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작가의 눈 제13회
출구가 닫힌 패러디

백지연(문학평론가)

동계올림픽의 쇼트트랙 메달 사건이 불러일으킨 분노와 허탈감이 젊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미제불매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불매운동의 목표는 동일하지만 그것을 주창하는 맥락은 제각기다. 다국적기업이 생산한 물건과 음식이 인간다운 삶을 저해하는 과정을 차분히 설명하는 환경론자들부터 오래 전의 금모으기 운동을 들먹이는 기묘한 애국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흥미롭기까지 하다. 철저히 개체화한 현대사회에서 `우리'를 확인시키려는 이 열망의 몸짓은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을 자극한다.

'우리''가 표방하는 집단적 정체성의 추구는 그것을 억누르는 더 강한 '우리' 앞에서는 단결력을 과시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우리'에는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엄격하게 작동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사회적 욕구와 가치는 놀라울 정도로 동일하고 경쟁적이다. 나이에 따라 일정 수준의 재산과 신분, 규격화한 가족형태를 갖추지 않으면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한다.

특정한 집단이 그의 구성원에게 요구하는 동일화의 논리는 상대적으로 강한 탈주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복거일의 신작인 <목성잠언집>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것 역시 한국 지식인사회의 집단성이 상대적으로 만들어낸 기묘한 자유주의의 모습이다. 한국에서 진보적 지식인이란 `좌파적'임을 의미한다는 복거일의 진술은 그 자신이 명명하는 자유주의의 기원을 보여주는 솔직한 발언이다. 그의 자유주의는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오는 집단적 억압성을 떨치려는 극단적인 자의식을 표명한다.

작품으로 돌아와볼 때 <목성잠언집>이 다루는 정치적 진술은 입장 차이의 문제로 평가될 것은 아니다. `햇살정책'이나 `골드슈타인' 대통령, `통일개니미드' 등의 비유와 명명은 읽는 이에 따라 냉소의 쾌감을 안겨줄 수 있는 설정이다. 목성의 행성인 개니미드가 멸망한 역사를 거꾸로 추적하는 가상미래소설이라는 형식 자체도 작가의 개성을 반영한 것이다. 이 책을 부담없이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술자리에서 나누는 신랄한 정치적 담화의 연장으로 생각하면 된다.

한 작가가 선택하는 정치적 시각이 그 자체로 공격받을 수는 없다. 문제는 이것이 `문학'의 옷을 걸치고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한 예로 소설 속에서 작가가 이분화하는 주류와 비주류, 보수와 진보의 기준은 문학적 패러디의 형식이 얼마나 위험하고 단순한 무기로 쓰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패러디의 본래적 효과는 그것이 대상으로 삼은 담론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통렬한 반성적 사유를 보여주는 데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소설이 차용하는 패러디는 특정한 정치적 시각의 우월성을 주창하는 혐의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소설 속에서 “탐욕과 음모와 분쟁으로 어지러웠던 개니미드의 역사”를 통해 경험과 지혜를 알려주겠노라는 선지자의 음성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권력자의 형상을 닮고 있다. 그 동안 정치적, 문학적 소신의 입지와는 별도로 복거일의 문학적 존재를 인정하는 논자들이 있었다면 지식인 사회가 치열한 자기검열을 거쳐야 한다는 함의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롱과 회의가 그 자신에게로 향하지 않는 자유주의의 행로는 다른 종류의 집단적 정체성으로 쉽게 회귀한다. 스스로에게 칼을 겨눌 각오가 없는 풍자의 세계가 더 이상 문학의 이름으로 옹호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겨레신문 2002년 3월 10일)

처음 올린 날 2002년 3월 22일(금)
백지연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