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의 왕
소설의 기원에 관한 공상 5




한차현





정신 없이 돌아가는 삥발이판을 어깨 너머 구경하던 내게 단장님은 바삐 씨부렸습니다.
“대기실에서 제발 이 짓거리 좀 말랬잖아. 뭐야 양아치 새끼들도 아니고. 당신은 어여 옷 챙겨 입어.”
“왜요?”
“이거 무슨 냄새야, 왜긴 초대 때문이지, 누구 쓰레기통 좀 갖다버려라. 죽은 쥐라도 집어넣었나.”
단장님의 시옷 자 수염이 내 앞에 바투 다가와 푸드득, 떨렸지요.
“하여당간 대단해. 내 배가 아파 더는 말 않겠지만, 어젯밤에 당신 기가 막히는 꿈을 꾼 게 틀림없어. 그걸 기억 못하고 있으니 이 판국에 백 원짜리 노름판이나 구경하고 계신 거겠지만.”
우리들 하는 말로 ‘초대’라고 있습니다. 초대한다 이거죠. 놀러온 사모님들 얼큰해지면 깎아놓은 오이 같이 미끈한 가수 형들 초대하고, 한잔 잡수러 오신 아저씨들은 또 서빙 보는 미끈한 빤쓰 걸들을 초대하고. 이해되시죠?
“어어, 열한 시 반 타임은 어쩌구요?”
“대기실에서 허벅지 긁적이며 죽치는 친구들이 몇인데 그거 못 때울까. 이거 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엊저녁 기똥찬 꿈이나 기억해 보라니까.”
“어제 잠을 설쳐서잠도 한숨 못 잤는데.”
“군말 접고 따라와. 여기에 기운이나 집중시키문서.”
“아야.”
부지런히 앞서던 단장님이 뒤로 손을 뻗어, 어디에 뭐가 달려 있는지 안 봐도 훤하다는 듯, 불알 끝을 새큰히 꼬집었습니다.
처음엔 홀 안 어느 테이블이나 룸인 줄 알았다가, 업소 뒷문으로 나서기에 그럼 근처 실내 포장마차 같은 데로 자리 옮긴 사모님들인가 싶었죠. 그런데 큰길을 넘더니 명품백화점 안쪽 화이트 스트리트에 들어서는 것 아닙니까. 찻길 하나 사이에 두고 수준 차가 엄청난, 한마디로 가깝고도 졸라게 먼. 마음 급한 단장님이 앞서 헤매는 곳인즉 바로 그런 거리 아니겠습니까.
그날 밤 나를 초대한 분은, 다름 아닌 문 여사님이었습니다. 세상에 네상에.
처음 뵙는 분이었지만, 당연하게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테이블 건너 그분이 과연 그분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뼈마디로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인사드려, 자넬 불러주신 문 여사님이셔. 긴장한 나머지 눈밑 살가죽을 쉴새없이 쌜기죽거리는 단장님의 소개가 있기 전에 말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그런 훌륭하신 양반들은, 외모에서부터 그러한 기운이 솔솔 샘솟는 모양입니다.
“오셨군요.”
눈물나게 화려하고 우아한 룸 안에 문 여사님과, 친구 두 분이 빤히 나를 훑어보고 계십니다. 그 나이에도 하나같이 화사한 미인들입니다. 길거리에서 멋모르고 마주쳤다간 그 아줌마 맛나겠네 소리가 절로 날 만한. 뭘 어쩌겠습니까. 구두 속 발가락만 꼼지락거리며 멀뚱히 서 있을 수밖에.
“반가워요. 앉으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바쁘신 분 오시라고 해서 죄송해요. 한잔 드릴게요. 괜찮으실까요?”
“감사합니다.”
이 근방만 해도 소유한 건물이 스무 채는 넘는다는. 평소 핸드백에 넣고 다니는 현금만으로도 우리 같은 업소 한 두 개는 간단히 사들이고 남을 정도라는. 지방에 가진 땅에 골프장도 들어서고 대학도 세워진다는. 국회위원이고 검찰청 누구고 방송국 누구고 무슨 일 생겼을 때 무슨 일 엮고 싶을 때 그녀만 통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주워들은 소문만으로도 그쯤 되시는 양반이 친히 따르는 잔입니다. 바들바들 손끝이 떨리려고 하더군요.
“당신의 개그를 봤어요.”
“감사합니다.”
“아니 참, 코미디라고 했던가? 재미있었어요. 재주가 많은 분 같더군요.”
“부끄럽습니다.”
“다른 건 아니고. 그저, 여기 좋은 친구들과 술 한잔하는데, 당신 생각이 갑자기 나더군요. 불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부끄럽습니다. 영광입니다. 달리 멋진 표현을 준비할 새도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판에 박힌 대사들이 영 마음에 걸렸습니다. 무대에 서는 놈이라 그런지 저도 소위 ‘상투적인 관용어’ 혹은 ‘죽은 은유’라 일컫는 어휘들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진 편이거든요. 어쩌다 그런 말을 입에 올려야 할 때면 그 뻔하고 뻔뻔한 소리를 들어야 하는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길 정도죠. 감사합니다 부끄럽습니다, 를 라면가락 후룩거리듯 입에 올리는 이가 실제로 그렇게 감사하고 부끄러워하는 중이라고 믿는 감사하고 부끄러운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늦게 합석한 술친구처럼, 누나들 노는 데 따라온 막내동생처럼, 회식 자리의 신입사원처럼. 성격 좋은 문 여사님과 친구 분들 사이에서 저는 조금씩 제 주제와 소재를 잃어갔습니다. 좋더군요. 그 귀한 이름만 들어봤을 뿐인 양주가 병째로 찰랑찰랑 비워지고, 그걸 주거니받거니 하는 이들인즉 봄꽃보다 화사한 문 여사님과 그 친구분들인 데다가, 그 순간을 돈 한 푼 들일 걱정 없이 즐기고 있다는. 사는 재미가 이런 거다 싶더군요. 씨벨 좆도 쌍소리에 100원짜리 짤랑거리는 포커판을 일없이 구경하던 제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와락 쏟아질 줄 누구는 알았겠습니까. 뿌듯했습니다. 으쓱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런 반짝 행운도, 결국은 내 코메디 덕이랄 수 있을 테니.
저요, 젊은 놈이 이런 말 한다고 때리지 마세요, 고생했다면 한 놈입니다. 꼴에 코메디 배우겠다고 무대 바닥에서 좆나게 터지고 좆빠지게 잔심부름한 거, 그거 글로 옮기는 재주만 있었다면 옛날에 단편소설집 하나는 묶었을 겁니다. 이 바닥 인간들이 그래요. 꼴에 아티스트라고 콧대가 이마까지 올라가서는 뭐든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는 걸 못 보죠. 자존심만 더럽게 똥 같아서 눈에 좀 거슬린다 싶으면 사정없이 욕하고 집어던지고 걷어차고. 그렇다고 처음에,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알아듣게 설명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뻣뻣해서 누굴 웃기겠냐고 뚜드려 패고, 하는 꼴이 병신같이 웃긴다고 뚜드려 패고, (아니, 코메디 하겠다는 놈을 웃긴다고 뚜드려 패면 도대체 뭘 어쩌자는 소립니까?) 연극배우들 보라고, 무대 섰으면 진지하게 몰입하는 자세 좀 배우라고 뚜드려 패고. 이 미친 새끼가 어디서 겉멋만 잔뜩 들었냐고, 밤무대 코메디가 무슨 연극 무대나 되는 줄 아느냐고 뚜드려 패고.
한 1년 구르다 보니까 요령이라는 게 생기더군요. 하긴, 그 동안 나른 안주접시가 몇 접시고 딴 맥주병이 몇 갭니까. 관객들이 어쩔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웃음이 술렁술렁 번지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폭소가 터지게 만들 수 있는지. 준비한 연기 끝내고 무대 뒤로 물러서면서, 어떻게 뜸을 들여야 더 많은 박수를 받아낼 수 있는지. 사실 그런 거, 되는 대로 가는 애드립 같지만 치밀하고 섬세한 계산이 깔린 연기의 연장이거든요. 보기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막상 따라하려면 감이 안 잡히는. 이른바 무대 짬밥이 어느 정도 받쳐줘야 하는.
8개월 만에 보조 딱지를 떼고 10분짜리 코너를 처음 맡았습니다. 투명 의자에 앉아 텅 빈 허공에 대고 열심히 베토벤을 연주하는, 그러다가 허둥지둥 자빠지고 엎어지는 피아니스트. 저의 첫 배역이었습니다. 10만 관중 들어찬 특설무대가 아니라 술 취한 손님 기십 명 앞이었지만 홀로 온전히 책임져야 할 무대에 선다는 건 어쨌거나 살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눈앞은 노래지고 뒷목은 뻣뻣해지고, 가슴 안쪽에서는 그야말로 희고 검은 피아노 건반들이 띵동땡동 미친 요동을 쳐대고. 어디가 무대 앞이고 뒤인지 모른 채 넋이 나가서 첫 공연을 신고했습니다. 대기실로 돌아와, 아직도 달달 떨리는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쪼그려 있는데 사회 보는 형이 뒤통수를 툭 치고 가더군요. 이 새끼 그래도 병신 기질이 있네?
한달 두 달 지나니 조금씩 할 만해졌습니다. 무대 안팎의 공기 흐름, 그런 게 살갗에 슬렁슬렁 와 닿더군요. 하긴 첫 공연 때처럼 매번 그렇게 속이 메슥거렸다간 어디 이 생활 해먹겠습니까.
방법을 아는 코메디안은요, 마이크만 잡아도 지켜보는 사람들이 웃을 준비를 한다고 했습니다. 나 웃길란다 너 웃어라. 나 웃을란다 너 시작해라.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눈감고 서면 어둔 객석 저편의 관객들 숨소리가 귓전에 살랑살랑 들려오는. 소통의 즐거움이라던가. 두 세계와 네 개의 자신. 무대 예술가들이 즐겨 이야기하는 경지 말입니다.
이거 말이 평택 지나 안성까지 샜네. 어쨌거나 그날 밤, 꽤 술이 됐습니다. 깜빡깜빡 정신을 놓쳤다가 되찾고 다시 잃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그 사이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온전히 기억하기 힘들 지경으로. 뭐, 큰 실수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겁니다. 부랴부랴 더듬어보니 옷차림도 그런 대로 양호하고 얼굴 상한 데도 없었으니까. 어느덧 새벽 2시였습니다. 룸 안은 귀가 먹먹할 만큼 조용하고, 테이블 위의 빈 술병과 흐트러진 안주 접시들, 대형 스크린에는 곡 번호를 선택해주십시오, 글자가 홀로 명멸하고.
문 여사님이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습니다. 술 취한 숲 속의 여왕처럼.
“여사님.”
손끝에 닿는 어깨의 감촉. 놀라울 만큼 가볍고 부드러웠습니다.
“일어나 보세요 여사님.”
“……으음.”
“새벽 두 시가 넘었어요.”
“내가 깜빡 잠이 들었나봐. 아이 머리야.”
“친구 분들은 가신 모양이지요?”
“그럴 거예요. 저기, 물 한잔 줄래요? ……고마워요.”
“나가셔야죠 이제.”
“어디로?”
“댁에 말씀입니다.”
“그래야지요. 가봐야 반겨줄 사람도 없지만.”
그러더니 반짝 눈을 들어 내 시선을 맞춥니다. 순간 몹시도 부끄러워졌습니다. 잠결에 불룩 솟아오른 팬티 앞을 엉겁결에 들키고 만 때처럼.
“택시 불러드릴까요?”
“기사가 대기하고 있을 거예요. 그보다…….”
도저히 마주 쳐다볼 수가 없더군요. 모르겠습니다, 그 눈빛이 이상했던 것인지 내가 이상한 놈인 건지.
“그보다 당신, 당신은 어디로 갈 생각인가요?”
“돌아가야죠. 초원의 집으로.”
“그렇군요. 거기가 당신의 집인가요?”
“뭐, 그런 셈이죠.”
조마조마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옷가지가 하나하나 벗겨지는 기분이더군요.
“같이 가요. 내 집에.”
“예?”
“당신이 좋아. 우리 같이 살아요.”
“어, 농담 마세요.”
머리끝이 아뜩해졌습니다. 심장이 배꼽 아래로 철벅 내려앉았습니다. 순간 멀고 아득한 생의 한 지점이 바닥부터 와지끈 갈라지고, 조각난 그 틈새로 미치도록 강렬한 형광 불빛이 환히 솟구치는 환상에 시야를 압도했습니다. 내 얼굴 위에 가련한 당혹의 빛이 어른거렸던가. 여사님이 팔을 뻗어 목덜미를 다정하게 끌어당겼습니다. 숨이 막혔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진심이에요. 난 정말, 당신이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를 만난 곳은 경평 덕소산 호숫가의 오래된 별장이었다. 그날 저녁, 별장 안은 객지에서 초대된 손님들로 온통 시끌벅적했다. 그는 전직 코메디안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전직 코메디안, 하고 듣는 순간 내 귓속은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다. 전직 당나귀. 전직 전화기. 마치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말이다. 전직 코메디안 이전의, 전직의 반대말은 현직일 테니까, 그는 두말할 것 없이 현직 코메디안이었을 텐데, 왜 그 일을 그만두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 그의 말마따나 연기자로서의 자존심과 명예 혹은 소통의 즐거움에 관한 문제가 있었는지. 그래서 지금은 무엇을 하며 사는지.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갈 마음이나 계획은 없는지. 쓸데없는 질문으로 이야기가 길어지게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168평 아파트. 혹시 상상이 되십니까? 제가요, 자랑이 아니라 꽤나 없이 자란 놈이거든요. 스물 넷에 결혼한 친구새끼 인천 어디 공장 단지 옆에 13평 아파트 전세 얻는 거 보고는 으아 씨발 난 언제 이런 데서 살아보나 우울해했던 저라구요. 그러니 어땠겠습니까. 168평이라니.
현관에서 안방까지 그러니까 집안 끝에서 끝까지 한번 갔다가 오면 이건 뭐 동네 한 바퀴 산책하는 기분이 들죠. 거실에 앉아 있으면, 지금 주방에서 바글바글 끓는 게 콩나물국인지 라면인지 알 수가 없구요. 잘 뵈지도 않고 냄새도 안 나니까. 방이 아홉 개 화장실이 네 개. 그 넓은 집에 누가 누가 사느냐. 문 여사님과 집안 일 보는 가평할머니, 운전기사 한씨아저씨, 거기에 제가 얹혀 들어간 겁니다. 어느 영화 속 대사처럼 ‘우주공간 속 심각한 공간의 낭비’라고 해야 할까.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당신이 원하는 한 언제라도. 외출은 얼마든지 하셔도 좋아요. 예쁜 아가씨를 만나 데이트를 하시든 친구들과 낮술을 드시든 초원의 집 무대에 다시 서든. 대신 외박은 삼가주세요. 제발 부탁드리는 거예요. 당신이 이 집에서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이 집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하는 것으로써 끊임없이 증명돼요. 그렇지 않은 순간 당신은 이미 이 집 사람이 아닌 거지요. 이해하시죠?”
초라하게 한 짐 싸서 들어오던 첫날 문 여사님이 한 말씀입니다. 어려울 게 뭐겠습니까. 들어오지 말랄까봐 걱정인 판인데.
신이 나더군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실실 웃음이 나더군요. 이놈의 상황이 꿈이거나 아직 벗어나지 않은 공상 속 그것은 정녕 아니길.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언제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가는지 영문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넉넉하고 또 자유로웠습니다. 간섭이 없다는 것, 빈둥빈둥 하루해를 보내는 데 그만큼 젖과 꿀 같은 조건이 또 있겠습니까. 와인 한 병 들고 베란다 티 테이블에 나가 앉아 온종일 시간을 보낸다고 뭐라는 사람이 있나.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늘어지게 잠자리 헤맨다고 깨우는 사람이 있나. 온수 콸콸 틀어놓고 면도한다고 밥 많이 먹는다고 잔소리할 사람이 있나. 상선(上善)은 약수(若水)라. 노자 말씀인즉 바로 요런 생활을 두고 하는 말이었을 겁니다. 물론 나로서는, 물처럼 어디로 흘러가기보다는 그 자리에 영원토록 머물러 있길 바라는 입장이지만. 웅덩이에 고인 빗물처럼 동굴 바위틈의 석회수처럼.
보름 정도 지났을까. 시내에 잠깐 나갔다가 아파트로 돌아왔습니다. 저녁 식탁에 앉기까지 한참은 더 있어야 하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집안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소리 없이 현관문을 열어주는 가평할머니의 얼굴에서 그런 기색이 엿보였습니다.
일찍 오셨네. 어여 들어가 쉬세요 사장님.
할머니는 그렇게 저를 불렀습니다. 가당치 않게도 말입니다.
무슨…… 일 있나요?
전 잘 몰라요.
거실 소파에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 여사님과, 처음 보는 어떤 남자. 그건 다소 뜻밖의 장면이었습니다. 베란다로부터 말간 햇살이 들어오는, 그런 시간이었으니까. 현관 들어설 적부터 느껴지던 묘한 분위기는 이 때문이었던가. 어여 (방에) 들어가 (나오지 말고) 쉬라던 할머니의 당부도 그래서?
“어디 다녀오셨나 봐.”
“일찍 들어오셨군요. 예, 볼일 좀 보느라고.”
물러날 테니 말씀 나누시라는 의미로 고개를 까닥이고 돌아서는데, 그러려고 하는데 여사님의 음성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괜찮으시면 앉아서 차 한잔하세요. 아, 서로 인사하시죠. 여기 이분은 김영민 씨라고.”
옆구리를 찔린 것처럼 주춤 일어선 청년은 시무룩히 허리를 꺾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순간 나는, 그가 내 시선을 조심스럽게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습니다. 민망하고 어색하여 어쩔 줄 모르겠다는 기색으로 말입니다. 권유를 뿌리칠 요령이 없어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그 자리에 합석하는 게 왠지 마음 편치 않더군요.
대화에 껴들 건덕지도 딱히 할 일도 없었던 나는 거의 자동적으로 낯선 손님을 힐끔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점잖은 색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나이 어린 티가 팍 나더군요. 저보다도 최소한 일고여덟 살은 아래로 보였죠. 정말이지 감탄이 절로 나올 미남이었습니다. 젊은 데다가 싱싱하고, 곱살한 데다가 잘생긴. 솜털 보송보송한 뺨, 귓불 세 군데에 앙증맞은 귀고리를 한 청년은 그런데 어딘지 불행해 보였습니다.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이 몹시도 안타까운, 그럼에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더욱 고통스러운. 그에 비해 문 여사님은 대리석처럼 평온했습니다. 상대적으로 냉랭해 보일 정도였죠. 그러므로 둘 사이에, 어딘지 아귀가 맞지 않아 불편한 기운이 떠도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베란다를 타고 넘어온 오후 햇살이 거실 벽을 타고 구부러지고. CD 속 낭랑한 피아노 연주도 어느덧 멈추고. 과일 접시가 1/4쯤 비워지고. 간간이, 기억 못할 만큼 맥빠지고 흥미 없는 대화 몇 마디가 오고가고. 그렇게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문 여사님이 홀연히 일어섰습니다.
“난 좀 씻어야겠네.”
그것은 우회적이면서 또한 대단히 직설적인 의사 표현이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라고 말한 적도 그런 기색도 없었던 청년은 끝내 울상이 되었습니다. 다시 받아주세요. 전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어요. 제발 절 버리지 말아주세요. 어떻게 된 일인지, 제 귀엔 청년의 무릎꿇은 애원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이 피곤해. 저어, 이분 대신 좀 모셔다 주시겠어요?”
막내아들뻘 되는 자신의 손님에게 짧은 눈인사를 던진 문 여사님이 몸을 돌렸습니다. 안방까지 길고 긴 복도 저편으로 뒷모습이 천천히 멀어졌습니다. 상심 가득한 청년의 얼굴.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쩔 도리 없이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말입니다.
“저어, 가시죠.”
천천히 구두 신는 모습을 지켜보고, 현관 밖으로 나와서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었습니다. 그가, 어딘지 낯이 익다는 걸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누구더라. 어디서 봤을까.
“선생님이 부럽습니다.”
맑은 벨소리가 울리고 28층까지 올라온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명확치 않은 기억 속의 청년이 우물거렸습니다.
“부디 행복하세요. 그러길 빌겠습니다. 부디.”
저로서는, 실로 뭐라 할 말이 없었지요.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정말 부럽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28에서 반짝이던 불빛이 한번도 멈추지 않고 1을 거쳐 지하 주차장이 있는 B3에 멈춰 설 때까지, 그리고도 한동안, 멍히 서서 그 불빛들을 멍히 지켜보았습니다. 낯이 상당히 익는데, 혹시 저 기억 안 나십니까. 그렇게 묻지 않았던 게 조금 후회되었습니다.
그날 밤늦은 시간이었습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방문이 열렸습니다. 문 여사님이었습니다.
“잤어요?”
“아니, 아뇨”
하얀 살갗이 아찔하게 비치는 잠옷. 부드럽게 살아 움직이는 몸의 곡선. 이불 속 내 몸의 일부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딱딱하게 열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옆에 누워도 되죠?”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침대 위로 스륵 미끄러져 들어온 여사님이 미처 준비되지 않은 내 몸을 따뜻하게 감쌌습니다. 침대가 소리 없이 출렁거렸으므로 순간 깊은 강물 속으로 속으로 끊임없이 빠져드는 환상에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신경 쓰이나요.”
“……무슨 말씀이신지.”
“낮에 그 사람 말예요. 그 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아닌가 해서.”
“전혀요.”
“다행이군요. 그래요. 아무 일 아니에요. 아무 일도.”
“그렇군요.”
당황스러웠습니다. 문 여사님의 표정이 침울했기 때문입니다.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처럼.
“사실, 지금 좀 힘이 드네요. 이젠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만.”
“…….”
“나 좀 안아줄래요?”
어쩔 수 없이 안쓰러운 기분이 들면서도, 한편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까 그렇게 무심한 태도로 일관한 게 누군데, 손님이 울상을 지으며 돌아가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지금쯤 포장마차 같은 데에서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을 이가 누굴 텐데. 하지만 그렇게 따질 생각은 없었습니다.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문제,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사정에 대해.

정체 모호한 파티가 한창이던 경평 호수 별장의 저녁시간, 그때까지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던 사람을 느닷없이 만나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소설을 쓰는 사람인 때문이었다. 정황을 말하자면 이렇다. 구석 자리에 야단 맞은 아이처럼 앉아 사람들 노는 꼴을 멀거니 구경하던, 아낌없이 나오는 술과 안주만 하염없이 축내던 즈음이다. 노래방 기계 반주 시끄럽던 옆방에서 술 취한 두 사내가 어깨동무를 하고 건너온다. 내가 있는 소파 옆자리에 풀썩 앉는다. 사진작가라는 강 누구와 또 한 명은 모르는 누구였다. “뭐라? 아랫도리만 홀랑 벗고?” “그렇다니까. 홀랑. 정말 대단한 여자들 아니라고.” “헤헤이, 이 작자 또 소설 쓰고 있다.” “소설 쓰는 거 아냐. 난 어디서 포르노 찍는 줄 알았다니까.” “고만 좀 해. 당신 툭하면 고따우 소설 쓰기 좋아하는 거 내가 모르나.” “정말이라니까. 소설은 젠장 내가 미쳤다고…….” 열나게 너스레를 떨던 사진작가, 문득 말을 멈추고 내 쪽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잃어버렸던 막내 동생을 찾은 사람처럼 목소리가 커진다. “뭐야. 진짜 소설을 쓰는 분이 여기 계셨잖아?” 동료의 어깨를 툭 친다. “아이고 우리 완전히 실수할 뻔했고만. 이거 봐. 인저 나한테 소설 쓰네 마네 그딴 소리 말라고. 진짜로 소설을 쓰는 양반이 여기 계시니까. 크힛!” 그때이다. 장식장 구석, 고물 오디오 앞에서 등을 보이고 있던 누군가 일어서더니 이쪽으로 다가온다. 오래 전부터 거기 그렇게 쭈그려 앉아, 자기가 할 만한 일은 그것밖에 없다는 듯, 먼지 낀 LP 자켓들을 하염없이 뒤적이던 남자였다. “저어, 소설…… 쓰는 분이세요?” 나는 물론이고 기세 좋게 떠벌리던 사진작가와 그의 동료도 멍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전직 코메디안이 서툰 외국어를 구사하듯 자신 없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어, 저한테 기가 막힌 소설거리가 하나 있거든요.”

여름이 갔습니다. 28층 아래로 굽어보이는 강변 풍경에 가을빛이 더해졌을 뿐 일상은 여전했습니다. 고요하고 풍요롭고 또 변함 없이 자유로운 일상의 연속. 아, 달라진 게 하나 있긴 합니다. 언젠가 칫솔을 물고 거울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지요.
허어, 이게 누군고?
얼굴이 참말로 통통해졌더군요. 반지르르 아기돼지처럼 뽀얀 피부에 늘어진 뺨과 턱살. 분명한 내 얼굴이 내 얼굴 같지 않았습니다. 에헤, 세월 참 좋구나.
베란다에 서면 저편 도심지를 유유히 가로지르는 물살이 보입니다. 가을이 오면서 더욱 깊어진 강물 위로 하늘을 헤엄치는 철새 떼가 비칩니다. 밤이면 검게 반짝이는 수면 위로 유람선 불빛이 19살을 꿈처럼 미끄러져 흐릅니다. 생의 정점. 생의 정점. 가슴 서늘하도록 아름다운 풍경들을 한가로이 좇다보면 밑도 끝도 없는 조바심으로 가슴 울렁입니다. 다가올 삶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생의 어느 정점 위를 조심히 걷고 있는 것만큼은 아무래도 확실하다고. 그런 것 같다고.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셨더라.”
어느 날. 밤늦게 귀가한 여사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일찌감치 자리에 들었던 저는 졸린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섰습니다. 여사님이 한없이 인자한 미소로 저를 반깁니다. 취하신 것 같더군요.
“석 달째 되어갑니다.”
“어머나, 벌써?”
“시간 참 빠르죠.”
“어떠셨어요 여기 생활.”
“행복합니다.”
“내가 만날 바깥일에 매여 사느라 신경도 못 써주고. 늘 미안해서.”
가평할머니가 과일을 내오자 여사님은 술을 청했습니다. 그리고는 한씨아저씨까지 호출했지요. 밤늦은 술자리에, 온 식구가 모여 앉았습니다.
“아, 당신. 코메디안이라고 했지요.”
“그랬었지요.”
“안타까워라. 난 당신이 무대에 선 모습을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고?”
“처음 뵈었을 때 여사님이 그러셨지요. 당신의 개그를 봤어요. 아니 참, 코메디라고 했던가?”
“내가?”
“재미있었다고. 재주가 많은 분인 것 같다고.”
“그랬던가. 내가 요즘 정신이.”
문 여사님이 빙그레 웃었습니다.
“저기, 코메디 한번 보여주실 수 있어요?”
“물론이죠, 언제든지 원하신다면.”
“지금. 바로 여기에서.”
“……예?”
가평할머니가 짝짝짝 박수를 쳤습니다. 포크로 사과 조각을 찍던 한씨아저씨가 아랫입술을 잡아 빼고 휘익,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황당했습니다. 쪼그만 꼬추를 드러낸 채 어른들 앞에서 동요를 불러야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조명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고작 세 사람이 눈을 말똥거리며 모여 앉은 거실에서, 그것도 자다 깨서 느닷없이.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누굽니까. 헬렐레 술 취한 손님들을 즐거이 웃고 손뼉치게 만들었던, 초원의 집의 간판 코메디안 아니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습니다. 나를 향한 눈동자 여섯 개가, 수백만 관중의 함성보다 뜨겁더군요. 한차례 숨을 골랐습니다. 뭐가 좋을까. 처음부터 확실하게 사람들을 사로잡으려면. 궁리 끝에 평이하지만 가장 대중적인 레퍼토리 ‘소리 흉내’를 시작했습니다. 인민군 쓰는 따발총 소리. 칙칙폭폭 뿌우 기차 소리. 쉬유우우우 콰앙 포물선을 긋는 곡사포 소리. 쉐에엑 창공을 가로지르는 쌕쌕이 소리. 뚜우우 뱃고동 소리. 더운 입김 묻어 끈적해진 손을 풀고 가쁜 숨을 고르며 반응을 살폈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들. 웃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군가 묻습니다. 다…… 끝난 건가요? 무대 경험 적은 이들이 눈앞 까매져서 당황하는 게 바로 이런 순간입니다. 어떻게 분위기 수습하고 어떻게 좌중을 환기시켜야 할지 알지 못하는 채 그냥 울고만 싶어지는 거죠. 하지만 전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내 코메디의 운명이 관객들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의 웃음이 내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끝나긴요. 이제 시, 시작입니다.”
‘마른오징어 굽기’ 아시나요? 가난한 연인들의 영양간식. 빨간 연탄불 위에서 오그작 오그작 몸을 꼬며 맛나게 구워지는 오징어 말이죠. 전국노래자랑에서 흉내내는 출연자들이 가끔 나올 정도로 잘 알려진. 한 마리 천 원짜리냐 이천 원짜리냐에 따라 구워지는 속도와 모습이 달라집니다. 서서히 어깨가 뒤틀리고 두 다리가 꼬이고 입술이 돌아가고 손목이 뒤틀리고. 뜨거운 연탄불에 뼈가 휘고 살이 구워지듯 고통스럽게. 맛나게 노릇노릇. 쿡쿡 쿡쿡. 사람들이 소리 죽여 웃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분위기 놓칠 새라 ‘경운기 발동 걸기’에 들어갔습니다. 여름날 뙤약볕 쨍쨍한 시골길. 벌겋게 낮술 잡순 농부 아저씨, 비틀거리며 다가와 경운기 발동을 겁니다. 모터에 연결된 줄을 쭈욱 잡아당기는 거죠. 그런데 약주가 과하신 건지 엔진이 낡았는지 여간 힘겨워 보이지 않습니다. 털털. 털털털털. 푸시식. 털털 털털 푸시시. 자꾸만 꺼지는 모터 소리에 농부 아저씨 얼굴이 더욱 빨개져서 씩씩거립니다. 털털 털럭털럭 털털털털 아이고 죽갔다, 이놈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너 술췠니? 털털털털 털럭털럭 헥헥.
히히힛! 한씨아저씨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가평할머니도 입을 가리고 홍홍 홍홍, 합니다. 뽕 맞은 가수처럼 힘이 솟았습니다. 답례로 ‘홍시와 엿’을 선보이자. 서울 사는 딸네 집 찾아 먼길 떠나던 할아버지. 지친 다리도 쉬어 갈 겸 요기도 할 겸 나무 그늘에 앉아 봇짐을 푸십니다. 말캉말캉한 홍시 감을 꺼내는군요. 똥 싸는 자세로 쪼그려 앉은 할아버지, 이제 감을 잡숫기 시작하는 겁니다. 달달달 채머리를 흔들어 가며 감꼭지를 요렇게 따서는 혓바닥으로 요렇게 닐름 핥습니다. 아이고, 성한 이가 몇 개 남아 있지 않네요. 이제 본격적으로 감을 빨아 드십니다. 쪼옥. 쪼오옥. 쪼글쪼글한 양 볼이 오목하게 빨려 들어갑니다. 푸하하하. 문 여사님이 소녀처럼 박수를 칩니다. 홍시를 맛나게 드시고는 할아버지 또 봇짐 속을 뒤적거립니다. 주먹만한 갱엿 조각을 꺼내네요. 저 단단한 놈을 어떻게 드시려나. 억지로 입에 쑤셔 넣기는 했는데 도무지 어찌 해볼 도리가 없어 눈만 껌벅껌뻑, 불룩 튀어나온 한쪽 볼이 매우 거북한 모양입니다. 별 수 있나. 잇몸으로 사알살 우물거려 봅니다. 턱주가리를 크게 움직여, 아래위로 맷돌질을 하듯 힘겹게. 그럴 때마다 주름진 얼굴 거죽이 흉하게 씰룩이고. 우하하하. 사람들이 소파를 두드리며 웃습니다. 하지만 거기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그 즈음 나는 내가 아니라 나무 그늘에 앉아 입 안의 엿 조각과 씨름하는 어느 할아버지였습니다. 아울러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주시하는 대상 역시, 연기에 열중하는 제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였고. 그래요. 두 세계와 네 개의 자신, 아까 말씀 드렸던.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꾸울꺽, 힘겹게 엿을 삼킨 할아버지가, 내가, 똥 싸는 자세를 풀고 일어섰습니다. 휴우. 이마에 촉촉이 밴 땀을 닦으며 꾸벅 인사했습니다. 브라보! 세 명의 관객이 환호의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그가 거듭 말하던 ‘두 세계와 네 개의 자신’이란, 기억나는 대로 소개하자면 이렇다. 여기 무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심호흡 한 차례 하고, 혹은 입술 끝으로 첫 대사를 달싹이며 무대에 올라서는 순간 연기자는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진입하게 된다. 순간이동장치에 몸을 맡긴 우주인처럼 말이다. 그것은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물러서는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무대 뒤 좁은 통로를 경계로 두 개의 세상이 존재한다. 무대 안, 과 밖.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공간 차원이 다를 뿐 둘 모두가 엄연히 존재하는 실제 세계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플라톤의 동굴 이데아 따위로 뭉뚱그려지는, 한 세계가 다른 세계의 허상이거나 모방이거나 종속되는 관계가 아니라는. 그리하여 네 개의 자신이라는 개념이 다시 탄생한다. 하나. 평상시의, 그렇게 믿어지는 나. 둘. 무대에 서서, 그 세계의 역할에 따라 행위하고 인식하고 사고하는 나. 셋. 두 번째 나를 주시하는, 관객석 어느 눈동자 속에 투영된 나. 네 번째 나, 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뭐였더라.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날 밤. 아아, 그날 밤. 앞으로의 생애가 얼마나 주어질지, 그 와중에 무슨 순간들이 찾아올지 알 수 없지만, 맙소사, 단 한시도 잊지 못할.
하루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때아닌 가을비는 자정 지나서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불을 끄고 누워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드는 빗소리를 엿듣고 있을 즈음이었습니다. 문 여사님이 귀가하는 기척이 들렸습니다. 나가서 밤 인사를 할까 하다가, 자는 셈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할 텐데 인사 주고받느라 공연히 성가시게만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똑똑. 빗소리를 타고 잠깐 잠이 들었던가.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사님이셨습니다.
“주무셨나봐.”
“아닙니다. 들어오세요.”
여사님과의 사랑은 늘 이렇게 예고치 않았던 계제에 찾아옵니다. 선택이 아니라 주어지는. 처음 만남이 그랬듯, 기다릴 새도 준비할 수도 없는.
밤비 소리가 아득히 창문을 두드립니다. 여사님의 입술은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매끄럽고 촉촉한 혓바닥에서는 잘 익은 포도주 향기가 감미롭습니다. 그 향기로부터, 무수한 흔적과 흔적들을 느낍니다. 사람. 사람들. 여사님 옆구리를 고단히도 스쳐 지나갔을 숱한 그림자들.
“당분간 못 보겠네요.”
“아니 왜요.”
“아메리카 가요. 일 때문에.”
“아.”
여사님의 손길에 부끄러움 많은 하체가 침대 밑으로 자꾸 가라앉습니다.
“피곤해. 살 수가 없어. 언제나 맘 편히 쉴 날이 올까.”
“언제 가시나요.”
“내일 아침 첫 비행기.”
“…….”
“한달, 어쩌면 그 이상 걸릴지도 몰라요.”
따뜻한 손바닥이 벗은 가슴을 어루만집니다. 오래된 상처에 약을 발라주듯.
“행여 내 걱정은 말아요. 어디서건 잘 지낼 테니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왜 아니에요. 언제나 문제투성이지. 여기도 거기도. 떠나도 그렇지 않아도. 혼자 있어도 사람들을 만나고 다녀도.”
“힘내세요.”
“그 동안 고마웠어요.”
“왜 그런 말씀을.”
“한 동안 못 만날 테니까.”
“고마운 건 오히려 전데요.”
“아메리카 가서도 그거 보고 싶으면 어떡하나.”
“그거, 요?”
“참 좋았어요.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정말 즐거웠어요.”
“뭐가…….”
“당신 코메디쑈. 며칠 전에 보여준.”
“아아. 그.”
“잊지 못할 거예요. 고작 세 명의 관객 앞에서 진지하게 연기하던 당신 모습. 감동적이었어요.”
비가 내립니다. 비가 내립니다. 어둔 창 밖으로 가을비가 밤새 그치지 않고 옆자리의 아름다운 여인은 숨죽여 속삭입니다. 정점. 생의 알 수 없는 어느. 뒤에 가 한없이 모호한 기억으로 남겨질. 바람 불 듯 가슴이 저렸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좀 했어요. 어떻게 답례할까.”
“에이, 답례는 무슨.”
“뭐가 좋을까. 나도 뭘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어설픈 대로 준비를 해봤지요. 화답 공연이라고 해야 하나.”
“화답 공연이라뇨?”
“코메디쑈.”
“어…… 그게 무슨.”
“코메디 말예요. 당신 전공.”
“그 코, 코메디를 말하시는 건가요.”
“뭘 그렇게 놀라요? 사람 부끄럽게.”
어둠 속에서 여사님이 몸을 일으켰습니다. 침대가 출렁, 흔들렸고 방안 가득 불이 켜졌습니다. 시린 눈 속에 들어온 것은 여사님의 밤색 고운 브래지어와 팬티였습니다.
“문 좀 잠글게요.”
“문? 어, 예, 그러시죠.”
딸깍. 잠금쇠를 누르고 돌아서더니 이마 뒤로 머리칼을 넘기며 수줍게 웃더군요. 엉겁결에 입맞춤을 당하고 만 중학생 소녀처럼.
“저기, 나랑 약속해요.”
“무슨 약속을.”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절대 비밀이에요. 창피하니까.”
“그러죠.”
“그리고,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부탁인데, 너무 크게 웃지 말아 주세요. 혹시 제 코메디가 웃긴다고 해도 말예요.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챌지도 모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얼떨떨했습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가. 이 오밤중에, 천하의 문 여사님이, 나만을 위해, 덜렁 빤쓰 부라자 바람으로 서서, 웬 세상에, 코메디쑈를?
“해도 될까요?”
“예, 준비 되셨으면.”
“비웃지 마세요. 너무 형편없어도.”
“무슨 말씀을.”
차려 자세로 선 여사님이 어깨로 숨을 쉬었습니다. 지긋이 눈감고, 고개를 살며시 쳐들고, 입술을 가볍게 오므려 천천히 숨을 고릅니다. 실기시험장 문 앞에 선 예체능계 수험생 같습니다.
“……시작할게요.”
이윽고 눈을 뜬 문 여사님. 얼굴이 조금 이상합니다. 다른 사람 같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 실로 다른 사람 같아진 여사님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어깨를 꾸부정히 웅크리고
목을 앞으로 뽑아 턱을 내밀고
겨울나무처럼 뒤틀린 팔과 손목과 무릎
구부정 휜 허리
잔뜩 찡그린 입가와 콧잔등
아, 저것은. 병신육갑춤의 대가 공옥봉 여사의 작품 ‘지랄원숭이’ 첫 자세 아닌가! 생의 절망이라는 벼랑 끝, 슬픔의 극한을 넘어선 춤꾼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육체의 해학적 언어라는. 저걸 여사님이 어떻게?
뒤틀린 채 굳게 다문 입술. 이마 위로 잔뜩 치켜 올라간 눈썹과 방향을 잃고 좌로 우로 뒤룩거리는 눈알. 섬뜩하게 변모한 얼굴의 주인공이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근육이 경직되고 관절이 마비된 듯 불편하고 이상한 춤을 덩실덩실. 다시 덩실덩실.
그러다가 우뚝, 멈추어 섭니다.
시간만이 숨죽인 채 천천히 흐릅니다. 4초. 5초. 6초. 숨쉬기가 덩달아 조심스러워집니다. 7초. 8초. 9초. 낯선 춤꾼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집니다. 15초. 16초. 17초. 빨개집니다. 새빨개집니다. 검붉어집니다. 숨을 참습니다. 예, 척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숨을 참고 있는 중입니다. 연기를 위해, 연기의 한 극적인 과정으로서 말이지요. 지켜보는 나까지 덩달아 고통스러워집니다. 말리고만 싶습니다. 누군가 눈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숨을 참고 있는, 그만큼 ‘숨막히는’ 장면이 또 있겠습니까. 55초. 1분. 1분 20초. 제발 그만! 그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달려가서 경직된 몸을 흔들어 달래고 싶습니다.
오른손을 쳐듭니다. 쳐든 손을 천천히, 팽팽하게 긴장된 방 안 공기가 흐트러질 새라 조심히, 어깨 뒤로 뻗습니다. 허공에 머문 오른팔. 뾰족함을 드러내고 잔뜩 물러선 권총 공이 같은.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새로운 긴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한 순간. 잔뜩 물러선 오른팔이 휘익, 허공을 기릅니다. 뒤통수를 세차게 내려칩니다. 터질 듯 긴장되어 있던 얼굴 근육이 일순 폭발합니다.
꺽!
곤혹스러운 비명과 함께 벌어진 입에서, 길다란 혀와 가지런한 이와 붉은 잇몸이 와락 쏟아집니다. 핏발 선 눈알이 덩달아 10cm 정도 튀어나옵니다. 엉겁결에 흠칫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정말이지 끔찍하고 충격적인 장면. 막 교통사고를 당한 피해자 같은. ‘위험! 절대로 따라하지 마세요.’ 그런 자막이라도 붙어야 할 것 같은. 뒤통수에서 물러난 손이, 손바닥이, 앞이마를 대여섯 차례 두드립니다. 턱턱, 턱턱. 흉물스럽게 튀어나온 눈알과 이와 잇몸과 혀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 들어갑니다. 이윽고 연기자는, 제가 아는 아름다운 문 여사님의 얼굴로 돌아왔습니다. 그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냐고 따지지 마세요. 상식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은, 시종 그 꼴을 지켜보았던 저 역시 잘 알고 있으니까. 더욱 놀라운 것은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장면이, 꿈에 볼까 두려운 한편 엄청나게 우스웠다는 점이었습니다.
“우화하하하하핫!”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나는 배를 잡고 방바닥을 굴렀습니다. 낄낄낄낄 낄낄낄낄. 개미떼 같은 웃음이 입가를 타고 끊임없이 기어 나왔습니다. 문 여사님이 질겁을 하며 다가와 입술 가운데에 집게손가락을 가져갔습니다.
“쉿! 조용히! 제발 쉿.”
“아이고. 으흐흐. 푸히히.”
“아이 참. 사람들 깬단 말예요.”
매트리스에 얼굴을 박고 한참을 꺽꺽거렸습니다. 웃음에 체한 기분이었습니다. 한참 만에야 미칠 것 같은 웃음을 겨우 끊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밤색 브래지어와 팬티의 문 여사님이,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저기…… 웃겼어요?”
“웃기다마다요!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네.”
“정말? 나 기분 좋으라고 그러는 거 아니고?”
“아이고, 억지로 이렇게 웃을 수가 있나요. 정말 최곱니다.”
진심 어린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짝짝짝짝짝.
“튀어나오는 눈알! 정말 대단해요. 어디서 그런 연기를?”
“아까 말했잖아요. 답례로 뭘 보여줬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래서 어설픈 대로 준비해 좀 해봤다고. 방문 잠그고 거울 앞에서도 연습하고 샤워하면서도 연습하고 차 안에서도 잠깐잠깐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몰래.”
문 여사님의 놀라운 코메디쑈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시작이었습니다.
두 눈꺼풀을 홀라당 까뒤집고, 아랫입술을 늘여 당겨 콧잔등을 덮고, 왼팔을 머리 뒤로 돌려 왼손 중지로 오른쪽 콧구멍을 야무지게 쑤시고, 쩍 벌린 입안에 주먹을 쑤셔 넣고, 그걸 빼는데 빠지지가 않아 낑낑거리는 시늉을 하고. 저는 쉴새없이 배를 잡고 낄낄거리며 방바닥을 뒹굴었습니다. 끊임없이 놀라고 감탄했으며 또 감동했습니다. 감히 말하지만 그날 밤, 도저히 잊을 수도 생생히 기억해 낼 수도 없는 그날의 밤 시간. 여사님은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되어 세상에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던 내 생애 최고의 코메디쑈를 보여 주었습니다. 삼류다 통속이다 저질이다 따질 필요도 이유도 없는, 원초적이고 위대한 몸의 예술을.
“놀랍습니다. 못 잊을 겁니다.”
“좋게 봐줘서 고마워요.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 비밀이에요. 약속.”
“약속, 입니다. 나중에 또 다시 감상할 기회가 있을까요?”
“물론이죠. 너무 늦었네. 건너갈게요. 쉬세요.”
“예, 안녕히.”

덕소산 별장의 밤이 깊었다. 새벽이 가까워 오고, 사람들은 벼랑 끝을 향해 달려가는 바람 같았다. 계단 구석에 술 냄새 지독한 토사물을 게워놓는, 웃통을 벗고 춤을 추는, 한시도 쉬지 않고 떠벌려대는, 욕설을 내뱉으며 주먹다짐을 하는, 마루바닥을 뒹굴며 거친 사랑을 나누는 사람 사람들. 남자의 이야기도 허덕허덕 고갯마루를 넘어서고 있었다. 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소설가라는 사람은, 누구나 그 앞에 가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지껄여도 무방한 부류라고 믿는 것인가. 그런 짜증이 무뎌질 즈음이다. 뜻밖의 의심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 사람 혹시 소설을 쓰고 있는 것 아냐? 그리하여 여태까지 들은 이야기가, 죄다 꾸며낸 거짓말인지도.

새벽 세시가 넘은 시간.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잠들고 싶은 생각도 없었습니다.
눈감으니 검은 각막 너머로 지난날이 어른거렸습니다. 느닷없이 말입니다. 지난날들. 이제는 그렇게 불러 마땅할, 그렇게밖에는 말할 길 없는 알지 못할 시간 너머의 어느 흔적들, 한 세계를 향해 종적 없이 사라져간.
양등포 거리에 처음 발을 들어놓던 때입니다. 극장식 유흥주점 초원의 집에 무작정 찾아가 고개 숙이는 제게 선배 연기자들은 대뜸 그랬죠.
새끼 옷 입은 뽀대 하고는. 어깨에 뽕 좀 봐. 니가 김승진이냐?
꼴에 구창모 파마를 했네. 생긴 건 배철수 같아서.
임마, 집에 돌아가. 평생 후회하지 말고.
더럽고 힘들고 애틋한 막내 시절. 쉬는 날이면 동기 몇과 어울려서 아톰표 본드를 샀죠. 라면 봉지에 몽땅 짜 넣고 돌아가면서 킁킁 마시고 헤헤 웃고 새가 되어 하느작거리고 거북이가 되어 버르적거리고. 비 오는 날이면 짱께집만한 데가 없어요. 1천5백 원 하던 짬뽕에 군만두 시켜놓고 소주를 마시면 좁은 홀에 파리가 마구 날고 천장에 매달린 끈끈이 줄에 그놈들이 새까맣게 붙어 있고 선반의 고물 TV가 내내 지직거리고 배 나온 주인아저씨가 러닝셔츠만 입고 돌아다녀도 즐거웠으니. 밤거리 어슬렁거리는 녀석들 삥 뜯는 재미도 쏠쏠했지. 당산공고 다닌다고 했던가, 새 나이키 농구화 뺏긴 새끼 엉엉 울 것 같은 표정하고는. 나중에 지배인 형에게 들켜서 죽도록 얻어터져야 했지만. 그래. 그땐 정말 그랬어, 당시를 멀리 아련히 추억하는 이런 새벽 시간이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상상도 못했던, 그런 때. 눈 밑이 뜨끈해졌습니다. 콧잔등이 시큰거렸습니다.
비 오는 동네 중국집의 파리떼처럼 느닷없이 달려드는 지난 기억들. 신경통처럼 느닷없이 찾아온 한 시절에의 그리움. 그 진원지인 양등포를 찾아 나서기로 마음을 굳힌 것은 날이 밝아오던 즈음이었습니다. 문 여사님이 아메리카로 떠나시던 바로 그날이었죠.
자고 나면 뒤바뀌는 게 도심지 풍경이라더니 몇 개월 만에 찾아간 양등포 시장은 묘하게도 낯이 설었습니다. 백화점 건너. 지하철 4번 출구로부터 시작되는 꽃가게 길이며 지하에 대형 수입상가가 있는 호프집 건물과 먹자골목 초입의 24시간 원조 감자탕집에 골목 안쪽으로 다닥다닥 붙은 여관들까지, 눈감고도 훤하고 뻔한 그 풍경들이, 왠지 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먹하게 물러서 있는 듯한. 기분이 그런 거겠죠?
극장식당 초원의 집! 아, 그 냄새. 지하 층 특유의 퀴퀴하고 콤콤하고 들큰하고 퇴폐적이고 또 포근한. 제 젊은 한때가 곰삭았던 그 냄새에 잠시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주책없이 나오려는 눈물을 주먹으로 틀어막고 싶더군요.
“어라, 이 새끼 누구야?”
“안칠현이!”
“형님들 나와 보세요. 여기 누가 왔나.”
옛 식구들이, 중동으로 시집갔다가 놀러온 딸자식 대하듯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모두들 여전하더군요. 드럼 치는 태지 형이 그제야 잠 깼는지 사타구니를 득득 긁으며 나타나 웃어주었고 삼룡이 용필이 씨발 영록이 모두 건강한 얼굴로 달려와 제 팔을 끌어안았습니다.
“흐메, 기름기 잘잘 흐르는 거 봐.”
“어떠냐 강변 문여사. 잘 빨아줘?”
“아파트 존나 넓다매? 화장실이 열 두 개라고 하던데.”
반가운 얼굴들끼리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펑펑 피워 올렸습니다. 참말로 흥겹고 유쾌했습니다. 엇비슷한 추억을 간직한 이들과 함께 이제는 사라진 날들을 눈앞에 끌어내 실컷 들쑤시고 주무르고 만지작거린다는 것은.
그 동네 여전하더군요. 툭하면 관할 형사 새끼들 공술 처먹으러 와서 팁 삼천 원 내놓고 빤쓰걸들 밤새 주무르고, 민요 부르는 킴카나리아 아줌마에게 홀딱 반한 노인네 새끼 분장실까지 쫓아 들어와서 소란 일으키고, 만취한 손님 새끼 테이블에 올라가 춤추다가 떨어져 눈텡이 깨진 게 지난주에만 두 명이고. 같이 웃고 재잘거려야 할 딸딸이 주일이가 옆에 없는 것이 조금 허전했습니다. 제 동기거든요, 비슷한 시기에 들어와 같이 코메디 배우던. 툭하면 어디 사라져서 딸딸이 치다가 들켜 얻어터지곤 했지만 참 좋은 놈이었는데. 지난달에 느닷없이 영장이 나왔다더군요. 씨발놈. 딸딸이만 치지 말고 연락 좀 하지.

날이 밝았다. 아침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별장 관리인이 마루에 들어서더니 외치기 시작했다.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일어들나서 해장하세요. 셔틀버스가 여덟 시 반에 출발합니다. 온천 가실 분들 서두르시고요. 아휴, 술냄새. 밤새도록 알 수 없는 파티를 즐기던, 새벽이 오면서 하나둘씩 애벌레가 되어 구석자리에 웅크렸던 사람들이 하나둘 꿈틀거린다. 한없이 괴롭고 구슬픈 얼굴들로 몸을 일으킨다. “식사…… 하러 가시죠? 밤새 떠들었더니 배고프네.” 전직 코메디안이 우물쭈물 제안했다. 아직까지 나를 놓아줄 마음이 없는 그는, 말하자면 그제야, 밤새 괴롭혀 마지않았던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정작 나로서는 조금쯤 혼란스러워지는 중이었다. 이 남자는 누굴까. 여태 들었던 이야기가 죄다 거짓말이었다면. 밤새 들려준 내용이 실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허구였다면, 그렇다면?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밤새 떠들어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게 바라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이, 자기가 지껄이는 거짓 이야기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다고 믿는 것일까.

저녁 시간이 되었습니다. 같이 술 먹던 옛 동료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하나 둘 일어섭니다. 주방에서 안주 만드는 양념 냄새가 번지고 막내들은 분주하게 테이블 치우고 대걸레질을 하고, 무대는 또 나름대로 공연 준비가 바쁩니다. 초원의 집의 하루는, 그래요, 바로 이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죠. 바삐 단장님을 찾았습니다.
“무대에 서겠다고? 당신이?”
“예.”
“아니 왜애?”
“왜라뇨. 저도 코메디안 아닙니까.”
“한때 그랬지. 과거에.”
“전 여전히 코메디쑈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누가 뭐랬나. 그런데 당신, 강변 문여사와 헤어진 거야? 그 집에서 쫓겨난 거냐고. 난 오늘, 그냥 놀러온 건 줄 알았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헤어지다니.”
“아니면 다행이고. 그런데 왜 갑자기 무대에 올라가겠다는 게야?”
“그러고 싶으니까요. 제발요. 십 분짜리 한 타임만 할게요.”
“거 참…… 아니, 그런데 왜애?”
“코메디쑈를 사랑하니까요. 단장님은 제 코메디쑈를 좋아하지 않으셨나요?”
그런 게 기억날 리 없다는 표정으로 빨부리 담배를 빡빡 빨던 단장은, 검지손톱을 세워 앞이마를 득득 긁었습니다.
“알아서 해.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하지만 뒤에 가서 딴소리하기 없기야?”
“감사합니다.”
“출연료는 오늘 먹은 맥주 값으로 쳐줄게. 아아, 제발 고맙단 소리는 마.”
대기실에 들어서 의상을 골랐습니다. 빨간 빤짝이 파란 빤짝이 은색 빤짝이. 한동안 잊고 있었을 뿐 참으로 친숙한 그 감촉들.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습니다. 거울 앞에서 분장에 열중하던 이들이 한마디씩 뱉습니다. 올라갈라고? 헤이. 술이나 마시고 놀다 가지 무슨. 하여간 대단해. 나 같으면 아무리 부탁을 해와도 거절하겠구만. 아무리 한솥밥 먹었던 옛 동료들이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언젠가는 그들도 깨닫지 않겠습니까. 그 세계 떠나 있어 보면, 그토록 지겹고 힘들던 무대 위가 그리워 신경통이 도질 지경이라는 걸.
첫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쿵쿵거리는 베이스 음, 신나게 때려부수는 드럼 소리, 관악기의 기름진 음색, 트로트 가수의 간드러지게 찢어 놓는 가창에 이어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무대 쪽 나무 벽을 왈랑왈랑 흔들어댑니다. 덩달아 제 가슴이 왈랑거립니다. 비감해진다는 말을 그럴 때 쓰기도 하나요? 8시 20분 제 순서를 얼마 안 남겨놓고, 그런 느낌이 삶은 계란을 통째로 넘긴 듯 목구멍 가득 미어졌습니다.
드디어 찾아온 순서. 무대 뒤에 서서 기다리는 장딴지가 달달 떨렸습니다. 박수 소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제가 아니라 열창을 끝내고 물러서는 중현이를 위한 박수입니다.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던 중현이가 아는 체 합니다.
“칠현 형 차례네? 잘 해요. 오늘 관객 분위기 좋다.”
사회 보는 정호 형이 마이크를 잡은 모양입니다. 예, 감사합니다. 아아, 진정하세요. 저어기 저기, 춤 못 취서 환장한 누나 손님, 그래요, 빨강 레자 입은 언니, 잠깐만 앉아주세요. 예예, 감사합니다. 자.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들 오늘 운 참 좋으십니다. 특별순서어, 그렇습니다, 예정에 없던 스타가 지금 조오기 뒤에서 이 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아, 동남아 순회공연을 막 마치고 돌아온……. 고맙게도 그렇게 분위기를 띄워주지 뭡니까. 힘이 났습니다. 무대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심장의 피가 펄펄 끓었습니다.
스탠딩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순간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됩니다. 와들와들. 사지가 미친 듯 떨렸습니다. 모가지가 덜그럭덜그럭 춤추고 으어어어, 돼지 목 조르는 신음이 절로 쏟아졌습니다. 놀란 사람들이 작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사고다! 감전이다! 예상했던 반응입니다. 미리 준비한 연기였지요. 잠시 뜸을 들인 저는 나직한 멘트를 내뱉었습니다.
“감전 당한 거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배가 고파 전기를 좀 먹었습니다. 동남아 기내식이 부실하더군요.”
까르르, 웃음소리가 장내 가득 술렁입니다. 그러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잠잠합니다. 아무 반응도 없습니다. 도대체 저게 무슨 수작인가, 하는 표정들. 젠장 실패네. 이럴 땐 다른 거 없습니다. 빨리 잊고 분위기 바꿀 방법을 찾아야지요.
“여러분. 이 다 빠진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엿 드시는 거 보신 분 있나요. 아니, 나이 자신 분한테 엿먹어라 망발하는 게 아니구요. 정말 먹는 엿 말입니다. 못 보셨다구요? 좋습니다. 그럼 이 자리에 할아버지 한 분 모시겠습니다.”
기억하시죠? 거실의 단출한 관객들로 하여금 소파를 치며 웃게 만들었던 그 레퍼토리. 딸네 집 찾아 먼길 떠나던 할아버지. 나무 그늘에 앉아 봇짐을 풀고. 달달달 채머리를 흔들며 주먹만한 갱엿 조각을 어거지로 입에 쑤셔 넣고. 불룩 튀어나온 한쪽 볼이 매우 거북해서 눈만 꿈뻑꿈뻑. 그리고는 힘겹게 우물우물. 턱주가리를 크게 움직여, 아래위로 맷돌질하듯 힘겹게. 아랫입술을 뒤틀며 맹렬히 얼굴 거죽을 씰룩이던 나는, 힐끔 객석의 반응을 살폈습니다. 그리고는 턱 놀림을 스륵 멈추고 말았습니다. 멍한 눈빛. 다큐멘터리 영화를 감상하듯 진지한 그 얼굴들. 키득거리기는커녕 미소짓는 사람 하나 없습니다.
“아휴, 우리 할아버지 배탈나시겠다. 거 엿 한번 먹기 힘드네. 그렇죠? 감사합니다. 자, 박수 좀 부탁합니다.”
이마에 배인 땀을 닦았습니다. 김빠진 박수 몇 차례 나오다 멈추더군요. 안 되겠어. 비장의 무기를 꺼내야지. 악단 쪽에 신호를 넣었습니다. 전주가 시작됩니다. 빰빰 빰빰 빰빰 빰빰 빰빰 빰빰 빰빰 빰빰 빠암. 신라의 달밤입니다.
“조옷습니다. 노래 한 곡 땡기고 가겠습니다. 아흐아, 신라하에헤 다흐알바흐암이여.”
음악 코메디! 신라의 달밤 한 곡으로 가수 10여 명이 총출동하는 겁니다. 메들리 모창이라고도 하죠. 푸흘국싸흐에 조옹쏘오리, 들리여허온다으. 주인공 현인 선생이 한 소절을 부르면 송창식이 다음 소절을 받고 곧이어 서유석이 한 소절. 그렇지, 관중들이 반응을 보입니다. 음악 따라 어깨춤을 들썩이더니 일어서서 춤을 추고 손뼉으로 사 분의 이 박자를 맞추고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르고. 요절가수 배호가 마이크를 잡습니다. 이문세가 뒤를 따르고 연달아 신승훈 김건모까지 등장합니다. 생음악 반주 따라 분위기 한껏 달아오릅니다. 무대와 객석이 하나되어 빙글뱅글 춤을 춥니다. 노래흐르으을 불, 러흐으으라. 시이일, 라, 에헤, 밤, 노호레헤를. 빠바밤 빰빰 빰 빠바바바바바암. 노래가 끝났습니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토록 열광하던, 반주에 맞추어 아싸아싸 춤을 돌리던 인간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적막. 죽음 같은 적막. 노래가 끝나자 얌전히 제자리에 돌아가 앉는 이들. 집단 최면에 빠진 것처럼 일사불란한 움직임. 환호는커녕 박수도 없고 웃음도 없습니다. 진지하고 진지한 눈빛으로, 그렇게 뚫어지게 내 쪽을 주시합니다.
당혹스럽기 이전에, 높은 벽 앞에 가로막힌 듯한 막막함 이전에, 두렵더군요.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초짜 시절에도 떨리긴 했지만 관중들이 두려웠던 적은 없었거든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어떻게 사태를 수습해야 할지 요만한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새끼들 같으니. 허파를 집에 두고 왔단 말인가. 연기도 그럭저럭 된 것 같은데, 서유석 모창도 잘 먹힌 편이었데, 어쩌면 킥킥 웃어주는 새끼 하나 없다니. 통로 구석에 선 정호 형이 연신 손바닥을 세워 목 자르는 시늉을 합니다. 어서 판 접으라는 신호죠. 온몸에 힘이 빠졌습니다. 마이크를 잡고 꾸벅 고개를 숙였습니다. 순간, 문 여사님의 그 놀라운 코메디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좋은 시간 되십시오.”
눈앞 캄캄해져서 어떻게 무대를 내려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하얀 옷에 먹물 세례를 받은, 그보다도 기분 더럽고 비참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안칠현이가 지금 눈앞의 안칠현이 맞나 상당히 궁금하군.”
“면목 없습니다.”
“그것 봐. 얌전히 술이나 빨면서 놀다 가랬더니만.”
단장님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시옷 자 수염을 배배 꼬았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하게. 자넨 그걸 놓친 거야. 관중들이 언제나 자네 편이 될 줄 알았어?”
“…….”
“됐어 됐어. 질펀하게 엎어진 물을 이제 어쩌겠어. 잊어버리고 술이나 마셔.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앞으로 무대 올라가겠다는 소리 무조건하고 삼가주셔. 우리 극장 문 닫는 게 소원이 아니라문 말야.”

“저는 여기서 지하철 탑니다.” “저기, 명함 같은 거 없으시죠? 하긴 소설가라고 하셨으니까.” 덕소산에서부터 얻어 타고 온 벤 승용차가 시 경계선을 막 지난 동네에 잠시 멈췄다가 멀어져갔다. 그와 내가 남았다. “시간 나면 연락 한번 드릴게요.” 전직 코메디안의 얼굴은 까칠했다. 밤새 쉬지 않고 나를 못살게 굴었던 탓이다. 조금은 무뚝뚝하달 수 있는 목소리로, 나는 마지막 인사를 내뱉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아, 안녕히.”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어색하게 손 쳐드는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 일요일 오후가 흐느적흐느적 가라앉고 있다. 연락 드릴 시간이나 또 뵙게될 일 따위는 물론 없을 터였다.

초원의 집 다녀온 저녁부터 이상하게 몸이 아프더군요. 충격이 컸던 탓일까. 몸살 감기 걸린 것처럼 열이 오르고 술 잔뜩 마신 다음날처럼 속이 메슥거리고 뭇매 뚜드려 맞은 사람처럼 팔다리 허리 어깨가 저리고 쓰렸습니다. 밤새 앓았습니다. 어쩌면 다행스러운 노릇이었니다. 일는지 몰랐습니다. 간만에 찾아가 고집 부리듯 올라갔던 무대, 사무치게 그리웠던 그 자리에서 뜻밖에 맛본 절망의 기억으로부터 조금은 놓여날 수 있었으니까. 독한 감기몸살약을 세 알이나 털어 넣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자다 깨다 내내 땀흘리며 뒤척이며 비몽사몽 밤을 보냈습니다. 죽을 것 같았습니다. 정말 죽는 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문 여사님이 보고팠습니다. 그 얼굴 그 목소리 그 품이 그리웠습니다. 문 여사님의 코메디쑈를 한 번만 봤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비어 있는 여사님의 방에 들어가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싶었습니다. 몸 아플 때 곁에 없는 누군가 간절히 그리워지는, 그 고통을 아시는지요.
다음날. 정오가 지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감기몸살 증세는 여전했습니다. 온몸이 무겁고 열이 오르고 어지럽고 하는 일도 없이 피곤했습니다. 수저를 들 힘도 없었습니다.
“사장님, 많이 편찮으신 거예요?”
비루먹은 병아리처럼 비실거리고 있는데 가평할머니가 다가왔습니다.
“에이그. 얼굴이 말이 아니시네.”
“몸살인가 봐요. 곧 나아지겠죠.”
“약은 드셨어요? 뭘 좀 잡숫고 약을 드셔야지.”
“고마워요 할머니. 저 좀 잘게요.”
한없이 다정한 분. 공연히 서러웠습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여려지기 쉬우니까.
“사장님.”
“예?”
할머니. 저 사장님이 아니라 칠현이입니다. 그렇게 불러주세요.
“저어, 무슨 마음 고생 같은 거 하시는 거예요?”
“아니오.”
“괜찮아요 사장님.”
“…….”
“누구나 그렇지요. 세상 사람들 누구나. 우리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사실 사람들 모두, 돌이킬 수 없이 괴로운 일 한두 가지씩을 속에 품고 살아간대두요. 그걸 입 밖에 내지 않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아 잘 모를 뿐이지만.”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여태 한번도 그런 적 없었던, 그럴 생각도 가지지 않았던 얼굴을.
“할머니도요?”
“그럼요.”
“…….”
“말씀드리지요. 사실 제 고향은 인천이랍니다. 대대로 인천 토박이지요. 가평엔 가본 적도 없는.”
“정말요?”
“정말이고 말고요.”
“아니 그런데 왜.”
“괴로운 일 때문이지요. 남들은 모르는. 그래서 인천 출신이면서 30년 동안 가평 아줌마로, 다시 가평할머니로 살아야 했던 것이지요.”
“아아.”
“그러니 어서 일어나세요. 모두가 아픈 친구들이니 혼자 우울해 하시지 말고.”
찔끔찔끔 나오는 오줌은 핏물처럼 탁하고 거울 속 얼굴은 죽은 나무껍질 같았습니다. 베란다를 넘어서는 가을 햇살이 몹시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루 사이에 몸무게 4㎏이 빠졌더군요. 하고 싶은 일도 생각나는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게 귀찮았습니다. 저녁나절에 겨우 일어나 죽 몇 모금을 뜨고, 내내 속 뒤틀려 괴로워하다가 자정 무렵 고스란히 게워내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왜 이러지. 정말이지 죽을 때가 된 거야.
새벽녘에 문 여사님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도 너무 반갑고 행복한 나머지 꿈이 아니었으면 꿈이라도 깨지 말았으면 깨더라도 조금만 늦게 깨어났으면 기도를 올리고 싶었습니다. 하얀 선녀 옷을 입은 여사님. 머리 위에 무지개 빛 광채가 찬란히 빛나고, 하들하들한 잠자리날개 옷 사이로 밤색 고운 팬티 브래지어가 얄밉게 어리비쳤습니다.
잘 지냈어요?
여, 여사님.
어서 일어나요. 아프면 안 되요.
목에 메었습니다. 소리치려 했지만, 당신이 그리워 참을 수 없었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보고 싶어요. 언제 오실 건가요?
조금만 참아요. 조금만.
뜨거운 먼지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습니다. 아름다운 여사님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저, 이러다 죽을 것 같아요. 자신이 없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예전엔 이런 적 없었는데.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니 용기를 내요.
다음날. 기막힌 꿈에도 불구하고 차도는 없었습니다. 열은 좀 내린 것 같은데, 여전히 피곤하고 몸에 힘도 없고 속이 울렁거렸습니다.
고민 끝에 마음을 정했습니다. 병원에 가보기로요. 괜찮다고 몇 번을 사양했지만 한씨아저씨가 굳이 바래다주겠다고 따라나섰습니다. 문 여사님이 그러셨다더군요. 혹시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겨 차를 써야 하면 그래도 좋다고. 거참, 문 여사님은 그렇다면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일까요? 당신이 떠나고 없는 새에 내가 이렇게 골골 앓으리라는 것을?
보건소도 양호실도 아닌 병원에, 다른 사람 병 문안도 아니라 제 몸 돌보자고 찾기는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입맛 썼습니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이런 저런 일 겪게 마련이라지만, 참으로 씁쓸했습니다.
진찰 접수시키던 때입니다. 원무과 아가씨가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접수증에 적은 인적 사항을 볼펜 끝으로 콕콕 찌릅니다.
“저기요. 주민번호 이거 맞으세요?”
“그럼요.”
“이상하다. 안 뜨네. 보험카드 다시 줘 보세요.”
“여기.”
“보자……. 그렇지. 뒷자리가 틀렸네요.”
“틀리다뇨?”
“보세요. 546인데 564로 적으셨잖아.”
“546?”
“환자분 주민번호 끝자리 말예요.”
“546? 아닌데?”
“아니긴요 여기 그렇게 나왔는데.”
“어어, 그게.”
“접수 제대로 됐습니다. 다음 분.”
이상하다. 참말 이상하다. 접수증을 받아들고 돌아서는데 고개가 절로 뒤틀렸습니다. 546이라? 아닌데. 아닐 텐데. 지갑을 꺼내 뒤졌습니다. 웬걸, 내 사진 박힌 주민등록증 한가운데에 ○○○○546이란 숫자가 영락없이 찍혀 있더군요. 이런 쌍. 내가 지금 제 정신이 아닌가봐. 주민등록증에 왜 잘못된 번호가 적혀 있는 거야. 아니 아니, 여태 내가 주민번호를 잘못 알고 살았던 건가?
3층 외래진찰실에 가서 이리저리 똥개처럼 불려 다녔습니다. 피 뽑고, 혈압 재고, 체중계에 올라가고, 증상에 대해 묻는 대로 대답하고, 혀 내밀고, 눈을 위로 치켜 떴다가 아래로 내려 떴다가. 그리고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오후가 홀랑 지나갔습니다. 온종일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채. 앉아 있을 힘도 없었습니다. 대기실 소파에 털벅 드러눕고 싶었습니다. 키 작고 여드름 난 간호사가 허공에 대고 외쳤습니다. 안칠현 님 들어오세요.
앉으세요.
젊은 의사가 컴퓨터 모니터에 대고 소곤소곤 말했습니다.
처음 오시는 거네요.
예? 아, 예.
주기도문 외듯 높낮이가 없는, 알아듣기 매우 힘든 말투였습니다.
몸살 감기 걸린 것처럼 열이 오르고 술 잔뜩 마신 다음날처럼 속이 메슥거리고 뭇매 뚜드려 맞은 사람처럼 팔다리 허리 어깨가 저리고 쓰리고. 오늘은 열이 좀 내렸는데 속이 여전히 울렁거리고.
간호사들에게 몇 차례나 반복했던 자각 증세를, 그의 입을 통해 고스란히 되받았습니다.
맞습니다.
전에도 이런 증세 있으셨어요.
처음입니다.
어어, 입원하시는 게 좋겠어요. 상태가 안 좋아요.
어떤 상태, 가요?
내 쪽은 단 한 차례도 쳐다보지 않고 고개 속인 채 대화 내용을 기록하려는지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던 의사가 길고 복잡한 외국말을 섞어 몇 마디 지껄였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단어들이, 아마도 제 ‘상태’에 대한 설명이었을 겁니다.
A형 간염일 확률도 없지는 않은데, 정확한 사항은 더 검사를 해 봐야 알겠네요.
입원을, 꼭 해야 하나요.
저기요. 솔직히 말해 지금 대단히 위험한 상태입니다. 감기몸살 정도가 아니라구요.
…….
간 기능이 이 지경이 되도록 어떻게 견디셨나요. 지금이라도 이렇게 찾아오셨으니 망정이지. 그렇게만 알아두세요.

덕소산 호숫가 별장에서 전직 코메디언이 밤새 들려주었던, 실제 체험담인지 영판 거짓말인지 그 중간 어디쯤인지 알지 못할, 그런 이야기를 컴퓨터 모니터도 4백자 원고지도 아닌 이면지 위에 두서 없이 기록하는 지금 엉뚱한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30분 전만 해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던, 그러나 흐릿한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애써 머리를 짜낼 필요성을 찾을 수 없어 넘어가고 말았던 어떤 이야기의 작은 조각이, 어째서 갑자기 기억의 수면 위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두 세계와 네 개의 자신. 이른바 무대 예술인이 즐겨 말하는 경지라는, 전직 코메디언의 견해. 하나. 평상시 무대 밖의 나. 둘. 무대 위의 나. 셋. 어둔 관객석 어느 눈동자 속의 나. 그리고 네 번째. 무대 위도 무대 뒤도 객석도 아닌 곳. 거기가 네 번째 나의 자리입니다. 아니,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편이 좋겠네요. 가장 자유롭지요. 심지어 세 가지 역할 형태 중 하나 또는 둘 이상의 ‘나’와 함께 할 수도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그 역할입니다. 이를테면 세 종류 ‘나’의 존재감을 규정하고 확장하고 또한 완성시키는, 그 창조적인 분야가 바로 ‘네 번째 나’의 역할인 것이지요.

병원에서 나와 정신나간 사람처럼 홀로 걸었습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그런 기분 아실 겁니다. 거리를 걷기 시작해, 삼십 분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고, 갈 데도 없으면서 해 떨어지고 날 저물고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아무 생각도 없이 혼자 그렇게. 우울했습니다. 심하게 거덜난 인생 말년을 미리 들여다보고 만 때처럼, 그 이상으로.
여기가 어디고 지금이 몇 시인가. 아직 병원 주변의 저녁인사. 새벽녘의 양등포 시장 근처인가. 장딴지가 부었는지 발목이 부러졌는지 감각이 없더군요. 대단히 위험한 상태라니. 간 기능이 ‘이 지경이라니. 말이나 되는 수작인가. 평생 동물병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몸인데. 나쁜 짓 나쁜 생각 한번 허투루 안 하고 살아왔는데. 정말로 웃기고 있군. 주민등록번호까지 헷갈리다니. 도대체 뭐야. 초원의 집 무대에서의 일 때문인가. 낸상 처음 맛본 끔찍스러운 망신에, 그 충격이 너무 지랄 맞아, 그래서 몸이고 정신이고 이렇게 엉망이?
등나무 벤치가 모여 앉은 광장. 분수대 주변으로 도심의 어둠이 예쁘게 내려앉았습니다. 삼삼오오 모여 서성이는 사람들. 대리석 계단에 주저앉았습니다. 아, 여기는? 시립 문예회관입니다. 고색 창연한 석조건물의 고고한 옆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사람들이 많군요. 어쩐지. 매표소 앞에 길게 줄을 서 있습니다. 멋진 공연이라도 있는 모양이지요. 환한 색 정장을 입은 이들의 표정이 밝습니다. 젊고 화사합니다. 꽃다발을 들고 카메라를 메고 공연 팜플렛을 말아 쥐고 둘씩 셋씩 조잘거리는 모습에 제 기분까지 가벼워지는군요. 어둠 속에서, 그들에게 조심히 말을 건넸습니다. 여러분. 잠깐만요. 술 취한 농부가 경운기 돌리는 모습 보신 적 있나요. 엄청나게 웃긴데. 예, 감사합니다. 다음은 박격포와 따발총 소리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모두 박수!
밤이 깊어갑니다. 지친 어깨에 선득한 밤이슬이 내려앉고 있습니다. 밤바람이 살랑살랑 식은 이마를 만지고 달아납니다.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그런 대로 견딜 만했습니다. 잠들고 싶었습니다. 이미 잠이 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속이 메슥거리는 감기 몸살 증세도 더 이상은 저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빛이 있습니다. 밝은 빛이 이편으로 다가옵니다. 사람들이 그 빛 따라 소란스레 모여듭니다. 매표소 향해 구불구불 이어지던 대열이 조금씩 흐트러집니다.
검은색 리무진입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있습니다. 분노가 아니라 환호입니다. 차 뒷문이 열리고, 누군가 사뿐 내려섭니다. 와아!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던 카메라 라이트가 연달아 터집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치고 꽃다발을 던집니다. 오늘 공연의 주인공인 모양입니다. 바닥에 손을 짚고 힘겹게 일어섰습니다. 한 발 한 발 계단을 내려서 그들 쪽으로 다가갑니다. 불빛에 눈이 부십니다. 오늘의 주인공이 살랑 손 흔들어 환호에 답합니다. 사람들이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지릅니다.
아니, 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새하얀 모피 코트 자락이 발목까지 내려온, 새하얀 털모자에 살짝 가리운 얼굴. 낯이 익습니다. 발 동동 구르는 팬들을 향해 활짝 웃어주는 오늘의 주인공. 다름 아닌 문 여사님이었습니다.
“문, 무……. 여, 어.”
혀가 굳더군요. 말린 버섯처럼 뻣뻣하게. 복받치는 감정에 목구멍이 콱 막혔습니다. 반가웠습니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메리카에서 언제 돌아오신 거지, 하는 의문은 떠올릴 새조차 없었습니다. 힘차게 달려갔습니다. 다리가 덜덜 떨렸습니다. 문 여사님, 저예요! 겹겹이 쌓인 사람들을 밀치고 한 발 두 발 다가갔습니다. 죄송합니다, 잠깐만요, 잠깐만. 똑같은 팬의 입장으로서 미안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문 여사님 여기요! 여기 좀 봐주세요, 내가 왔단 말입니다! 마침내 두터운 사람들 무리를 뚫고 나아갔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환호의 함성과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쏟아지는 리무진 앞. 문 여사님을 향해 힘차게 달렸습니다. 어젯밤 꿈에 보았던 반가운 얼굴, 하늘하늘 잠자리날개 옷 사이로 곱게 어리비치던 밤색 팬티 브래지어, 여사님을 힘껏 끌어안았습니다. 그러려는 찰나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그림자 둘이 거세게 제 몸을 밀쳐냈습니다. 무전기를 들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었습니다. 대리석 바닥에 쓰러진 제 몸을 내리누릅니다. 뭐야, 피신시켜! 다른 새끼 없나 확인해! 이 개새끼 가만 안 있어? 무기 없나 어서 뒤져봐. 그들의 억센 힘에 두 팔이 등뒤로 뒤틀립니다. 뜨거운 연탄불 위의 오징어 다리처럼 말이죠.
둥글게 모여 섰던 군중이 짧은 비명을 지릅니다. 입을 막고 수군거립니다. 이내, 경호원들의 민첩한 행동에 박수를 보냅니다. 문 여사님! 저예요, 저라니까요! 어깨뼈가 꺾이는 고통에 숨이 막혀 한 마디 말도 뱉어낼 수 없었습니다. 억센 힘에 질질 끌려 어둠 뒤로 퇴장하면서 저는 보았습니다. 불의의 소란에 놀란, 다소 난감해진 표정의 문 여사님이, 그래도 격려해주는 팬들을 향해 가벼이 손 흔드는 것을. 검은 양복 입은 사내들의 호위 속에서 박수 받으며 계단 뒤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밤이 깊었습니다. 매표소 근처는 한산합니다. 쑈가 시작된 모양이지요. 기쁜 얼굴로 줄을 서서 표를 사던 사람들 모두 공연장으로 자리를 옮겼을 겁니다. 춤과 음악과 화려한 조명 쏟아지는 무대. 박수와 환호의 열기 뜨거운 관객석. 그립고 아름다운 정경을 그려보며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한참을 누워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채이고 밟혔던가. 온몸이 아팠습니다. 보나마나 옷자락 여기저기 찢어지고 멍들고 피가 났을 겁니다. 졸음이 밀려옵니다. 대리석 바닥에 달라붙은 잔등이 조금씩 식어가고 있습니다. 정점. 생의 알 수 없는 어느. 뒤에 가 한없이 모호한 기억으로 남겨질. 낯설고 생경한 단어를 아득히 웅얼거려 보았습니다. 저편 찻길 너머, 빌딩 전광판이 달빛처럼 쏟아졌습니다.
“잠들면 안 돼요.”
“누구…….”
“일어나세요. 어서.”
반짝이는 구두가 보이고 잘 다림질한 양복바지 주름이 보였습니다.
“당신은.”
가련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사람. 청년이었습니다.
“당신이, 당신이 여기 어떻게.”
“…….”
“다 보았군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아까부터. 먼 곳에 서서.”
언제이던가. 168평 아파트의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문 여사님과 함께 거실에 앉아 있던. 안녕하세요, 우물쭈물 인사를 뱉으며 내 시선을 조심스럽게 피하던.
“죄송합니다.”
“뭐가…….”
바람이 불었습니다. 밤바람에서 먼지 냄새가 났습니다. 서럽고 반갑고 부끄러워 구토가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절로 고개를 떨어뜨렸습니다. 왼쪽 가슴에 큼직한 구둣발자국이 찍혀 했었습니다. 이상하고 야릇한 무늬처럼.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지요. 제가 나설, 그런 만한 자리가 아니어서.”
청년의 얼굴은 우울했습니다. 여전히 곱고 싱싱하고 아름다운 얼굴 위에 알 수 없는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쫓겨나듯 아파트 현관을 돌아 나서며, 당신이 부럽습니다, 중얼거리던 그 표정.
“맞아, 당신은.”
몸 불편한 거지처럼 길바닥에 드러누운 채 잠꼬대처럼 입술을 달싹였습니다.
“이제 기억이 났어. 세상에.”
현관 밖에서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어딘지 낯이 익던, 어디서 봤더라 싶었던, 그 정체를 비로소 기억해내었던 겁니다.
“당신…… 당신은 가수왕 신지군요. 그렇죠?”
청년의 시무룩한 얼굴이 흐트러집니다. 부끄러운 미소를 짓더군요.
“맞았어. 아, 이런.”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아요.”
“몇 년 전만 해도. 스포츠 신문에 당신 얼굴이 안 나오는 날이 하루도 없을 정도였는데.”
“일어나세요. 밤 공기가 쌀쌀해요.”
겨우 일어섰지만 온몸 마디마디가 죄다 분리되어 삐걱거리는 것 같더군요. 그의 부축이 아니라면 한 걸음도 옮기지 못했을 겁니다. 부디 행복하라고 빌어주셨는데, 참으로 면목이 없네요. 하지만 이해해주세요. 그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안다면, 당신도 이런 제 꼴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참, 이건 비밀인데, 혹시 문 여사님의 코메디쑈를 본 적 있으신가요? 그런 저런 말들이 입안을 맴돌았지만, 몹시 고통스러웠으므로,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밤거리의 행인들이 한데 엉켜 걷는 우리들을 멀찌감치 피해갔습니다. 묵묵히 걷던 전직 가수왕 신지가, 뭔가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뒤돌아 서더니 어딘가를 가리킵니다. 웅장한 시립문화회관 건물이, 푸른 빛 조명을 받아, 허공에 둥실 떠올라 있습니다.
“저도 저 무대에 선 적이 있었어요. 그 날, 정말 대단했었는데.”





한차현1970년 서울 출생. 1998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창작집 [사랑이라니, 여름 씨는 미친 게 아닐까], [대답해 미친 게 아니라고], 장편소설 [괴력들], [영광전당포 살인사건], [왼쪽손목이 시릴 때] 등이 있음. 본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