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시월은 햇살도 좋고 바람도 좋습니다. 일 년 중에 제일 좋은 달을 고르라면 저는 사월과 시월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그 다음은 언제냐고 물으시면 오월과 구월이라고 하겠습니다. 햇살도 알맞게 따뜻하여 벼의 낱알 하나하나를 익게 하고, 과일에 마지막 단맛을 스미게 하며, 아름다운 빛깔로 익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동생네 식구들과 아이들이 산방에 놀러왔습니다. 가지가 찢어지게 감이 열렸고 대추도 제때에 따주지 않아 저절로 떨어지는 것들이 있는데, 잘 되었다 싶어 같이 감과 대추를 땄습니다. 감은 솎아주지 않아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자라는 바람에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잘 익었습니다. 너무 익어 홍시가 된 것들도 있습니다. 여동생은 봄에 매실을 따다 비탈에 미끄러져 다친 손목이 아직도 시큰거린다고 하면서도 좋아하며 감을 땄습니다. 아들 녀석은 어디서 들었는지 매실이 몸에 좋다고 매실 액을 좀 얻어가야겠다고 합니다. 올봄에 담은 매실은 어머니 댁에도 동생 집에도 다디달게 잘 익었습니다. 다들 우리 집에 담은 거 줄 테니 가져가라고, 우리 집 매실이 더 잘 익었다고 자랑입니다.

호두나무는 다람쥐들이 이미 수없이 다녀간 뒤라 거둘 게 없지만, 대추도 소쿠리 가득하고, 감도 따고 보니 바구니와 봉지와 함지에 가득 합니다. 조카들은 밤도 주워서 직접 까보고 싶다고 밤나무 밑으로 달려갔는데 까다가 썩은 게 많다고 이내 돌아옵니다. 소설가 이외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음식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음식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인간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인간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부패된 상태를 썩었다고 말하고 발효된 상태를 익었다고 말한다. 신중하라. 그대를 썩게 만드는 일도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고 그대를 익게 만드는 일도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외수 '하악하악'중에서

그렇습니다. 잘 익었던 감과 밤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그냥 방치해 두면 천천히 부패하고, 약간 덜 익은듯하던 매실도 잘 담아두면 서서히 발효하여 좋은 식품이 됩니다. 아니 안전하다고 믿으며 냉장고에 넣어 둔 음식도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 곳에 너무 오래 방치해 두고 있으면 어떤 식품이든 부패하고 맙니다.

사람도 과일도 시간 속에 익어가는 게 있는가 하면 썩어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익어가는 것들은 빛깔에서 윤이 납니다. 잘 익는 것들 옆에는 적당한 햇빛과 알맞은 바람이 있습니다. 잘 익는 것들은 햇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몸 전체를 하늘 아래 투명하게 내어 놓습니다. 어디로든 바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지닌 것을 감추지 않고 개방합니다. 몸도 그렇고 마음도 한가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즐겁고 기쁜 자세로 하늘 아래 서 있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환하고 밝은 기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받아들일 줄 알고 시간에 몸을 맡길 줄 압니다.

부패하는 것들은 습기에 차 있고 어둡습니다. 몸도 마음도 구석진 곳에 버려져 있거나 당당하지 않습니다. 가지도 배배 꼬여 있고, 잎도 실의에 차 있으며, 바람과 햇볕이 그들 얼굴 위에 충만하지 않아 열매는 찡그리고 있습니다. 그 열매들은 제 주위에 있는 것들을 마땅치 않게 여기고 바람도 햇살도 외면합니다. 세상에 대해 냉소적이고 얼굴은 적의에 가득 차 이그러져 있습니다. 과일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습니다.

이 좋은 가을 우리도 썩어가는 열매가 아니라 익어가는 과일로 있어야 합니다.

<2009. 1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