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 구운 영혼(2)




윤동수



스타그룹이 해복투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음을 새삼스레 절감했다. 그것은 사내의 입을 통해서도 증명되었다. “처자식 굶겨 죽인 놈, 암에 걸려 골골거리는 놈, 시집도 안 가고 지 에미 피 말려 죽인 년, 빈털터리로 마누라한테 쫓겨난 놈, 받아먹은 돈 게워냈다가 배신자로 낙인찍힌 놈, 아 그 자식은 고민한답시고 끙끙대다 자살했다지 아마. 분신한 새끼는 흉측하더만, 괴물이 따로 없어. 그 꼴로 살아보라지. 칙사 대접 받을 테니까. 하여간 폐인 집합소가 따로 없다니까.” 사내가 일일이 세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고 한 해고자들의 사연을 박충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른 회사의 해고자들하고 달리 스타그룹 출신들은 살아가는 데 늘 허덕거렸다. 왜냐하면 노조가 있어야 최소한의 생계비라도 도움을 받을 텐데, 스타그룹에는 달랑 신문사 하나 빼고는 노조가 없는 탓이었다.
“그 사람들을 불행에 빠뜨린 건 바로 자네야. 인간 박충식이 아주 골칫덩어리야......” 그 대목에서 박충식은 사내의 말을 가로챘다. “아니야, 끝까지 싸울 거야. 복직 투쟁을 계속할 거야.” 불쑥 내뱉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지하실에서 처음으로 사내에게 항변한 셈이었다. “호오, 그러셔?” “그래, 당신이 사람을 잘못 봤어. 반드시 복직할 거야.” 박충식은 부르튼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것은 아내와 한 약속이었다. 재혼한 뒤 태어난 아들한테도 하루에도 여러 차례 손가락을 걸고 맹세했다. 조선소에서 산처럼 큰 배를 만드는 아빠를 보여주겠노라고!
“당신은 하수인이야!”
“아니지, 그게 아니지. 나는 신봉자야. 숭배자라구. 나 자신이 스타그룹이라니까. 밤하늘에 영원히 빛나는 별 말이야. 그 별처럼 살고 싶지 않아?” 거침없이 내뱉던 사내가 “헌데 말이지, 그 별 같은 아들놈이 걱정되지 않아?”하고 말꼬리를 흐렸고, 박충식은 몸을 옹송그리며 격렬하게 헛구역질을 해댔다. “제발...... 애는 건드리지 마...... 이제 겨우 네 살이야......” “오호, 내 말을 잘못 들었나보군. 애를 유괴라도 할까봐? 이봐, 우린 그런 치사한 짓은 안 해. 아까 말했잖아, 야만적인 짓은 안 한다구.” “고마워, 정말 고마워......” 간신히 한숨 돌린 박충식에게 사내가 던진 말은 노예였다. “이봐, 자네 아들이 대를 이어서 자네처럼 노예로 살아야겠어?” 노예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스타그룹의 가혹한 노무 관리가 떠올랐고, 박충식은 숨이 턱 막혔다. “정말로 우리애는 무사한 거지?” “그렇다니까, 그 얘긴 접어두고, 거, 왜 조선소에서 돌아버린 애 얘기 못 들었어?” “아, 그 사건이라면......” 박충식은 서른세 살 1급 용접공을 기억해냈다. 그 친구라면 해고자들과 함께 두 달 전에도 병문안을 갔었다. 아버지와 한 직장에서 일하던 친구였다. 스타그룹은 아버지를 인질 삼아 노조 만드는 모임을 이끌던 젊은 친구를 괴롭혔다. 마침내 아들이 해고되자 아버지는 현장에서 목을 매 자살했고, 젊은 친구는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거 우습게 볼 일 아냐. 자네라고 해서 비껴갈 것 같아? 노예는 대물림하는 거야.” “싫어...... 싫다니까...... 안 돼. 그건 안 돼!” 순식간에 무너진 박충식은 속내를 마구 털어놓았다. “나는 그렇게 되기 싫어, 내 자식을 노예로 살게 할 순 없어. 한 번 뿐인 인생인데 버림받기는 싫어. 평생 노예로 밑바닥에서 기다가 버러지처럼 죽기는 싫어.” “암 그래야지, 그건 노예지 인간이 아니거든.” 사내는 토사물을 비비며 벌벌 떠는 박충식을 달랬다. “자네와 나 말고 보는 사람 아무도 없어. 솔직하게 털어놔보라구, 시원하지?” 사내는 겁에 질린 박충식의 머리에 천천히 생수 병을 기울였다.

스타조선에 노조가 있었듯이 스타중공업에도 유령 노조가 있었다. 그것을 깨부수고 살아있는 노조를 만들자고 뜻을 모은 사람들이 서울로 가서 싸우기로 하였다. 스타그룹에서 딱 한 곳 노조가 있는, 동방일보 노조를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지만 하나같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딴에는 회사 관리자들을 따돌린답시고 창포역이 아닌 밀양 역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기차가 끊기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돈을 거두어 10만 원에 운전기사가 달린 봉고차를 얻었다. 아무리 창포시에서만 굴러먹은 촌놈들이라 해도 그렇지 열한 명이나 모였는데, 서울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봉고차 운전자도 창포시 토박이기는 마찬가지여서 고속도로에 들어섰는데도 길을 몰랐다. 이리저리로 한참 헤맨 끝에 대전을 넘어섰는데 그만 차가 펑크가 나고 말았다. 12월, 한밤중 고속도로에는 칼바람이 몰아쳤다. 지나가는 차를 세우다, 택시비를 4만 원이나 물어가며 펑크를 때운다고 무려 다섯 시간이나 벌판에서 지샜다.
동료들 중에서 굶고는 못 산다는 이가 곱슬머리 최형이었다. 한 데서 보낸 그 겨울밤에도 최형의 타고난 솜씨는 빛을 발했다. 영하 10도로 곤두박질친 겨울밤을 고속도로에서 얼찐거렸다가는 얼어 죽기 십상이었다. 차들은 얼음 바람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스쳐가지 배는 고프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가장 먼저 논으로 내려간 사람이 최형이었다. 그리고 볏짚을 잔뜩 모아 불을 피워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최형의 타고난 생존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들은 땔감을 줍는다고 부산을 떠는 동안 놀랍게도 최형은 먹을 것을 구해왔다. 어둠 속에서 비닐봉지와 자루를 짊어지고 그가 나타나자 동료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볏짚에 구워 먹은 그 고구마 맛이란!
자루에 담긴 건 고구마였다. 가족이나 회사 몰래 떠났던 길이라 저녁도 변변히 못 먹었던 참이었다. 다들 불에 굽기가 무섭게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비닐봉지에서는 떡이 나왔다. 최 형 말로는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가 상가에서 얻었다는데, 그날 밤 어둠이 뒤덮은 들녘에서 불빛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린 말이야 굶고는 못 살아! 산타클로스가 따로 없다, 자네하고 다니면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동료들에게 최형이 신나게 지껄인 말이었다.
이튿날 새벽, 서울에 도착해서 봉고차 운전자가 도망간 것도 모르고 아침을 라면으로 때웠을 때도 땡전 한 푼 없다고 주머니를 까 보인 이가 최형이었다. 그 최형이 고속도로에서의 기적에 대해 털어놓은 건 먼 훗날이었다. 벌판을 지나 동네에서 상을 당한 집을 만난 건 사실인데, 고구마는 꿍쳐둔 돈으로 샀다고 했다. 어려서 하도 굶기를 밥 먹듯 해서 배가 고프면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고, 그래서 머리 커진 뒤로는 비상금을 챙겨두는 버릇이 생겼노라고 고백했다.
동방일보에서도 최형의 생존력은 단연 두드러졌다. 노조 사무실을 점거한 지 하루가 못돼 마누라와 노모가 번갈아 찾아와 울고불고 난리였다. 회사에서 당신 아들이 큰일을 저지른다, 빨갱이로 몰린다고 가족들을 협박해서 끌고 올라온 거였다. 마누라가 게거품을 물고 통곡을 해대자 한 시간 만에 누군가 나갔고, 급기야 총각들은 단식투쟁을 선언했다. 열한 명에서 가족들 성화에 못 이겨 다섯 명이 나가고, 네 끼나 굶었을까, 단식투쟁을 그만두자고 나자빠진 건 최형이었다. 마누라가 밖에서 까무러쳐도 꿈적도 않던 그가 배고픈 건 못 참는다고 엉금엉금 기었다. 결국, 최형의 의견을 받아들여 정식으로 단식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노총으로 투쟁 장소를 옮기면서, 유령 노조 철회하고 중공업 노조 인정하라! 라고 가장 힘차게 외친 이가 바로 최형이었다. 10년 넘게 스타중공업에서 한솥밥을 먹은 다음에야 어째서 최형이 단식투쟁을 접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배고픈 건 못 참는다는 최형은 요즘도 비상금을 챙기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을까.
“이봐,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가 말이야?”
생수로 목을 축인 사내가 부드럽게 말했다. 박충식을 굽어보는 눈빛이 촉촉했다. “자네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집안 사정은 좋았어. 왜 아니겠어? 아버지가 배를 여러 척 가진 선주였잖아?”
인생은 안개 속과 같은 거라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사내가 바야흐로 박충식의 어린 시절을 들추어내기 시작했다. “지랄 맞은 태풍만 불지 않았으면 자네도 유복한 가정에서 컸을까? 인생이란 이상하게 꼬이지, 사람 맘대로 안 돼. 끔찍한 태풍이었어.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자네 아버지 배도 파도가 삼켜버렸으니까. 그 바람에 집안이 기울었지. 그렇다고 인생을 태풍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잖아. 자네 아버진 때맞춰 바람을 피우고 빚을 지고, 그나마 남은 배를 몽땅 팔아치웠으니까.” “제발 그만둬......” 박충식은 사정했다. 얼굴도 기억 못하는 아버지였다. 그저 어머니를 징글징글하게 고생시켰다는 것만 머리에 남아 있었다. 여태껏 살면서 아버지가 있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낳아준 분을 모른 척 해서야 인간이 아니지. 자네도 애비를 닮았나봐. 배 다른 형제들도 그렇고 이혼하고 자식새끼들도 에미가 다르잖아. 피는 못 속인다니까......” “그만해...... 닥치라니까......” 박충식은 토사물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사내를 겨냥해 힘껏 뿌렸다 싶은데, 마음만 앞섰지 그것은 손끝만 끈적거리다 말았다. 사내가 읊조리는 것들은 스타그룹에서 얻어냈음이 틀림없었다. 하늘 아래 벌어지는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다는 스타그룹의 정보망이 아닌가. 하물며 스타그룹에 대든 한 인간을 낱낱이 해부하는 것쯤은 이력서를 복사하는 것만큼 쉬울 터였다. 스타중공업에 들어오고 나서 숱하게 겪었으면서도, 손금 보듯 하는 그들의 감시망에 막상 걸려들었다 싶으면 몸서리가 쳐졌다.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날 때 미역국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재혼할 때 하객이 몇이나 왔는지도 훤히 꿰뚫고 있을 터였다. “자네가 태어난 지 3년 만에 아버지 사업이 망했어. 그러자 자네 애비는 식구들을 끌고 산골로 도망쳤어. 무슨 무슨 군이다 읍이다 해서 행정구역을 굳이 이 자리에서 밝히지는 않겠어. 그곳이 어딘지는 자네가 더 잘 알겠지? 빚쟁이가 숨어들기에는 안성맞춤이었잖아. 고작 다섯 가구밖에 안 사는 막막한 산골이었으니까. 집안 말아먹은 아버지는 산골에 들어온 지 6년 만에, 자네가 아홉 살 때 눈을 감았지. 무책임하게 말이야.” “제발 우리 어머니만은 입에 올리지 마......” 사내는 박충식의 요청을 묵살했다. “어머니가 이 집 저 집 일을 거들어주며 양식을 구했어. 그런데 기껏 다섯 집이니 뭐가 나오겠어. 그때부터 자넨 굶고 다닌 거야. 중학교 때까지 1년 내내 양식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했지. 가을이나 겨울에는 고구마나 감자로 그럭저럭 견뎠어. 봄에는 학교에서 주는 강냉이죽이나 딱딱한 빵으로 끼니를 때웠고.” 사내는 그쯤에서 눈물을 글썽였다. “자네가 너무 불쌍해. 못 먹고 자란 자네가 너무 가여워서 그런다니까.” “닥쳐, 제발 닥치라니까. 차라리 두들겨 패든지 술을 처먹여......” “자넨, 나를 나쁜 놈으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불쌍한 사람, 특히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내버려두는 건 죄악이라구. 자넨, 도시락은 꿈도 못 꾸었잖아.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한 누이가 보세공장에서 미싱을 타서 받은 월급으로 먹는 걸 해결했으니까. 어린 자네라고 해서 놀기만 한 건 아니지. 학교 갔다 오면 남의 집 소를 끌고 나가 꼴을 먹였으니까. 그 값으로 쌀과 보리를 받았으니까 밥값은 한 셈이지. 점심은 엄마가 들일 나간 곳을 찾아가서 얻어먹곤 했잖아.”
어린 날의 추억 탓일까, 박충식은 차츰차츰 사내의 울먹임에 익숙해졌다. 사내가 주절대지 않아도 중학생 시절은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중학 1학년을 마칠 쯤, 학교에 다니기가 싫었다. 동네 사람들은 어머니를 종처럼 부려먹었다. 이웃집 이불 빨래를 하러 불려나가는 어머니가 싫었다. 친구들 보기에 창피했다. 오죽 가난했으면 다른 애들은 가방을 들고 다녔는데, 중학교 때도 책보자기를 어깨에 둘러매고 다녔다. 이십 리나 되는 학교 길, 남들은 버스를 탔는데, 혼자 걸어 다녔다. 차비라고 해봐야 십오 원인가 이십 원이었다. 어쩌다 그 돈이 생기면 국수를 사먹고 걸어왔다. 차비도 없지, 가방도 없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남들한테 빌붙어 얻어먹는 생활이 지긋지긋했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모른 척 한 건 너무했어. 자넨 초등학교 때부터 기성회비도 못 냈잖아. 늘 얻어맞고 집으로 쫓겨나기 일쑤였어. 집에 가봤자 돈이 있을 턱이 있나? 선생님한테 매를 맞은 자네는 집으로 안 갔어. 들이나 읍내에서 빈들거리다가 선생님이 캐물으면 엄마가 안 계시다고 딱 잡아뗐으니까 말이야.” “아예 내 머리 속을 닥닥 긁어서 몽땅 까발려놓지 그래?” 강제로 발가벗겨지는 느낌이 이럴까. 성기만 가린 채 오들오들 떨면서 말이다. 비록 술에 찌들고 토사물로 뒤발랐지만 분명히 옷을 입은 채였다. 그런데 사내의 입이 벌어질수록 박충식은 알몸으로 이리저리로 끌려다니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바람둥이나 무능력자로 아버지가 손가락질 받는 건 귓등으로 흘려버리면 그만인데, 어머니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 나이에 어머니의 존재를 부정했던가?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그것도 쓰라리지만, 흑백사진을 들이대고 녹음기를 틀어놓듯이 어린 시절을 악몽으로 몰아가는 사내는 무서웠다.
분노와 수치심에 사로잡힌 박충식이 어리둥절해진 건 사내에게서 비롯된 어머니 얘기가 이상하게 꼬이면서부터였다. “품 팔아서 생계를 꾸리는 엄마를 동네 사람들이 무시한다는 걸 자네는 진작에 알고 있었지. 자네는 중, 고등학교가 붙어있는 데를 다녔어. 어느 날, 헐떡고개를 멀찌감치서 보고 있자니까 어머니가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고 계시더군. 그런데 말이야, 고등학교에 다니는 형들이 헐떡고개에 거지가 지나간다고 우르르 몰려가며 손가락질을 해대고 히히덕거리잖아. 속에서 열불이 났겠지. 자네는 그 자리에서 냅다 뛰어가 주먹을 날렸어. 하지만 중학생 꼬마가 어림도 없지. 고등학교 형들한테 실컷 얻어터졌어. 맞으면서도 눈으로는 자꾸 멀어지는 어머니를 끝끝내 놓치지 않았어. 세상에 태어나서 그날처럼 억울했던 적은 없었을 거야. 어린 나이지만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거든. 그냥 있다가는 미칠 것 같았어. 집에 가서 책보를 집어던진 자네는 짱돌을 움켜쥐고 고등학생 집을 찾아갔지. 그리고 대문에서 나오는 사람 머리를 그대로 찍어버렸어.” “헐떡고개는 첨 듣는 걸?” 사내는 박충식의 물음을 자르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날 밤인가, 다음날인가 어머니가 그 집을 찾아가서 빌더군. 그 집 마당에서 별의별 욕을 다 들어가며 싹싹 빌더라니까. 자넨, 그걸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봤지. 못난 자식을 용서해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죽을죄를 지었다고 싹싹 빌었어.” 사내의 입에서 “자네 어머니는 평안도에서 홀로 피난을 나왔기 때문에 친척이라곤 아무도 없었잖아.”라는 말이 나오자, 박충식은 무언가 빗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 저건 내 얘기가 아니야! 뭔가 착각했던지 다른 사람의 일을 엉뚱하게 갖다 붙인 게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포항 출신이고 지금도 그곳에는 이모들이 둘이나 살고 있으니까. 당신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그건 우리 어머니가 아니라니까! 하고 따져야 마땅하건만 웬일인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입을 다물기는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박충식의 속을 넘겨짚기라도 한 듯이 “나에게는 어머니가 없어.”하고 짧게 뱉은 뒤, 한동안 머리통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사내는, “우리들의 어머니를 그토록 슬픔에 빠뜨리는 인간들은 용서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말이지, 그건 뭐랄까,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는 범죄나 다름없거든.” 하고 침통해 했다. 박충식은 전혀 뜻밖이었다. 어머니의 고난과 세상의 질서라니!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가쁜 숨을 몰아가며 되짚어보아도 도무지 아퀴가 맞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조선소 용접공 부자를 안다고 했지? 그럼 병원에 있는 친구한테 형이 있었다는 것도 알겠군.” 박충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살 위인, 다른 공장에 다니던 형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갑자기 그 사람들의 비참한 가족사를 까발려서 뭘 하자는 걸까. “그 집도 자네 집안을 빼닮았더군. 그래서 아버지를 설득했지. 막내가 노존가 뭐 한답시고 회사를 들어먹으려는데 이래서 되겠냐고. 그때 내가 누굴 끌어들였는지 알아? 바로 그 양반의 마누라이자 두 형제의 어머니였어. 그 집도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거든. 작업하다 떨어져 죽은 그 큰아들 말이야, 그 친구는 어머니가 거지라고 놀림감이 되는 걸 못 견뎌했거든, 어렸을 때 말이지. 어머니를 가지고 논 놈들을 짱돌로 찍고 복수를 했지. 그리고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그 꼴을 당했으니 오죽 마음이 아팠겠어? 어머니와 자기 가슴에 대못을 쾅쾅 박은 거지.” 울적한 얘기를 꺼내자니 목이 마르다는 사내는 생수를 삼킨 뒤, 의자 등받이를 끌어안고 말을 이어 나갔다. “죽은 큰아들이 아버지 원망을 많이 했거든. 어머니가 그렇게 된 건 오로지 아버지 때문이라고 어려서부터 머리에 박혔거든. 그래서 내가 그랬지, 당신 큰아들도 개죽음을 당했는데, 하나 남은 막내아들마저 안 좋은 꼴을 봐서야 되겠냐구 말이야. 그랬더니 그 양반, 명장답게, 아참 샛길로 빠져서 미안한테 그 양반이 용접으루다 명장인 거 아는지 모르겠네, 하여간 그건 그렇고, 명장답게 척 알아듣더군. 아들놈을 말리겠다고, 허튼짓을 못하게 잡도리를 하겠다고 시원시원하게 나오더라 이거야. 마누라 병으로 일찌감치 저 세상 보냈겠다, 명장이라는 영웅 칭호를 달아준 회사의 뜻을 저버릴 수는 없지 않겠어? 누구 때문에 아들놈이 취직했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으면 안 되잖아?” “당신, 참 잔인한 인간이야......” “그렇지 않아. 그 명장 양반을 좀 성가시게 했을 뿐이야. 그냥 날마다 철딱서니 없는 아들놈이 회사에 금을 내려고 한다, 철판에 금이 가면 배가 어찌되는지 잘 알지 않냐? 당신 아들 때문에 회사가 침몰하면 책임질 거냐고, 알아듣게 타일렀을 뿐이야. 마누라와 큰아들 저 세상 보냈으면 막내는 건져야 하지 않겠냐고 좋은 말로 설명했어. 헌데, 그 싸가지 없는 놈이 애비 말을 들어먹어야 말이지.” “결국,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거라 이거군.” “그렇지, 찰떡같이 알아듣는군. 왜 그렇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알아? 이 세상은 그냥 굴러가는 게 아냐. 물건도 제자리가 있듯이, 사람도 써먹을 데가 다 따로 있는 법이거든. 눈에는 안 보이지만 엄연한 질서가 있어. 아들놈은 그걸 파괴하려 했거든. 그 부자는 조선소에서 평생 열심히 일하는 게 그들의 몫이었어. 나는 말이지, 비뚤어진 건 제자리에 바로 놔야 직성이 풀리거든, 그게 사명이기도 하고.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는 세상은 참 아름답거든.” “나도 그 아름다운 세상을 금가게 하지 마라?” “자넨, 참 말귀를 잘 알아듣는 편이야. 그래서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의자를 밀친 사내가 느닷없이 박충식을 끌어안았다.
도대체 이 인간의 머리 속에는 뭐가 들었을까.
사내의 품에 머리를 맡긴 채 박충식은 묻고 또 물었다. 토사물을 훔친답시고 입술을 쓸어대는 사내의 손은 징그러웠다. 뱀이 목을 감으면 이런 느낌일까, 분명 사람의 손인데, 미끈대는 게 영 소름이 끼쳤다.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축 늘어진 채 팔을 건들대고 있자니, 장난감 인형이 이럴까 싶었다.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도 지겨웠을까, 사내가 갑자기 냅다 박충식을 팽개쳤다.
“다 좋은데 말이야, 자넨 욱하는 성격을 뜯어고쳐야 돼!”
이 참엔 또 성격 타령인가? 뱃속의 내장이 뿔뿔이 흩어지기라도 한걸까. 격렬한 통증이 엄습하는 배를 쥐어뜯으며 박충식은 버르적거렸다. 또 무엇을 시빗거리로 삼으려고 저리 날뛸까. 사내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박충식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네 군대 가기 전인가 제대한 다음인가. 대성조선 하청인 거성개발에 다녔잖아? 11개월 보름 만에 반장하고 대판 싸우고 때려치웠지? 고작 십오 일을 못 참아서 퇴직금도 못 받았잖아. 성질 머리가 그래서야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말종밖에 더 되겠냐구?” 무대에 홀로 선 배우가 따로 없었다. 뒷짐을 지고 부리나케 왔다 갔다 하다가, 허공에 마구 삿대질을 해대고, 답답한 나머지 가슴을 두드렸다가, “자네가 모르는 진실을 하나 알려줄까?”하고 목소리를 깔더니, “자네 배다른 형 있지? 일곱 살 더 먹었나? 하여간, 그 친구가 그 일을 뒤에서 조종했다는 거 아냐. 자넬 물 먹이려구, 수작을 부린 거지. 아무리 배 다른 형제라고 해도 한 아버지 핏줄인데 그럴 수 있어?”하고 빳빳이 세운 손바닥을 찌를 듯이 눈에 들이댔다. “거짓말하지 마......” 박충식은 사내를 비웃고 싶었다. 뺨이며 입술이 일그러지더라도 허튼 수작 부리지 말라고 실컷 비웃어주고 싶었다. 형님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형님의 주선으로 그 회사에 들어간 건 사실이었다. 형님하고는, 살갑게 지내지는 못해도 원수처럼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스타그룹의 정보망에 구멍이 났든지, 하도 오락가락하다보니까 제풀에 사람을 헛짚은 게 분명했다.
1인극을 마다 않는 사내는 본격적인 배우가 되기로 작심한 걸까. “우리는 절대로 거짓말을 안 해!”하고 손사래를 치더니, 한동안 대본을 짠다, 인물을 고른다 해가며 박충식에게 무엇을 보여줄까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나뿐인 관객이 어떤 인물을 원하는지 알고 싶어 하다가 성에 차지 않자, 자신을 꾸짖어가며 1인극에 빠져들었다. 그러기를 몇 분이나 지났을까, 제풀에 달아오른 몸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물! 물을 애타게 찾았다. 그리고 부리나케 대형 생수 병을 정수리에 들이붓자마자 “우라질, 어떤 인간부터 요리를 할까?” 하고 입으로는 무언가를 질겅질겅 씹는 시늉을 해보였다. 마치 고깃덩이를 통째로 게걸스레 먹어치우기라도 하듯이 이를 드러내고 부딪더니 “언제나 그렇듯이 조선소하고 중공업이 가장 말썽이라니까.”하고 마침내 생수 병을 집어던졌다. “조선소부터 칼질을 해나갈까? 명장을 보라구, 용접의 달인이지만 자신의 명예와 직장 때문에 자식을 미치게 만들었어. 그 자식은 또 어떻고?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자지, 아비를 죽게 만들었잖아? 유령 노조를 없애겠다고 말이지. 세상에 노조면 노조지 유령 노조가 어딨어? 그야말로 유령 때문에 생사람들만 잡았잖아. 그뿐만이 아니지, 유령 노조 위원장 말이야. 그 친구는 5천 명을 등쳐먹는 사기꾼이야. 지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아무 할 일도 없는 위원장 자리를 꿰차고 앉았잖아? 그 친구는 생긴 것도 그렇고 정말 유령 같다니까. 왜냐하면 말이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사무실에 하루 종일 멍청하게 앉아 있거든. 그러다 언젠가는 진짜 유령이 될지도 몰라.”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박충식은 물었다. 젖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댄 사내는 “스타보험에서는 스물세 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이혼을 했어. 칠백 명이 잘려나갔는데, 독한 여자들이 복직에 목을 맨답시고 남편을 차버렸다니까. 스물세 명이 가정을 깨버린 거야. 거기에 달린 아이들까지 해서 몇 백 명이 뿔뿔이 흩어진 거지. 자네와 함께 당했던 여직원도 결국 약혼자하고 갈라섰잖아. 약혼자란 그 남자 놈도 한심해. 약혼녀가 자네한테 성폭행을 당했다고 줄기차게 세뇌시키니까 홀라당 넘어오더군. 결국 파혼을 했잖아. 자네를 매장한 부위원장하고 사무장 말이야. 벌써 몇 년 째 떵떵거리고 잘 살아가잖아. 정말 비열한 놈들이지? 백화점, 유통, 건설 화학...... 우와, 우리가 작업한 인간들만 모아도 월드컵 경기장을 꽉 채우고도 남겠는걸.” “누가 그렇게 만들었냐니까?” 박충식의 외침과 동시에, “물론, 우리가 그랬지.” 하고 무릎을 꿇은 사내는 흐느꼈다. 그리고 뜬금없이 용서해달라고 매달렸다. 관객의 손을 꼭 쥐고 머리를 숙인 사내는 “제발 용서해줘,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정을 파탄시킨 죄를 용서해줘. 1년 내내 미행하고 가족을 괴롭히고, 끝내 정신병자로 만든 사람이 열 명도 넘어. 그 사람들의 원성 때문에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 제발 용서해달라구!” 용서해달라니, 무엇을 용서하라는 거야! 사내가 격렬하게 달라붙을수록 박충식은 손을 빼려고 몸부림쳤다. “당신은 인간이 아니야! 저리 가, 저리 가라니까!” “그러지 마. 불쌍한 나를 외면하지 마!” 꽉 잡은 손에 사내가 뺨이며 입술을 마구 비비자 박충식은 “제발 나를 내버려둬......” 하고 진저리를 쳤다. ‘사람이 저럴 수는 없어. 저건 괴물이야. 술을 처먹이고도 모자라 사람을 아예 말려 죽일 셈이야.’
사내가 눈물을 그친 것은 박충식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먹이면서였다. “제발 부탁이야...... 나를 내버려달라구......” “오, 그래 이제야 나를 용서해주는구만.” 관객의 반응을 멋대로 판단한 사내는 고맙다는 말끝에 “자네도 죄의식을 가지지 말라구.” 하고 목소리가 바뀌었다. 죄의식이라니? 박충식이 묻기도 전에 사내는 말했다. “스타그룹의 식구가 되는 걸 죄라고 생각하면 안 돼. 그건 말이지, 명장이나 유령 노조 위원장 같은 노예가 아니야. 스타그룹의 한 식구가 된다는 건 인간으로서 최고의 삶을 보장받는 거야, 무엇보다 성스러운 일이지.”
타인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해수욕장에서 여름 한철 장사한 일을 사내가 꺼냈을 때, 박충식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뒷조사를 어디까지 한 것일까. 퍼내도 퍼내도 샘솟는 우물이 저럴까, 사내의 추적은 끝 간 데를 몰랐다.
“나는 다만 자네의 본모습을 되찾아주고 싶을 뿐이야.”
물에 젖은 딸기코를 느릿느릿 닦으며 사내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고 빨간 카네이션 한 송이를 코에 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미친 듯이 울먹이던 방금 전 하고는 영 딴판이었다.
본모습이라니? 이번에 또 뭘 들쑤시자는 걸까. 해수욕장이라면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거성개발을 관두고 군 소유 땅을 불하한다기에 고향으로 갔다가, 농사를 지어본 것도 아니고 해서 시작한 게 해수욕장 장사였다. 그 여름날 무슨 일이 있었던가? 바닷가를 추억하던 박충식은 차라리 사내가 후련하게 털어놓기를 바랐다.
“자네 그때 돈푼깨나 만졌던데. 우리가 진작에 만났더라면 훨씬 좋았을 걸. 자네한테 그런 면이 있는 줄 정말 몰랐어, 우리가 뒤적거린 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어.” 사내는 박충식의 코에 카네이션을 대주었다.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향기를 맡아보라고 선심을 쓰기보다는 후딱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싶었다. 안개꽃, 나리꽃, 글라디올러스를 번갈아 갖다대며 뜸 들이지 말고 왜 해수욕장을 입에 올렸는지 밝혔으면 싶었다. 땡볕과 아수라장 같았던 바닷가를 거닐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박충식이 기억하는 거라고는 구멍가게를 임대해서 평상을 놓고 여름한철 장사를 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바닷가에서 직장생활 1년 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자네 동업자 있잖아? 애비가 물려준 땅 믿고 껄렁대던 친구 말이야. 기타도 잘 치고 여자들한테 인기가 좋았던데. 첨에는 자넬 쫓아내려구 별짓을 다했더군.” 사내는 다짜고짜 한 인물을 살려냈다. 그리고 텃세 때문에 싸움을 한 사람들 서넛을 심심풀이 삼듯 건져냈다. 하지만 박충식은 기억이 안 났다. 장사를 시작한 지 1주일은 텃세 때문에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바닷가 토박이들하고 대거리를 하자니 한번은 칼부림 일보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두어 명이 음료수 값을 두 배로 받으라고 으름장을 놓다가 안 되면 다섯 명이 한밤중에 우르르 몰려와 시비를 걸었다. 수영복을 싸게 빌려줬다고 술에 취해 시비를 걸기 일쑤였다. 자신들이 정한 값대로 안 받으면 튜브를 몽땅 펑크 내버리겠다고 칼을 들고 설쳤다. 아이스크림, 과자, 술 할 것 없이 토박이들이 정해준 대로 바가지를 씌워야 했다. 밤낮으로 몰려와 악머구리처럼 들끓던 그들을 기억하라니! 그 여름을 겪고나서는 고향에 가더라도 바닷가에는 얼씬하지 않았다.
“동업자를 자처한 그 친구 말이야. 자네가 덕본 건 확실해. 나중에라도 찾아가면 고맙다는 인사는 하라구. 자네를 가장 악랄하게 들볶은 친구였어. 바가지 안 씌우면 죽여 버리겠다고 자네 목에 칼을 들이댔으니까. 자넨, 진심으로 그 친구한테 고마워해야 돼. 왜냐하면 말이지, 그 친구가 아득바득했기 때문에 자네도 속편하게 바가지를 씌우면서 돈을 만졌으니까 말이야. 자네 돈 벌려고 장사한 거잖아? 좋은 친구 만난 덕에 세상 공부도 제대로 한 셈이지. 그 친구 요즘도 거기서 잘 살아. 모텔에다 횟집을 크게 하던데, 한번 놀러가보라구. 아, 참 그리고 말이야, 거기서 자네가 애를 만든 건 잊지 않았겠지?” 사내는 농담이라고 낄낄거렸다. 하지만 박충식은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술에 취해 홧김에 잠자리를 가졌던 여자가 있었다. 바가지 씌우는 문제로 싸움을 한 날, 웬 늙은이가 술하고 딸하고 바꾸자고 주정을 했다.
“요즘은 씨도 안 먹히는 낡은 수법이지만 그때만 해도 고전적인 수법이었어. 애비란 작자가 자기 딸을 버려놨다고 돈을 뜯어냈잖아. 순진한 자넨, 꼼짝없이 걸려들었구. 잔돈푼깨나 날렸을 거야. 뭐 자네야 협박에 굴복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이 불쌍해서 그랬겠지만. 그 정도로 매듭을 지은 건 잘한 짓이었어. 그놈은 상습범이었으니까. 인간말종이라 그거지. 그 인간 마지막이 어땠을 것 같아? 길바닥에서 폐품처럼 죽었어. 우리가 뒤져봤지만 행려병자쯤으로 객사한 걸로 나왔으니까. 그 여자 말이야, 인간말종의 딸, 그 여자한테 스무 살쯤 된 딸이 있던데. 그 여름하고 햇수가 맞아떨어지는지 잘 따져보라구. 그렇다고 새삼스레 찾아 나서라는 거는 아니구.” “아직도 더 남았어?” 박충식은 물었다. 마냥 듣고만 있는 것도 지쳤다. 이렇게 기다리다가는 열 명 스무 명도 좋고, 자신과 얽혔다는 사람들이 한도 끝도 없이 쏟아질 터였다. 여름 내내 토박이들의 입맛대로 해수욕객들에게 바가지를 씌웠다. 터무니없는 가격이어서 처음에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다 며칠 지나자 언제 그랬냐 싶게 거리낌 없이 물건을 팔았다.
“동업자와 의기투합하고 인간말종도 푼돈으로 다스렸던 인간, 그게 바로 자네의 본모습이라구. 돈 벌려고 장사했잖아? 바가지를 씌워가면서 말이야. 그게 자네야. 그리고 그게 인간이지.”사내는 박충식을 격려했다.
그 여름날 박충식이 깨달은 것은 세상에는 두 갈래의 사람이 있다는 거였다. 수영복 차림으로 바다에서 물장구를 치는 사람 그리고 땡볕에서 장사하는 사람. 그해 여름 해수욕하는 사람들 무리에 얼마나 끼어들고 싶었던가!

정식으로 해고 통지를 받은 것은 수원 현장으로 발령이 난지 십칠 일 만이었다. 해고 사유는 발령 거부와 근무 태만이었다. 표적으로 삼은 지 오래인 회사에서는 본때를 보이자고 작심한 게 분명했다. 그 해에 민주노총에서는 스타그룹에 민주 노조의 깃발을 꽂겠다고 발표를 했던 터라 말하자면 선수를 친 셈이었다.
앓던 이나 마찬가지인 인간 박충식을 스타그룹은 간단하게 뽑아버렸다. 창포시에서만 근무하던 사람을 어느 날 갑자기 발전 설비 설치 현장인 수원으로 가서 일을 하라는 거였다. 도저히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재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다 아내는 막둥이를 임신한 지 7개월째였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마저 세상을 뜬지 불과 한달밖에 안 되었다. 배부른 아내와 어린 두 딸만 남겨두고 창포시를 떠날 수는 없었다. 재혼으로 다시 이룬 가정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내용증명을 보냈지만 회사는 철저히 무시했다.
사진 찍기를 죽기보다 싫어한 이가 영화배우 빰치게 생긴 오 형이었다. 같은 남자가 봐도 어느 자리에서나 그는 돋보였고, 여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해고 복직 투쟁을 한답시고 날마다 정문에서 출근 투쟁을 하였다. 부당한 해고임을 알리는 선전 작업을 3개월째 벌이는 동안 오 형은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서주었다. 노동자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새벽부터 움직였고, 걸핏하면 욕설과 다툼이 끊이지 않은 탓에 몸이 상하기 일쑤였다.
오 형이 뜻하지 않게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은 영화배우 노릇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서울에서 민주노총 위원장이 내려왔던 터라 집회 규모가 컸다. 해질 무렵, 회사 정문에서 부당 해고를 규탄하는 집회를 마치고 많은 노동자들이 창포시 중심가를 향해 행진했다. 오 형은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스타동지회 회원들을 이끌었다. 빨간 핸드 마이크를 들고 앞장서던 그가 짜증을 내기 시작한 것은 시내로 접어들면서였다. 공단을 거닐 때만 해도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비디오 카메라를 든 낯선 청년들이 갑자기 바짝 달라붙었다.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들은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집회 시작부터 시위대를 촬영하고 있었다. 스타그룹 비서실에서 나왔다는 그들은 애초에 시비를 걸 속셈을 지녔던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누군가 구호를 외치거나 플래카드를 펼쳐들면 어김없이 달려가 카메라를 들이댔다. 다른 언론사의 기자들은 맞춤한 거리를 두고 사진을 찍거나 촬영을 했는데,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노동자들의 얼굴에 바짝 붙었다. 팔을 휘두르고 구호를 외치는 사람의 코앞에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나, 온몸에 항의 벽보를 두른 여자한테는 머리부터 발끝가지 샅샅이 훑어대는 바람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누가 봐도 성희롱이 틀림없었다.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삿대질을 해가며 따져도 그들은 도리어 사람마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약을 올렸다. 시위 참가자들의 원성을 사려고 몸을 사리지 않던 그들이 임자를 만난 건 파출소 앞을 지나면서였다.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깐죽거리던 그들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오 형이 카메라를 빼앗아버렸다. 오 형의 행동을 반긴 건 오히려 스타그룹 비서실에서 나온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옳다구나 하고, 사람을 친다느니, 강도짓을 저질렀다고 부아를 돋우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싫다는데 왜 남의 얼굴을 찍어대냐고, 오 형은 카메라를 내동댕이치고 빼앗은 필름을 그 자리에서 태워버렸다.
그 사건으로 출근 투쟁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카메라를 빼앗느라 몸싸움이 벌어졌고, 다친 청년들이 고발하기 무섭게 오 형에게는 체포 영장이 떨어졌다.
오 형이 왜 사진 찍기를 질색하는지 알게 된 건 어느 절에 머물 때였다. 경찰의 검거망을 피한답시고 절집에 숨어들었는데, 사흘이 못가 좀이 쑤셨다. 저녁을 평소보다 한참 이른 다섯 시에 먹고 나면 할 일이 없었다. 그날도 서녘 하늘에 벌건 해가 걸린 걸 보고 산책을 나섰다가, 계곡에 쪼그리고 앉은 오 형이 자신의 얼굴이 비친 수면에 조약돌을 던졌다. 얼굴이 부서지지 않게 저 물을 손에 담을 수 있을까? 무뚝뚝한 그답지 않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그렇게 하고 싶어서 안달을 했던 여자들이 있었노라고 털어놓았다. 한때 그의 얼굴 사진이 공단의 여자 기숙사에 나돈 적이 있다는 거였다. 짐작만으로는 남녀가 어울린 야유회에서 찍었지 싶은데, 그 사진을 돌려주겠다는 여자들이 수두룩했다. 어떻게 연락처를 알아냈는지, 사진을 핑계 삼아 여자들은 만나기를 바랐다. 처음 한두 차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나갔는데, 뒤늦게 문제가 심각함을 깨달았다. 산행이다, 여행이다 해서 모임을 갖자고 수선을 피웠지만 여자들은 단둘이 만나기를 은근히 바랐다. 한 달 사이에 다섯 여자를 별다른 감정 없이 만났을까, 오 형이 께름칙하게 여긴 건 사진이었다. 놀랍게도 여자들은 한결같이 오 형의 사진을 담은 지갑이나 액자를 꺼내 보이며 자신이 애인임을 은연중에 과시했다. 아울러 자신들의 사진을 오 형이 품고 다니기를 바랐다. 그러마 하고 오 형이 무심코 여자들한테 사진을 받은 게 탈이었다. 나중에야 밝혀졌지만 여자들은 오 형이 자신만을 점찍은 것으로 알았고, 여러 여자들이 얽히고설켰다는 게 들통 나면서 오 형은 졸지에 바람둥이로 낙인 찍혔다. 오 형의 자취방에서 수면제를 먹은 여자가 병원으로 실려 가고, 여자들의 부모들이 한바탕 소란을 피운 다음에야, 사진 때문에 빚어진 오 형의 어설픈 사랑 놀음은 수그러들었다.
희한하게 영화배우 저리가라였던 오 형의 얼굴이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바람둥이라는 헛소문에 시달렸던 그가 정작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은 건 사진 한 장을 달랑 보고 나서였다. 부모가 정해준 여자를 사진으로만 만난 지 불과 석 달 만에 후닥닥 식을 올려버렸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했던 그가, 사진으로 보니까 이상형이더라구, 하고 능글맞게 웃었는데, 끝까지 사진으로만 그랬노라고 부득부득 우겼다. 오 형이 딱 한번 사진 찍기를 망설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전세 계약서를 건네주던 날 동료들과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술을 한잔씩 걸치고 불콰한 낯으로 어깨를 곁고 다섯 명이 행복에 겨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죽는 날까지 형제처럼 지내기로 맹세를 하면서 말이다. 여자 복도 많다고 늘 동료들한테 놀림을 받았던 오 형은 요즘도 사진 찍기를 한사코 마다할까.
“구리 판때기는 떼어내고 동상을 세우는 게 어떨까?”
사내는 동판이 유치하다고 혀를 찼다. 박충식은 그것이 회사 정문에 박아 넣은 법원 결정문임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해고 통보를 하자마자 회사는 법원에 출입 가처분 신청을 냈고, 바로 판사의 결정문을 받아냈다. 그리고 아무개는 이러저러해서 스타중공업에 출입하지 못한다는 결정문을 새긴 동판을 정문에 여봐란 듯이 붙였다.
“말하자면 이런 거지, 자네가 폭행으로 구속됐다고 했는데 말이지, 그건 잘못된 거지. 잘못이야 엄연히 카메라로 시비를 건 놈들한테 있지, 자네가 얼굴을 안 팔겠다는 데 왜 찍어대냐구. 그딴 자식들하고 티격태격했다고 폭행이라니 말이 안 돼지. 대한민국 법 이거 노예들한테는 있으나 마나라니까. 그렇다고 해도 자네도 재판에서 좀 심했어. 스타중공업에는 지긋지긋해서 출입을 안 해도 된다고 했다며? 그건 본심이 아니었을 거야.” 거기까지 한숨 돌린 사내는 “인간 박충식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싸우는 거지, 스타중공업에 꼭 들어가려고 싸우는 게 아니다 라고 했겠다? 그거 지금도 진심이야?” 하고 물었다. 박충식은 마른침만 삼켰다. 모든 게 부질없었다. 숨이 끊어질지도 모르는 참인데 그걸 따져서 뭐하자는 건가. 차라리 물 한 모금이 더 절실했다. 그리고 판사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다. 모든 인간에게는 지켜야할 명예가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법정에서는 그랬다. 그것만은 정확하게 기억났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람한테는 사람대접을 해줘야지......” “옳아, 옳은 말씀이야. 한데 말이야, 해고 무효 소송을 기각하면서 한 판사의 말이 재미있어. 스타중공업에 말할 수 없는 누를 끼쳤다는 거야, 자네가 말이지. 직원들을 선동했고, 그래서 마음이 술렁거려서 일을 제대로 못하고, 걸핏하면 집회다 뭐다 해서 노는 바람에 손해를 끼친 게 수십억이나 된다지 뭐야. 자네를 기생충 보듯 하는 거지. 회사와 나아가 이 사회에서 쓸모가 없는 애물단지라는 거지. 그러니까 판사는 자네가 이 사회에 발붙이는 걸 원치 않았어. 영원히 추방하고 싶었던 거야. 자네 그렇게 되기를 바라나?” “추방이라니?” 박충식은 물었다. 해고자 신분으로 살아온 게 어느덧 칠 년째였다. 물러나려고 해도 더는 갈 데가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은 것도 모자라 거기서도 쫓아내겠다니, 도대체 어디로 가란 말인가. “그렇다고 판사가 자네가 죽기를 바라기야 했겠어? 말하자면 이런 게 아닐까? 자네가, 인간 박충식이 이 세상에서 제명당하는 거야. 자넨 멀쩡히 숨 쉬는 인간임에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스타중공업뿐만 아니라 창포시 시민, 유권자, 학부모, 대한민국 국민, 하다못해 초등학교 동창회 회원 자격도 박탈당하는 거야. 국세청 납세자 명단에서도 자넨 제명되고, 의료보험이나 국민연금에서도 자네 이름은 없어지는 거지. 어디에도 자네가 낄 데는 없어. 그뿐만이 아니야, 이 사회 어떤 조직이나 공적체제에도 속하지 않는 거야. 오죽하면 동판에다 그걸 새겨놓았겠어?”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박충식은 진심이었다. 아무런 소속도 없는 인간으로 존재하다니?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끔찍했다. 혹시 사내의 말대로 감쪽같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 마. 그래서 자네를 구원하러 내가 왔잖아, 살 길을 다 마련해뒀으니까, 안심하라구.” 사내는 꽃다발로 만든 베개에 박충식의 머리를 뉘어주었다. “돈을 받든지, 월급에 목을 걸고 살아가든지, 스타그룹에 노조란 있을 수 없어. 그건 인간을 편 가르고 타락시킬 뿐이야. 그 대신 말이지, 자식들 키울 수 있는 월급과 안락한 집을 제공하잖아. 복지 제도를 보라구. 학교, 병원, 양로원, 보육 시설, 휴양 시설, 요람에서 무덤까지 다 책임지잖아. 시원찮은 국가보다 훨씬 낫지. 자네는 이혼하면서 여자한테 위자료도 못 준 인간이야. 스타그룹의 복지 제도를 마음껏 누리면서 사는 게 자네한테 짜여진 인생이야. 그걸 이탈하지 마. 스타그룹은 말하자면 이 세상 어디로든 뻗어나가는 철길과 같은 거야, 자넨 거길 달리는 튼튼한 기차인 셈이지.” “튼튼한 기차라......” 박충식은 사내를 따라 읊조렸다. 복직 투쟁에 인생을 걸었다고 말해야 마땅한데, 입이 열리지를 않았다. 꽃다발 베개 탓일까, 사내가 늘어놓은 복지 제도가 편안하게 다가왔다. 스타그룹에서 쫓겨났다가 복직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의 불행한 삶은 돌아보기도 싫었다. 그것은 이마에 낙인만 찍지 않았을 뿐이지 사내의 말마따나 현대판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하다못해 국가마저도 그들의 하소연을 외면했다. 언제까지 복직 투쟁만 하다가 늙어갈 생각을 하면 앞날이 깜깜했다. 그에 반해 스타그룹의 품 안은 얼마나 평온한가!
“자네 전셋집을 누가 구해줬는지 잘 알지? 그럼 말이야, 이런 것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군. 그 돈이 어디서 나왔을 것 같아?” 박충식의 윗옷 단추를 끄르며 사내가 말했다. “어디서 나오다니?” 박충식은 되물었다. 전셋집이야 네 명의 동료들이 없는 살림을 쪼개 마련해준 거였다. 그 빚을 어떻게 갚을까를 고민해왔지, 여태껏 그것을 의심해본 적은 없었다. “그 친구들이 한 푼 두 푼 모았을 거다 그거지? 자넨, 그렇게 알고 있겠지? 아냐, 그렇지가 않아.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는 게 아니라니까.” “그럼, 어떻게....... 당신들이?” “그렇지, 우리가 집어준 돈이야.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자네는 우리가 마련해준 집에서 마누라와 새끼들하고 잘 살았던 거야. 그 행복한 가정을 지켜준 게 5억보다 못할 것 같아? 이런 사람하구는, 놀라지 마, 놀랄 것 없어, 말했잖아 스타그룹은 제 식구를 끝까지 보살핀다구.” “어떻게 그런 일이......” 박충식은 네 명의 동료들을 떠올렸다. 신 형, 김 형, 오 형, 최 형... 그들이 감쪽같이 속이다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사람들이 왜 그랬을까, 분노보다는 허탈했다. 뭘 믿고 살아가야할지, 무엇에 기대어 세상에서 버텨나갈지 아득했다. “뭐랄까, 하늘이 무너진 느낌이랄까, 잠시 배신감이나 뭐 더러운 기분이 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잠시야. 중요한 건 살아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한 가지 말해주지. 자네가 열심히 찾아다녔던 그 친구들 말이지, 지금 다들 잘 살고 있어. 그러니 안심하라구. 어? 갑자기 왜 이래?” 사내는 외로 꺾인 박충식의 얼굴을 보듬으며 “충격이 컸나봐. 하지만 인생이란 게 본래 만만한 게 아니잖아. 중요한 건 말이지, 노예가 아닌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거야. 그러려면 말이지, 자존심을 지켜야 돼. 이렇게 무너지면 안 된다니까.” 하고 생수를 입 안에 흘려 넣었다.
“배가 고파......”
박충식은 눈을 떴다. 몹시 허기가 졌다. 사내가 건네준 꽃을 입 안에 넣고 씹었다. “그래, 그게 자존심이야.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지.” 장미를 든 사내는, “꽃은 말이지, 배달하는 게 아니야, 향기에 취하고 맛나게 즐기는 거지!” 덩달아 하얗고 노란 꽃잎을 우적우적 씹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저번 총선에서 말이야, 남편이 공장 다니는 여자들이 노골적으로 돈을 바랬잖아?” “그랬어...... 숨기고 싶지만 사실이야.” 박충식은 물을 마시며 더듬더듬 말했다. 선거 전날, 노동자들의 아내들인 젊은 여자들이 돈을 달라고 했다. 노동당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지겠노라고. 돈이 있었다면 정말 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한 표가 아쉬운 상황이었고, 국회의원에 당선된 노동당 후보가 눈앞에 오락가락했다. 선거에서 떨어졌으면서도 한동안 돈 봉투를 돌렸다면 이겼을 거라는 아쉬움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 여자들한테 돈 봉투를 뿌릴 수 있어야 돼. 그게 바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구, 그걸 움켜쥐는 게 인간의 진정한 자존심이라니까.” 열변을 토하는 사내에게 박충식은 물었다. “이 참엔 날 죽일 셈인가?” “무슨 그리 섭섭한 말씀을...... 자네를 구원하는 게 나의 즐거운 사명이라고 했잖아. 돌아온 탕아라고나 할까, 스타중공업 광장에 자네 동상을 세우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이라니까. 스타그룹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야말로 죄악임을 명심하라구.” 박충식을 끌어안은 사내는, “이제 진정한 인간으로 자네는 다시 태어나는 거야. 노예들과 어울린 지난 몹쓸 기억은 다 잊어버려. 지금부터 편안한 추억만 펼쳐질 테니까.” 하고 얼굴을 닦아주었다.
네 명의 동료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언제부터인가 창포시에서는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사내의 품에 안긴 박충식은 동료들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해복투 사람들은 자신을 영원히 찾지 못하리라. 그리고 사라진 동료들처럼 인간 박충식은 누구에게도 잊혀진 존재가 될 터였다.





윤동수1960년 출생. 1990년 계간 <사상문예운동>에 중편 '새벽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2003년 [윤상원 평전] , 2005년 작품집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 펴냄. 본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