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잿더미 화요일

2001.09.21 게재
도정일(문학평론가)

9월11일의 뉴욕 참사를 보며 사람들은 말의 무력성(無力性)을 실감한다. 미사일이 된 여객기가 110층 건물을 케익 자르듯 절단하고, 뛰어내리는 것으로 죽음 방법을 선택한 사람들이 가랑잎처럼 흩날리고, 수 백년 버틸 것 같았던 건물들이 거대한 수직의 몸을 허물어 지상으로 침몰한다. 이것이 현실인가? 어떤 동사도, 형용사도, 개연성의 문법도 이 현실을 충분히 기술하지 못한다. 이 믿을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장면들 앞에서 사람들은 에드바르트 뭉크의 그림, 단테의 `인페르노'(<신곡> 지옥편), 히에로니무스 부쉬의 그림 같은 데서 유비(類比)를 얻는 것으로 이 현실의 기괴성을 간신히 머리 속에 수습한다.

테러리즘의 파괴력은 `무차별화' 전술에 있다. 그것은 민과 군, 공격할 것과 말아야 할 것,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사이의 구별을 존중하지 않는다. 이 무차별의 분출과 함께 여객기는 미사일로 둔갑하고 민간 건물은 공격 표적이 된다. 뉴욕 일각을 잿더미로 만든 이번의 테러리즘은 그동안 문명의 규칙으로 여겨져온 구분(區分)체계들을 `전면' 무화(無化)시켰다는 점에서 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의 것이다. 그러므로 무너져 내린 것은 세계무역센타 건물만이 아니다. 문명의 규칙과 문법들이 한꺼번에 무너진 것이다. 질서가 구분의 체계이고 문명이 이 체계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이번 사태를 `문명에 대한 일대 도전'이라 규정하는 데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9·11(이 숫자는 기묘하게도 미국 비상구급전화번호 911과 일치한다) 사건이 그 `이전'과 `이후'를 확연히 갈라놓는 역사의 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어떤 논객의 말도 그 점에서 일리 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그렇게 말하고 세계가 그런 꼴로 치달아도 될까? 지금은희생자들을 위한 애도의 시간이다. 애도의 예절은 반성과 성찰을 잠시 뒤로 미룰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애도는 분노와 다르고 증오와는 더더욱 다르다. 이번 테러는 미국을 향한 어떤 거대한 증오에 뿌리를 둔 것이라는 사실이 아주 중요하다. 그러므로 애도의 시간에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그 이상한 `증오'의 기원과 성격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은 강하다”를 거듭 확인하고 미국은 “이 악을 응징”하고 “승리할 것”이며 문명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지킬 것이라 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분노만이 대통령의 능사는 아니다. 중동과 이슬람권 사람들은 어째서 뉴욕 테러에 환호성을 올리며 박수치고 기뻐하는가? 그들은 모두 미치광이인가? 미국에 가해진 공격을 분노 이외의 다른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왜 그리 많은가? 이들도 모두 응징해야 할 악의 세력인가? 미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이고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이런 증오의 표적이 되어야 하는가? 부시 정부의 책임은 없는가?

9·11 사태 이후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크게 깨쳐야 할 것이 몇 가지는 있어 보인다. 세계의 한 지역이 불만과 증오로 절절 끓어오르고 그 증오를 해소할 방법이 없을 때 평화는 불가능하다. 불평등구조가 심화되는 세계에서도 평화는 가능하지 않다. 경제, 환경, 인종, 성차, 문화에 관한 정책은 평화정책에 연결되어야 한다. 모든 나라가 `자국 이익'과 `자국중심주의'만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도 깨침의 한 항목이어야 한다. 특히 강대국일수록 그러하다. `선과 악'이라는 판단 기준에 따라 `악'을 제거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아메바 수준의 머리에는 옳은 일일지 몰라도 이 복잡성의 세계에 맞는 코드는 아니다. 초강대국이 힘의 논리로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는 사고방식은 박물관에나 보내야 할 오류의 한 표본이다. 극단적 절망과 증오를 길러내는 환경이 그대로 있을 때 테러리즘이 없어지겠는가? 미국은 조만간 응징에 나설 것이 확실해 보이지만 아프가니스탄을 치고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는 것으로 미국이 테러리즘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도 큰 오산이다. 얼굴 없는 제2, 제3의 무수한 빈 라덴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들의 유령은?

([한겨레신문] 2001년 9월 14일자: 사진은 연합)

도정일(문학평론가) --------------
민족문학작가회의 자문위원/ 문학평론가.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평론집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