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6회
FILA와 인공기
김명인(문학평론가)
자고 나면 세상이 바뀐다.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이 있은 지가 벌써 2년여 전. 그때의 충격과 흥분이 차츰 가라앉으면서 `냉동정권’의 등장 가능성 증대와 함께 `햇볕정책’에도 이제 서녘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 같은 씁쓸한 전망에 서서히 젖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북쪽에서 갑작스럽달 정도로 연일 날아드는 급보가 그 어두운 전망에 빠져들던 우리들의 몸에 밴 비관주의를 뒤흔들어 놓고 있다.
서해교전에 대한 발빠른 유감 표명에서부터 그 징후가 드러나더니 연이어 이산가족 상봉 재개, 경의·동해선 연결공사 급진전, 통일축구대회에 이은 아시아경기대회 참가, 북-일정상회담과 연내 수교 가능성 증대, 신의주 특구 건설 공표 등 북쪽의 과감하고 발빠른 변신과 포석이 남한은 물론이고 국제사회 전체에 놀람과 기대를 안겨주고 있다. 이제 북한의 개혁개방노선은 바야흐로 루비콘강을 건넌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변화는 이라크를 선제공격한 이후 북한을 그 멀지 않은 후속 희생제물로 점찍어 두고 있음에 틀림없는 미국의 전쟁시나리오에 심각한 차질을 일으킨 `쾌거’라는 점에서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지금은 300명이 넘는 젊은 북한선수들이 한반도의 남쪽 항도 부산에서 남한의 젊은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뛰고 땀흘리고 있지 않은가
금방이라도 남북간에 평화가 정착하고 통일이 올 것처럼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그저 몇년마다 왔다가 사그러드는 남북관계의 주기적 상승국면 정도로 치부할 일도 아니다. 대선이 가까이 오면 으레 고개를 드는 전통적인 `북풍’ 같은 것으로 `삐딱하게’ 볼 일은 더더군다나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인다. 북한이 변하고 있다. 이제는 그것을 하나의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시점이다.
하지만 `북한이 변하고 있다’고 말해 놓고 보니 기대와 희망만큼이나 슬그머니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변한다면 어떻게 변할 것인가 아마도 중국식의 개혁개방노선이 그 큰 줄기가 될 터이다. 그것은 곧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화라는 이름의 전지구적 자본주의 작동체계와 교섭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북한 사회가 그 집요하기 짝이 없는 자본의 침투력 앞에서 50여년간 견지해 온 `우리 식’의 체제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을 지 주목된다.
그 정체성이라는 것이 이제 북한 주민들의 삶에 더 이상 아무짝에도 쓸모 없음이 판명된다면 해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해체가 자본주의적 인간관계나 문화에 오염되지 않았던 우리의 `또 다른 반쪽들’이 우리와 똑같은 자본주의적 인간형으로 변모해나가는 것으로 이어지는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북한 선수단의 아시아경기대회 참가와 관련해 `인공기’ 게양과 응원시 사용범위를 놓고 남한 사회에 일정한 긴장기류가 형성되어 왔다. 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인 `인공기’는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만 게양과 사용이 허용되는 `수난’을 겪고 있다. 하지만 남한 하늘에 펄럭이는 인공기 앞에서 감격하거나,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사람들의 숫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선망의 대상이 되거나, 경계와 증오의 대상이 되기에는 지금의 북한체제는 너무나 절박한 위기와 변화에 놓여 있다. 북한에 대한 선망과 증오가 문제거리가 되기에는 세상이 너무 변했고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는 지난번 남북한 통일축구대회 때부터 아시아경기대회에 이르기까지 북한 선수들의 운동복에 큼지막하게 아로새겨진 `필라’(FILA)라는 글씨가 더 자극적이지 않았을까 다국적 스포츠의류자본 `필라’에 자국 선수들의 가슴과 등판 주요부를 팔아넘기고 한켠으로 나앉은 `인공기’의 어딘지 어색하고 초라한 행색에 어쩌면 나처럼 가슴저리지 않았을까
김명인/ 계간 <황해문화> 주간,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02년 09월 30일 수록)
처음 올린 날 2002년 10월 1일(화)
|
이전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