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몇 해 전 고향에 폭설이 내렸다. 도로가 끊기고 통신이나 전기가 두절된 건 약과다. 하우스가 주저앉고 축사가 무너지면서 가축은 물론 사람이 상하기도 했다. 66년 만에 찾아온 폭설이랬다. 원시시대나 현대나 별 다를 게 없다. 사람은 자연 앞에서 한없이 나약하다. 한데, 어떻게 사람은 자연의 무자비한 비질에 죄다 쓸려가지 않고 여태 살아남은 것일까. 그해 폭설에 한 선배의 아버님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하우스 농사를 하시는지라 남들보다 피해가 컸던 거였다. 엿가락처럼 휘어진 파이프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쉰 선배 아버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쥐꼬리만한 보상금으로는 원상복구가 힘들었다. 통장을 헐어 비용을 마련하고 비닐하우스용 파이프를 구입했다. 특대 사이즈로. 주변 사람들 모두 말렸다. ‘우리 죽기 전에 이런 폭설이 또 오겄나?’ ‘세기의 폭설이라는 데 괜한 데 돈 쓰지 마소.’ 선배의 아버님은 묵묵부답이었다. 파이프로 골격을 세운 뒤에는 역시나 전보다 두껍고 질긴 비닐을 씌웠다. 사람들은 선배의 아버님이 세운 비닐하우스를 보며 끌탕을 했다. ‘저게 하우스여 요새여?’ 그럴 법도 했다. 선배의 아버님이 백세까지 사신다 해도 그해만큼 눈이 펑펑 쏟아질 가능성은 없었다.

이듬해 사람들의 입이 쫙 벌어졌다. 지난해에 버금갈 만큼 많은 눈이 내렸다. 새로 지은 하우스며 축사며 속절없이 무너졌다. 요새 같은 하우스만 빼고. 비로소 선배의 아버님은 입을 열었다. ‘봤지? 유비무환이여.’ 그렇다. 인간은 재난에 대비하는 능력을 지닌 덕분에 여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다. 올해도 고향에 첫눈치고는 많은 눈이 내렸다. 걱정이 된 나는 고향집에 전화를 했다. 건조장으로 사용하는 작은 비닐하우스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콧방귀를 뀌었다. ‘걱정마라. 눈이 좀 쌓인다 싶으면 내가 득달같이 달려가서 넉가래로 긁어내리니깐. 제깟 눈이 내려봤자 지붕에 쌓일 새가 없는데 하우스가 무너질 리 있겄냐?’ 유비무환도 제각각이다.

<2008. 12. 9 소설가 손홍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