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많은 사람이 불과 1년 만에 민주화가 이런 방식으로 붕괴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커다란 충격을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의 폭발과 그것의 형식적·제도적 실현은 매우 짧은 시기에 이루어진 '압축민주화'의 역사였고, 그런 점에서 오늘의 한국인들은 민주화 '이후'를 살고 있기보다는 여전히 민주화의 '도정'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정치적 이념의 좌우와 무관하게 시대에 대한 '착시 현상'은 민주화 과정의 거시적 흐름에 대한 성찰을 차단하고, 단기적인 '완료형'의 수사로 대체해온 것이 이른바 87년 체제 이후 한국 정치사의 풍경이었다. 정치적 좌우를 막론하고 지난 대선에서 지식인이나 정치계급 들이 외쳤던 것은 '산업화'와 '민주화'에서 모두 성공적인 성취를 보였으니, 이제 필요한 것은 '선진화'라고 입을 모았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된 의미에서의 민주화는 여전히 지그재그의 동선이기는 하지만 실현해야 할 과정이자 목표이며, '실용'을 구호로 내세우는 골계적 정치세력의 멘털리티란 여전히 '산업화'라는 낡은 국토개조 마인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선진화' 담론에 의존하는 모든 언설은 제 아무리 세련된 수사를 동반할지라도, 기껏 선거철에나 가능했던 '표어' 이상의 의미를 띠기 어렵다. 냉정하게 생각해본다면, 오늘의 자칭 실용정부에서 뚜렷하게 발견하는 것은 정보화라는 거대한 문명사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디지털 러다이트'(사이버 시스템 파괴) 운동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들은 시대에 불시착한 퇴행적 '산업화 세력'이기 때문에 정보화와 대중지성으로 상징되는 디지털 문해 능력과 정치적 결사체의 진화에 대해 진실로 공포를 느끼고 있다. 문화론적으로 보면, 지금 이 세력들은 TV와 같은 전자미디어는 물론이고, 인터넷 공론장과 같은 새로운 후기 근대적 미디어들의 진화 앞에서, 삽과 포클레인으로 무장한 산업화 시스템이 역사적으로 퇴장할 수밖에 없다는 명백한 운명을 이성이 아닌 '의지적으로'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시대착오다.

과거 산업화 시대에는 이들도 민중을 선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에 그들이 선동할 수 있는 계층이란 자본 축적의 이해관계로 결속되어 있는 집단인 소위 '강부자'뿐이다. 산업화 시기 파시스트들은 동시에 부자민중선동가들이었다. 히틀러가 그 단적인 예다. 그런데 정보화시대에는 이런 대중 동원 전략이 먹히지 않는다. '선진화'라는 구호를 목 터져라 외치면 외칠수록, 대다수 누리꾼은 풍자와 해학, 골계와 아이러니의 수사학 안에서 웃고 있을 뿐이다.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표면적으로는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태의 분명한 본질은 이것이 산업화 세력의 최후의 소극(笑劇)일 뿐이며, 디지털 러다이트 운동의 임박한 종언이 뿜어내는 마지막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관객 없는 극장에서 몸부림도 공연은 공연이다. 그러나 연출자와 관객 입장에서는 낡은 신파극을 더 지켜보는 수고는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역시 우리에게는 새로운 감수성과 우아한 극장, 그리고 스마트한 배우들이 필요한 것이다.

<2009. 4. 9 이명원 문학평론가·문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