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덕한 전쟁을 고발한다’거리로 나선 예술


반대하라.


지금 사막은 잠들지 못한다.


지금 메소포타미아의 아이와 어머니는


외진 울음도 나누지 못하고 죽어간다.


기원전 유적은 동트면 또 잿더미


지금 지구는 야만의 행성이 되어버렸다.


<고은 시인의 ‘나의 편지’ 일부>




이라크전은 문화예술인들의 전쟁이기도 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 5일 전인 지난달 15일 ‘문화예술인 반전평화운동본부’(문화연대, 민족굿위원회,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미술인협회, 스크린쿼터문화연대,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한국민족음악인협회 등 12개 단체 참여)까지 꾸린 문화예술인들은 한달동안 집단의 일원으로서, 개인으로서 숨가쁘게 달려왔다.

 

백발이 성성한 작가들이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15년만에 거리로 나섰고, 부도덕한 전쟁과 부시의 폭력성을 질타하는 시화·엽서·만화들이 가두를 장식했다. 인터넷을 통해 예술인들의 반전 메시지가 전파되는가 하면 공연예술인과 대중가수도 한 무대에 올라서 평화를 노래했다. 우리와 5시간의 시차가 있는 곳, 바그다드는 이미 미·영 연합군에 함락됐지만 이번 전쟁은 ‘반전평화예술’이라는 새 장르의 모태가 됐다.


미국의 승리가 전세계에 타전되던 지난주, ‘전쟁은 신을 생각하게 한다’(화남)는 한권의 책이 나왔다. 고은 신경림 김지하 이해인 도종환 박노해 안도현(이상 시인) 남정현 윤정모 방현석 오수연(소설가) 염무웅 도정일(평론가) 등 문인 122명의 글이 실린 최초의 반전평화문학 작품집이다.


‘평화의 꽃물이 들어야 할 봄에/전쟁의 핏물이 고이는/이 참혹한 슬픔을 어쩌지요?/‘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고/십자가 위에서 고백하신 주님/서로가 형제인 이 땅에서/사랑 대신 미움의 총을/용서 대신 복수의 칼을 든/눈 먼 사람들을 보고만 계십니까’라고 읊은 이해인 수녀의 시 ‘슬픈 기도’는 아릿한 슬픔을 느끼게 해준다.


개전 사흘 전 요르단 암만으로 날아갔던 박노해 시인은 현장통신에서 “세상은 ‘힘의 감동’을 믿지만 시인은 ‘감동의 힘’을 믿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가슴을, 영혼을, 진실을, 우리들 마음 깊은 곳의 울림을 믿고 거기에 가닿고자 몸부림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라는 말로 이번 전쟁을 대하는 문화인들의 심경을 대변했다.


이 작품집에는 특히 둔야 미카일, 압둘 와합 알 바야티 등 이라크 시인들의 시가 최초로 국내에 소개됐다. ‘전쟁은 밤낮없이 무자비해./그건 독재자들에게 긴 연설을 하도록 만들고/장군들에게 훈장을 주고/시인들에게 소재를 제공한다./그건 인공수족(手足) 산업에 기여하고/파리들에게 먹이를 제공하고/역사책에 페이지를 더해주고/희생자와 살인자들을 동등하게 만들고/연인들에게 편지쓰기를 가르치고/소녀들에게 기다림을 훈련시키고…’. 둔야 미카일의 시 ‘전쟁은 힘들어’는 전쟁의 일상성을 말해 더욱 감동적이다.


이책의 간행위원장을 맡은 홍일선 시인은 “반전평화라는 단일한 주제를 가지고 문학의 전 장르가 망라돼 한권의 책으로 묶인 것은 최초이며, 수록된 작품들의 성취도 역시 한국문학의 한 진경을 보여줄 만큼 매우 높은 편”이라고 소개한다. 이번 작품집은 짧은 기간에 쓰여진 시와 산문이 주축이지만 민족문학작가회의 공식 파견작가로 요르단·팔레스타인 등지를 돌았던 소설가 오수연씨를 비롯해 많은 작가들이 전쟁과 평화를 화두로 한 작품을 쏟아낼 것으로 기대된다.

 

시각예술 분야에서의 반전평화 캠페인도 활발했다. 시사에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만화가들은 그동안의 작업성과를 모아서 14일부터 한달 예정으로 인터넷 ‘반전평화 만화전’을 열고 있다. 우리만화연대·전국시사만화작가회의 등이 주축이 돼 모은 60여점의 작품을 우리만화연대 홈페이지(http://urimana.com)와 카툰저널 뉴스툰(http://newstoon.net)에 전시하는 것.


딸을 무동 태운 아버지의 행복한 모습 위로 USA 전투기의 그림자가 드리운 모습을 그린 고경일의 작품 ‘무제’, 빨간 해골의 융단 위에 ‘OIL’이란 글자를 배에다 새기고 요염한 포즈로 누워 있는 부시를 그린 주완수의 작품 ‘아메리칸 뷰티’, 어린아이의 손목을 정확히 절단하는 그림과 ‘우리의 쪽집게 폭격은 목표물을 정확히 분리해낸다’는 글귀가 어우러진 박재동의 ‘외과수술’ 등이 눈길을 끈다.


이 만화들은 지난 12일 서울시청 앞에서 반전평화비상국민회의 주최로 열렸던 ‘전세계 반전평화의 날’ 행사에서 1차 오프라인 전시를 가졌다. 이어 15일 서울 명동밀리오레 이벤트홀에서 문화예술인 반전평화운동본부 주최로 열리는 ‘이라크 난민 지원을 위한 평화와 연대의 밤’(소박스) 행사장에서 2차 오프라인 전시를 갖는다. 5월에는 작품을 골라 책으로 묶고 갤러리 전시도 가질 예정이다.


한편 가장 많은 시민들이 참여한 반전평화 예술활동은 ‘게릴라 엽서전－부시에게 보내는 메세지’였다. 문화연대를 비롯, 이라크전 파병 반대선언에 참여했던 문화단체들이 중심이 돼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5일까지 6차례에 걸쳐 교보문고·명동성당 반전평화캠프·홍대앞·명동에서 거리전시 및 제작행사를 열었으며, 지난 9일부터 13일까지는 서울 인사동 관훈갤러리에서 옥내전시를 가졌다.


2,500여명의 시민이 참여해 가로 15㎝, 세로 10㎝의 작은 종이 위에 시, 편지, 낙서, 만화, 사진, 드로잉, 채색화, 디자인 등 다채로운 반전평화의 이미지를 연출했다. 부시에게 ‘몸과 마음을 닦으실 수 있는 혜택을 주겠다”며 분홍색 온천탕 입욕권을 붙인 재치있는 작품도 있었고, ‘어린이가 죽자나요. 전쟁하지 마새요’라고 쓴 어린아이의 서투른 글씨도 보였다. 전쟁에 반대하는 예술인들도 참여한 덕분에 ‘15㎝ 예술’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성도가 높은 작품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주최측은 전쟁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문화연대·민예총·대안공간 풀·철학마당 느티나무·쌈지스페이스 등 7곳에 반전평화 엽서 수거함을 설치하고 작품을 계속 접수하며, 15일 ‘평화와 연대의 밤’ 행사에서 다시 전시한다.


문화예술인 반전평화운동본부 조영신 사무처장은 “반전평화는 이라크전에 국한되지 않는 인류 보편의 염원으로 문화예술인들에게 많은 창작의 영감을 불러일으켰다”며 “반전평화운동의 선전수단이 아니라 각 장르별 특성을 담은 예술작품을 통해 반전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사진 도서출판 화남·우리만화연대·문화연대 제공)



－［취재수첩］이라크 난민돕기 계속하기로…15일‘평화와 연대의 밤’개최－


전쟁이 끝나도 평화의 기원은 계속된다. 이라크전이 미국의 승리로 조기에 결판났지만 문화예술인 반전평화운동본부를 중심으로 모인 산하단체들은 종전 선언 이후까지 조직을 계속 유지하면서 이라크 난민 돕기와 한반도 평화구축 활동을 지원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반전평화라는 이슈가 이라크전에 국한되지 않고 긴장이 고조된 한반도에서도 유효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반전평화운동본부는 15일 오후 4시부터 11시까지 명동 밀리오레 이벤트홀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국회의원들과 문화예술인 반전평화운동본부가 함께 하는 이라크 난민 지원을 위한 평화와 연대의 밤’ 행사를 연다. 이부영(한나라당)·이미경·정범구·김영환(이상 민주당) 의원 등이 참석해 반전 메시지를 읽고, 정태춘·김현성·유정고밴드 등의 노래공연과 시낭송, 퍼포먼스, 부대전시가 준비돼 있다. 특히 이라크 난민 돕기 기금 마련을 위해 미술품 및 문화예술인 주요 소장품 30여점을 경매하며 시집·소설·CD 판매행사도 갖는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시민방송 R-TV와 함께 지난 9일부터 무기한으로 ‘반전평화를 주제로 한 작가들의 영상메세지 릴레이’를 하고 있다. 시인 민영·고은·이재무, 소설가 남정현·윤정모·송경아 등이 출연해 시낭송이나 반전평화에 관한 책 소개를 중심으로 평화 메시지를 전달한다.


민족굿위원회는 지난 13일에 이어 오는 20일 서울 인사동 전통문화공연장에서 ‘반전평화 기원굿’을 갖는다. 풍물굿패 살판·터울림·몰개·씨알누리·참넋·신나락 등이 출연해 전쟁으로 죽어간 수많은 이라크 국민들의 넋을 풀어주고 다시는 이런 참상이 발생하지 않기를 기원한다.


/한윤정기자 yjhan@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04월 14일 17:06: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