 깊숙이 두 개의 상자를 묻었다.
여름의 활기를 띈 바람이 희주의 머리카락에 입맞추고 달아났다. 이내 몽롱한 잠이 밀려들었다. 희주는 납골당에 기대어 눈을 감고,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 지금까지의 어둠이 아닌 편안한 안식의 수면이 희주를 끌어안고 있었다.



<고등부 산문 가작>
김하늬
진명여자고등학교 3학년

잔향



사람들은 모른다. 시들기 시작한 장미의 향기가 얼마나 진한지. 대개 막 봉오리를 맺거나 살짝 잎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들만이 향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꽃잎의 가장자리가 검붉게 시들기 시작하면서 장미는 제 일생의 가장 강렬한 향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도 장미가 여유 있게 남았다. 요즘 장미는 가장 싱싱한 빛을 발하고 있지만 찾는 사람은 적다. 입학식이나 발렌타이데이, 화이트데이 등 특별한 이벤트가 없기 때문이다. 어제 꽃시장에 다녀온 사장은 겨우 두 단 밖에 주문 안 했다며 투덜거렸지만 장미는 여전히 소복하게 남았다. 아무리 팔다 남은 것들이 내게 떨어진다지만 손질 안 된 장미가 널려 있는 모습은 사장의 눈 밑을 파르르 떨게 했다. 장미가 완전히 의욕을 잃기 전에 다듬어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싱싱함을 잃어 화원에서 방출될 것들이라지만 때론 그 누구의 가슴 속에 잊혀지지 않는 한 송이가 되는 것이 바로 장미다. 오늘따라 장미의 향기가 진하다. 달짝지근한 향과 화원 깊숙이 박힌 열기가 더해져 작은 두통을 만들었다. 머리를 꾹꾹 누르다가 약을 사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휴대전화기의 진동을 느꼈다. 슬쩍 사장의 안색을 살핀 뒤 포장코너 구석에 가서 전화를 받았다.
“김옥분씨 가족 되시죠?”
똑똑 부러지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네, 그런데요.”
식은땀이 등중기를 따라 또르르 흘렀다.
“여기 L백화점 보안실입니다. 지금 이곳으로 좀 오셔야 겠습니다.”
간신히 옴팡 쥔 곷들을 우수수 떨어뜨렸다. 사장이 고양이 눈을 하고서는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같은 이유인가요?”
“전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듯하니 와주시죠.”
남자의 말투가 귓속에 스타카토로 맺혔다. 휴대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서 바닥에 떨어진 장미를 주워 안았다. 사장의 낮은 헛기침이 화원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매번 이러면 참….”
다듬어 놓은 장미 단을 한쪽에 몰아 놓고 화원을 나섰다. 아찔하게 현기증이 일었다. 차마 지우지 못한 장미향 때문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엄마는 눅눅히 젖은 솜처럼 늘어져있었다. 여느 해보다 무지막지했던 더위 때문만은 아니란 것을 엄마나 나나 잘 알고 있었다.
“퇴근하고 우리 쇼핑이나 할까? 첫 월급은 엄마 속옷 사줘야 한다던데?”
눅눅함을 떨치려 짐짓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 아까부터 손을 조물거리고 있었다. 아가씨를 연상시켰던 작고 통통한 손은 어느 순간 탄력을 잃어 버리고 있었다.

평일의 백화점은 한산했다. 사람들이 텅 빈 공간을 부유하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안의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거 엄마한테 딱일 것 같은데. 한 번 입어봐.”
진열대 이곳저곳의 옷을 고르며 까르르 웃는 내게 엄마는 조금의 성의도 보이지 않고 그저 경계가 불분명한 웃음만 물어 보였다. 엄마의 기분을 바꿔주려던 의욕이 한풀 꺾였다. 나는 대충 눈에 띄는 속옷 몇 벌을 골라주었고 엄마도 건성으로 거울 앞에서 대 보고는 고갤 끄덕였다. 우리의 쇼핑은 이십여 분만에 끝났다. 왠지 허전하여 층을 내려올 때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매장을 한바퀴씩 돌았다. 점원의 집요한 호객행위에 도망치듯 그 자리로 돌아오는 것 역시 그랬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어깨를 살짝 들었다 내리고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사람이 몰려있는 생활용품 매장은 마음껏 쇼핑할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었다.
작고 조그마한 병따개 같은 것을 보면 엄마는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꼭 지갑을 열어 한두 개쯤은 사야 할 정도로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좋아했다. 그쪽으로 엄마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러나 별반 달라진 게 없는 표정이었다. 순간 엄마의 우울함이 더 이상 나와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쇼핑백을 맡긴 후 이벤트 상품 코너로 몰린 사람들의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엄마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눈빛이 바이올린 현처럼 파르르 떨렸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그러나 애써 그 한 줄을 잡아놓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는 모습이었다. 하마터면 손에서 빠져나올 뻔한 찻잔을 제자리에 놓고 엄마에게 다가갔다. 엄마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황급히 비상구 쪽으로 걸었다. 사람들을 밀치며 나아가는 엄마를 겨우 쫓아가 붙잡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고개를 휘휘 젓는 엄마의 이마에 나무 수액처럼 땀이 송글송금 맺혀있었다.
“집에 갈까”
엄마의 손을 꼭 잡으며 안색을 살폈다.
“왜 이러니? 괜찮다니까!”
엄마가 내 손을 휙 뿌리치며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는 쇼핑백을 들고는 1층 쪽으로 종종 내려갔다. 그러나 그 걸음마저도 삐걱삐걱 불협화음을 내며 흔들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우리는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더운 바람까지 끼어들어 더욱 불쾌했다. 그런데도 엄마는 오한이 나는 듯 몸서릴 쳤고 급기야 방에 들어서자마자 다리까지 덜덜 떨며 주저앉아버렸다. 백화점에서의 일로 마음을 풀지 못한 나는 그 모습을 못 본 척 신경질적으로 쇼핑백 안에서 속옷을 꺼냈다. 그때 툭 소리를 내며 조그마한 물건이 튀어 나왔다. 네덜란드 소년 모양을 한 자기 티스푼이었다.
“이거 엄마가 산거야?”
지갑을 열어 영수증을 꺼내 목록을 체크했다. 그러나 티스푼 따윈 없었다.
“배고프다. 밥 먹자.”
엄마가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손에 쥔 티스푼과 영수증이 엄마의 뒷모습을 낯설게 만들었다.
그 날부터였다. 하나 둘씩 눈에 익지 않는 물건이 집안에 놓이기 시작했다. 도금이 된 곰이 박힌 작은 보석상자, 기도하는 도제 인형, 붉은 벽돌이 가로막은 화장실 창가의 작고 앙증맞은 선인장 화분까지. 월급과 장미좌판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은 빠듯하지만 엄마가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었다.
“엄마, 저런 것은 사지 말고 예쁜 옷이나 사. 돈 부족하면 줄게.”
내 제안에 선뜻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나의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하는 모습 역시 어색한 상황이었다.
“그냥 허전해서…….”
엄마가 장미의 시든 잎을 떼어내고 봉오리를 살짝 조이는 나의 손에 눈을 맞추었다. 대궁에서 떨어진 꽃잎이 바닥에 내려앉자 엄마의 시선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엄마는 여전히 고왔다. 마흔을 훌쩍 넘겼지만 하얀 피부와 꼬리가 살짝 처진 눈매 때문에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함께 외출이라도 하면 자매 아니냐고 농담을 할 정도로 말이다.
“좀 소중히 다룰 순 없니? 그래도 장미잖아.”
기계적으로 장미를 다루는 내 손길이 서운하다는 듯 엄마가 말했다.
“시든 꽃을 누가 좋아해? 아침나절 안으로 손질을 끝내야 해.”
엄마는 여전히 내 손을 향해 서운함을 거두지 않았지만 내 손에서 시든 꽃잎은 더욱 빨리 떨어져 나갔다. 엄마는 종종 손질하고 남은 꽃을, 쓰레기통에 버린 꽃을 거둬 며칠동안 안방에 놓아두기도 했는데 향이 얼마나 진한지 다른 냄새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화원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말하자 친구들은 하루종일 꽃향기를 맡아서 좋겠다고 했으나 나는 며칠만 일해보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간신 참아냈던 적이 있었다. 집에서만큼은 꽃향기를 맡고 싶지 않았으나 일이 많은 날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가져와 손질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집에서는 화원보다 짙은 장미향이 났다. 나는 잠시 그 향이 혹시 엄마가 뿜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하철 역 앞으로 좌판을 옮긴 후 꽃은 그럭저럭 팔렸지만 고른 매출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제 막 생긴 역이라 그 곳을 지나는 사람 역시 들쑥날쑥 했기 때문이었다.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한 단도 팔지 못하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를 접을 수 없었다. 기분 좋게 취한 샐러리맨 혹은 갓 이성에 눈뜬 남학생이라도 만나면 아슬아슬하게 남은 로션이라도 살 수 있을 것이었다. 더위를 이기지 못하는 듯 장미도 하나 둘씩 꽃잎을 떨구고 있을 때였다. 휴대전화기에 낯선 번화가 반짝였다.
“김옥분씨 가족 되시나요?”
“네, 그런데요.”
“여기 L백화점 보안실입니다. 잠시 와 주셔야겠습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막 떼어낸 꽃잎이 낙하하는 것처럼 현기증이 밀려왔다. 좌판을 대충 정리하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백화점으로 허둥지둥 달려가는 내내 가슴 속에 장미 가시가 박힌 것처럼 콕콕 아렸다.
“전화 받고 왔습니다.”
“네. 그전에 잠시 저희와 이야기를 나눠야겠습니다.”
사무실 한쪽 구석에 놓인 철제 의장에 앉아 무안한 듯 손을 조물거리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신경질적으로 서류을 넘기던 직원이 내 쪽으로 의자 하나를 빼 주었다.
“이분이 이곳에 오시게 된 것은 천 오백 원짜리 커피 필터 한 팩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열에 들뜬 어린애처럼 눈물이 핑 돌았다.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몸을 가누고 있는 사이 다시금 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식품매장에서 귤이었고 이전엔 주방세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요, 워낙 소소한 물건들이라 저희 쪽에서 처리한다는 게 우스운 일이죠. 어머니가 깊이 반성을 하고 또 집에는 절대 전화하지 말라고 해서 그냥 지나갔습니다만 어머니께 경고했듯이….”
남자가 말을 끊고 두어 번 헛기침을 큼큼해대며 엄마 쪽으로 곁눈질했다. 엄마는 여전히 손을 조물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소소한 것은 규정대로 처리하기도 뭐하지요. 하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있다면… 이런 일로 다시 뵙지 않았으면 합니다.”
남자는 나를 향해 믿어도 되겠냐는 듯 눈을 한 번 꿈벅 거렸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그만 가도 좋다는 듯 엄마를 향해 턱을 가리켰다. 엄마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에서 웅- 하고 소리가 났다. 마른 입술을 오물거리며 침을 바르는 엄마를 노려보다가 휙 등을 돌리고는 보안실을 나섰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따랐다.
“도대체 이게 무슨 창피야. 생리 해?”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엄마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생리는 무슨….”
엄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숨을 쉬며 부엌으로 갔다.
“배고프지? 장사하다가 와서 밥도 못 먹었겠다. 밥 먹자.”
냉장고 밖으로 엉덩이를 쑥 내민 엄마는 냉장고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엄마를 향해 모난 눈을 박고 있는 동안 금세 상이 차려졌다. 내 앞에 가지런히 놓인 수저를 보니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의뭉을 떠는 것 같아 약이 올랐다.
“왜 찬이 마음에 안 드니? 자반 좀 구울까? 네가 냄새난다고 할까봐 내일 낮에 구워 놓으려고 했지.”
내 방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엄마는 고개를 길게 빼놓고 외쳤다. 백화점에서 눌러두었던 현기증이 몰려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엄마가 왜? 보안 직원이 혹 사람을 잘못 본 것이 아닐까? 흔한 얼굴이니까. 십구 년을 같이 살고서도 돌아서면 잊어버릴 수 있는 얼굴이니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머리가 아팠다. 꼭 감아버린 눈앞에 아빠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도마소리가 빗방울처럼 집안에 내려앉았다. 눈을 뜬 것은 한참 전이었지만 눅눅한 공기에 눌려 좀처럼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러나 사장의 잔소리는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하는 힘이 있었다. 시든 꽃이나 직원에게는 매섭도록 차가운 사람이었다. 엄마는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제보다 더 풍성해진 먹거리가 식탁에 놓여있어싿.
“얼른 먹어라. 아침을 먹어야 든든히 하루를 시작하는 거지.”
엄마가 새로 한 반찬들을 내 앞으로 미는 것도 부족한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겼다. 엄마는 늘 이런 식이었다. 아빠가 엄마를 심하게 때리고 함부로 대할수록 식탁은 더 풍성해졌다. 푸르딩딩하게 부어오른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아침을 준비할 때마다 아빠는 코웃음과 함께 숨막혀 하며 중얼거리곤 했다.
그 후로 집에 낯선 물건이 놓이는 일은 없었지만 나에겐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먼지가 내려앉은 것조차 한번씩 집었다가 놓는 것이었다. 진열장 위에 놓인 발레리나 주석 장식품을 한참동안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을 본 후 엄마는 찬거리 때문이 아니라면 외출을 하지도 않는 듯 했다.

횡당보도 건너편으로 백화점이 보였다. 신호등의 빨간 정지신호가 유난히 길었다.

“나야.”
엄마의 표정은 한순간 확 타오르는 불꽃같았다. 아빠였다. 낯선 사람 같았다. 아빠가 땀을 쓰윽 닦으며 나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보냈다.
“오랜만이다.”
남자 손수건 치고 지나치게 화려한 것이 아빠의 취향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난 몇 달 동안 얼굴은커녕 전화도 없던 사람이었다. 엄마가 자신이 마치 죄를 진 사람처럼 손을 조물 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왜 그렇게 답답해? 지금 고갤 숙여야 하는 사람은 저 쪽 이라구! 우리를 버리고 딴 여자한테 가버린 사람이라구!”
“저 자식이…….”
아빠는 짐짓 위엄 있게 음성을 낮췄지만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앞집 여자가 창밖으로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고개를 쏙 집어넣었다. 그러나 이쪽을 향한 시선은 떼어지지 않고 있었다. 아빠는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잠깐 들어가 있을래? 엄마랑 이야기할 게 있다.”
자리에서 버티고 서서 뚫어져라 아빠를 노려보던 나의 등을 현관 쪽으로 밀은 엄마였다. 엄마는 아빠의 갑작스런 등장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자세가 흐트러짐 없었으나 손을 떨고 있었다.
아빠가 돌아온 걸까? 그것을 말하기 위해 우릴 기다린 것일까? 슬그머니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앞집 여자도 살금살금 골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가 엄마를 향해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듯 했고 엄마는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손을 조물거리고 있었다. 아빠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더니 한 손이 공중에 치켜세워지더니 파들파들 떨었다. 엄마가 아빠의 얼굴과 팔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갑자기 손에서 반지를 빼내어 바닥으로 던졌다. 쨍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반지는 앞집 벽 아래에서 반짝였다. 앞집여자가 들키기라도 한 듯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아빠가 더듬더듬 반지를 주워 골목 끝으로 사라졌고 엄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어깨를 들썩였다. 나도 그만 자리에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다.
엄마의 반지는 아빠의 ROTC 반지다. 첫 미팅에서 다짜고짜 그 반지를 내밀고는 ‘우리 이제 사귀는 겁니다’라며 미소를 지었다던 아빠. 엄마는 그 반지를 건네받고 뭇 여학생들의 질투어린 시선을 받았다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어루만지곤 했다. 엄마에겐 마치 부적과 같아서 그 반지가 엄마의 손에 있는 한 아빠와 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화려했던 결혼반지도 마다한 손에는 늘 모조 사파이어가 투박하게 박힌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빠가 자신의 짐을 싸고 있을 때도 엄마는 주문을 외듯 하염없이 반지에 눈기를 주고 있었다.

백화점에 들어서자 싸늘히 식은 공기가 기분 좋게 나를 감싸 안았다. 땀이 베어있던 옷가지의 열기가 빠져나가자 약간의 한기까지 느꼈다. 7층으로 옮긴 보안실을 찾느라 건물을 꽤 헤메고 다녀야 했다. 지난번 그가 아는 체를 했다.
“김옥분씨 가족이죠?”
고개를 끄덕이고선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쇼파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젊은 여자가 분하다는 듯 팔짱을 낀 채 씩씩거리고 있었고 그 옆에 서서 허리에 손을 얹고 난감해하는 보안직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엄마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평소와 무척 달라보였다. 눈빛 때문이었다. 동물원 안에 던져진 음식을 먹다가 갑자기 우리로 달려들어 포효하던 오랑우탄. 녀석은 하늘을 향해 가슴을 내밀고는 제 손으로 팡팡 치며 울어댔다. 엄마, 아빠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었지만 그 붉은 오랑우탄의 눈빛은 잊혀지지 않았다. 음식으로 채울 수 없는 허기를 품었던 그 눈빛. 보안직원이 잠깐 한 숨이라도 놓을라치면 엄마는 굶주린 동물처럼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수습할 생각도 않고 계속해서 여자를 향해 돌진하는 엄마를 보안직원은 함부로 밀쳐냈다. 감전이라도 된 듯 온몸이 저릿하고 떨렸다.
“어떻게 된 일이죠?”
남자는 고개를 흔들며 피곤하다는 듯 말했다.
“어떤 상황 같습니까? 저희도 잘 이해는 못하겠지만 보시다시피 어머니가 저 고객에게 무작정 달려들고 있어요.”
여자가 구두를 또각 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엄마 또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남자가 어깨를 힘껏 눌러 자리에 앉혔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짙은 향이 다가왔다. 장미향이었다.
“댁이 따님이세요?”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는 그녀의 손에 반지 하나가 반짝거렸다.
“갑자기 쇼핑하고 있는데 저 여자가 다짜고짜 내 손에서 반지를 배려고 하지 뭐예요? 나참, 기가 막혀서. 나보고 도둑년이라고까지 하면서 손가락 부러질 정도로 세게 잡고 안 놔주는 거예요.”
빨간 립스틱의 입술에서 나오는 그녀의 말보다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빛을 내며 곱게 끼어진 반지에 시선이 고정됐다. 여자가 얼굴 높이까지 손을 올려 반지를 바라보았다.
“둘 다 나를 도둑년 보듯이 하네, 참나, 왜 그래요? 이 반지는 내 남편이 준 거 라구요.”
여자가 손을 쫙 펴 내 쪽으로 반지를 보였다. 미끈한 손가락에 반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의 동그란 테두리에 ROTC가 새겨 있었다. 세월의 관록을 자랑하듯 약간의 상처도 나있었다. 다시 엄마가 들썩이자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엄마의 어깨를 내리 눌렀고 엄마는 필사적으로 그 남자의 손아귀에서도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쳤다. 다른 보안직원이 달려와 엄마를 붙잡았다. 옷이 찢어질 듯 늘어났다. 그러나 그런 거에는 상관없다는 듯 간절한 표정으로 그저 반지가 끼워진 여자의 손을 바라보는 엄마였다. 엄마는 허기져 보였다.
“그나저나 온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함부로 밖에 돌아다니게 해도 되는 거예요?”
여자가 엄마 쪽으로 눈을 흘기며 말했다. 엄마를 향해 입술을 앙다물었지만 눈빛의 날은 자꾸 무디어 졌다. 여자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잘못했다고 말했다. 어설픈 미소를 눈치 챈 여자는 뭐라 한마디 하려다 확 보안실을 나갔다. 엄마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뒷모습이 불안했다. 여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진한 향기가 머무르고 있었다. 여자는 화려하게 만개한 장미 같았다. 도도하고도 아름다운 장미. 그러나 뒤에 주저앉은 엄마는 잎의 끝이 까맣게 죽어가는 시든 장미였다. 화원 한 구석에 몰아 놓은 초라한 꽃이었다.
백화점을 나서자 어스름하게 어둠이 깔려있었다.
“엄마 먼저 집에 가있어.”
횡당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엄마에게 말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화원과 집은 반대방향이었지만 엄마는 나를 따라 발길을 돌렸다. 나는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화원은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불이 꺼진 유리벽 너머에 있는 꽃들도 잠이 든 듯 향기가 잠잠했다. 뒤에서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이 꽃 사이로 비쳤다. 갑자기 경황없이 달려 나간 탓에 열쇠를 두고 나온 것이 떠올랐다. 문틈 아래로 손가락을 넣어 보았다. 다행히 열쇠가 있었다. 불을 켜자 낮에 손질을 하다 만 장미들이 힘겨운 듯 간신히 붉은 빛을 내고 있었다. 손질 불가능한 장미를 추슬러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신문지에 돌돌 말았다. 밖에서 바라보는 엄마가 마음에 걸렸다. 화원 문을 잠그고 지하철 역 앞에 도착할 때까지 엄마는 뒤를 따랐다. 좌판을 깔고 와락와락 꽃을 손질했다. 꽤 많은 장미가 검붉은 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들을 몰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나마 상태가 좋은 꽃들을 재빨리 손질해 포장을 하고 나니 좌판에 생기가 돌았다. 그제서야 꽃은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진한 향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번씩 돌아보았다. 거나하게 취한 사십대 남자에게 꽃다발을 한단 판 후 좌판을 정리하는데 나지막한 소근거림이 귓가에 고였다. 엄마가 좌판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좌판 바닥으로 버려진 검게 시든 꽃 송이 송이를 어루만지며 엄마가 말했다.
“한 번만 다시 활짝 피자. 한 번만 다시 아름답게 피어나보자꾸나.”
가슴 속에 가시 하나가 돋는 듯 아려왔다. 붉은 오랑우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날 밤 엄마의 허기는 장미의 향을 탄고 나에게로 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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