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며칠 전 봄비가 내렸다. 일기에 무심한 터라 이번에도 속절없이 비를 맞을 판이었다. 사람들의 가방 위로 삐죽 솟아나온 우산 손잡이를 보고도 준비성이 철저한 그들을 부러워만 했을 뿐이다. 나는 지하철 출입구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어두운 하늘을 비긋이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흑백사진 같은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토요일 오후였고 비가 내렸다. 나처럼 우산이 없는 녀석들만이 하릴없이 복도를 서성이며 비그이를 했다. 그마저도 하나 둘 떠나버리자 비구름 때문에 어둑한 그곳에는 나 홀로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빗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내가 사는 마을은 학교에서 가장 먼 곳이었고 어른 걸음으로도 족히 한 시간은 걸렸다. 학교를 떠나려 할 때 저 멀리 물안개와 빗줄기를 헤치고 낯익은 실루엣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였다. 흙탕물이 튀어 더럽혀진 치맛자락이 당신의 알종아리를 척척 휘감는 탓에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꼴에 사내랍시고 호기를 부린 나는 어머니를 먼저 돌려세운 뒤 좀더 머물다가 돌아갔다. 마을 어귀에 이르자 이미 빗물이 내를 이루어 길에 고랑을 만들며 흐르고 있었다. 그 질퍽한 황톳길에서 발자국을 보았다. 빗물이 흥건히 괴어 있는 낙인처럼 찍힌 발자국들. 그것이 꼭 어머니 당신의 것만 같았다. 그 길을 허덕허덕 돌아갔을, 당신 아들의 손을 붙잡고 돌아가는 작은 즐거움을 기꺼이 포기하고 짓쳐드는 빗줄기를 손으로 가리며 돌아갔을 바로 당신의 발자국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일까.

지하철 입구에 마치 과거에서 튀어나온 듯한 또 다른 어머니가 서 있었다. 계단을 종종걸음으로 내려오던 여고생이 그이의 손에서 우산을 낚아채더니 성큼성큼 비 내리는 세상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이의 어깨는 지쳐보였다. 저 아이도 알겠지. 훗날 왜 이 순간 어머니를 보며 싱긋 웃어주지 않았나를 자책하는 때가 오리라는 걸. 되돌아갈 수 없고 재현할 수 없는 매순간들이 우리의 역사라는 걸.

<2009. 3.24 손홍규|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