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 구운 영혼(1)




윤동수



전셋집을 마련해준 스타중공업의 옛 동료들을 찾으려고 전국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닌 적이 있었다. 스타그룹 해고자 복직 투쟁위원회에서 활동하던 때였다. 밥벌이인 꽃 배달하랴, 해고자 모임 꾸려나가랴, 하루 스물네 시간이 언제나 빠듯했다.
아내에게 그랬듯이, 전셋집에 얽힌 사연을 해고자 모임에서 털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고통스러웠다. 복직이 되는 그날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자고 맹세한 동지들이었건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배달을 나갔다가도 옛 동료들이 어디에 산다는 귀동냥이라도 할라치면 그 즉시 달려갔다. 부산으로, 목포로, 인천으로 대한민국 구석구석 발길 닿지 않은 데가 없었다. 다행히 해고자 모임은 좋은 핑계거리가 되어주었다. 새벽 두 시에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가봐야겠다고 해도 재혼한 아내는 말리지 않았다. 남편의 복직을 간절히 바라는 그녀는 ‘해복투’ 일이라면 만사 젖혀놓고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든든한 후원자인 아내에게 비밀로 하면서까지 그들을 찾아나섰지만 그때마다 헛걸음치기 일쑤였다.
옛 동료들이 사라진 날부터 인간 박충식의 삶 또한 그들과 한 배를 탄 것일까? 그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지하실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하루아침에 급작스레 변할 수 있는 게 인생살이가 아닐까. 언제 닥칠지 모르는 그 순간이 박충식에게는 지하실에서 벌어졌을 뿐이었다. 술을 얼마나 많이 들이부었으면 인간이 그렇게 되는 것일까. 지독한 숙취였다. 아무래도 그건 마셨다기보다는 들이부었다고 해야 옳았다. 실제로 깨질 듯한 머리를 아무리 쥐어뜯어봐도 박충식은 스스로 술을 들이켠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뜨고 나니, 술에 절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몸은 결박당한 상태였다. 아니다, 굳이 밧줄로 묶지 않았더라도 윗몸을 일으키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눈꺼풀을 꿈지럭대는 데만 온몸의 기력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으니까.
그 사내가 눈에 들어온 것은 의식을 되찾고도 한참 지나서였다. 혼미한 의식을 한 꺼풀씩 벗겨나가자 꽃향기가 코를 자극했고, 쓰린 속을 부여잡고 버둥대다 축 늘어지고 말았다.
“깨어났어?” 어디에선가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꿈결인지, 환청인지 모를 사내의 목소리였다. “......냄새 한번 고약하구만......” 어쩌고 하면서 사내는 정신을 차렸는지를 물었다. 입에서 나온 쓴 물이 턱을 타고 흐르고 있음을 뻔히 느끼면서도 박충식은 꼼짝도 못했다. 마음 같아서야 사내의 코를 싸쥐게 만든 그놈을 닦아내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사타구니에 처박힌 채였다.
“......당신은...... 누구요?”
박충식은 물었다. 환한 불빛이 갑자기 쏟아졌고, 눈앞이 뿌옜다. 혼신을 다해 입술을 달싹거렸건만 사내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거뭇한 형체로만 어른대는 사내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부르튼 입술을 벌렸다지만 목소리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부풀었다 졸아들었다 하는 사내를 향해 박충식은 겨우 입을 떼었다.
“당신...... 누구요?”
“나? 그건 중요하지 않아.”
사내는 말했다. 안간힘을 다해 물었건만 돌아온 답변은 너무 짧았다. 하지만 박충식은 실망하지 않았다. 여긴 어딜까? 왜 나는 이곳에 있는 걸까. 그리고 저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걷잡을 수 없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뭔지 모르지만 곤란한 처지에 빠진 것만은 분명해보였다. 그리고 이 난관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위험에 처했을망정 가족은 저절로 떠올랐다. 애들과 아내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러나 가족을 염려하는 박충식의 가장 노릇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 뭘 마실까?”
난데없이 사내가 두 손에 병을 들어보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몰랐다. 박충식은 본능적으로 사내를 향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사내는 얼른 두 팔을 거두어들였다. “오호, 그럴 수 없지.” 느물거린 사내가 내민 건 술병이었다. 방금 전까지 아들과 딸의 얼굴을 그려보던 박충식은 헛구역질을 해댔고, 사내는 오른손에 쥔 물병을 흔들어대며 키득거렸다.
그 지하실에서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살려낸 건 엉뚱하게도 혓바닥이었다. 사내한테 비루먹은 개 취급을 당했음을 깨닫기가 무섭게 혓바닥은 불같이 타들어갔다. 그리고 까닭 모를 분노가 치솟았다. 도대체 이 꼴이 뭐야? 왜 내가 술에 찌들어서 지하실에 뻗어 있냐구. 울화가 치밀었고 무엇보다도 억울했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입술은 타고 목은 말랐다. 숨죽이고 있던 갈증이 맹렬하게 몸을 갉아먹었다. 사내한테 놀림감이 되었을망정 물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혀와 목구멍은 어찌해볼 재간이 없었다.
오,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는 알량한 자존심이라니!
물! 물을 달라는 박충식의 청을 사내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소금에 버무린 거머리 같은 혓바닥을 박충식은 잘라내고 싶었다.
얄궂게도 박충식이 자신의 처지를 냉철하게 되돌아보기 시작한 건 사내한테 거절을 당하고 나서였다. 어떻게 해서 지하실까지 오게 되었는지 기억 저편을 되짚어보았지만 깜깜할 따름이었다. 누가 술을 먹였는지, 끌려온 지는 며칠이나 됐는지, 사내는 무엇 하는 인간인지, 가뜩이나 두통에 시달리는 그로서는 하나같이 뒤죽박죽이었다. 사방이 콘크리트 벽인 지하실에서 한 가닥 위안이 된 건 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꽃만은 익숙했다. 날마다 자신이 커피숍으로 병원으로 배달하던 빨갛고 노란 꽃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물, 물 좀 줘......” 손을 뻗으면 닿을만 한 곳에 생수 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박충식의 호소를 무시한 사내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들어올렸다 하기를 되풀이하며 사내는 두 손을 모아 빌었다. 그리고 입으로는 “한번만 봐줘, 제발 한번만 봐달라니까.” 라고 중얼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무엇을 봐달라는지도 몰랐지만 박충식으로서는 느닷없는 사내의 행동이 기이할 따름이었다. 머리를 바닥에 묻은 채 제자리에서 맴돌며 빌기를 계속하는 사내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봐달라는 소리만 읊조렸다. 격렬한 사내의 기구는 고스란히 박충식에게 전해졌다. 느글대는 속은 뒤집힐 듯했고 바닥 모를 통증이 뒤따랐다. 혹시, 미친 건 아닐까, 박충식이 품었던 의구심은 사내의 외마디에 싹 가셨다. “물을 먹고 싶으면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빌어야지!” 무엇에 홀린 듯 갑자기 고개를 돌린 사내가 고함을 질렀다. 흠칫 놀랐지만 박충식은 이내 긴장을 풀었다. 사내는 언제 그랬냐 싶게 씨익 웃음을 흘렸다. “누구 생각나는 사람 없어?” 두 손을 모은 채 물었던 사내는 박충식이 고개를 가로젓자, “아, 그때도 공장장이 이렇게 싹싹 빌었잖아, 위원장님 한번만 봐달라고 말이야.” 라고 내처 지껄였다. “어때? 그 양반 나하고 닮지 않았어?” 잡아먹을 듯이 바짝 낯을 들이대고 노려보던 사내는 “그 양반이 우리 형님이야, 아니지 작은아버지던가?” 라고 킬킬거렸다.
사내는 뜻밖에도 콧수염을 달고 있었다. 어딘가 엉성하다 싶은 그것은 사내가 마구 씨부렁거릴 때마다 번들거리며 씰룩였다. 바가지를 연상시키는 동그스름한 얼굴형에다 거무죽죽한 입술과 뭉툭한 딸기를 얹어놓은 듯한 코하며, 무엇보다 뿔테안경과 숯덩이 눈썹은 아무리 뜯어봐도 스타중공업 공장장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깡마른 예순 살 먹은 스타중공업 공장장을 박충식은 기억하고 있었다. 스타중공업 노동자협의회 위원장으로 있을 때였다. 임금 협상이 막바지로 치닫던 어느 날, 불쑥 찾아온 공장장이 3.5% 인상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자고 사정을 하다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날, 사내가 그랬던 것처럼 스타중공업 공장장은 한번만 봐달라고, 이번 협상에 자신의 목이 걸렸다고 사정사정했다. 물론, 박충식은 공장장의 부탁을 거절했다. 공장장 때문에 몇 천 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함부로 깎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어땠어? 늙은 양반이 위원장님 위원장님 하면서 무릎 꿇고 비니까 기분이 좋던가?”
사내의 이죽거림을 박충식은 침묵으로 받았다. 오래전 일을 끄집어낸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비로소 박충식은 오늘의 사태가 스타중공업과 연관되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러나 사내는 여전히 낯설었다. 스타중공업과 이어진 세월을 더듬어봐도 만난 적이 없었다. “지금부터 자네의 더러운 기억을 깡그리 지워버리겠어.” 처음 보는 사내가 협박을 하는데도 박충식은 변변한 대꾸도 못했다. 오히려 사내가 눈을 부라릴수록 해복투 모임에 가야 돼,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말 한마디 시원스레 못하고 탈진해버리면 안 된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스타중공업에서 해고되자 사택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이삿짐을 꾸리지 않았다. 부당한 해고도 억울했던 터라 악착같이 버티자고 아파트 명도 소송을 걸었다. 하지만 해고된 지 2년 만에 결국 소송에서 지고 말았다. 그래도 사택에서 안 나갔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동안 복직 싸움을 하느라고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법원의 통지를 받고도 안 나가고 버티자 마침내 집달리들이 들이닥쳤다.
과연 인생은 살만 한가?
그 무렵 문득 떠오른 의문이다. 왜냐하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삶이 거짓말처럼 되살아났으니까. 졸지에 길바닥에 나앉을 처지를 구원한 건 스타중공업에서 함께 일했던 네 명의 동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련한 아파트 계약서를 내밀었다
다시 묻는다, 과연 인생은 살만 한가? 계약서를 받아든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 스타중공업의 동료들은 사택에서 쫓겨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도움을 받으리라고는 전혀 짐작도 못했다. 실제로 그들은 집을 얻어주려는 계획을 사전에 일절 털어놓지 않았다. 그것이 인간 박충식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동료들은 아파트 계약서를 내민 거였다. 누구보다 그들의 사는 형편을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 몸담고 있다지만 목돈을 챙기기란 쉽지 않았을 거였다. 마누라와 싸워가면서 집값을 마련했을 그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과연 세상은 살만 한가? 돈보다도 코끝을 시큰거리게 했던 것은 동료들의 인간애였다. 스타중공업에서 사람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걸 숱하게 봤던 터라, 그들의 마음 씀씀이에 가슴이 찡했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묻고 싶다, 타인에게서 더운 정을 느끼고 눈물이 글썽했던 게 언제였던가?
동료들 가운데 성격이 가장 급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김형이었다. 노조를 만든답시고 국회의원 사무실을 점거했을 때 가스통을 터뜨리겠다고 경찰을 협박한 것도 그였다. 건물을 에워싼 구사대가 대학생들을 구타하자 김형은 재빨리 옥상으로 올라가 물탱크를 깨서 집어던졌다.
그 화끈한 사내와 인연이 닿은 것은 어울리지 않게 다디단 설탕 때문이었다. 스타중공업에 일용공으로 입사한 지 1년이나 됐을까. 정식 사원들과 부대끼면서 차츰 불만이 쌓여갔다. 그 전까지는 외주 협력 업체와 일했던 터라 별다른 차별을 못 느꼈다. 그러나 정식 사원들과 일을 하자니 아니꼬운 게 한둘이 아니었다. 작업복 색깔은 물론, 거기에 붙이는 이름표까지 달랐다. 협력 업체와 일용직의 작업복은 남루했고, 정식 사원들은 말끔했다. 심지어 정식 사원들은 영양사가 있는 깨끗한 식당에서 밥을 먹었지만, 일용직은 공사판 함바집이나 진배없는 데서 도시락을 까먹거나 질 낮은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일용직은 통근 버스도 못 탔고, 출퇴근도 후문으로 드나들었다. 힘들고 궂은 일은 일용직이 다했건만 임금은 정식 사원의 반도 못 받았다. 그렇게 일용직의 불만이 쌓이던 어느 날, 추석을 앞두고 회사에서는 선물이랍시고 설탕을 나누어주었다. 스타그룹의 계열사인 식품회사에서 만든 설탕이었다. 그런데 정식 사원은 15킬로를 주었고, 일용직은 5킬로가 나왔다. 사건이 터진 것은 일용직에게도 정문 출입이 허용된 날이었다. 퇴근길에 정문에서 누군가가 “내가 말이지, 직책이 일용직이지, 인간 아무개가 하루 써먹고 버리는 일용품은 아니다 이거야!” 라고 성깔을 부리며 설탕이 든 선물 상자를 패대기쳤다. 그를 따라 일용직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경비들과 멱살을 잡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그날, 자신은 일용품이 아니라고 외친 사내가 바로 김형이었다. 어느 덧 15년 세월이 훌쩍 흘렀다. 머리보다 몸이 앞서서 탈이라던 그 김형은 요즘도 설탕처럼 달콤한 인생을 누리고 있을까.
생수로 목을 축인 사내가 대뜸 “5억을 왜 안 받았어?”라고 물었다. 그러나 박충식은 알아듣지 못했다.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훔친 사내는 다 마시지도 않은 생수를 등 뒤로 던져버렸다. 구르는 생수 병 아가리에서 흘러나온 물이 바닥을 적셨다. 마른 침만 삼키던 박충식은 들었던 팔을 맥없이 군용 침대 밑으로 떨어뜨렸다. “무슨 배짱으로 5억을 안 챙겼냐구?” 사내는 박충식의 팔을 장난치듯 툭툭 쳤다. 자장면 외상값을 떼어먹었다가는 큰코다칠 줄 알아, 박충식은 사내의 채근을 그쯤으로 들었다. 사내에게서 이렇다할 긴박감을 못 느꼈다. 넉살 좋은 중국집 주방장이 단골손님하고 농지거리를 하면 이럴까 싶었다. 긴박감이 무언가, 군용 침대에 뻗은 박충식이 악취만 풍기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의자 등받이에 턱을 괸 사내가 병문안을 온 것으로 착각할 터였다. 무엇보다도 사내가 흔들어대는 꽃다발은 사내가 맡은 배역에 썩 어울렸다. “5억이 너무 많아서 양심에 찔렸어?” 사내는 장미 한 송이를 박충식의 코에 댔다 뗐다 했다. “하긴, 너무 비싸게 쳐줬지. 이거 팔아봤자 어디서 5억을 받겠어?” 마치 고깃덩이를 다루듯 사내가 꽃다발로 엉덩이와 등짝을 건드려도 박충식은 내버려두었다. “당신...... 모르는 게 없구만.” “에이, 뭘 그까짓 것 가지고 그래, 창포시에 소문이 좍 퍼진 유명한 사건을 모른 데서야 말이 안 돼지.” 사내는 자기 같았으면 냉큼 받아먹었을 거라고 몹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가 실수한 거야, 그때 눈 딱 감고 챙겼어야지. 지금은 5억은커녕 2억? 아니지 1억도 안 쳐줄 거야. 왜냐하면 말이지 스타중공업을 들었다 놨다 했던 투사하고 꽃 배달부는 값 차이가 워낙 심하거든.” 엎드린 박충식은 자신이 저울질을 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군용 침대는 저울이고, 자신은 그 위에 오른 고깃덩이고, 사내는 눈금을 매기며 값을 후려치는 장사꾼이었다.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가. 재혼한 마누라 앞세워 기껏 꽃 배달로 연명하면서 어째서 5억을 나 몰라라 했을까?” 골치 아픈 거 다 접어두고 인간적으로 자신한테만 속닥거려달라고 사내가 귀를 바투 댔지만 박충식은 할 말이 없었다. “거, 되게 비싸게 구네. 하긴, 돈벼락을 맞는 행운을 날렸으니 무지하게 배가 아팠을 테지. 5억이 뉘 집 강아지 이름인 줄 알아? 그걸 뿌리치다니, 멍청하긴. 그러니 인생살이가 고달픈 거야.” 사내는 주겠다는 사람 성의를 봐서라도 인생을 그렇게 살면 못 쓴다고 짐짓 타이르기까지 했다.
위원장에서 쫓겨난 다음 현장에 복귀했는데도 일을 시키지 않았다. 업무를 맡기기는커녕 현장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게 하려고 회사에서는 별의별 수작을 다 썼다. 그래도 박충식은 일부러 자재를 정돈하고 제품을 출하할 때 앞장서서 몸을 아끼지 않았다. 반장이라는 작자는 일하는 시간까지 일일이 기록했고 심지어 화장실에서 몇 분이나 머물렀는지도 낱낱이 고해바쳤다. 정작 일감을 안 줄 때는 언제고 막상 일을 하니까 잠시도 못 쉬게 감시했다. 크레인이나 지게차 따위 장비가 대기하는 시간까지 따져서 사람을 못 살게 굴었다. 나중에는 아주머니를 한 사람 붙여주더니, 청소 당번으로 내몰았다. 그렇게 화장실 청소라든지 허드렛일로 날마다 따돌림을 받던 무렵, ‘만년 과장’한테서 퇴근하고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약속 장소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바닷가였다. 창포시와 이웃 도시를 잇는 창포다리가 멀리 보이는, 발전기 엔진을 선적하는 부두에서 과장은 기다리고 있었다. 남들은 그를 만년 과장이라고 비아냥댔지만 박충식은 따로 갈비과장이라고 불렀다. 거기에는 두 사람만 아는 사연이 있었다. 스타동지회를 꾸리고 대의원으로 활동하던 어느 날 그가 집으로 찾아왔다. 과일 상자와 갈비 상자를 들고 온 그는 무턱대고 얼마면 되겠냐고 물었다. 뜬금없는 물음에 박충식은 즐거운 명절에 어인 돈타령이냐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겉으로는 그렇게 둘러댔지만 만년 과장이 밤늦게 찾아온 까닭이 노조 설립을 막자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박충식이 눈도 꿈쩍하지 않자 만년 과장은 거간꾼으로 나선 본색을 드러냈다. 조선소에 자리를 알아봐주겠다, 대도시 영업소로 보내주겠다, 사무직으로 옮겨주겠다 라고 목이 쉬도록 설레발을 쳤다.
그날 밤, 과장은 한 인간을 사기 위해 얼마를 가져왔을까. 스타그룹 어디든지 원하는 데로 보내주겠다는 마지막 미끼마저 박충식이 거절하자, 그는 냅다 갈비 상자를 뜯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돈 다발이 들어 있었다.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 뭉치를 흔들어대며 과장은 이래도 말을 안 들을 거냐고 눈을 치떴다. 박충식은 대답 대신 아내에게 술상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안주는 갈비였다.
회사와 맞서는 박충식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던 만년 과장이 눈시울이 벌게진 건 소주 세 병을 비우고 나서였다. 잔을 털어 넣은 그가 더러워서 이 짓도 못해먹겠다고 갈비를 씹으며 투덜댔다. 돈이 원수지 사람이 무슨 죄가 있냐고, 박충식이 거들자 과장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나이에 심부름꾼이라니, 남들 보기 창피스럽다고 허연 머리칼을 쥐어뜯는 과장을 박충식은 위로했다. 감격한 그는 돈이 다가 아니다, 사람이 먼저라고 큰소리 탕탕 쳤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총대를 멨다는 과장의 호소는 바닷가에서도 여전했다. 박충식은 갈비과장을 충분히 이해했다. 술에 취해 허풍을 떨었을 뿐 그의 본심은 따로 있었다. 돈 다발을 코로 큼큼대면서 이 좋은 냄새를 왜 안 맡겠다는지 모르겠다고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해댄 그였다. 갯벌에 한참 눈을 주던 과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답시고 5억을 줄 테니 명예퇴직을 권했을 때, 박충식은 돈 다발에 머리를 박고 곯아떨어진 한 인간을 떠올렸다. 딴에는 머리를 까만색으로 염색을 했다지만 5억으로 세상을 다 살 수 있다고 떠드는 그는 추레했다. 저번 날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혀를 놀리는 과장보다는 취해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편이 훨씬 보기 좋았다. 이것도 중요한 업무라고 그가 목에 힘을 줄수록 사람이 싫어졌다.
“자넨 그때 창포시를 떴어야 돼!”
사내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랬으면 오늘처럼 지저분한 주정꾼 놀이도 안 했을 거고 인생이 180도 확 달라졌을 텐데 말이지.” 과연 그럴까. 입술로 비죽비죽 기어 나오는 토사물을 그대로 뭉개며 박충식은 사내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개자식,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놀이라니……. 입술을 벌려봤자 토사물만 불거졌다. 갈비과장에다 5억 사건까지 꿰뚫고 있는 사내의 정체가 무언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스타중공업에 입사한 뒤로 경찰, 안기부, 구사대, 경비회사 직원들을 두루두루 겪어봤지만 사내는 도통 기억이 안 났다. 재혼한 사실이나 꽃 배달하는 것까지 줄줄이 엮어내는 걸 보면 오랫동안 뒤를 밟아온 게 분명했다. 더러운 꼴은 못 본다는 사내는 “5억으로 사람답게 살지 시궁창에 뒹구는 돼지 꼴이라니?” 하고 혀를 찼다. 그리고 튤립 꽃잎을 한 점씩 따서 박충식의 낯에 떨어뜨렸다. “그 돈 받고 창포시를 떴으면 좀 좋았겠어? 넓디넓은 대한민국에서 사람 살 데가 창포시뿐이냐구?” 갈비과장도 그랬다. 팔자 고친 거라고, 평생 먹고사는 데 지장 없을 거라고, 창포시에서 사라져주기를 바랐다. 심지어 그는 공장만 바글대는 공해도시여서 사람 살 데가 못 된다고 창포시를 저주했다. 그리고 5억을 밑천 삼아 여봐란 듯이 살아보라고, 작업복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임을 잊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걸 받아서는 안 되지......” 박충식은 헛도는 혀를 겨우 굴렸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만. 이봐, 자네가 그런다고 해서 알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 다들 그걸 못 챙겨서 안달이지. 겉으로야 어쩌고저쩌고 씨부렁대지만 돌아서면 5억을 움켜쥐지 못해 배가 아파서 야단들이지.” 사내는 그게 인간이라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어리석기는...... 자네하고 한편이었던 거, 스타동지횐가 하는 작자들 중에서도 자넬 모함한 놈들이 여럿이었어. 이유야 간단해. 자네한테 5억 돌아가는 걸 눈뜨고 보자니까 미치겠다는 거지.” 사내가 정직한 인간들로 추켜세운 동료들을 박충식도 알고 있었다. 5억을 건네려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갖가지 억측이 나돌았지만 스타동지회 회원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처음에는 사람을 돈으로 매수하려든다고 하나같이 회사를 비난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흥분이 가라앉자, 과연 5억으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30평 아파트를 몇 채나 살 수 있을까, 은행에다 넣어두면 이자를 얼마나 받는지, 한정식 식당이나 100평짜리 생맥주집을 차릴 수 있는지를 심심풀이로 즐기던 이들이 어느새 눈 딱 감고 받을 수도 있지 않냐고, 쑥덕거리기에 이르렀다. 소문의 진상을 밝히라고 따지던 그들이 인생을 역전시킬 기회를 잡은 거라고 서슴없이 입방아를 찧었다. “그 사람들 탓할 게 못 돼. 왜냐? 그 친구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반면에 노동자의 자존심이니 뭐라면서 인간성을 돈으로 쌈 싸먹으려고 했다고, 자네를 손가락질한 작자들이야말로 버러지 같은 놈들이지.” 사내는 배신자들을 털어놓았다. “자네가 활약했던, 노조 설립에 핵심 조직이었던 스타동지회를 팔아먹겠다는 놈들이 서너 명 있었다구. 박충식이는 허수아비다, 자네 몫의 반만 준다면 스타중공업에는 영원히 노조가 들어설 수 없게 하겠다고 맹세를 하더만. 더 치사한 놈은 1억으로 깎아주겠다고 뒷거래를 하는 놈이야. 사람을 돈으로 차별하지 말라고 악쓰던 놈들이 뒷구멍으로는 지들 몸값을 흥정하자고 덤비지 뭐야.” 코미디가 따로 없다며 사내는 배꼽을 쥐고 낄낄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 “얼씨구,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왜? 배신감에 미치겠어? 자네한테 보여줄 수 없는 게 유감이야. 몸값을 흥정하는 자네 동료들 낯짝을 직접 봐야 하는데, 정말 안타깝구만.” 사내는 그쯤은 예고편에 불과하다며 5억짜리 코미디를 즐기라고 발을 굴렀다.
“자넨, 광대였어! 투사도 뭐도 아니었다니까!”
사내는 배우 노릇을 훌륭하게 해줬다고, 스타중공업 직원들뿐만 아니라 창포시 시민들의 흥밋거리였노라고, 박수를 쳤다. 과연 어릿광대였을까. 한동안 현장이 그 사건으로 술렁인 건 사실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박충식이 승낙을 할 건지 말 건지 궁금해 했고, 술집에서 내기꾼들은 그것으로 안주를 삼았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노조를 만들려고 음모를 꾸미면 회사에서 돈을 주는 것으로 알기까지 했다. 그리고 회사의 탄압으로 망가진 육체와 정신적 피해를 보상받은 거라고 발표하고 떠버리면 그만이라고, 구체적인 탈출 방법을 일러주는 이들도 있었다. 주위에서 하도 여러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들쑤시는 바람에 잠시 솔깃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넌지시 얘기했더니 아내는, 그 돈 받아서 부자로 잘 먹고 잘살 수 있겠냐고 딱 잘라 거절했다.
“그렇지 않아. 나는 돈을 안 받았어.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구...... 자...... 자존...... 심.......” 박충식은 아내를 떠올리며 헐떡거렸다. “오호라, 자존심을 지켰다 이거군.” 사내가 냉큼 받았다. “그게 뭐하는 데 쓰는 건데? 그딴 건 세상살이에 보탬이 안 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딴 걸 붙들고 애걸복걸하느니, 차라리 5억짜리 다리를 놔준 과장이 훨씬 더 충실한 인생을 사는 거라고, 사내는 강변했다. 노을이 지는 갯벌을 거닐며 박충식이 거부 의사를 밝히자, 갈비과장은 사람을 모독하는 거라고 몹시 흥분했다. 평생 모아도 만질 수 없는 돈을 안 받겠다는 것은 스타중공업에서 일하는 월급쟁이들을 욕보이는 짓이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석양에 벌겋게 물든 과장의 얼굴을 보면서 박충식은 삶이 갑자기 쪼그라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건 사는 게 아니야. 거기서 5억 받으면 사람이 아니지......” 박충식은 자신의 결단이 옳았음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 위로가 되나? 뭣을 위해서지? 같잖은 자존심 때문에?” 왜 그것을 혼자만 지키려고 아등바등 대는지 모르겠다는 사내는 그 딴 건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서 없어진 지 오래 됐다고, 생존에는 도움이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말했다. “자네를 저울에 재면 몇 푼이나 나갈까?”

노사협의회 대의원 노릇이 바빠질수록 결혼 생활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노조 설립 문제로 서울로 농성하러 갔던 신혼 초부터 싹튼 처가와의 마찰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창포시의 수출자유지역에서 여공으로 일했던 아내는 노조를 만들어보겠다는 남편을 이해하려들지 않았다. 노동운동이다 노조다 해서 말썽 피우지 말고, 남들처럼 회사에 고분고분하면서 월급이나 꼬박꼬박 받아오기를 바랐다. 창포시의 노동운동 단체와 여성운동하는 이들이 나서서 아내를 설득했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특히 성일중공업에 다니던 손위 처남은 노동운동이라면 치를 떨었다. 성일중공업이라면 창포공단에서도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공장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고되고 구속되는 시련을 겪고 나서 마침내 노조를 설립했던 터라, 창포공단 노동자들은 성일중공업에 다니는 이들을 우러러봤다. 노동자들의 희생을 눈으로 봤으면서도 처남은 노조는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막말을 해댔다. 노조가 생기고 나서 월급이 오르고 복지제도도 한결 나아졌음에도 회사를 말아먹으려는 불순분자들이라고 헐뜯기 일쑤였다. 노동자인 처남이 노동운동을 짓밟는 회사의 목소리를 판에 박은 듯이 지껄이는 데는 안타깝기보다는 차라리 슬펐다. 처남은 자신의 여동생을 공장 파괴분자하고 살게 하지는 않겠다고 별렀다. 노동운동에서 손을 떼든지 여동생하고 갈라서든지 양단간에 결딴을 내라고 윽박질렀다. 그 처남과 장모가 떼거지로 몰려와 보따리를 싸라고 아내를 닦달한 건 임금 협상에 교섭 위원으로 참석하면서였다. 명색이 교섭 위원이건만 열한 차례나 있었던 협상 과정에 단 한 차례만 회의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본격적인 협상이 무르익어가면서 안팎으로 시련이 닥쳤다. 집에는 회사 간부들과 경찰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진을 쳤고, 회사에 가면 안기부가 걸핏하면 사람을 잡아갔다. 2차 교섭 날짜가 잡히자 안기부는 얼토당토않은 꼬투리를 잡더니 ‘해양공사’라는 간판을 단 대공분실로 끌고 갔다. 전화로 오라고 해서 가지 않으면 그들은 회사에 차를 몰고 들어와 잡아갔다. 경찰서 취조실이나 파출소 지하에서 노동운동에서 손을 떼라고, 전기 고문 기구를 조작해보이며 사람을 위협했다.
재혼한 아내와의 만남에 일등 공신인 신 형과 가까워진 것이 그 무렵이었으리라. 교섭 위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스타동지회 회원인 신 형과 함께 회사 앞에서 선전물을 뿌렸다. 경찰과 안기부가 임금 협상에 끼어들었고, 때문에 올해 임금 협약은 엉터리고, 그 책임은 회사에 있음을 밝힌다는 내용이었다. 선전물을 나눠주기 무섭게 회사 경비들은 폭력을 휘둘렀다. 출근 시간에, 회사 정문에서, 스타중공업 노동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두 사람은 선전물을 빼앗겼고, 무려 30분이 넘도록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했다. 어찌나 얻어터졌던지 뻗어버린 신 형을 보자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경비실 창에 머리를 찧으며 당장 사과 안 하면 죽기 살기로 싸우겠다고 악을 썼다.
이혼하고 세상만사가 다 귀찮을 때 지리산으로 바람을 쐬러가자고 한 이가 신 형이었다. 가정이 깨지고 나니까 스타동지회나 대의원 일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신 형을 따라 꾸역꾸역 산을 올랐지만 풍광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경찰, 안기부, 스타중공업이 한 몸인 현실이라는 벽을 뚫기란 도저히 불가능해보였다. 그 거대한 바위에 달걀을 던지기는커녕 한 줌 모래알도 아니었음을 깨달을수록 비참해졌다.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구질구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위자료가 없어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수 없었다. 장모는 한 가정이 깨지는 데는 아랑곳하지 않고 위자료를 받아내려고 악착을 떨었다. 피붙이인 손녀를 놓고 흥정을 하는 그 여자에게 넌덜머리가 났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도저히 돈 한 푼 나올 구멍이 없음을 샅샅이 뒤져본 다음에야 장모는 반년이나 끌던 이혼 절차를 마무리했다. 두 딸을 떠맡고, 셋방 보증금과 살림살이까지 몽땅 처에게 넘겨준 다음에야 겨우 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네 명의 동료 가운데 이혼의 아픔을 겪은 이가 신 형이었다. 처지가 비슷해서 그랬을까, 재혼을 주선하는 데 누구보다 신 형이 앞장섰다. 당사자는 딱 잡아뗐지만, 지리산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꼬드긴 것도 나름대로 꿍꿍이속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신 형이 하룻밤 묵자고 들어간 민박집에서 재혼한 아내를 만났으니까. 그곳에는 창포시의 여러 단체 활동가들이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종교 기관에서 운영하는 여성단체 활동가였던 아내는 노조도 없는 스타중공업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혼한 노동자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한 인간을 새롭게 알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지!
재혼은 식은 죽 먹기라고 용기를 북돋워주던 신 형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재혼을 하고 나서 신 형하고는 더욱 가까워졌다. 아이들끼리도 자주 어울리며 가족처럼 지냈다.
김장 김치도 나눠먹던 신 형을 찾아 피아골을 탄 적이 있었다. 노고단까지 오르자고 작정했건만 중턱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무엇에 홀린 듯 허위허위 오르다가 정신이 번쩍 든 탓이었다. 고양시 일산 아파트 단지에 산다더라, 수원 공장에 다닌다던데, 서울 강남에서 봤다더라, 귓불이 간지럽다 싶으면 달려갔다 헛걸음한 끝에 무턱대고 올랐던 지리산이었다. 그날, 단풍으로 타들어가던 피아골에서 넋을 놓고 있다가 재혼한 아내를 만났던 민박집으로 향했다. 물론, 그곳에도 신 형은 없었다. 주인 없는 빈집만 덩그마니 버려져 있었다. 재혼하면 의형제를 맺자고 흉금을 터놓던 대숲에는 쏴하고 바람이 물결치고 있었다. 살면서 힘들 때는 산을 오른다던 신 형은 요즘도 지리산을 타고 있을까.
손바닥을 편 사내가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며 “그날 밤, 자네를 저 세상으로 보냈어야 했는데......”하고 중얼거렸다. “보내다니?” 박충식이 묻자, 후회막급이라는 듯 이마를 두드리며 왔다 갔다 하던 사내가 “숨통을 끊어버렸어야 한다 그 말이지.”하고 획 돌아섰고, 그것도 모자랐는지 “이렇게, 이렇게 말이야.” 수선화 꽃다발을 칼로 뭉텅뭉텅 내리쳤다. “숨통을 끊더라도 물은 줘야 할 거 아냐......” 애원하는 박충식에게 날아온 건 사내의 지청구였다. “한심한 인간 같으니라구.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는 알고 죽어야 할 거 아냐. 그래야 억울하지 않지. 이봐, 우린 이렇게 친절하다니까. 보아하니, 여기서 눈을 감으셔도 뒤탈이 없겠어.” 그러고 나서 박충식의 뺨을 토닥거린 사내가 “까놓고 말하면 자네는 그날 밤에 죽은 목숨이라니까.”하고 히죽 웃고 나서야, 박충식은 그날 밤이 언제인 지를 물었다. “분수대 공원이었지? 기왕 선심 쓴 것, 확실히 알려주지. 방파제 삼거리 파도횟집에서 저녁을 드셨지 아마?” 황천길 가는 마당에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라고 딸기코가 바짝 눈앞에 다가오자, 비로소 박충식은 사내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3년 전에 겪었던 테러와 연관된 자가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술을 처먹이고 사람을 납치하는 것쯤이야 우습게 알 터였다. “당신, 살인자로구만.” “아니지,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생사람 잡으면 쓰나.” “아무튼 그건 살인 행위나 마찬가지였어.” “알아, 자네가 살인미수로 고발한 거 다 안다구. 중요한 건 말이지, 약 먹은 쥐새끼처럼 비실비실하지만 자네가 내 앞에서 새파랗게 살아 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 사건은 경찰에서도 증거 불충분으로 종결됐잖아.” 그건 사실이었다. 피해자가 두 사람이나 있는데도 경찰은 단서가 없다면서 질질 끌었고, 결국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당신은 살인자야......” 박충식은 혀끝을 입술에 댔다. 살인자, 라고 뇌까려보지만 터진 입술에서는 피비린내가 묻어나올 뿐이었다. 찢어지고 갈라터진 입술은 상처투성이였다.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한 다음 호스로 쏟아 붓듯 병째 쿨럭쿨럭 들이부었으리라. 술독에 빠지는 장면은 흐리마리하지만 테러를 당하던 날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스타중공업을 들락거리던 경비 업체 직원에게서 위원장님 조심하라는 귀띔을 받은 지 닷새 되는 날이었다. 늘 미행을 당하던 때라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차가 두 대가 달라붙었는데, 한 대는 스타그룹 비서실에서 나왔고, 다른 한 대는 소재 파악이 안 된다고 넌지시 일러주었다. 그날은 임금 협상이라는 큰일을 마무리 지었겠다, 노조 설립 문제로 부산에 다녀오던 참이었다. 아직도 노조가 없다니, 스타중공업에는 팔푼이들만 다니냐고 동종 업체 노조 위원장한테 놀림을 받은 터라 마음이 바빴다. 노동자 협의회 사무실에 들어서자 여직원 한 사람만 있었다. 왜 여태 퇴근을 안 했냐고 묻자, 그녀는 생일이라고 했고, 그럼 저녁이나 먹자고 회사 밖으로 나갔다. 임금 협상을 앞두고 야근을 밥 먹듯이 했던 것도 미안했던 참이라 잘됐다 싶었다. 저녁을 먹으며 술을 한 잔 곁들였고, 횟집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여직원을 택시에 태워보냈다. 그리고 건너편 공원에 세워둔 차에 들어가서 술이 깬 다음에 가려고 잠을 청했다. 얼마나 잤을까. 뒤 유리창이 깨지고 누군가 벽돌로 머리를 내리쳤다. 워낙 급작스레 당했기 때문에 저항할 틈이 없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현장을 뒤집어놓은 사건으로 번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눈을 뜨자, 놀랍게도 택시를 타고 갔던 여직원이 옆에 쓰러져 있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여직원은 당구대로 머리를 심하게 맞았고, 그때까지도 깨어나지를 못했다. 머리는 피로 범벅이 됐고, 차의 타이어는 예리한 흉기에 펑크가 난 채였다.
“우리가 서툴렀지? 아무래도 각본이 엉성했어.”
사내는 그때만 해도 아마추어였다면서 실수라고 둘러댔다. 그 사건을 일컬어, 프로의 자존심을 구긴 허점투성이라는 사내의 변명은 거짓이었다. 집에 갔어야 할 여직원이 곁에 쓰러져 있는 걸 보고 아, 누군가 손을 쓰기 시작했구나 하고 퍼뜩 알아챘다. 이튿날 위원장의 행적을 비난하는 대자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붙은 것하며, 경비 회사 직원의 걱정이 빈말이 아님을 실감했다. 누군가 치밀한 각본을 짜놓고 테러를 저지른 거였다. 회사에서 내다붙인 대자보는 각본에 따라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노동자 협의회 위원장 박충식이 여직원과 차 안에서 발견되었다. 늦은 밤 술에 취해 여직원과 함께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차 의자가 뒤로 젖혀져 있었고, 위원장의 품에 안긴 여직원은 옷이 헝클어진 채였다. 여직원을 농락한 위원장...... 대자보는 위원장이 한밤중에 여자와 있다가 강도한테 당했다고, 박충식을 파렴치범으로 몰아갔다. 누가 보더라도 오해를 살만 했다. 특히, 여직원의 약혼자는 그 정도가 심했다. 박충식이 전후 사정을 설명했건만 그는 약혼녀를 겁탈하려 했다고 흥분했다. 회사에서 바라던 대로였다. 회사는 박충식을 고소하라고 여직원의 약혼자를 끊임없이 부추겼다.
“부위원장도 우리 쪽으로 넘어왔겠다, 경찰도 협조를 잘 해줬겠다, 뭐가 잘못된 걸까?” 사내의 말 대로였다. 박충식이 자필로 쓴 대자보를 현장에 붙여달라고 했지만 부위원장은 거부했다. 내용을 뜯어고치든지, 삭제하자는 말을 듣고 부위원장이 회사의 손아귀에 들어갔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경찰은 위원장 전용차에서도 박충식의 지문을 찾아내지 못했다. 박충식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녀 관계에서 비롯된 폭력 사고나 청부 폭력이었노라고, 경찰은 차에서 지문 한 점이 안 나왔다고 수사 종결을 알렸다.
“그때 부위원장이 지금까지 위원장 역할을 잘 하고 있잖아? 그런데 말이지, 왜 자네만 여태까지 나가떨어지지 않고 설쳐대는 걸까? 우리가 뭘 잘못 처리했을까? 우리 작업 방식에 문제가 뭐였을까?” 빨간 장미 다발로 자신의 머리를 후려친 사내는 “그건 말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가 너무 야만적이었어. 벽돌로 찍고 방망이로 때리고 가족들을 협박하고 피눈물을 쏟게 했거든. 그래서는 안 돼. 암 안 되구 말구. 인간은 인간답게 다루어야, 아니지 대접해야 한단 말씀!”하고 스스로 묻고 답했다. 인간을 존중하는 스타그룹의 명예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사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박충식은 소름이 돋았다. 그룹 계열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스타그룹은 가족들의 삶까지도 쥐락펴락했다. 노동자 협의회 위원장으로 있을 때, 100일 동안 하루 스물네 시간 행적을 미행하고 기록한 스타그룹의 감시망은 참으로 징글징글했다. 스타중공업에 몸담은 내내 쇠줄에 발목을 묶인 수인이라거나, 감시탑에 갇혔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도대체 당신 누구야?” 박충식은 입을 열었다. 테러를 가한 범인을 앞에 두고도 주먹 한번 휘두르지도 못하다니, 화가 났고 억울했다. “내가 누군지는 알 필요 없어. 중요한 건 자네 인생이야. 멋모르고 날뛴 지난 세월 청산하고 인간답게 살아봐야지 않겠어?” 사내는 꽃을 뿌렸다. 저런 놈은 살 가치가 없어. 주먹으로 턱주가리를 날리고 테러범으로 처벌해야 돼. 사내를 응징하고픈 의지와 달리 꽃잎을 씹던 박충식의 입에서는 “물 한 모금만 달라니까......”라는 신음이 배어나왔다.
“너무 고통스러운가?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그 독한 양주를 말이야, 알코올 도수 100도짜리 독주를 퍼 마셨으니 몸이 견디겠냐구. 게다가 싫다는 사람을 잠도 안 재우고 서른 병도 넘게 처먹였어. 다 합치면 드럼통으로 하나는 될 거야. 그 비싼 놈의 독주는 불을 붙이면 활활 타잖아. 사람을 죽이자고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있냐구.” 무릎을 꿇은 사내는 애처로운 눈길로 박충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나쁜 놈들이야. 술로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냐구. 인간을 짐승 다루 듯하고 말이지, 이건 명백한 인간성 파괴야. 식물인간을 만들어놨잖아.” 사내는 짐짓 머리를 숙이며 용서를 빌었다. 사내의 머리가 코끝에 닿았지만 박충식은 터럭 한 점 잡을 힘도 없었다. 용서해달라구? 도대체 당신이 누군지 알아야 용서를 하든 말든 할 거 아냐? 사내는 과장되게 어깨까지 들썩이며 훌쩍였다. 박충식은 차츰차츰 사내의 얼굴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구둣솔을 닮은 콧수염, 콧숨이 드나들지 않는 딸기코와 귀에까지 걸린 안경은 그 자체가 한 짝인, 어릿광대나 씀직한 플라스틱 가면이 틀림없었다. 물론, 생수를 찍어 바른 안경에서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이봐, 난 식물인간이 아냐. 숨쉬는 인간이야......” 그러나 박충식의 호소는 사내의 노기 서린 목소리에 이내 묻혀버렸다. “정말이지, 나는 싫다구. 인간을 이런 식으로 쓰레기 취급 하는 인간들이 득시글대는 세상이 정말 싫단 말이야!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사내가 어깨를 흔들 때마다 박충식의 얼굴은 토사물에 철퍼덕거렸다. “자네가 너무 불쌍해. 자네 같은 사람들이 자꾸자꾸 늘어나는 이놈의 세상을 저주한다구.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 너무 넘쳐나. 어쩌자고 아파트 15층에서 어미라는 년이 자식새끼들을 창밖으로 날려버리냐구. 셋이나 되는 애들을 연탄재 버리듯이 던져버리는 여자가 인간이야?” “사정이 있었겠지. 오죽 살기 힘들었으면 그랬겠어......” 문득 말해놓고도 박충식은 어이가 없었다. 얼떨결에 대꾸한 것도 그렇지만 이 판국에 투신자살한 여자 얘기는 또 뭐란 말인가. “말 잘했어. 사정이 있었겠지, 암. 그게 인간이거든. 세상 살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면 가차 없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게 인간이야. 헌데 말이지, 자네가 그 꼴이 돼가고 있어. 그래서 불쌍하다는 거야. 자, 이걸 보라구.” 사내는 부리나케 무릎걸음으로 바닥을 기며 “빚 때문에 죽겄소, 빚 좀 갚아 줍쇼.”하고 구걸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 다음에 사내가 흉내 낸 것은 거리에 나돈 지 3년이나 됐다는 알코올 중독인 노숙자였다. 웅크린 채 드러누운 사내는 손을 덜덜 떨며 “누구와 닮지 않았어?”하고 벌쭉 웃었다. 그리고 재빨리 웃음기를 지우며 냉정하게 말했다. “난, 그런 인간쓰레기들이 혐오스러워. 이 세상에서 살 가치가 없어.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구. 자존심을 잃어버린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냐. 더욱 슬픈 건 말이지, 그런 인간들은 탈출구가 없다는 거야.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을 운명을 타고 났거든.” 딸기코가 콧등을 문지르자 박충식은 도리질을 치려고 바동거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깨끗이 쓸어버려야 할 쓰레기들이라는 사내의 속삭임이 귓불을 파고들었다. “자네도 바닥 것들하고 한 식구가 되고 싶어?” “아니야, 나는 그렇지 않아. 죽어도 그렇게 살기는 싫어......” 박충식은 토사물을 토해냈다. 힘껏 외치자고 했건만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너무 끔찍해. 인생은 그런 게 아니야. 저 자가 저주를 퍼부은, 밑바닥 인간들한테서 악취가 풍기는 건 사실이잖아. 인간답게 살기는커녕 죽지 못해 사는 허접한 하루하루가 이어질 뿐이잖아.
“아니,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는 말아. 스타그룹의 식구가 됐다는 건 영광스런 일이야. 왜냐하면 말이지 영원히 생존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거든.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자네는 그걸 스스로 잘라버렸어.” 눈매가 부드러워진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토사물을 한줌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지저분하게 살지 말라니까.”하고 생수로 씻어냈다. “냄새가 심할 텐데......” 박충식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갑작스레 콧날이 시큰했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하찮은 행동에 감동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물통에 뒹구는 돼지 같은 자네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하루 빨리 거기서 나와야지.” 사내는 회사 측으로 돌아선 부위원장과 사무장이 얼마나 잘 살고 있나를 들려주었다. 인간답게 살 자격을 갖춘 인간이라고 사내가 추켜세운 그들에게서 맛본 배신감을 박충식은 잊지 않고 있었다. 테러 사건의 진상을 알리기는커녕 남녀 관계에서 빚어진 추잡한 행위로 누명을 씌운 그들이었다. 그리고 대의원과 집행부가 다 물러나야 한다고 사원들을 선동해서 박충식을 쫓아냈다. 결국 회사와 한통속이 된 그들은 선거를 통해 노동자 협의회 집행부를 장악했다.
동정심에 이끌린 것도 잠시였다. 사내는 바지춤에 손을 벅벅 문지르며 “지저분하게 살지 마, 지지분하게 살지 말란 말이야! 구정물에 뒹구는 돼지새끼는 인간이 아니라니까!”하고 낯빛이 바뀌었고, 입 안에 머금었던 생수를 박충식의 얼굴에 마구 내뿜었다. “제발 지저분하게 살지 말아줘......” 침대 머리맡을 붙든 사내의 간곡한 호소는 드높았다 가라앉았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건 하소연이 아니라 협박이었다. 찢어진 입술이 젖어들자 박충식은 슬슬 주눅이 들었다. 언제 폭발하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마주한 심정이 이럴까. 사내의 웃음이나 위로가 진심이 아님을 깨닫고 나자 가시 방석이 따로 없었다. 손에 채찍을 쥐었더라면 무자비하게 등짝을 후려쳤다가 이내 아팠냐고,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 미안하다고 흐느낄 인간이 바로 사내였다. 박충식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해고자 복직 투쟁위원회라구?”
냅다 생수 병을 벽에 집어던지며 사내가 외쳤다. “그 딴 건 찌끄러기들이야. 스스로 죽지 못해 환장한 거야. 인생 낙오자들이지. 결국, 이 꼴이 되고 말 거야!” 똑똑히 봐두라고 경고한 사내는 바닥에 떨어진 수선화를 거듭거듭 짓밟았다. 바야흐로 박충식은 올 것이 왔음을 깨달았다. 사내가 노린 건 바로 스타그룹 해고자 복직 투쟁위원회였다. 스타전기, 스타화학, 스타보험, 스타백화점, 스타유통, 스타전자, 스타건설, 스타운송...... 스타그룹 계열사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뭉친 ‘해복투’는 지치지도 않고 싸워왔다. 전국의 사업장을 돌면서, 노동자들의 집회가 있는 곳이라면 서울이나 지방 어디를 가리지 않고 부당해고 철회를 외쳤다. 300명 남짓한 인원이 4년 넘게 스타그룹에 맞서왔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박충식은 기죽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누군가, 스타그룹 해복투 부위원장이 아닌가. 경찰이나 법도 자기들 입맛대로 떡 주무르듯 하는 스타그룹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개돼지 취급을 받으면서 꿋꿋하게 버텨왔어.
“자넨, 자신만 망친 게 아니라 남들까지 썩게 만들고 있어. 한마디로 암적인 존재라구!” 사내는 움켜쥔 해바라기를 칼로 도려내며 “봐, 암 덩어리는 이렇게 깨끗하게 제거해야 돼.”하고 난도질한 꽃을 집어던졌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