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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3년 탄생100주년문학인기념문학제>김대행 발제문
이름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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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쟁의 의미와 문학사의 전개

김대행(서울대 교수)


1. 논쟁을 되새기는 까닭

탄생 백주년을 맞는 문인들을 다시 이야기하는 의의는 무엇일까? 돌이며 회갑처럼 살아 있는 사람의 기념일을 기리는 것과도 뜻이 다를 것이고, 해마다 돌아오는 기일을 맞는 것과도 또 다른 의미가 있을 듯하다. 말하자면 백 년의 세월이니까 그저 많은 세월이 지났다는 이상의 의미가 거기에는 담겨 있는 것으로 보고자 한다. 특히 문인들에 관한 일이기에 그 뜻은 각별한 바가 있다.
문학사는 한 세대마다 새로 써야 한다고도 하고, 심하게는 십 년마다 새로 쓰는 것이 옳다고까지도 말한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탄생 백 년이 지났다는 것은 문학사를 몇 번쯤 새로 썼어야 옳다는 뜻도 되고, 그래서 냉정하고 엄밀한 눈으로 이 문인들을 바라볼 수 있게끔 되었어야 한다는 뜻도 될 것이다.
그리고 탄생 백주년을 맞이하는 문인들의 문학적 궤적을 좇아 오늘의 문학을 되돌아보고 내일의 문학을 예상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도 담겨 있을 것이다. 역사는 꼭 되풀이되는 것만도 아닐 것이고, 과거가 오늘의 거울이기만 한 것은 또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만한 시사가 없는 과거 돌아보기도 무의미한 노릇이 되리라는 점에서 이런 반추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03년에 태어난 문인들의 백주년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일반적 의미에 비추어 좀더 각별한 데가 있다. 특히 이들이 담당했던 역할이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의 시대를 헤쳐 나가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논쟁의 의미는 다시 곰곰이 새겨보겠지만, 우선 그들이 처한 환경이 특이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논쟁을 전개했던 무대는 신문과 잡지였다. 이 시대의 신문과 잡지란 요즘으로 치자면 마치 인터넷과 같은 무대였다고 할 수 있다. 붓으로 쓴 글씨가 개인과 개인을 연결해 주는 데서 한정되던 환경을 물리친 활자 매체의 세계는 문학을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새로운 매체 환경에 새롭게 적응해 나가는 길을 개척하고 그것을 공론의 장으로 성장시켰던 것이다. 이들에 의해서 문학의 공론화가 비로소 문을 열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논쟁은 일단 의의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일이 매우 신속하게 열띤 공방의 모습으로 전개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문학의 공론화에 그만큼 적극적으로 나선 역사적 단계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논쟁이 전개된 사실만으로도 이만한 의미를 지니는 이들의 작업은 문학과 삶의 관계에 대하여 계속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우리 문학사를 돌아보면서 이들의 논쟁과 관련하여 금방 깨닫게 되는 바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 논쟁이 아직도 끝을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제고 삶이 고단할 때면 똑같은 문제가 되살아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1903년생의 논쟁을 문제 삼으면서 백주년에 다시 되돌아보고자 하는 뜻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분명 지난날을 더듬는 작업이지만, 그러면서도 그 의미는 오늘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내일로 그 뜻을 연장해 내고자 하는 일이기도 하다.

2. 1903년생과 논쟁의 시대

1903년생과 논쟁의 관계를 생각하면, 흔히 말하는 사주팔자라는 것이 정말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1903년생 문인들의 대부분이 논쟁에 깊숙하게 관여하게 되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논쟁에 가장 활발하게 참여한 것은 김기진이지만, 양주동, 윤기정, 이은상, 송영, 권환 등이 논쟁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이들이 겪어야 했던 문학사적 세월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생각하게 해 준다.
논쟁의 준비 기간은 그 이전부터이고, 사회적으로 논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분위기 또한 그 이전부터 성숙한 것이지만, 이들이 본격적인 논쟁을 벌인 것은 1926년부터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1903년생 문인들은 20대 초반에 줄기찬 문학 논쟁에 투신을 했던 셈이다. 이러한 연대 추정은 문학 논쟁의 진정한 의미가 궁극적으로는 시대의 고통에 해당하는 것임을 짐작하게 해 준다.
문학 논쟁은 크게 프로 문학 내부에서 전개된 것과 외부에서 전개된 것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건 다 프로문학과 관계를 갖는다는 점은 공통된다. 프로 문학의 내부 논쟁이 프로문학 자체의 노선에 관한 것이었다면, 외부 논쟁은 우리 문학 보편의 노선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자가 다 문학의 노선과 관계된다는 점은 이것이 시대의 고통에 대응하는 방법과 관련이 깊다는 뜻을 지닌다.
논쟁의 역사적 전개가 어떠했는가가 충분할 정도로 연구자들에 의해 정리가 되어 있는 터이므로(특히 김윤식,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1976, 김영민, [한국문학비평논쟁사], 1992) 논쟁의 궤적을 낱낱이 추적하는 것은 무의미할는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다만 1903년생들이 그 논쟁에서 어떤 역할들을 했는가를 회고해 보는 것이 좋겠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김기진은 계급문학의 구현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에 자극된 박영희와 더불어 문단에 신경향파문학이라는 조류를 형성하는 구실을 한다. 이런 분위기에 자극되어 1925년 12월 [개벽]지는 /'/계급문학 시비론/'/이라는 특집을 마련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문단은 크게 두 부류, 구체적으로는 세 부류가 되어 계급문학과 국민문학,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간 절충파의 논쟁이 전개된다. 김기진과 박영희가 계급문학론의 선봉에 서고, 염상섭이 국민문학의 이론을 전개한다.
이 연장선에서 최남선의 시조부흥론(/'/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 [조선문단], 1926.5)이 제기되고, 이병기(/'/시조란 무엇인고/'/, [동아일보], 1926. 11.24-12.13) 등이 호응한다. 이에 대하여 김기진(/'/문예시평/'/, [조선지광], 1927.2)은 인류의 역사가 지리적 종족적 역사가 아니며 민족적 수직적 역사가 아니라 계급투쟁적 역사라는 논리로 이를 반박한다. 이에 뒤이어 이은상(/'/시조 부흥에 대해/'/, [신민], 1927.3) 등의 시조옹호론이 이어지며, 프로문학 쪽에서는 시조가 이미 사라진 옛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리로 반박한다.
같은 시기에 프로문학 내부에서는 이른바 내용과 형식 논쟁이 전개된다. 김기진(/'/문예월평/'/, [조선지광], 1926.12)이 박영희의 소설 작품에 대하여 계급의식에 대한 추상적 설명에 그쳤으며 소설로서의 요건을 구비해야 한다며 건축론으로 빗대어 평을 하자 이에 박영희(/'/투쟁기에 있는 문예 비평가의 태도/'/, [조선지광], 1927.1)는 프롤레타리아 전문화가 건축물이고 예술은 그 구성물 가운데 하나라며 톱니바퀴론으로 이에 맞선다.
이 논쟁은 까닭 없이 혹은 문학이 아닌 다른 조건 때문에 돌연 중단된다. 논리에 승복해서가 아니라KAPF라는 조직의 논리가 선행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되는 증언들이 있고, 또 김기진이 이후에 전개한 문학론이 형식에 대한 고려의 연장선에 있고, 계속해서 논의의 과제로 남아 윤기정(/'/문학적 활동과 형식 문제/'/, [조선문예], 1929.2) 등이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을 보게 된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양주동(/'/문단 3분야/'/, [신민], 1927.5)의 절충설이다. 프로 진영 안의 내용 형식 논쟁에 국민문학파의 시조 부흥론을 연관지으면서 절충, 즉 중도 우파적인 논리를 전개한다.
이와 같은 시기에 김화산(/'/계급예술론의 신전개/'/, [조선문단], 1927.3)에 의해 제기된 아나키즘론은 윤기정(/'/계급예술론의 신전개를 읽고/'/, [조선일보], 1927.3.25)에 의해 비판되고, 임화, 한설야에 의해 재차 비판된다. 좌파의 노선 다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논쟁에서 제기된 윤기정의 주장은 혁명 투쟁기의 문학이 할 일은 선전과 선동이라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과제는 문학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문학이 지녀야 할 목적의식에 관한 논쟁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논의의 앞부분에는 내용론으로 투쟁의 방향을 선명하게 한 박영희(/'/문예운동의 방향전환/'/, [조선지광]1927.4)가 서 있었으며, 김기진(/'/시감2편/'/, [조선지광], 1927.8)이 프로문학은 문학활동에서 문학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윤기정(/'/무산문예가의 창작적 태도/'/, [조선일보], 1927.10.9-20)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1928년으로 넘어서면서 계급문학에 관한 논의는 문학의 대중화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조선지광]의 신년 특집 설문으로 제기된 /'/현단계의 조선 사람은 어떠한 예술을 요구하는가/'/로 촉발된 이 논의에서 김기진(/'/사회 의식 과정에 순응한 예술/'/, [조선지광], 1928.1)은 대중의 개념을 도입하고, 대중의 사회 현실이 요구하는 문학을 주장한다. 이에 비해 윤기정(/'/문학 아닌 문학/'/, [조선지광], 1928.1)은 혁명적 문학을 주장하는 것으로 맞선다. 김기진의 대중문학론은 여기서 나아가 시의 대중화까지 주장(/'/단편서사시의 길로/'/, [조선문예], 1929.5)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러한 김기진의 논의는 임화(/'/김기진군에 답함/'/, [조선지광], 1929.11)에 의하여 개량주의, 자유주의 등으로 공박받기에 이른다.
같은 시기에 양주동은 끊임없이 절충파로서의 논의를 전개한다. 민족을 초월한 계급도 없고, 계급에서 유리된 민족도 없다는 주장을 앞세워(/'/정묘 평론단 총관/'/, [동아일보], 1928.1.1-18) 국민문학파와 프로문학의 양쪽을 다 공격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김기진(/'/비평적 수언/'/, [조선지광], 1929.6)과 윤기정(/'/문단시언/'/, [조선지광], 1929.8) 등에 의하여 반론이 제기되는 가운데서도 양주동은 이른바 좌우 합작의 주장을 계속 전개한다.
1929년은 문학 논의가 다변화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김기진(/'/농민 문예에 대한 초안/'/, [조선농민], 1929.3)이 문학대중화론의 연장선에서 이 잡지의 특집에 답하면서 주의를 환기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향은 권환(/'/하리코프대회 성과에서 조선 프로예술가가 얻은 교훈/'/, [동아일보], 1931.5.14), 송영(/'/1931년의 조선문단 개관, [조선일보], 1931.12-20-30) 등에 의해 뒤늦게 나온다.
1930년에는 권환(/'/무산예술운동의 별고와 장래의 전개책/'/, [중외일보], 1930.1.22) 등에 의해 KAPF의 조직 개편론이 등장하면서 김기진 류의 대중화론이 공격을 받게 된다. 특히 권환(/'/조선예술운동의 당면한 구체적 과정/'/, [중외일보], 1930.9.4)은 대중화와 비속화는 경계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면서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를 주장하고 그 구체적 실행 이론으로 제재 선택의 범주 열 가지를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후로도 문학 논쟁은 계속된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1903년생들의 문학 논쟁은 KAPF 일차 검거가 이루어진 1931년을 고비로 잠잠해지게 된다.

3. 논쟁의 의미

논쟁은 매우 다양하고 적극적이었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것이면서도 그 활발한 전개에 힘입어 여러 방면으로 논의가 이루어진 바 있다. 때로는 논의가 하나의 초점으로 모아지지 않음으로써 산발적이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그 방향은 하나였다.
그 방향은 그 시대에 가장 중요한 과제가 무엇인가로 집중된다. 계급문학을 내세우거나 그와는 달리 국민문학을 내세우거나 그 모두는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추구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일제 강점기라는 현실에 대처하는 방식의 차이가 지향을 달리한 것이기는 하지만 문제의식은 같은 데서 출발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프로문학 내부의 논쟁이 나아가는 방향과 관련해서도 같은 관점을 유지할 수가 있다. 내용과 형식 논쟁에서 김기진이 물러선 점을 비롯하여 그 이후의 논쟁 과정에서 관심의 초점은 문학이 무엇에 봉사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그래서 목적문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게 되는 이러한 관심은 문학이 현실에 대처하는 수단이라는 인식을 견지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이 시기의 논쟁이 갖는 의미는 문학보다 삶에 중점이 놓인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학은 현실을 헤쳐 나가는 삶의 방식으로 선택된 것이었다. 그러기에 1903년생들은 주로 진보의 쪽에 섰던 것이다. 언제 어느 때에나 진보는 젊음의 몫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1903년생의 논쟁은 이 점에서 삶의 방식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고, 예술로서의 문학을 넘어서서 당대의 가치관이자 신념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게 된다.
문학이 가치관이자 신념이라는 것은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성격에 대한 해명을 기다리게 된다. 이 말은, 어찌 보면 근대적 의미의 작가군이 형성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시기가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뜻하게 됨을 말해 준다. 직업으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지식인 또는 사회 엘리트로서의 작가라는 전통적인 선비사상이 지속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 점에서 이 시기의 논쟁은 예술 논쟁이라기보다 문화 논쟁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시기의 논쟁은 어찌 보면 조선시대의 상소 논쟁을 연상하게도 한다. 대상은 임금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이지만, 거기서 논의되는 문제와 논의의 전개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새로운 활자 매체라는 환경에서 적극적으로 이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펴고 이를 통해 입지를 확보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새로운 활동이라 할 만하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문학에 대한 인식의 깊이와 폭은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문학의 대중화를 둘러싼 논쟁이 암암리에 말해 주고 있듯이 장터에서는 아직도 육전소설을 팔고 있고, 신소설과 신구가요의 독자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여서 출판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서 이들이 전개한 문학론이 어느 정도의 파급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한 환경에서 문학 논쟁이 이만한 폭과 깊이를 확보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된다. 그것이 비록 한정된 소수의 역할이었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영향력에 의해서 역사는 나아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특히 그러하다.
공시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논쟁이 외국, 특히 일본의 영향 아래서 이루어진 감이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 시기의 비평사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일본 쪽의 사정을 꼼꼼히 참고해야 한다는 것이 이를 입증해 준다. 말하자면 중국 쪽에 기대고 있었던 우리의 정신사적 풍토가 일본으로 그 머리를 돌렸다는 점은 다르겠지만, 이론적 근거를 밖에서 구했던 사정은 그 뒤로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 중요한 뜻이 있다.
이 점은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우리의 근대 정신사가 전개되어 온 과정이 그러하지만, 논거를 밖에서 구함으로써 선각자적 위상을 확보할 수 있었던 역사는 불가피했던 만큼 애석한 역사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외국의 근거에 의해서 좌우되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쉽사리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강대국의 논리가 세계를 지배하는 오늘의 사정에서랴.

4. 문학사의 전개

1903년생들이 벌인 논쟁이 문학사의 전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미시적으로 살피는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입증하기 어려운 가정에 머물 가능성도 크다. 그렇기는 해도 이들의 논쟁에 의해 1920년대 초기의 [폐허]나 [백조]가 보였던 문학적 경향을 일거에 소거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쟁이 그 후 문학사의 전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분명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거시적인 관점에서 문학사의 전개를 이 논쟁과 관련지어 본다면 다음과 같은 말이 가능해진다. 첫째, 이 논쟁과 같은 쟁론은 사회적 환경이 어려울 때면 언제고 현재형으로 살아났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이 시기의 쟁론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쟁론의 현재화와 관련해서 생각해 본다. 우리는 순수와 참여의 논쟁 또는 운동권 문학 또는 노동문학이라는 핵심어들을 기억해 낼 수 있다. 경우는 다르지만 그 모두가 어려운 사회적 조건의 영향이었다.
사회적 삶이 어려우면 언제고 문학에 대해서 똑같은 질문이 던져진다는 것이 문학사의 진실이라고 해도 좋겠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보다는 문학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로 질문이 바뀌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문학이 삶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한은 이 질문은 매우 정당하고 필연적이다.
1903년생들의 논쟁을 더듬으면서 매우 곤혹스럽게 다가오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오늘날 문학은 독자가 없는 시대에 이르렀다고들 한다. 문학은 소일거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문학인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방언만을 교환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문학의 역할에 대한 자조가 담긴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문학사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인지 함께 고민해 볼 일이다. 오늘날 문학의 상황이 이러한 것은 우리 삶이 더 이상 고민이 없는 수준에 이르러서 이러한 것일까? 매체의 환경이 변한 것을 탓하기보다 문학의 사명에 대한 질문을 요구하는 것이 백주년을 맞는 문학사적 질문이 될 것이다.
아직도 우리가 1903년생들의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있다는 문제를 생각해 본다. 이 논쟁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의 일이라는 것은 북한의 문학사와 문학이론을 생각하면 금방 확인이 된다. 남과 북의 문학사를 한데 놓고 본다면 오늘 우리는 이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음이 드러난다.
반동적 부르조아로 지칭되는 무리가 있고, 민족개량주의로 비난되는 논의들은 통일을 전제로 할 때 어떻게 수용되어야 하는가가 현재로 살아 있는 문제들이다. 통일이 그저 구호로만 외쳐지던 시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도 좋을 시점에서 이 문제는 우리가 함께 안고 해결해야 할 과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탄생 백주년을 기념하면서도 우리는 이처럼 아직 이 문제를 현재로 안고 있는 것이다. 편찬의 취지에 따라 다루는 방식이 다르기야 하겠지만, 1981년 과학·백과사전출판사판 [조선문학사]가 다루던 이 시기의 논쟁을 1992년 사회과학출판사판 [조선문학사]는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찾아질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기에 1903년생들의 논쟁은 언젠가 다시 또 논의의 장에 들어서야 할 것이고, 그런 상황이 오게 되면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해질 것이다. 남한에서는 시조가 현실적인 양식이 되어 있는데, 북한은 시조를 논외로 한 것이 이러한 논쟁의 전개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또는 북한의 민족적 특성론은 이 논쟁의 어떤 부분에 맥이 닿을 수 있겠는가 이밖에도 더 많은 문제들이 우리의 숙제로 던져질 것이다.
하기야 문학은 영원히 숙제일는지도 모른다. 1903년생들의 논쟁을 되새기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문학의 이러한 숙명에 관한 것이다. 그들의 삶이 그처럼 숙제의 연속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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