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해마다 그렇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12월은 송년회의 달이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풍성한 분위기는 아니라지만 그러면 어떠랴. 정다운 사람들과 올해의 사건사고를 안주 삼아 술 한 잔 마시며 시름을 달래고 내일을 기약하면 그만인 것을.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처럼 되던가. 내키지 않아도 참석해야 하는 자리가 훨씬 많은 법이니 말이다. 송년회가 슬슬 지겨워질 무렵의 이슥한 밤이었다. 모처럼 낙낙한 시간을 보내는데 지방에 사는 불알친구한테 느닷없이 전화가 왔다. 문상을 위해 서울에 올라왔는데 얼굴이나 보자는 거였다. 어마뜨거라. 젠장, 왜 녀석은 하필 이럴 때 행차했단 말인가. 녀석은 내 목소리에서 주저하는 기미를 느꼈는지 불편하면 그냥 내려가겠노라 말했다. 따져보니 얼굴 본 지가 한참 되었다. 서울나들이가 잦은 녀석도 아닌 터라 이번에 못 보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녀석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마음은 갈팡질팡했다. 미안해 친구야, 오늘은 영 상태가 좋지 않으니 다음에 보자. 새벽 일찍 나가야 하거든. 이런 말들이 재채기처럼 터져나오려 했다. 소심하게 혹은 비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사이 녀석한테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외투를 걸치고 현관문을 열자 12월답게 맵찬 공기가 얼굴을 후려쳤다. 찬 기운에 절로 눈물이 찔끔 났는데, 이 모든 게 녀석 때문인 것만 같았다. 그때의 내 입은 오리 주둥이나 한가지였으리라. 골목 끝 빵집 앞에 구부정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 녀석은 구두 끝으로 바닥을 툭툭 차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보았다. 빵집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빛이 그의 얼굴에 부딪히며 금가루처럼 흩날렸다. 하얀 잇바디를 드러내며 녀석이 팔을 번쩍 들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녀석이 발소리만으로도 나를 알아봤음을, 여태의 송년회는 말짱 도루묵이며 진짜 송년회가 시작되었음을. 그 동안의 주저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젠장, 나도 모르게 화답하듯 팔을 번쩍 들었으니 말이다

<2008. 12. 16 소설가 손홍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