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1. 터전

하늘에
푸른 빗장을 풀어
햇살을 풀어제치면
무지개가 동서로 걸리는
터

흰옷 입은 사람들이
강강술래 흥겹게 부르며
배두대간 등줄을 타고
산과 벌 그 어디에서나
풍성한 아사달을 열었다

천신(天神)을 우르르
두 손 모으고
땀 흘려
농토를 일군
창시(創始)의 맥박이
줄기줄기 뻗어

할배와 할배의 할배가
뜨거운 사랑
봉화불로 솟구치며
화강암 암벽에 새겨둔
세월의 푸른 미소
천마의 기상으로 끝도 없이
달려온 박달의 혼

억만년을
돌려야 할
이 큰 수레바퀴
어진 품 그윽하게
청사에 푸른 문을
여닫으며 살아야 제!

2. 망향에 흩뿌린 피눈물

암록강 두만강 건너
짚새기 자국 남기며
된바람 성긴 눈발을
남루로 걸어간
님이
송화강 해란강에
피눈물을 흘렸답니다

장백산맥 깊은 골짜기에
소쩍새 울음으로
다 채우고
만주벌 떠오른 해를 보며
조선의 고향을
가슴에만 묻었던
품 이언만

쓸어져도
일어서고
또 일어서서
비분에 한(恨) 응어리
청솔 옹이 된 채
무궁화 꽃 가슴
지린성 얕은 산지에
무덤 하나 남겨둔
님
거기서 저 푸른 영원을 지키고 있습니다.

3. 녹슨 철마는 일어나 기적(汽笛)높이 울리며 달려야지

모두가 한 마음
궂은 다짐으로
다시금 되찾은
우리들의 터

그 뜻은
다만 하나였음에도
둘로 쪼개진
그래서
피맺히는 전쟁의 역사 한 페이지
남겨 둔 아픔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등 되돌려
살아온
한(恨)의 몸부림은
찢어진
반쪽 이 산, 하에
과원(果原)의 오색 꿈이
쌍무지개 뜨는
저 하늘 그려두고

휴전선에
주저앉아
울음조차 녹슬어 적묵(寂默)으로
잠이던
철마 한 쌍 일깨워
경의선. 경원선. 동해북부선 철길 넘어
넘어
가야지 달려가야지
만주벌. 시베리아 저 광활한 벌판에
고구려 혼불 찾아
달려가야지

4. 북한산 뻐꾸기

불러도
불러도
메아리는 없다

지천명 저 세월
푸른 빛 더운 눈물로
밤 낮 울었어도
돌아오는
메아리는 없다

기다림에 목 타는
가슴속
한 덩이 뜨거운 해
광휘로 출렁이는
하늘 우르르
목놓아 울었어도
메아리는 없다

살아온 나날보다
살아갈 나날이
보다 짧아진
내 주름살의 굵기보다
더 거칠어진
금강산 미인송이
나이테를 돌리고만 있는데

더운 땀방울
쇳물로 튀어
삘딩 숲이 된 도심 한복판에서
피 더운 함성으로
울었어도
군사분계선 그 북쪽을
넘을 수 없어

불러도
불러도
돌아온 메아리는 없다

5 오두산 소쩍새

누굴 애타게
기다리는
새는
밤. 낮
서울 쪽 서울 쪽
목 뺀 울음 토해내고 있다

거센 창파에 허덕이며
가슴에만 묻어 둔
그리운 별
바라볼수록
허탈한 수렁 속 깊이에서
뛰쳐나와야 할 외침인데

쾡한 눈망울의
그대가
저 언덕 너머
그 너머에서
서울 쪼옥 서울 쪼옥
바람 따라
메아리 따라
울리고 있다

보리꽃 피는
보리꽃 지는
오두산 골짜기에서
푸른 세월
풍화로 녹스는
철조망

군사도로 벌겋게 홈 패인
북쪽 민둥산
밝은 아침해는 여전히 떠오르는데
자지러지게 굴러 떨어지는
한 귀 바퀴 소쩍새 울음
앙가슴 후벼파며 울고 있다

6. 고향찾기

돌아가자
돌아가자
할배의 따슨 품으로
돌아가자

이념의 허울 쓰고
놀아난 지천명 세월
피눈물 뿌리며
살아온 내 형제야

이제는
짙게 가리운 저 허망한 껍질을 벗고
돌아가자
돌아가자
할배가 만든 사랑의 마을로

봄바람 훈훈한 향취 숨쉬는
맥박을 따라
초록빛 내 산하 빼어난 모습이 되어
서로가 더불어 함께 살아갈
내 고향 아사달 꽃피는 마을로
돌아가자
돌아가

이 산과 저 산이
정답게 손목 맞잡고
뻗어 내린 우리들의 터전에
저 바다 격랑 치는 파도가
아무리 험하다해도
우리는 한 핏대로 태어났기에
할배들이 가꿔온 내 역사 찾아서

끓는 피
하나로 묶어 놓고
믿음의 소망 꽃피는 마을로
사랑의 꽃씨 뿌리면서
살아가자
살아가

7. 금강산 가는 길목

육로 금강산관광 길에
남방 한계선 지나
북방 한계선도 넘어
차창에 스쳐간
녹슨 철판 위 자획조차 희미한
"휴전선" 팻말도 또 지나

새떼들만 넘나들던
적막한 녹음 바람
흔들고 지나간 자리
삼복 더위 햇빛에 땀 절인
경계의 그 사람은
부동의 자세로 버티고 서서

나와 너를 잇고 있는
동해북부선 발가벗은 철길노반 언덕 위에
새 철길 다시 놓아
사랑의 가교 얹어 볼까
다시금 눈뜨는 피안의 저 환희를
그리는 눈자위에 글썽이는이 눈물

재물보다 귀한 사람의 향내
그 곳에 두고 싶어
반 백년 그리운 정의 꽃씨를
흙 한 줌 저 돌부리에 뿌려 볼 수 있었으면
차창에서 손이 라도
한 번 흔들어 볼 수 있었으면
까만 얼굴에 깡마른
말 없는 그 사람은
어느 한적한 산사 앞 돌탑의 모습으로
눈망울 깜박이는 작은 미소도 없이
팔 높인 직각 보행 특유한 걸음걸이로
차창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네

8. 삼일포에 뿌린 피눈물

그 날은
눈물 여울 출렁이는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있던
날
삼일포에는
물빛도 맑은 푸른 고요가
석호의 가장자리를
가득 담아두고 있었습니다

한 폭 그림 속
푸른 물감으로
둥실 떠있는
와우도, 사선정. 단서암, 무선대가
봉래선생 시 한 귀 절 읊어가며
사백 년 세월 숲을 노 젓고 있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무시로 변해왔지만
천연(天然)은
태고의 모습
그대로 가다듬고
적요(寂寥)한 풍화의 숨결
해맑게 흘리며
세월의 출렁다리를 건너
무변의 피안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늘 더 높인
미인송 주변에서
기웃거린 바람의 손길은
어찌 그렇게도 매정한지
움켜진 소중한 한 핏대의 사랑을
저 파란 옥빛 비원(泌園) 둘레에
붙박아 둘 수만 없어
피눈물의 한(限)을
그곳에 뿌려두고
서러운 또 한 번 이별을 거기 두고 왔습니다

9. 도문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한 세상 살기가 아리어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북한 회령 땅
구절양장 산골마을
옥수수 다락 밭도
몇 몇 년
산사태로 토사에 묻혀
연명하던 초근목피
젖떨어진 갓난 아기 굶어죽던 날
한 서러운 젊은 새아씨가
네 살 박이 큰애를
산 속에 둔 채
목숨 걸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도문 국경선을 넘어가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붙들리면
어. 쩌. 나 !
검정무명 통치마 쪽진 머리에
날품팔이
행상도
펴놓고 할 수도 없어
조바심에
감춘 울음
줌치 깊이 숨겨둔 뒤
행방불명되었답니다

쓰리랑 쓰리랑 쓰라리요
한 세상 살기가 이리도 쓰라려서
쓰리랑 쓰리랑 쓰라려요!

이 돈이면
남양 땅 고향에서
버쩍 골은 남편과
배곯아 피 가죽 상접한 어린 자식을
이밥에 쇠고기 국 실컷 먹여 보겠지
허리춤에 감싸 쥔 중국인민폐
미국달러 한 웅쿰 바꿔 쥔 마음 손아귀
또 한 번 목숨 걸고
국경선 두만강 물 건너
회령 땅 찾아가는
저 젊은 새댁

아리랑 쓰리랑 아리리요
님 만나 한 평생 잘 살아야지
쓰리랑 아리랑 쓰라려요

달맞이꽃
피고 지는
옥수수밭 질펀한 만주벌 지평선
간이역에서
깡마른 사내와
입 언저리 버점 핀 야윈 아이와
북경 행 열차를 타고 가는
그 여인을
보았다는
소문으로
술렁이며 흘러가는
국경선 두만강 강물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아리랑 중국 국경선을 넘어가요
나를 잡아서 넘기는 님은
죽어서도 지옥문조차 못 열거예요

10. 큰 품

너와 나
분명 하나 이었음으로
삶과 죽음도
한 묶음 하여
초가에서나
기와집에서나
흉년이면
멀건 씨락죽도
함께 나눠 던
할배의 참된 사랑 이야기 배우가며

그리움만 여울 치는
세월의 강가에서
어제 흘렸던
서러운 피눈물 사연을
가슴 깊은 골에 묻어 버리고
오늘은
믿음의 씨앗들이
새 눈 틔울 때까지
할배의 따뜻한 마음이 되어
할배의 거칠어진
저 손길 기리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