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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3년 탄생100주년문학인기념문학제>김영민 발제문
이름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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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념과 문학의 길
 탄생 100주년을 맞는 문인들을 통해 바라본 문단 구도

김영민(연세대 교수)
 

1.

권환, 김기진, 김영랑, 김진섭, 송영, 양주동, 윤극영, 윤기정, 이은상, 최명익 등 10명의 문인이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이들 10명의 문인은, 각자 서 있는 자리와 바라보는 방향은 달랐지만 모두가 치열하게 자신의 길을 살다 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시인이며 소설가였고, 자신의 이념을 이론적 작업을 통해 드러내며 다양한 문학 논쟁을 펼친 비평가들이기도 했다.
이들의 문학적 궤적을 추적하는 일은 그 자체가 곧 1920년대 이후 한국 근대문학사의 커다란 줄기를 찾아 보여주는 작업이 된다. 이점에서만 보더라도, 우리는 이들이 남긴 족적의 크기를 실감할 수 있다.
김영랑과 최명익을 예외로 한다면, 이들은 모두가 1920년대에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20년대는 그들의 자연 연령이 10대를 마감하고 20대에 들어서는 시기였다. 그런데, 김영랑 또한 {시문학}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가 1930년 3월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의 등단 시기 역시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문학 활동이 시작되던 1920년대는, 문학사적으로 볼 때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 만남의 한 축에 [카프(KAPF)]와 프로문학이 자리 잡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카프]와 프로문학을 어떻게 평가하건, 그것이 1920년대 이후 한국문학사에 미친 영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어떤 연구자들은 [카프]가 태동하던 1920년대 초·중반을 본격적인 한국 현대문학의 출발기로 보기도 하는데, 이때 가장 큰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한국문학과 세계문학과의 직접 접속이라는 측면이다.
탄생 100주년을 맞는 10명의 문인 가운데 상당수가 [카프]와 프로문학이라는 매개 항과 어떤 형태로든 연관성을 맺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들 문인이 지녔던 [카프]와 프로문학에 대한 생각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권환, 김기진, 송영, 윤기정 등은 바로 그 [카프]와 프로문학의 태동 및 활성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는가 하면, 이은상, 김진섭 등은 그와 대립하는 자리에 있었고, 양주동은 이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2.

1920년대 초반은 지속적인 민족주의 운동의 전개과정 속에서 사회주의적 경향이 분출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경향은 단순히 새로운 사상에 대한 관심이라는 측면을 넘어, 반일 자주독립을 향한 열망의 새로운 표출이기도 했다. 당시 지식층들은 종래 방식의 민족주의 운동만으로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고, 그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적극적 자세로 대응하며 검토하고 수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문단의 분위기는 이러한 사회운동 전반의 분위기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1920년대 초반의 한국 문단은 {창조}, {폐허}, {백조} 등으로 대표된다. 이들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문학인들을 우리는 각각의 유파로 분류해 부르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하나의 유파로 불리기에는 너무나 편차가 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구체적인 신문학운동(新文學運動)을 지향했다고는 하나, 그렇게 하기에는 구성원들 사이의 응집력이 크게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응집력 있는 문학운동을 지향하면서, 사회전반의 변화와 열망을 문단에도 반영하기 위한 구체적 시도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 것이 [염군사]와 [파스큘라], 그리고 [카프] 등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문화 및 문학 단체의 등장이다. 이들 새로운 단체의 등장에 김기진, 송영, 윤기정이 각각 중요한 역할을 맡아 기여하게 된다.
이 가운데 특히 김기진의 등장과 활동은 이후 한국문단의 지형도를 바꿀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일본 유학 도중 프로문학을 접하게 된 김기진은 한국에 새로운 문학의 씨를 뿌리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1923년 귀국한다. 귀국 후 그는 {개벽}을 통해 [클라르테운동의 세계화] 등을 발표하고, {백조}에는 [떨어지는 조각조각] 등의 글을 발표한다. 김기진의 새로운 예술에 대한 주장은 특히 감상주의에 젖어 있던 {백조} 동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백조}는 더 이상 명맥을 이어가지 못하게 된다.
김기진은 자신의 친형 김복진 등과 더불어 /'/새로운 경향의 문예운동/'/을 제안하며 [파스큘라]를 결성한다. [파스큘라]의 구체적 결성 취지는 /'/인생을 위한 예술/'/, /'/현실과 싸우는 의지의 예술/'/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문학인, 미술인, 연극인 등으로 구성된 [파스큘라]의 존재는 1923년 겨울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송영은 /'/무산계급 해방문화의 연구 및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잡지 {염군}의 편집을 매개로 하여 생겨난 예술운동단체 [염군사]의 일원이 되어 활동한다. 그들이 기획하고 편집한 잡지의 대부분은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그는 꾸준히 소설과 희곡을 집필해 투고한다.
김기진의 [파스큘라]와 송영의 [염군사]는 여러 차례의 회합을 거쳐 서로 합치기로 합의 한다. 이들은 /'/예술을 무기로 하여 일체의 전제 세력과 항쟁한다/'/는 요지의 슬로건을 내걸고[카프] 창립총회를 열게 된다. 이때가 1925년 8월 23일이었다.
윤기정과 권환은 김기진· 송영과 달리 초기 발기인 명단에는 들어 있지 않았으나, 뒤에 합류하여 [카프]의 일원이 된다.
김기진은, 귀국 후 처음으로 발표한 글 [프로므나드 상티망탈]에서 당시 서울의 문단 분위기를 비판하며 예술과 문학의 뿌리를 근저로부터 개혁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그가 본 서울의 문단은 /'/기성문화에 중독되어 병든 얼굴로 오로지 자기 계급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중산계급자들이 활약하는 곳/'/이었다. 그는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지금 글을 쓴다는 문학자들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과연 우리의 현재 생활 상태에서 생의 본연한 요구인 문학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을 던진 후 그에 대해 스스로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당시와 같은 상황에서는 비굴과 인종과 타협과 기만과 도피와 절망의 문학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기진의 이러한 상황 판단은 곧 신경향파 문학과 프로문학의 대두 배경이 된다. 김기진은 [카프] 결성의 주도적 역할을 맡았지만 그가 조직의 운영을 주도하지는 않는다. 특히 [카프] 결성 직후에 이루어진 박영희와의 내용·형식 논쟁에서 외형상 패배를 시인한 이후에는 조직 운영의 핵심에서 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논쟁에서 김기진은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통한 문학성의 획득이 부르조아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프로문학에서도 중요한 것이라고 일관성 있게 주장했다. 그는 이런 생각을 바탕에 두고, /'/소설이란 여러 가지 재료를 적재적소에 배치한 건축물과 같은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기진의 이러한 생각은 세계관과 계급적 태도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비판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김기진의 갑작스러운 사과였다. 그렇지만 문학에 대한 김기진의 기본적 생각은 논쟁이 이렇게 사과로 마무리된 이후에도 전혀 바뀌지 않는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바라다보면, 그는 [카프]의 구성원들 가운데 가장 일관성 있고 합리적인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문학운동의 확산을 위해서는 대중의 호응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제안한 /'/문학대중화론/'/, 문학대중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구의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문제를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농민문학론/'/, 프로문학에 알맞은 창작방법의 모색을 위해 제안한 /'/변증적 사실주의론/'/ 등은 모두가 우리문학 이론 전개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점하게 된다.
김기진과 박영희를 중심으로 한 내용·형식 논쟁은 [카프] 내적으로는 이른바 방향전환의 계기가 되고, 외적으로는 아나키스트와의 논쟁의 빌미가 된다. 윤기정은 이 방향전환 및 아나키스트 논쟁에서 모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다.
윤기정은 아나키스트 논쟁을 통해 문단에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당시 대표적 아나키스트 문인이었던 김화산은 프로문예운동의 핵심이 아나키즘 운동에 있음을 천명하며 [카프] 중심의 프로문예운동을 비판한다. [카프]에서는 김화산의 이러한 논의를 자신들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보고 집단적으로 대응하는데, 그 대응의 가장 앞자리에 섰던 이론가가 윤기정이다. 윤기정은 [계급예술론의 신전개] 등의 글을 통해, 아나키스트를 비판하고 프로문예 운동의 정통성이 [카프]에 있음을 천명한다. [카프]는 아나키즘 논쟁을 거치면서 조직을 정비하고, 자연발생적 프로문학에서 목적의식을 강조하는 프로문학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것이 1927년 무렵에 진행된 [카프] /'/제1차 방향전환/'/이다. 당시 [카프]의 방향전환 논의는 문단 자체만의 필요에 의해 태동한 것이라기보다는 전체 사회운동의 방향전환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방향전환론이 대두하면서 [카프]는 정치투쟁을 더욱 중시하게 되고, 자신들의 조직을 예술가 중심의 특수 조직에서 예술에 관심을 갖는 모든 이들의 대중적 조직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윤기정은 이 시기 [무산문예가의 창작적 태도] 등의 글을 통해 방향전환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먼저, 자연발생기의 창작 태도를 반성하고 목적의식기의 창작 태도를 취할 것을 천명한다. 아울러 이 시기의 문학의 역할은 현실을 /'/해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변혁/'/하는 데 있는 것임을 강조한다. /'/어떻게 쓸까/'/를 고민하기보다는 /'/무엇을 쓸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그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권환은 1930년대 초반에 진행되는 [카프] /'/제2차 방향 전환/'/의 기폭제 역할을 하며 평단에 등장했다. 그는 [카프] 조직의 형태와 구성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창작 역량 본위에서 투쟁 역량 본위로 조직을 개편할 것을 제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카프]를 본격적인 사회운동단체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권환은 창작 주체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명하는데, 의식 낮은 인텔리 작가보다는 미숙한 노동자 출신 작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당시 [카프]의 논의가 지나치게 지식인 중심으로만 전개되었다는 비판을 생각한다면, 권환의 이러한 주장은 나름대로 문학 대중화 논의의 폭을 넓혀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대중예술 장르의 확산에 대한 생각도 지니고 있었다. 기존의 잘 다듬어진 예술 양식들뿐만 아니라, 거칠지만 현장을 담고 있는 투쟁리포트 등도 대중예술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은상과 김진섭, 그리고 김영랑 세 사람 사이에 특별한 공유항이 있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카프]를 매개항으로 했을 때는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그와 대립 혹은 대칭 되는 자리에 서 있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거칠게 말해, [카프]가 1920∼30년대 문단 지도(地圖) 왼편의 대부분을 점한다면, 이들 세 사람은 오른편의 나누어진 한 영역씩을 각각 점하며 문단에 크고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카프]의 프로문학과 첨예하게 대립했던 일군의 문인들 가운데에는 국민문학파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엄밀히 말해 국민문학파란 동인도 아니었고, 특정한 조직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를 하나의 유파로 분류한다는 것은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용어는 1920 ∼30년대 당시에도 사용되었고, 또 기존의 문학사들 역시 이러한 표현을 보편화시켜 사용하고 있다.) 분류하자면, 이은상은 이 국민문학 계열의 문인이라 할 수 있다.
이은상을 비롯한 국민문학 계열의 문인들이 [카프]의 프로문학과 충돌하게 된 구체적 계기는 시조부흥론에 있다. 시조부흥론은 1920년대 중반 이후, 프로문학운동에 대항하는 국민문학운동의 구체적 실천 방안의 하나로 제안된 것이었다. 국민문학 계열의 문인들은 [카프]가 강조하던 문학의 세계적 보편성과 국제적 연대성이라는 측면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보다는 우리나라 문학만이 지니고 있는 독자성 내지 특수성을 추구하는 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시조부흥운동/'/이었다. 프로문학의 세계주의에 대해 국민문학은 조선주의를 내세우게 된다. 이은상은 1927년 3월 [시조부흥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 시조의 부흥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자기 기백을 살리는 길이 될 것임을 주장하고 그 일을 실천해 나간다. 그는 [시조문제] 등의 글을 통해서도, 민족심과 향토미와 관련한 시조의 육성을 강조하고, 조선이 그 자신을 발견하고 그 자신을 숭상하기 위해서 시조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을 주장한다. 이은상을 비롯한 국민문학파의 시조부흥론에 대해 [카프]의 이론가들은 적지 않은 반론을 펴며 맞서게 된다. 김기진 역시 반론을 펴나간 이론가 중의 한 사람이다. 시조부흥론에 대한 김기진의 비판은, 시조부흥론이 강조하는 조선주의는 곧 국수주의·보수주의·정신주의 등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진섭은 동경 유학 중 정인섭 등과 함께 [외국문학연구회]를 결성하고, 서구문학의 유입과 소개를 통하여 조선문학의 수준을 높인다는 생각 아래 {해외문학}의 창간에 관여한다. 그는 1927년 1월 발간된 {해외문학} 창간호에 [표현주의 문학론]을 써서 외국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를 시작한다. 이런 일들로 인해 그는 {해외문학}파 문인으로 불린다. 김진섭 자신은 프로문학 계열 등 여타의 문인들과 직접 충돌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외문학}파의 주요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인 정인섭이 프로문학을 공격하고, [카프]의 구성원들인 송영과 임화 등이 {해외문학}파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나섬으로써 [카프]와 {해외문학}파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선이 그어지게 된다. {해외문학}파는 [카프]에 대해, 프로운동의 조선적 특수성을 살지리 못한 채 /'/직역적 국제주의/'/라는 부정적 면모만 노출시켰다고 비판한다. [카프]가 일본의 외형을 직수입하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으며,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적극적 비판에도 실패하고 철저히 침체된 면모만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프로문학 진영의 송영은, {해외문학}파가 중간파 내지 순수학구파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실은 이들이 우익의 입장에 서서 중산계급 이상의 소시민과 인텔리를 대상으로 번역활동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시기 송영은 {해외문학} 파에 대한 분명한 경계심과 적대감을 드러내게 된다.
{시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던 김영랑은 문단 활동 당시 프로문학 계열의 문인들과 직접적으로 대립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김영랑은 후일의 연구자들과 문학사가들에 의해 유미주의자, 순수한 감각 추구의 서정시인, 향토성을 강조한 시인 등으로 정리된다. 김영랑에 대한 이러한 정리는 문학사의 새로운 측면에 대한 독창적·독자적 기여라는 긍정적 평가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반면 당 시대 삶의 현장으로부터의 철저한 유리라는 부정적 평가로 이어지기도 한다. 김영랑에게 내려지는 이러한 평가들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두 [카프]가 남긴 문학사적 자취와는 크게 구별되는 것이다. 김영랑은 후세의 연구자 및 문학사가들에 의해, [카프]와는 가장 먼 거리에 놓이는 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셈이다.
양주동은 문단이 이른바 좌·우파로 나뉘어져 논쟁하던 시기, 스스로 중간파를 자처하며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맡아 했던 문인이었다. 양주동은 진정한 국민문학 혹은 민족문학의 건설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프로문학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는 견해를 표명한다. 그는, 프로문학의 근본정신은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현금의 조선사회에서 프로문학의 발생은 필연적/'/이라는 말로 프로문학에 대한 호의를 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론적 견해와는 달리, 실제 나타나고 있는 프로문학적 현상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현금의 프로문학은 아직도 조선이 요구하는 참다운 프로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주동은 국민문학파와 프로문학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는 당시 문단의 문제점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을 감행한다. 그는 프로문학의 이론가들이 계급문학을 고취하는 일에만 몰두하여 민족사상을 망각하게 됨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고 비판한다. 아울러 국민문학파에 대해서는 그들이 하등의 구체적 이론도 지니지 못한 상태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비난한다. /'/현 시기 우파라 할 수 있는 민족주의 계열의 문학은 그 정신은 가상하나, 간판만 위대할 뿐이요 내용이 공허하고 실제 방법론이 결여되어 그 실질적 존재 여부가 의심스럽다는 것/'/이 양주동의 판단이다. 그는 논의의 결론으로 /'/민족문학과 사회문학, 즉 국민문학파와 프로문학파의 합류/'/를 주장한다. 민족문학과 사회문학의 상호 배격은 종파주의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현 정세에서는 민족을 초월한 계급정신도 없고, 계급에서 유리된 민족관념도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은 양주동의 절충주의적 입장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
양주동의 이러한 주장은 국민문학파나 프로문학파 모두에게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특히 프로문학파로부터 집중적인 비판을 받게 되는데, 김기진과 송영, 그리고 윤기정은 모두 그 비판의 중심에 서 있었다. 김기진은 양주동의 주장이 국민문학파의 주장과 대동소이하다는 것과, 민족주의 문학과 국민문학을 연결시켜 논의하는 것이 우선 수긍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윤기정은 양주동에 대해 /'/중간파적 태도를 취하는 듯하면서도 실은 반동작가와 합류하는 작가/'/로 단정하고 비판한다. 송영 역시 양주동의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가 매우 모호하다는 것과, 그의 계급적 입장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들어 중간파 문학론을 공격한다.
양주동의 절충적 주장이 현실적으로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단의 대립을 중재하고, 그들 사이의 합의를 통한 새로운 문학운동을 펴보고자 했던 양주동의 의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의 이러한 절충적 주장은 단순히 국민문학파와 프로문학파 사이의 대립을 완화시키는 데만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는 더 나아가 1920년대 중반 민족의 공동 이익을 위한 좌·우 합작, 즉 일제하 민족주의 진영의 우익 세력과 사회주의 계열의 좌익 세력이 연합을 꾀하며 [신간회]를 조직한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 이러한 점에서 양주동의 논의는 일제하 사회운동의 전반적 맥락 속에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잘 드러날 것이다.

3.

오늘 논의의 대상이 되는 문인들에 대해 그 가운데 일부는 /'/이념/'/의 길을 택했고, 또 다른 일부는 /'/문학/'/의 길을 택했다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고, 또한 그러한 방식의 분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문학사의 흐름 속에서 /'/이데올로기를 얻은 대신 문학을 잃었다/'/거나, /'/본격적인 문학을 위해서 이념에 대한 경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류의 술회와 주장을 접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이념/'/과 /'/문학/'/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의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논의의 대상이 되는 여러 문인들이 걸어간 길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 이들에게 /'/이념/'/과 /'/문학/'/은 단순한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김기진이, /'/문학을 일종의 선전문처럼 사용하는 일에 대해 예술지상주의자들 못지않은 슬픔을 느낀다/'/고 고뇌를 드러냈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카프]의 문인들에게도 문학 자체가 소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에게는 그 소중함을 지키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그들은 현실이 문학에 미치는 힘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지 않고는 자유로운 문학 활동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그러한 판단에 따라 자신들의 길을 간 것이었다.
[카프]와 충돌했던 여타의 문인들에게도 이념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국민문학 계열의 한 사람으로 시조의 현대화 작업에 진력하며 우리 문학의 독자성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던 이은상이나, {해외문학}파로 분류되면서 세계문학의 소개에 진력했던 김진섭, 그리고 {시문학}파의 시인으로 활동하며 우리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김영랑 역시 자신들이 품었던 생각과 지향하던 문학세계가 분명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이르는 사이, 이른바 문단의 좌·우·중간파를 대표하는 문인들로 기록된다. 이들의 대부분은 일제하 민족문학의 중요성을 직·간접적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민족문학에 대한 이해와 그 민족문학의 구현을 위해 각자가 택한 구체적 문학 활동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이념이 달랐고, 지향하는 문학 세계가 달랐으며, 따라서 걸어간 길이 달랐다. 하지만, 그들이 닦아 놓은 토양과 그들이 열고 간 여러 갈래의 길이 우리 문학사를 풍성하게 살찌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탄생 100주년을 맞는 몇몇 문인들의 문학적 궤적을 통해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이르는 문단 전체의 구도가 잡히고 그 지형도가 그려진다는 것은, 그만큼 이들의 위치가 중요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발표를 마치며]
여기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못한 문인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양해를 구합니다. 그것은 그분들의 업적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기보다는 여기서 설정한 1920 ∼1930년대 /'/문단 구도/'/라는 접근법을 통해 논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진행되는 개별 발표를 통해 충분히 논의가 이루어지리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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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4. 1014
54

  제8회 세계작가와의 대화: 김지하 발제문

2004.10.24.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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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회 세계작가와의 대화: 심포지엄 발제문(안 득)

2004.10.24. 1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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