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표명희의 첫 소설집 [3번 출구]
(창작과비평사, 2005년 12월 20일)

2001년 제4회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에 '야경'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표명희의 첫 소설집이다. 한국 사회 여성들의 문제를 독특한 리얼리즘으로 형상화한 여덟 편의 소설을 수록했다. 세련되고 안정된 문체, 머뭇거리는 듯하면서도 엉뚱하고 당당한 여성 캐릭터들은 표명희 소설이 가진 독특한 매력.

죽은 남편의 정부로 의심되는 여자를 찾아가는 주부('죽령터널, 지나다'), 가부장적 질서에 숨막혀하며 시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애완견에게 씰리카겔을 먹이는 위악적인 며느리('씰리카겔') 등이 소설집의 여성 주인공들은 점점 더 이기적이 됨으로써 자신을 현시하고자 한다. 동시에 우리 사회가 하류층 여성들을 권위적으로 지배하는 메커니즘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표제작 '3번 출구'는 한 직장 여성의 위태로운 삶을 그려낸다. 외모도 학벌도 별볼일없는 디자이너 '나'. '나'는 전문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직장에서 수석 디자이너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사랑 때문에 박실장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빼앗기고, 결국 사랑도 잃게 된다. 회사를 그만둔 '나'는 퇴직금 전부를 성형수술에 쓰면서 점차 정신착란에 빠져든다.

표명희 1965년 대구 출생. 2001년 '야경'으로 제4회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책 속에서

석달간의 병실생활에서 아버지를 사로잡은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추상이 아니었다. 뼈와 가죽만 남은 아버지의 야윈 몸과 허약해진 마음을 송두리째 거머쥐고 있던 것. 그것은 바로 엄마의 손맛, 삶의 집착만큼이나 끈끈하고 깊었던 맛에 대한 욕망이었다. 애벌레 시절 먹던 잎의 맛을 잊지 못해 평생 그 나무 주위를 떠돈다는 나비의 생리 같은 것. -- 본문 140쪽, '씰리카겔' 중에서


::작가의 말

언젠가 나는 곱창을 씹으며, 내 소설도 이런 뒷고기 운명을 닮았으면, 하는 생각을 떠올린 적이 있다. 한 생명체의 마지막 허드렛일을 도맡음으로써 몸을 정화시켜주는, 정작 자신은 군내를 풍길지언정 온몸에 활기를 불어넣고 향취가 살아나게 해주는, 주목받지 못하는 운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제 일을 해내는 그런 역할이 빛나 보였던 것이다.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작품, 오래오래 질기고 튼튼하게 살아남는 작가. 그 두 가지를 나는 동시에 소망한다. - 표명희


::추천글

표명희의 세계는 그녀의 문장처럼 고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세상의 고요함과 닮았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듯, 이 세상도 소설도 표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고요함의 내면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씰리카겔'을 읽어봐야 한다. 그녀 작품의 표면적 고요함은 그 내면에 깃든 슬픔과 절망, 분노와 외로움을 감추는 뚜껑이나 포장, 아니면 툰드라의 얼음 벌판과 같다. 툰드라의 식물 같은 그녀의 인물들은, 작가와 더불어, 이 세상에 뒤덮인 얼음이 녹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다같이, 이놈의 얼음벌판에서 발이 시려 부들부들 떨고 서 있는 자들이 아닌가. - 최인석 (소설가)

표명희 소설의 미덕은 관습화되고 자연화된 영역을 벗어난 여성 캐릭터들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치밀하고 냉정한, 때로는 영악하기까지 한 그녀들의 캐릭터를 통해 소설은 여성의 문제에 접근해간다. 모두 한통속인 세상 혹은 시간을 견디면서 점점 발칙해지고 영리해지는 여성 캐릭터들. 그래서 그녀들의 반란은 은밀하면서도 치명적이다. - 소영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