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십여 전 꼭 한번 스키장에 가본 적이 있다. 내 주제에 스키장이 가당키야 하겠냐만,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후배 덕을 보았다. 장비대여에서 리프트 사용, 슬로프 사용이 모두 공짜였다. 그러니까 좀 얌체 짓을 한 거다. 공짜 좋아한 탓일까. 사실 나는 그곳에서 충격을 받았다. 흉흉한 소식이 그칠 새 없는 아이엠에프 시절이었다. 위안이 필요했던 거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많은 이들로 북적댔던 건. 어쨌거나 휴게실 벽에 커다랗게 내걸린 글귀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I‘M Fine. 난 괜찮아요.

그곳에서 아이엠에프는 아임파인의 약자에 불과했다. 세월이 흐른 뒤 알았다. 아이엠에프가 누군가에는 기회였다는 걸. 정말 괜찮은 사람들도 있었다는 걸. 수많은 중소기업이 무너지고 파산한 이들이 철로변이나 도로변에 자신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던 그 시절에도 누군가는 행복을 구가했다. 한동안 우리는 그런 이들을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재테크의 달인 등등 온갖 수사를 구사하여 칭송하며 그들을 닮으려고도 했다. 그 사이 졸부들의 나라라는 별명을 갖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삶이 잔인한 이유는 화려한 수사(修辭) 때문이다. 아이엠에프에서 아임파인을 연상할 수 있는 것도, 우리 몸을 갉아먹는 바이러스에 행복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도 모두 수사가 허용되기 때문이다. 이 화려한 수사와 현실 사이의 아득한 거리 앞에서 이따금 혼동을 느낀다 해도 상관없다. 수사는 늘 현실을 압도하는 법이니까.

화려한 수사에서도 위로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행복을 구가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위기를 기회로 삼는 아름다운 이들은 어떤 분들일까. 그리하여 훗날 우리는 또 어떤 별명을 추가하게 될까.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 ‘난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자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나는 모른다. 그토록 하고 싶었으나 입 밖에 내뱉는 순간 달아나 버릴까봐 난 행복해라는 말을 꾹 참고 사는 다른 많은 이들처럼.

<2009. 2. 3 손홍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