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課業
권혁소
유복자(遺腹子) 외아들로 태어나 부담스러웠다
미완으로 끝난 아버지의 항쟁(抗爭)은 모호하였다, 하여
어머니 돌아가시면 혁명의 길을 가리라 다짐하였다, 허나
흙 묻은 장갑 끝에 매달리는 네 살 딸애를 가족애로 껴안으면서,
조금씩 두꺼워지는 월급봉투를 차곡차곡 쌓으면서,
북향에서 남향으로, 언덕에서 평지로 아파트 평수를 늘려가면서,
자동차의 배기량을 높여가면서,
등산. 운동. 레저 용품을 카드로 긁는 과감성을 키우면서
혁명의 길도 투쟁의 길도 그저 남의 길이 되어버렸다
오늘도, 자본의 길을 간다, 가다가
허름한 몸빼, 구부정한 허리, 튀어나온 엉덩이, 플라스틱 슬리퍼,
그 뒤로 까맣게 드러나는 갈라진 뒤꿈치
내 어머니, 저 어머니들, 일생의 꿈을 만난다
지주의 등짝을 관통하던 저 갑오년의 죽창 같은 시를 쓰자고,
선생도 꼭 선생 같은 선생만 되자고,
동지에겐 관대하더라도 자신에겐 냉정하자고
맹세하고, 일기에 쓰고, 또한 그들처럼 다짐했건만
맹세와 다짐은 방패 앞에 주저앉고, 신문지 앞에 자빠지고, 경고장 앞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정신 차리자, 나는
자본의 자식도 지식인도 아니다, 이 세상 주류도 아니며 지배계급은 더더욱 아니다, 아니다, 적어도 나는
중앙시장 좌판계급의 자식이며, 교육 노동자이며, 주류 세상을 일갈하는 시인이며, 피지배계급의 가난과 억압에 눈물 흘릴 줄 아는 투사 아닌가, 그런 전사여야 하지 않겠는가
자본의 아가리는 점점 견고해지는데
가엾게 한 세상을 산 어머니만 땅에 묻혔다
땅 속 어머니를 세상에 복원하는 일, 이것이 작금 나의 과업(課業)이다
권혁소 1962년 강원 평창 출생. 1984년 <시인>으로 등단. 시집 <논개가 살아 온다면> <수업시대> <반성문> <다리 위에서 개천을 내려다보다> 등이 있음. 본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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