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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3년 탄생100주년문학인기념문학제>정재찬 발제문
이름 관리자
첨부 원고4.hwp (130.2K)


                                        梁柱東의 노래, 논쟁, 그리고 이야기
 양주동의 시 세계를 중심으로

정재찬(청주교대 교수)





1. 梁柱東과 우리 시대 : 나와 梁柱東

물론 나는 梁柱東 선생과 師弟의 緣도, 아무런 개인적 친분 관계도 없다. 그러면서도 선생과 同列에 감히 /'/나/'/를 놓는 無禮를 범하고자 하는 데에는 그만큼 각별한(?) 사연이 있다. 선생은 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실상은 내 인생의 시기 시기마다 중대한 관련을 맺어 왔기 때문이다. 이 때 /'/나/'/는 5∼60년대에 태어나 대략 70년대에 중·고교 생활을 보낸 이 땅의 웬만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이해되어도 좋다.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선생의 첫 모습은 TV 화면에 비친 그것이었다. 선생이 주로 무슨 말을 했고,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幼年期의 내가 알 턱이 없었지만, 넓은 이마에 희끗희끗한 옆머리를 짧게 쳐 올린 채, 선생은 늘 구수하게, 매사에 막힘이 없이, 온갖 典故를 들이대며 達辯을 구사하는, 뭔가 깊이 있는 듯싶은데, 어김없이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무척 희한한 어른이었다. 그러나 내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TV 프로그램 사회자가 선생을 곧잘 國寶라 불렀다는 것, 그리고 다른 출연자와는 달리 유독 선생에게만은 꼭 梁柱東 /'/교수/'/나 /'/선생/'/이 아니라 /'/박사/'/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생은 내가 처음 알게 된 /'/박사/'/의 모델이었던 셈이다. /'/박사/'/는 博學多識한 /'/萬物博士/'/이어야 하며, 말을 잘하는 /'/才致博士/'/이어야 한다는 인상을 선생은 내게 심어 주었다. 선생이 지식의 보급이라는 차원, 곧 지식의 대중화라는 차원에서 TV와 라디오에 출연했는지, 부와 명성을 추구해서 그리하였는지, 그리하여 그 당시 賞讚의 대상이었는지, 批判의 대상이었는지, 그것은 지금도 내 관심사가 아니다. 그런데 자꾸만 선생의 모습에 도올 김용옥의 모습이 겹쳐드는 것만은 굳이 그가 선생에 빗대어 자신을 /'/宇宙寶/'/라고 칭하였던 것을 들먹이지 않더라도막을 길이 없다. 학자의 방송 출연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오히려 일종의 특권이나 의무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건대, 여하한 의미에서든 선생이 이 방면에서도 先驅者의 역할을 했던 것만큼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선생을 大衆的 知識人이란 점에서도 재조명해야 할 시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나는 TV에서 선생을 뵙기 이전에도 이미 선생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해마다 /'/어머니날/'/이 되면, 나와 형제들, 나와 친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선생이 지은 <어머니 노래>를 부르곤 했다. 훗날, /'/어머니날/'/이 /'/어버이의 날/'/로 바뀌었을 때 어색함을 느껴야 했던 데에는 아마도 <어머니 노래>에 필적할 만한 <어버이 노래>가 없었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어린 시절, 나는 그 노래의 작사자가 선생인 줄을 까맣게 모르고 불렀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노래가 본디 일제 말기 /'/가정 가요/'/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아주 뒤에 가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역시 몰라도 좋은 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선생의 그 노래가 어릴 적, 아니 지금도 가장 중요한 노래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 가게 된 /'/나/'/, 곧 우리들은 다시 선생과 遭遇하게 된다. 나는 지금도 /'/幾何/'/의 뜻을 찾아 헤매던 선생의 추억담이 담긴 <몇 어찌>를 기억하며, /'/꼬꾀요 陶, 당국 唐/'/의 웃지 못 할 이야기가 담긴 <爐邊의 鄕思>를 가끔씩 떠올린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역시 壓卷은 바로 <勉學의 序>를 꼽아야 할 것이다. "[내]가 一人稱, [너]는 二人稱, [나]와 [너] 외엔 牛 ·馬勃이 다 三人稱也라."란 구절을 기억 못할 자가 누구랴? 어디 그뿐인가? "[男兒須讀五車書]는 前者의 주장이나 [博而不精]이 그 通弊요, [眼光이 紙背를 徹함]이 後者의 持論이로되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함]이 또한 弱點이다."를 위시하여 각종 東洋 古典이 인용되는가 하면, 워즈워드, 키이츠, 에머슨 등등의 西歐 文人이 줄줄이 등장하고, 뿐만 아니라 그 글 속에 나오는 /'/陳腐, 冒頭, 衒學, 案頭, 一穗, 敬虔, 涉獵…/'/ 따위는 漢字 問題로 즐겨 출제되곤 하였었다. 그 시절, TV 속의 박사님이 다르긴 다르다고 여긴 탓인지, 교과서와 시험의 위력 덕택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여하간 나로서는 이 글이 대단한 글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記憶의 刻印이 너무도 강한 나머지, 정작 鄕歌를 배울 적에는 선생의 偉業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그저 외국시의 譯者와 같은 정도로만 알고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동안 새로운 語釋과 解釋이 학계에 제출되었어도, /'/나/'/와 /'/우리/'/의 기억 속에 <讚耆婆郞歌>는 늘 "열치매 나타난  이 흰 구름 좇아 떠가는 아니야."로 남아 있으며, 이러한 사정은 심지어 오늘날의 학교 교육에서도 여전하기만 하다. 그런 면에서, 즉 영향력과 권력이란 측면에서, 선생은 국어교육계에서도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선생이 근대시 초기를 담당한 詩人이요, 一代의 批評家였으며, 최초의 시 전문지로 평가받는 {金星}을 主宰하였다는 점 등은 그나마 대학에서 근대 문학을 공부하게 된 덕에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사실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나/'/ 같은 이를 제외한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거나 왜곡된(?) 기억 속에 갇히고 말았던 것이다. 아니, 실은 이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그러했음을 고백해야겠다. 근대 문학을 공부하는 동안, /'/나/'/는 선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때로는 비판적인 시각으로만 대하곤 했었기 때문이다.
허나, 새삼 기억을 들추다 보니, 處處에 선생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면서, 내 스스로도 적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급기야 선생을 연구 대상으로 삼게 되면서 열두 권의 방대한 全集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나로선 여간 茫然自失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며, 원고 청탁을 수락한 나의 어리석음을 痛嘆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근대 문인으로서의 선생을 다루도록 요청 받았으니, 선생의 그 폭넓은 경력과 활동 분야 가운데, 영문학자요, 번역자로서의 공로는 물론, 특히 나의 깜냥으로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선생의 향가 연구 분야를 연구 대상에서 除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겠으나, 그 또한 별로 큰 위안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왜냐 하면, 그것을 다 제하고서도, 이 대회의 큰 주제인 <논쟁, 이야기, 그리고 노래> 가운데 그 어느 하나도 선생을 비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모두를 다루는 것은 後稿를 기약하기로 하고, 현재로선 선생의 노래(시)를 중심으로 선생의 논쟁(비평)과 이야기(수필)를 아우르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 판단하는 바이다.
헌데, 이 글을 쓰기 위해 비로소 선생에 대한 硏究史를 검토해 보니, 대부분의 경우, 선생과 同時代人들의 懷古談 類와 後學들의 讚辭가 大宗을 이룸을 알 수 있었다.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그 둘의 형식을 한데 묶는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 더해, 回顧的인 私的 에세이 취향에, 東西 古典을 인용하고 패러디하기를 즐겨 했던 선생의 風을 애써 흉내내보고 있다. 감히 /'/나와 梁柱東/'/이란 제목을 붙인 것부터가 그러하다. 선생은 감히 春園과 맞서지 않았던가. 선생은 내가 응당 패러디할 만한 하나의 古典이 아니던가.
하지만 진짜 이렇게 하는 이유는 내가 느끼는 일종의 二律背反과 관련이 있다. 하나는, 선생의 功績과 영향력을 인정하는 데 세대와 학파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점의 승인이다. 우리 세대도 선생에게 갖은 영향을 받았기에 나름대로의 존경심과 추억이 담긴 회고담이 있으며, 선생의 直系가 아닌 後學도 선생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지금껏 나는 보이고 싶었다. 그것이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데 마땅히 갖추어야 할 禮에 해당됨은 물론이다.반면에, 이제는 선생을 둘러싼 담론과 권력으로부터 공히 자유로워져야 할 필요성이 압박감처럼 다가온다. 선생에 대한 평가는 세대와 학파에 따라 곧잘 필요 이상으로 대립되는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평가는 차치하고, 선생의 시 세계에 대해 정밀한 분석조차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앞으로 나는, 學者가 아닌 文人으로서 선생의 功過를 함께 드러내 보이고 싶은 것이다.

2. 梁柱東의 {金星} 시대

무애 양주동의 시작 활동은 1920년대 초두부터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處女詩는 <月下吟>으로 기록되나 이 /'/언문 詩/'/로 된 /'/新詩/'/는 신문사에 투고하였으나 실리지 않은 채 /'/煙失/'/되어 그 모습을 알 길이 없고, 早稻田 大學 豫科 시절, 교지에 漢詩를 투고하는가 하면, 잡지 <알>을 발간하였다 하였으나 이에는 또 金聖嘆의 [不亦快哉]를 번역한 글 혹은 잡문이 실렸을 뿐이다. 따라서 현재 확인 가능한 그의 첫 시는, 비록 {金星} 창간호(1923. 1)에 실린 시편들보다 한 달 정도 늦게 선을 뵈었으나, 창작 시기로만 볼 때는 {開闢}(1923. 2)에 등재된 <어느 해>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文酒半生記}에는 다음 같이 적혀 있다.
나의 처녀작 新詩가 미발표로 없어진 [月下吟]인 것은 앞에 말하였다. 예과 재학 때 [매미]라 題한 한 篇의 詩를 지어 잡지 [開闢]에 보내어 편집자에게 편지로 자꾸 졸라 게재되었던 일을 기억한다. 아마 무슨 失戀 비슷한 것을 [날아난 매미]에 비유하여 지은 詩인데, 나는 그것을 아주 [象徵詩]의 [걸작]이라 생각하여 얼른 실어 주지 않는다고 편집인의 [詩에 眼目 없음]을 힐난하는 편지를 여러 번 써 보낸 것이다.({文酒半生記}, p.41)
하지만 {開闢}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시는 <매미>가 아니라 <어느 해>이다. 그가 詩題를 <매미>로 착각한 것인지, 편집 과정에서 제목이 바뀐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 인용에서 보듯 제재나 내용으로 볼 때는 <어느 해>가 바로 <매미>라는 작품이었으리라 추정하는 데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스스로 /'/상징시/'/의 /'/걸작/'/이라 여겼던 그의 작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머-ㄴ, 먼, 어느 햇 여름이다---

어떤 날, 나는 매암이 우는 소리를 처음 듯고,
그 아릿다운 목소리에  을려,
한거름에 뒷동산으로  어 올라갓섯다.
그러나 내가 매암이 우는 나무 엽해 갓가이 갓을 때에
매암이는 노래를 뚝그치고,
어대로 날어 갓는지, 맵시조차 보이지 안핫다.

뒷동산에 나려오는 길에,
나는 족으마한 개 한 마리를 보앗다.
개는 暫間 나를 물그럼이 건너다 보더니,
자취업시, 저-편 솔나무 사이로 가고 말앗다.

마을에 돌아오니까, 동무 아이들이 무엇하려 갓섯느냐고 뭇기로,
내가 뒷동산에 올라갓든 말을 한즉, 그 애들은 나를 비웃는 듯이
[그래, 매암이 몃마리나 잡앗느냐?] 하얏다.
그리고, 족음 잇다가 어떤아이가
[너의들, 누구, 우리 개 못 보앗늬?]하는 말을 나는 들엇다.

어쩐일인지 나는 그때 갑작이 설에젓다.
그래서, 남모르게 혼자 실컷 울엇다.

아아, 그것은 分明히 어느해 여름이거니……

<어느 해>({개벽}, 1923. 2) 전문
이것이 /'/상징시/'/의 /'/걸작/'/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걸작/'/은커녕, /'/상징시/'/도 아니며,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시/'/라고 부르기조차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失戀의 설움을 날아간 /'/매미/'/로 드러내고자 했다면, 그것은 상징이 아니라 比喩나 寓意에 불과하며, 그런 비유로 읽히기를 꺼려 원의를 감추고자 하였다면, 그 역시 몽롱이나 모호한 분위기에 불과한 것이지 상징이라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위 작품에 이어 실린 <幻想>이란 작품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마치 몽타주나 형태주의를 실험하는 듯한 파격적인 형식에, 1연과 2연이 정확히 대칭 구조를 이루는 작위적 모습이 눈길을 끌지만, 정작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것이다.

시골,
村家,
골방,
피마자 燈盞,
婦人,
--- 아기 못나 소박 마즌 ---
한숨,

…………

눈물,
老處女,
--- 앗가운 靑春 ---
電燈불,
內室,
기와집,
都會,

…………

幻想!

…………
그들,
나………….
 <幻想> 전문

하지만, 우리 시단의 초창기에는 이런 정도의 朦朧體를 곧 상징시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년대 초반에도 이러한 수준의 작품은 數多하게 발견되는 것이 사실일 터, 초창기 시의 형성 과정에서, 이처럼 가능한 모든 詩形과 詩體를 실험하고 시도하는 정신은 오히려 그 결과의 過를 덮어주는 功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 다만, 이 시기의 작품들은 역시 習作 정도로 간주하는 편이 온당하다고 하겠다. 양주동이 {朝鮮의 脈搏}(1932)을 펴내면서 이 두 작품을 누락시킨 것 역시 그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文酒半生記}를 통해, 위 작품들과 "대략 같은 시절에 지은 것"으로 "당시의 나로서는 대단한 [상징 詩]로 여겼(p.41)"다고 밝힌 <꿈노래>를, {人生雜記}에서는 자신의 "新詩 處女作(p.72)"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그의 마음에 썩 드는 작품은 아니었던 듯한데, {文酒半生記}의 동일한 글에서 그는 이 노래에 대해 "사뭇 개념적인 비유體의 것으로 지금 읽어 보면 유치하기 그지 없"다고 하였거니와, 시집 {朝鮮의 脈搏}에서도 유독 그 작품에 대해서만은 창작 시기를 밝히는 작품 말미 부분에 굳이 /'/一九二二·試作/'/이라 하여 이것이 본격적인 작품은 아니라는 뜻을 전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꿈노래>는 창작 시기상으로는 처녀작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金星} 창간호가 아닌 제2호(1924. 1)에 실리게 된다.
{金星} 창간호(1923. 1)에는 <記夢>, <永遠한 秘密>, <無題>, <小曲> 등이 실린다. 앞서의 <어느 해>, <꿈노래>와 마찬가지로 모두 1922년에 창작된 이 작품들에는 /'/試作/'/이란 꼬리표가 붙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중 <無題>는 뒤에 {朝鮮의 脈搏}에 실리면서 <어느 밤>으로 改題되는데, <小曲>과 마찬가지로 실상은 小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의 것이었다. 따라서 양주동의 초기 시편을 대표하는 작품은 역시 <記夢>과 <永遠한 秘密>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싷검은 뫼를 넘고 넘고, 진흙빛 물을 건느고 또건너
님과 나와 단둘이 일음모를 나라에 다다르니,
눈앞에 끝없이 깔린 黃沙場
夕陽은 아득하게도 地平線을 넘도다.

난데없는 一陣陰風이 黑布帳을 휘날리고
주린가마귀 어지러이 떼울음 울자
모래우에 산같이 쌓인   들은
일시에 닐어나 춤추고 노래하며 痛哭하도다.

달이 西山에 기울어, 萬 는 다시 잠들고
동편한울 오죽 별하나
영원의 신비로운 눈을 깜빡일때에,
나는 님과함께 象牙의 높은塔우에 올나가도다.

고요한 바다 한가온대 크나큰 꽃한송이 떠올라
다섯낱 붉은닢이 莊嚴히 물우에 벌어지며,
새벽안개속에 깊이깊이 감초인 大地로서
風便에 종ㅅ소리 한두번 들려오도다.

<記夢>---[金星]誌 發刊 序詞 전문
渡日 이전에 그는 /'/詩/'/는 도무지 詩 같지 않다고 여겼다. 너무나 漢詩와 표현법이 틀리고 세계가 달랐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대체 한문학밖에 없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여가에나 즐길지언정 전문으로 공부할 거리는 못된다고 생각"하였던 그가, 그러나 동경 유학 시절 본격적으로 신문학을 접하고 나서 "완전히 신문학 때문에 제二차 중독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그래서 그는 "/'/Fin de Si cle/'/[世紀末], /'/Tour d/'/ivoire/'/[象牙塔] 및 [데카덩](decadent)이란 참으로 매력 있는 세 프랑스語 단어"를 만나고, "어쩐지 [썩은 송장]을 아름답다 노래한 [惡의 꽃]의 작자 보들레르"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西歐 문학의 신입생인 多感한 이 靑年은 서구 문학 중에서도 주로 世紀末的인 頹廢 사상과 眈美주의---곧 예술지상주의에 감염"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위의 시에서 /'/象牙/'/와 /'/  /'/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記夢>은 특히 {金星}의 발간 서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거니와, 이는 곧 {金星}의 정신적 지향을 선언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진대, {金星}이란 이름이 "[黎明]을 상징하는 [샛별]의 뜻과 [사랑]의 女神 Venus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노라 그가 밝힌 바와 같이, 이 시는 결국 /'/상아탑/'/과 /'/샛별/'/, 곧 理想을, /'/님/'/, 곧 사랑, 예술, 아름다움의 여신과 더불어 憧憬하고 希求하는 浪漫的 情調의 노래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永遠한 秘密>은 보다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면모를 보인다. <記夢>이 {金星}을 주재하는 이로서 일종의 발간사를 대변하는 목적성에 연관된 것이라면, 이 작품은 {金星}이 추구하는 그 정신의 연장선상에서 한 개인의 시인으로서 자신의 면모를 드러내기에 족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도 /'/象牙/'/가 등장함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며, 반면에 정작 시집 {朝鮮의 脈搏}에서는 <永遠한 秘密>은 1부에, <記夢>은 3부에 각각 수록된 것도 알고 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 하면 {朝鮮의 脈搏}을 편하면서 양주동은 1부에는 "靑春期의 情愛를 主題로 한 敍情詩"를, 3부에는 "思索的, 反省的 傾向을 띤 人生詩"를 수록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님은 내게 黃金으로 장식한 적은 상자와
象牙로 만든 열쇠를 주시면서,
언제든지 그의 얼굴이 그리웁거든
가장 갑 할때에 열어보라 말슴하시다.

날마다 날마다 나는 님이 그리울때마다,
黃金箱을 가슴에 안고 그우에 입맞호앗으나,
보담더 갑 할때가 후일에 있을까하야
마츰내 열어보지 않앗섯노라.

그러나 어찌 알앗으랴, 먼-먼 후일에
내가 참으로 黃金箱을 열고싶엇을때엔,
아아 그때엔, 이미 象牙의 열쇠를 잃엇을것을.

(黃金箱 그는 우리님께서
날바리고 가실때 최후에 주신
영원의, 영원의 秘密이러라.)

 <永遠한 秘密> 전문

양주동은 이 /'/소네트/'/를 당시에 "열렬히 사랑했던 S라는 여성에게 바친"다. 그는 스스로에게 감격할 정도로 이 시를 아꼈다. {朝鮮의 脈搏} 1부의 제목이 바로 <永遠한 秘密>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실상 이 시는 <記夢>보다 앞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文酒半生記}에서 그는 前記한 <꿈노래>와 더불어 이 작품을 <新文學에의 轉身> 節에서 다루고, <記夢>은 그 다음 節, 곧 <[金星] 시대>에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양주동은 <永遠한 秘密>을 통해 개인의 시적 취향을 시험하고, 그에 입각해 {金星}을 公刊하고, <記夢>을 통해 그 같은 시 정신, 곧 世紀末的이고 耽美主義的인 정신을 公的 담론화 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위의 시들이 퇴폐적이고 탐미적이며 예술 지상주의적인지에 대해서는 자못 회의가 든다. 실제로 그 스스로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우리들의 당시 詩風이 자칭 상징주의요 퇴폐적임은 屢述한 바와 같다. 그러나 세 사람(양주동, 백기만, 유엽--필자 주)---, 뒤에 古月까지를 합한 네 사람의 詩風은 결코 정말 世紀末的·[데카덩]적은 아니었고, 차라리 모두 理想주의적·浪漫적·感傷적인 작품이었다. ({文酒半生記, p.51)

 양주동의 작품 가운데 /'/데카덩/'/적이라고 할 만한 작품은 다음의 것이 거의 유일한 예로 보인다.

벗은 나를 무릎위에 올려 앉히고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너의 마음은 언제든지 어린애와도
같고나] 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까닭도 없이 그저 좋아서
어리광을 피어가며 웃었습니다.

나는 벗의 손을 굳게도 쥐이고
그의 가슴을 어르만지면서
[이몸이 계집애나 되었더라면] 하였습니다.
벗은 아무 말없이 나를 꼭 끼어안고
하염없는 눈물만 흘렸습니다.

--<벗>({동명}제2권 제17호, 통권 34호, 1923. 4) 전문

일찍이 그는 "一대의 소년 奇才로 저 천재 詩 [母音]의 작자 램보와 그 同性 애인으로" "[데카덩]의 化身 베를랜느"를 좋아했다. 이 시가 그와 연관됨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주동으로부터 同性愛的 傾向을 추적해 보려는 어리석음을 범할 필요는 없다. 다만 식민지 문학청년의 이러한 관념에의 傾倒와 포즈에 대해서는, 이해는 하되 지적할 필요는 있다.
양주동은 자신을 多感하다고 여겼다. 感傷的이라고 여겼다. 그것이 거짓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주격 나(I)/'/와 /'/목적격 나(me)/'/는 분리해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同性愛는커녕, 실제로 대부분 그의 시는 건강했다. 초기시는 하늘, 바다, 산, 별, 꿈이 間斷없이 등장하고, 후기시는 계몽적이고 교술적이기까지 했다. {金星} 시대를 마감하고 난, 다음 작품을 보라.

이나라ㅅ사람은
마음이 그의 집보다 가난하고,
平和와 自由를
그의 兄弟와같이 사랑합니다.
나는 이나라ㅅ사람의 자손이외다.

외로옵고 쓸쓸하고
괴로움많고 눈물많으나,
숨ㅅ결잇고 生命잇는
이나라ㅅ사람---
아아 나는 이나라ㅅ사람의 자손이외다.

 --<나는 이나라ㅅ사람의 자손이외다>({개벽}56호, 1925. 2) 일부
술을 즐기는 정도의 낭만을 제외하곤, 그의 삶 또한 건강했다. 짐짓 頹廢然하던 문학청년 시대를 넘기고 나서는, 그는 의욕적인 학자요, 성실한 생활인으로 일관했다. 5살 때 아버지를 잃고, 12살 때 어머니를 여읜, 그의 말대로 /'/天涯 孤兒/'/인 그를 이른바 /'/고아 컴플렉스/'/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로 인해, 그 자신의 말과는 달리, 그의 시에서 어떤 뛰어난 시적 감수성을 발견하기란,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힘든 일이다. 시인으로서의 초기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실질적으로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보아야 할, <님께서 편지왓네>({朝鮮文壇} 26호, 1935. 12)를 보면 --- 물론, 같은 곳에 실린 朱耀翰의 작품도 수준면에서는 大同小異 하지만, 시인으로서의 그의 재능은 도무지 인정하기가 어렵게 되고 만다.

님께서 편지왓네
날사랑한다고 쓰여잇네
그러나 사랑愛ㅅ자는 잘못 썻든지
근심憂ㅅ자를 만들어 노왓네

글자야 무슨 자이든
마음만알면 그만안이리
함물며 사랑이 근심인 줄을
님도 나도 아는 배어늘

 --<님께서 편지왓네> 전문
이 상태에서 더 이상의 詩作은 무의미하다. 실제로 그는 晩年의 /'/戱文/'/투의 수필을 통해 학생들의 웃지 못 할 漢字 誤記 사례를 두고두고 써먹었거니와, 愛라는 글자와 憂라는 글자의 유사함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寸劇은 이야깃거리, 곧 수필감은 될 수 있을지언정, 詩의 모티브로는 미달을 면치 못한다. 2연조차도 시적 통찰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기에 향가 연구에 몰두하는 등의 다른 사연은 제하고서도, 여기서 그의 시는 정지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시단의 초창기를 담당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인으로 발전하는 데 치명적인 어떤 결함이 있었다. 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그는 이미 후배 시인들에게 추월당하고 만다. 제법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문제는 그 觀念의 過剩과 感受性의 不在에 있었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 우리는 부득불 그가 세기말 사상의 洗禮로부터 벗어난 이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剩과 感受性의 不在에 있었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 우리는 부득불 그가 세기말 사상의 洗禮로부터 벗어난 이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3. 梁柱東의 비평 시대

3호 발간(1924. 5)을 마지막으로 {金星} 시대를 마감한 양주동은 1925년 다시 東京으로 돌아가 佛文科에서 英文科로 籍을 옮겨 학업을 계속하게 된다. 하지만 이듬해, 대학 1학년생의 신분으로 그는 일약 문단의 중심 자리로 진입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春園과의 [中庸과 徹底] 논쟁이다.
1926년 1월 벽두, 春園은 프로문학을 비판하는 내용의 [中庸과 徹底---朝鮮이 가지고 십흔 文學]({동아일보}, 1926. 1. 2∼3)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춘원은 /'/常的 문학론/'/을 내세우면서, 비록 常的은 아니라 할지라도 革命文學이 때로는 필요하나, 극도로 허약한 현재 민족의 상황에서 강렬한 자극제와도 같은 혁명은 病이 될 뿐이요, 따라서 그 같은 變的 문학에서 벗어나 常的 문학, 곧 中庸의 문학을 취할 것을 주장한다. 한국 문학의 방향을 지도하려는 의도가 확연한 이 글에 대해 프로문학 측에서도 비판이 제기됐지만, 문단의 반향은 정작 양주동의 비판을 둘러싸고 일어난다.
양주동은 [徹底와 中庸]({조선일보}, 1926. 1. 10∼12)을 통해 춘원을 반박한다. Taine를 빌어 "문예가 시대의 산물이라는 단안 밑에서" 그는 "우리의 생활이 이미 常的이 아닌" 이상, "우리의 문학이 變的이 될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나아가 그는 "우리의 현재 문학이 그 출발점으로 혹은 일과정으로 퇴폐 문학, 혁명 문학 두 가지가 있을 것을 단언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미 그 양자의 萌動을 보았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릇 중용의 도덕은 평화로운 상태에서만 타당한 진리란 말이다. 도덕상 심미상 비극단의 조화/'/씸메트리/'/의 미요, 덕인 것은 상식적으로도 眞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헤겔/'/의 소위 Synthesis로서의 眞임으로 우리는 그 /'/씬테씨쓰/'/를 얻기 전에 먼저 Thesis와 및 그의 Antithesis를 찾어야 할 것이다. (…) 우리는 지금 /'/안테시쓰/'/의 과정에 있다. 우리는 먼-혹은 가까운 장래에는 중용의 도가 사회적 편리적 내지 예술적으로 진리가 될 것을 잊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하의 道로서는 오직 /'/철저/'/와 /'/극단/'/이 있음을 역설코저 한다. All or Nothing임으로 절규코저 한다.

다시 말해, 춘원의 中庸에 대하여 무애는 徹底, 곧 radical한 사상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양주동은 춘원의 주장에 대해 원론적 측면에서 동의함을 잊지 않았다. 다만, "조선의 문학이 그 궁극적 의미에서 인류보편의 문화적 通性에 의하야 常的이래야 한다는 결론에는 양자가 일치"하지만, "영원성과 시대정신의 표현은 서로 인과되고 서로 표리되는 /'/방패의 양면/'/"이되, "영원성의 출발점이 시대정신 그것부터에 있는 것"이므로, 현 시대 정신에 충실한 문학은 變的인 문학, 곧 "소극적으로 퇴폐적 문학, 적극적으로 혁명적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문단에서 차지하는 춘원과 무애의 지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 문학청년 시절, 양주동은 춘원의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 匿名으로 감격된 편지를 써서 春園에게 보내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가뜩이나 春園의 浩浩한 才量에 대하여 일종의 羨妬를 느껴 기회만 있으면 한 번 쳐 보리라 생각하던" 양주동은 "先輩 大家의 글을 앙큼하게 논박하여 그 덕분에 [큰 이름]을 얻어 날린" 셈이 되었던 것이다.
이 논쟁 과정에서 양주동의 논리는 빛이 났다. 확실히 그는 感受性보다는 論理에 승했다. 그리고 이로써 그는 {金星}의 공백을 일거에 회복하는 것은 물론, 문단의 중심부로 부상함과 동시에, 시에서 비평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역 확대까지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곧, 현 시대 상황에서 우리 문학의 나아갈 방향이 바로 "소극적으로 퇴폐적 문학, 적극적으로 혁명적 문학"이라 제안한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미 그 양자의 萌動을 보았다."라는 지적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남은 길은 데카당스로 되돌아가느냐,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같은 혁명적 문학으로 나아가느냐 하는 것뿐이다. 정답은 정해진 셈이다. /'/소극적·적극적/'/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또 춘원의 주장이 프로 문학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놓여 있었다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양주동은 결국 프로 문학의 손을 들어주는 셈이 되고 만 것이다. 더욱이 그에게 데카당스는 이미 經過해 버린 대상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논쟁의 논리적 귀결일 뿐이다. 춘원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관념상으로는, 논리상으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 굳이 춘원을 비판하지 않더라도, 그가 관념적으로는 프로 문학에 동의했을 수도 있었던 것.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자신의 체질과 맞지 않는다는 데서 발생한다. 이것은 확실히 그에게 딜레마로 작용했음직하다. /'/徹底/'/를 주장하였지만, 그의 체질은 오히려 /'/中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아니, 操作的인 층위가 아닌 本質的 층위에서 볼 때, 그의 관념 자체가 중용에 가까웠다고 말해도 좋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관념의 과잉과 감수성의 부재 문제와 만나게 된다. /'/徹底/'/를 주장하고, 동시에 퇴폐 문학은 소극적이라 단언한 이상, 그렇다고 프로 문학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그의 문학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나의 生活上 신조는 "樂而不淫, 哀而不傷"이란 여덟 자에 極하였다. 진실로 이 여덟 자는 나의 인간적 태도요, 또한 藝術觀照上의 태도이었다. (--) 그러나 내 생활은 이 여덟 자에 배반됨이 많다. 특히 후자에 있어서 그러하다. /'/感傷/'/은 내 생활을 여지없이 침범한다. 지배한다. (--)
나는 /'/感傷/'/이란 것이 미상불 사람으로서 피치 못할 것임을 안다. 사람이 온전히 木石化하기 전에는 좀처럼 이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뿐만 아니라 나는 감상이 나의 現業인 문학의 중요한 조건임을 느낀다. 문학적 述作에서 감상적 조건을 빼내면 과연 무엇이 얼마나 남으랴.({동아일보}, 1927. 12. 1)

자신의 딜레마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이 글에서, 양주동은 지금 자신이 관념상으로는 중용이요, 체질상으로는 철저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은 아니지만 착각일 수는 있다. 그는 자신이 감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의 시들이 이를 증명한다. 그의 시에 드러나는 감상성마저, 감수성보다는 관념이 작동한 소산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니 "문학적 述作에서 감상적 조건을 빼내면" 창작상 위기가 닥칠 것이나, 그로서는 원래 뺄 것이 없으므로 손해 갈 일도 없는 셈이 된다.
[徹底와 中庸]의 논리적 연장선상에서 그가 얼마나 고심하였는지는 아래의 글이 잘 보여준다. 나름대로의 비장함마저 느끼게 하는 이 글에서, 양주동은 소극적 문학, 곧 감상주의와 낙천주의 모두로부터의 결별을 선언한다. 마치 [徹底와 中庸]에서 자신이 주장한 바를 여하히 실천할 것인지에 대한 出師表처럼 말이다.
그러나 감상은 결국 소극적이다. 인생적 태도에서 감상의 순간은 확실히 소극적 방면이다. 설사 그것이 아름다운 꿈이요, 달콤한 눈물이요, 내지 多情多恨한 종류의 문학의 중요한 동기가 된단들 과연 그것이 내게 무엇이랴. 감상은 사람의 활력을 자극시킴보다 오히려 방심케 함이 많다. 감상 많은 개인이나 사회가 얼마나 무력한가.
나는 몇 번이나 얼마 안 되는 과거 인생의 도정 상에서 감상의 유혹을 받았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낙천주의적 인생관을 가지고 그것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 또 다시 감상의 유혹을 받았다. 낙천주의는 일개 미봉책에 불과하던 것이다. 감상주의나 낙천주의나 요컨대 소극적 인생 태도란 방패의 양면에 불과하다.
나는 이제부터 힘써 감상적 경지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 결과 내가 의식적으로 /'/詩/'/를 분실한다 하여도 방심에 慊然함이 조금도 없으리라 한다.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적극적 생활 태도를 가지고 一轉期 이후의 /'/나/'/를 창조하는 것은 지금 나의 전적 노력이다. 아마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현금의 조선이 그러할 것이요, 모든 人의 생활과정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적극적 문학이란 것이 프로 문학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 때는 이미 프로 문학에 대해 비판적 평문을 곳곳에 발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기 몇 달 전, 그는 당시 한국의 비평계를 1) 순수문학파, 즉 정통파와, 2) 순수사회파, 즉 반동파, 그리고 3) 이 양자를 조화·절충시키려는 중간파의 3분야로 나눈 다음, 중간파를 다시 좌·우로 나누어 양주동 자신은 우익 중간파라 천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감상주의와 결별하고 적극적 문학을 추구하되, 중간파로서의 주장에 걸맞게 詩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삶>의 든든함을 느끼는 때
가사 총알 한 방이
지금 내 머리를 꿰어 뚫는다 하자
그로 인하여 나의 피와 숨결이
과연 끊어질 것인가
끊어질 것이면 끊어지라 하자
아 그러나 나의 위대한 생명의
굳센 힘과 신비로운 조직이여
어이 총알 한 방에 해체될 것인가

이것은 나의 근작시 한 편이다. 인생의 허무한 것과 나란 존재의 미약함을 느끼던 나도 때로는 이러한 생명의 충실감을 가지게 된다. 사람은 나의 생각을 非常識임을 웃을는지 모르거니와 나는 참으로 나의 /'/삶/'/이 얼마나 위대하고 신비로움을 때로는 절실히 느낀다. 또한 유물론적 안목으로 보아 이것이 한낱 /'/관념의 유희/'/라 비난하더라도 나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 나는 이러한 생명감을 확실히 파악할 때에 비로소 내 자신을 인식하고 거기서 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기쁨 속에서 이 한 편을 써 놓았다. ({동아일보}, 1927. 12. 3)

이 시는 여러모로 양주동의 前代의 시와는 다른 느낌과 표현의 묘를 보인다. 물론 관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교술의 기운을 못 마땅해 할 수도 있는가 하면, 오히려 모던해 보일 수도 있고, 생명이라는 주제에 눈길을 둘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감상적 경지에서 벗어나 적극적 생활 태도를 견지해 나갈 때, 그가 닿은 곳은 결국 또 관념의 세계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여기에 우익 중간파로서의 건강성과 이념이 더해지면, 이번엔 계몽주의의 표정을 띠게 되기가 십상이다. 1929년 {문예공론} 창간호에 실린 다음의 두 작품을 보라.

한밤에 불꺼진 재와같이
나의 情熱이 두눈을 감고 잠잠할  에,
나는 조선의 힘없는 脈搏을 짚어 보노라.
나는 님의 毛細管, 그의 脈搏이로다.

이윽고 새벽이 되야, 훤한 東녁 한울 밑에서
나의 希望과 勇氣가 두 팔을 뽑내일 때면,
나는 조선의 更生된 긴 한숨을 듯노라,
나는 님의 氣管이오, 그의 숨ㅅ결이로다.

그러나 보라, 일은 아츰 길ㅅ가에 오가는
튼튼한 젊은이들, 어린 學生들, 그들의 공던지는 날내인
손발, 책보낀 女生徒의 힘잇는 두팔
그들의 빗나는 얼골, 活氣 잇는 걸음거리---
아아 이야말로 참으로 조선의 산 脈搏이 아닌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갗난 아이의 귀여운 두볼,
젖달나 외오치는 그들의 우렁찬 울음,
적으나마 힘찬, 무엇을 잡으려는 그들의 손아귀,
해죽해죽 웃는 입술, 깃붐에 넘치는 또렷한 눈동자---
아아 조선의 大動脈, 조선의 肺는, 아기야, 너에게만 잇도다.
---<朝鮮의 脈搏>({문예공론} 창간호, 1929. 5) 전문

조선아, 잠들엇는가, 잠이어든
숲속의 이리와같이 숨ㅅ결만은 우렁차거라.

비ㅅ바람 모라치는 저녁에
이리는 잠을 깨여 울부짖는다.
그소리 몹시나 우렁챠고 偉大하매
半밤에 듯는이 가슴을 서늘케 한다.
조선아, 너도 이리와같이 잠깨여 울부짖거라.

아아 그러나 비ㅅ바람 모라오는 이 [世紀]의 밤에
조선아, 너는 잠ㅅ귀무딘 이리가 아니냐.
그렇다, 너는 번개한번 번쩍이는 때라야,
우뢰ㅅ소리 한울을 두갈래로 찢는 때라야
비롯오 성나날뒤며 울부짖을 이리가 아니냐.
 --<이리와같이>({문예공론} 창간호, 1929. 5) 부분

이 노래, 특히 <朝鮮의 脈搏>에서 六堂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위의 시가 실린 {문예공론} 창간호에는 양주동이 이미 1927년에 내세운 바 있던 折衷主義가 다시 주창되고 있었고, 민족문학론이 상당히 유포되어 있었던 터, 이에 김기진이 [批評的 數言]({조선지광}, 1929. 6)을 통해 六堂의 국민문학론 때보다 이론이 진보된 것이 무엇이며, /'/朝鮮心/'/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절충주의 논쟁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자. 다만, 절충주의는 이른바 Synthesis로 볼 수는 없는 것이었음은 지적해 두어야 하겠다. 앞서 [徹底와 中庸]의 논리대로라면, 그것은 中庸과 상통하는 터, 그렇게 된다면 "/'/중용/'/은 오직 평화로운 안정된 상태에서만 수용될 도덕"이라 하였으므로, 현 정세의 객관적 정황상 절충주의가 요구된다는 주장과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절충주의는 중용일 수도 없었고, 민족주의와 계급주의를 지양 극복하는 진테제가 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잘못하면, 단순한 종합주의가 되거나 혹은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고 말 위험에 절충주의는 놓이게 된 셈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朝鮮의 脈搏>이나 <이리와같이>에서 엿보이는 舊民族主義的 계몽주의와 차별되면서 階級主義 또한 지양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시기에 쓰인 작품들은 주로 시집 {朝鮮의 脈搏} 가운데, 같은 이름의 2부 /'/朝鮮의 脈搏/'/에 수록되어 있거니와, 이에 그 시집의 서문에 주목해 보도록 하자.

이 詩集은 前後三部作으로 난호여잇다. 흔히 靑春期의 情愛를 主題로 한 敍情詩와 및 가벼운小曲따위는 [永遠한秘密] 속에 包含되엿고, 思想的이오 主知的인諸作은 [朝鮮의脈搏] 속에 蒐集되엿다. 前者와 後者와의差異는 主로 나의詩傾이 個人的情感의 世界로부터 차차 社會的 現實로 轉向한것을 보인다.(…)
나는 이로써 나의詩作上 한時代를 完全히 끝내이고저한다. 나는 이로부터 詩的觀照의 分野를 좀더 社會的, 現實的, 大衆的方面으로 옴기려한다. 그러한意圖의 一端은 이미 本卷第二部에잇는 數三篇의 詩風에서 發見되리라 믿거니와, 그것을 좀더擴充하고 보담深化함은 오히려 今後에屬한 課題이다.

/'/個人的 情感의 세계/'/에서 /'/社會的 現實로 轉向/'/한 작품들, 더구나 앞으로 더 /'/擴充하고 보담 深化/'/할 작품 세계의 /'/一端/'/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라고 양주동 스스로 칭하고 있는 작품들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그가 말한 /'/第二部에 잇는 數三篇의 詩風/'/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1930년에 쓴 <情思>({동광} 20호, 1931. 4) 數篇 가운데 일부를 예로 들어 보자.

2. 激論한뒤

그렇다, 우리의 理論이 정당하고,
우리의 주장이 모다 확실타하자.---
우리의 말하는 대중이 어느곳에 잇는가,
우리들중에 과연 대중이 잇는가.

대중은 저긔저 교문을 드나드는 학생의무리,
그보다도 손발에 흙묻은 농부의무리,
아니다, 도회에 헤매이는 지게꾼들,
공장에 헐떡이는 직공들이 아니냐.

동지여 테-블을 그만 두다리라,
우리사이의 주장은 모도다 옳은것이다.---
만은, 그대여, 천의 리론을 무삼하리,
돌아가 어린애 글ㅅ자한자 가르키려한다.

4. 나부터몬저 敵인줄알라

姑息과 孤疑와 躊躇,
리기적타산과 그리고 보수,
말좋은 중립, 고답, 기실은 회피,
의식적 무의식적 反動의 정체---
그의 지사연한 리론가연한 가증한 풍모---
아아 이는 현대 지식계급의
소뿌르根性 가진자의 필연의 운명일러라.

궤변과, 허위, 糊塗,
헛되히 벌린 聲勢와 그의 무내용, 무기력,
력사를 감히 창조치는 못하고
나아가는대로  을려가는 가련한 [동반자]---
실행에 림하야는 持說로 豹變하는 [캐멜레온]---
아아 이는 지나가는 世紀의,
물려가는 계급의 덮을수없는 본색일러라.

여명에 돌진하는 행렬에
알거나 모르거나 고의로 눈감으려하는,
어슬렁 어슬렁 뒤나 딸으려하는,
시대의, 민중의, 보잘것없는 기생류---
진군에 도로혀 장애나될 진취성의 불구자---
아아 나의아들아, 너의아비 그러하거든,
나부터 몬저 새세계의 너의 [敵]인줄 알라.

5 [一切의疑懼를 버리라]
( 테 [神曲] 地獄篇)

原則은 서잇다, 남은것은 細目뿐이다.
목표는 정하여잇다, --- 문제는 다만
認識의 早晩과 출발의 시각뿐일다!

그러나, 어이하랴, 아아 어이하랴
민중의 감각 이다지도 무디이고,
민중의 의지와 긔개 이다지도 침체한것을.

아아 민중아, 귀를 씻으라!
눈을 부뷔라! 머리를 닦으라! 활개를 치라!
회색의 꿈에서 깨어 현실에 步調를 맞호라!

민중아, 자각하라, 아아 그러나,
[너부터 몬저 일췌의 怯懦를 버리라,
일췌의 疑懼를 헌신짝같이 내여버리라.}

인용이 길었지만, 만일 우리가 위 시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들, 과연 이 시편이 프로문학파가 아닌 자에 의하여 씌어진 작품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실로 이 시는 프로문학 측의 權煥 등이 쓴 이른바 아지-프로詩나 /'/뼈다귀 詩/'/, 혹은 개념적 교술시와 그 모습이 다를 바가 없다. 아울러 그 내용 또한 당대 프로문학이 자체 내 비판의 취지로 쓰곤 했던, 일부 프로 문인의 小부르지와지 근성을 경계했던 것과도 다를 바가 없다. 민족문학파의 圈內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인 문인은 양주동이 거의 유일한 예로 판단되거니와, 이는 절충파로서의 다음과 같은 선언을, 단순한 선언 차원이 아닌 실천으로 옮겨 보인, 하나의 웅변이 아니었을까?

民族文學과社會文學이 氷炭不相容이라보고 相互 排擊하는諸流는 所謂宗派主義의餘毒이다. 그러나우리는 둘다 現情勢에妥當한것으로 보고 더구나兩者는 서로히 그合致點을連貫하야 合流함이 必要하다고본다. 現階段의情勢에잇서서, 民族觀念과階級精神을 서로背馳한다보는것은 그야말로 現實과理想에對하야 아울러 色盲이다. 더구나無産文學派에서 民族觀念을意識的으로抛棄하고 無視하고 甚至於排擊코저하는傾向은 무던히 錯覺的理論에 屬하는것이다. 現情勢에잇서서는 民族을 超越한階級精神도업고 階級에서 遊離한民族觀念도잇슬수업다. 우리는 [朝鮮民族人인同時에 無産階級이안이냐?] 우리의文學은 民族的인同時에 無産階級的이어야한다.({문예공론}, 1929. 5. p.44)

민족문학파에서든, 프로문학파에서든, 양자의 합치점을 창작 차원에서 실천해 본다는 것은 양주동과 같은 절충파가 아니고서는 시도조차 불가능한 것이었으므로 양주동의 이러한 詩作 행위가 異彩를 띠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민족적인동시에 무산계급적 작품인가 하는 데에는 강한 의문이 든다.
일찍이 그는 프로 문학을 비판하면서 ⑴ 그들의 작품에 남의 것 모방이 많고, ⑵ 취재에 모방이 많고, 게다가 작품의 단안이 늘 소극성이 되는 것, ⑶ 창작 동기에 고의성이 많은 것, ⑷ 표현 수단이 부족한 점 등을 든 바 있다. 특히 그는 프로 문사들의 상투성과 관념성을 정확히 공박하곤 했다. "실제에 잇어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한 민중문학을 민중에게 제공하엿는가. 우리는 얼마나 민중의 생활과 정서를 대하엿는가, 안이 일보 나아가 우리는 과연 어느 점 지 민중생활을 이해하고, 그 정신에 즉하엿는지 의문이다."라고 했을 때, 이러한 문제 제기는 실제적으로 프로 문단 내에서도 대중화 논쟁과 더불어 심각하게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情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기존의 프로시의 경향과 차별되지 않으며, 표현의 면에서도 당대 프로 문학의 단편서사시류보다도 오히려 뒤지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기 때문이다. 더구나, 만일 차별이 된다면, <情思>의 내용이 프로 문학의 허구성, 즉 그들의 민중적 기반의 허구성을 공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견될 터,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창작 동기의 고의성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는, 양자의 절충이 되지 못한 채, 오히려 敵의 칼로 敵을 치는 꼴이 되는 형국이 되어버린 셈이라 하겠다.
이 한계를 그가 몰랐을 리 없다. 이에 양주동은 1931년 [文壇側面觀---左右派 諸家에게 質疑]({조선일보}, 1931. 1. 1-13)를 통해 민족문학의 방향을 12항목에 걸쳐 제시하였다. 즉, ⑴ 민족문학은 재래와 같은 봉건적 보수적 태도를 揚棄하고, ⑵ 민족의 계급적 사실을 회피 은폐하지 말며, ⑶ 될수록 광범위한 사회층의 의식을 포용할 것, 아울러 ⑷ 민족적 문화재의 보존과 향상, ⑸ 민족적 단결 통일 역량 고조, ⑹ 계급과 교차하는 입장을 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⑺ 부득이 대립할 경우엔 보다 큰 사실을 신중히 할 것, ⑻ 민족적 감정의 선동이나 과장을 삼가고, ⑼ 계급 쪽에서도 계급적 사실 이외에 민족적 사실이 있음을 잊지 말며, ⑽ 현 단계에서 계급적 사실을 무시하는 이론 및 실천의 현실성을 폭로할 것, ⑾ 현 단계에서 계급적 사실을 은폐하는 자체의 비겁성을 揚棄할 것, ⑿ 민족의식이 궁극적 이상이 아님을 대중에게 보일 것 등을 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詩作의 方法論이 될 수 있을까? 이번에도 여지없이, 양주동은 자신의 주장을 실천에 옮긴다. 윗글을 발표한 바로 그 날에, 양주동은 다음의 시를 남긴다.

사나운 권력의
억제하는 명령앞에서
때로는 양과같이 무릎을 꿇기쉬운 대중의비겁---
혹시는 털끝만한
더러운 리욕의 밋기에 물려
물ㅅ고기같이 꼬리치며 생명을 애걸하는 개체의무력---
동지여, 그대는 낙심하는가, 아즉 참으라,
한숨을 거두고 쾌히 책상을 뒤지라.

아아 어인일가, 양과같이
그리도 온순하든 [작일]의 민중이
하로아츰 [정의]의 기ㅅ발아레 범같이 날뛰며 갓도다.
저보아, 바로전에 물ㅅ고기같이
그리도 불상히 파닥으리든 수많은 개체가
하로ㅅ밤 [부정]의 낙시ㅅ대를 두동강에 분질럿도다.
동지여, 놀람을 그치라, 이렇므로사
비롯오 이한권이 인류의 력사가 아니뇨.
--<史論>(1931. 1. 1)

이것은 광주학생 의거 이후, 1931년 원단 아침, 양주동이 교수로 재직하던 평양 숭실학교에서 학생들의 의거가 벌어졌을 때, 그 광경을 교수실에서 비분강개해 바라보며, 아울러 인텔리의 무기력을 뼈저리게 느낀 나머지 그 날 밤에 쓴 시로 알려져 있다. 앞서의 여러 시에서 보듯, 학생은 그에게 민족이요, 민중이다. 따라서 이 작품 속에는 민족과 계급의 대립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절충인지, 종합인지, 그도 저도 아닌 것이 될지는 자신 있게 말하기가 힘들어진다. 이럴 정도라면 굳이 왜 절충이 필요한 것인지, 양자가 각각 자신의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것과 작품 실천상 어떻게 차별되는지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요컨대, 주장 차원에서가 아니라 창작 차원에서 볼 때, 절충주의의 치명적 결함은 그 자체의 미학적 이론이 부재하다는 데 있다.
그 결과, 시집 {朝鮮의 脈搏} 서문에서 약속했던, 즉 이러한 창작 경향을 "좀더擴充하고 보담深化"하는 "今後에屬한 課題"는 결국 수행되지 못한다. 앞서 인용했던 <님께서 편지왓네>를 예외로 하고는, 여하한 후속편도 제작되지 않은 채, 이 <史論>은 사실상 절필시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관념의 과잉과 감수성의 부재가 낳은 결과는 이와 같았다. 그의 시를 비판하기는 쉬운 일이다. 그의 시 세계에 대한 정밀한 연구가 부재했던 데에는 양주동 자신의 책임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연구자의 입장에서 볼 때, 詩史를 정리하는 데 필요한 매력 이외에 그의 시가 별다른 연구 의욕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성실성과 치열함을 인정하는 데 결코 인색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시에서 비평의 세계로 나아갔을 때, 그의 두뇌와 논리가 빛을 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시를 버리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이론과 실천을 병행하고자 끊임없이 고뇌하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양주동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책임감이 남달랐던 문인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본고가 그의 이론과 실제 시작 행위를 꾸준히 대비하며 증명하는 데 주력했던 사연 역시 이와 관련이 깊다. 그것은 양주동에 대한 우리 세대의 예의이자 책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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