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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발제] 김승환: 인천 전국민족문학인대회 발제원고
이름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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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전국민족문학인대회 발표원고(2001년 6월 23일 토)

 

 민족문학과 지역문학

People/'/s Literature of Korean and the Regional Culture -21세기문학의 행로(行路)



김승환(충북대 교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충북지회)

 

1.황화론(黃禍論), 초원을 달리는 말

 

초원에 말이 달린다. 황화론(黃禍論)이라는 바람을 몰고 질풍노도의 말 발굽으로 세계라는 초원을 나르듯 달린다. 어 먼지를 맞으면서 사이드는 말했다. 서양사람들이 동양을 인식하는 방식은 신비함과 이국적인 정조(情調)라고--. 그리고 그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동양을 문화적으로 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하나의 모습을 갖는 언설(discourse)/'/1)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다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고 그가 동양 출신의 서양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가 중동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으며 우리가 제국주의라고 때때로 부르는 미국의 심장부에서 문화이론을 생산하고 있는 저명한 학자라는 사실에 경탄할 뿐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이지만 서양인들은 동양인에 대해서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즉시, 인종주의적 편견이라고 비판받을 것이지만 나는 반드시 그렇게 말해야겠다. 이것은 가치를 판단하는 수사법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진술이므로 부끄럽거나 두렵지 않다. 비엔나를 포위하고 몇 달씩이나 기독교 국가의 심장을 공략했던 이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타타르나 훈족 그리고 몽골족의 유럽 대정벌로 인하여 서양인들은 동양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야만적 멸시를 신화처럼 기억하고 있다. 서양인들은 결코 표면에서 이런 말을 내뱉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의 흔적과 문화의 기억 속에서 은밀하게 작동하는 이 어두운 기억을 우리는 황화론(黃禍論)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동양인의 서양사람에 대한 편견에도 잘못이 있기는 마찬가지이고 서양을 하나의 범주로 설정한 것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뜻에서의 동양과 서양을 거칠게 이야기한 것이니 그렇게 이해되었으면 한다.

나는 이 문제, 동서양의 문제를 공간적으로 좀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표현하는 지형의 공간개념으로 지역을 이해해야 한다는 역설(逆說)을 차용하고 싶은 것이다. 한 지역 내의 여러 사회역사적 요인까지 세분화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바람직한 방식이 아니다. 우선 지역이라는 공간성으로 지역을 이해한 다음 지역의 지역적 특질을 분석해 나가는 방식도 때때로 유효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구의 가장 큰 지역은 서양과 동양이라는 초거대 담론이 등장한다. 양파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 보자. 여기서 다시 동아시아라는 담론이 생기고 한국과 일본이라는 지역문제가 생긴다. 한국 안에서는 다시 북한과 남한이라는 지역이 생기고 남한 안에서는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지역 개념이 생긴다. 그러니까 지역 개념은 결국 역사적 개념이며 사상의 체계이며 생존의 현실인 것이다. 자 그러면, 세계와 민족과 지역이라는 삶의 세 범주 속에서 우리는 지역문학의 현단계를 살펴보고 미래를 전망해 보기로 하자.

 

2.민족문학의 현단계로서의 지역문학론

 

흔히 지역문학이라고 하면 특정한 지역의 문학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어떤 지역의 문학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 지역이 생산했거나 지니고 있는 문학의 총량(總量)을 지역문학이라고 한다. 어딘지 어색하다. 그렇다면 이 평범한 규정은 잘못인가. 아니다, 여기까지는 맞다. 그런데 어떤 지역 또는 특정한 지역이라고 할 때 /'/어떤/'/에 해당하는 공간은 이 지구상의 모든 영역을 지시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 이야기의 속도를 좀 빠르게 해 보자. 대다수의 작가나 이론가들은 지역문학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믿고 있으며 지역문학을 문학의 중심이 아닌 변방의 문학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스스로 답을 해 보자. 아니라면 다행이고 그렇다면 불행하다. 이 경우 두 부류의 작가들이 존재한다. 자신은 문학의 중심에 서 있으며 그런 특수한 인식은 필요없다는 작가와 자신은 완전히 문학의 변방에 놓여 있다고 간주하면서 열등의식과 울분에 가득한 작가들이다. 지역을 공간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이러한 현상은 언제나 반복된다.

나는 지역의 공간적 인식을 넘어서는 역사적 사상적 인식을 위하여 민족문학론을 돌이켜 보아야 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는 이미 /'/민족문학/'/이라는 담론의 권위가 어떠하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즉, 오늘날 민족문학이 권위를 넘어서서 권력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부정한다면 우리의 정직한 인식은 작동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그 누가 부정하더라도 2001년의 남한에서 민족문학은 거대한 권력으로 존재한다. 역사적 의의를 상실한 민족문학이라는 신화의 깃대는 갯벌에서만 휘날리고 있다. 과거 7,80년대 민족문학이 가졌던 정의와 진실의 끝이 이제는 그런 배타적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자. 민족문학 진영의 작가들이 역사의 정의에 기여한 자랑스런 자부심에 머물러 버린다면 그것은 지난날 민족문학운동이 지향했던 목표를 정면에서 배반하는 것이다. 왜냐. 민족문학이라는 거룩한 이름 속에는 인간적 진실과 평등한 사회와 정의의 역사라는 절대적인 목표가 녹아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서구적 근대의 산물인 민족주의와 동양적 특수한 역사 속에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한국식 민족주의는 남한에서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외세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민족주의와 자기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민족주의는 문학의 가장 중요한 동력(動力)이었으며 그래서 민족문학은 시대적 의미를 획득했던 것이다. 반외세 자주화, 반봉건 민주화, 반독점 민중성 등은 민족문학의 정수(精髓)였다. 그리고 /'/매판 외세 자본 식민 파시즘 독재와 같은 비인간적인 야만성에 대항하는 의식으로서의 민족 패러다임이 있었기 때문에 진보 진영의 민족문화는 무조건적인 정당성을 확보/'/2)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90년 전후를 기점으로 그러한 민족문학의 진실성과 역사적 의의가 마치 소멸되어야 하는 것처럼 인식하는 백치(白痴)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남한 사회에서 그런 긴장과 거대서사는 없고 문학적 다양성(diversity)이 중요하므로 다원적인 여러 문학의 형태에 몰입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

우리는 그들을 포스트모더니즘 신봉자라고 말한다. 이런 과격한 비판을 하는 나는 걱정이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자신이 포스트모더니즘 신봉자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세계적 규모의 자본에 고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서 다양한 매체와 다양한 감정으로 실로 놀랄 만한 예술작품을 생산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훌륭한 점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자신이 세계국가체제에 복무(服務)하고 있으면서 보편적인 문화예술을 추구하고 있다는 이 이율배반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예술성과 보편성은 자본의 인간에 대한 지배방식일 뿐인데 다만 그것이 예술과 감정으로 드러나고 있어서 마치 초시간적인 예술적 진실이 어디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들의 눈에 오늘날의 세계는 유토피아를 향해 항진(航進)하는 거대한 유람선으로 비쳤고, 문학은 다양한 삶의 흔적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담아내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에게 탈식민의 전사(戰士)였던 파농을 읽히자. 파농은 /'/식민모국에 대한 열등 컴플렉스를 문화적 모방으로 상쇄하려 한다는 현상을 굴종/'/3)이라고 정의했다. 세계체제의 음모와 분단체제의 현실을 단 하루만이라도 생각해 본 작가라면 그러한 허상을 쫓을 수는 없을 것. 비굴한 복종을 택하면서 백치 예술가로 살 것인가, 진실을 이해하면서 당당하게 살 것인가. 민족문학 진영에도 지난날의 이러한 치열함은 흔적도 없이 내다버리고 달관(達觀)한 듯한 표정으로 문단을 어슬렁거리는 작가들이 있고, 이제 더 이상 긴장을 유지하지 않아도 좋다는 회상에 젖어서 사는 시인들이 있다. 이런 예술가들은 지난날의 치열한 긴장을 멋적어하면서 리얼리즘에 대한 배반을 서슴지 않고, 자신의 순수한 예술성을 과장되게 드러내고 또 표현한다. 그리고 말한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그러면서 다양한 수많은 예술적 방식과 매체의 변화에 작가들이 따라가야 한다고 선포해 버린다.

긴장의 이완은 감정의 해체를 선사했다.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민족문학은 배타성을 띠게 되고 의도하지 않았던 권력으로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난날의 민족문학이 정의와 진실을 추구했던 것이지 분할과 권력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여기서 민족문학 진영이 문학권력을 쟁취했다거나 그 문학적 정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민족문학의 진실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해묵은 자기성찰이다. 게다가 문학권력이라는 아주 꺼림직하고 또 분기탱천할 금기의 어휘를 건드리고자 하는 것도 아니니까 더욱 더 오해하지 마시라. 진정으로 민족문학의 진실을 완성하고자 한다면 민족문학인 스스로 민족문학을 해체시켜야 한다. 무엇보다도 민족문학이 배타적으로 존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매우 중요해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거시적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초거대서사로 민족문학과 우리의 주제인 지역문학을 조망해 보자. 자본의 모든 것에 대한 지배는 자본의 절대화라는 방식으로 인류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것을 우리는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그러니까 신자유주의는 금융독점자본의 전세계 제패(制覇)라는 미증유의 상황을 만들고야 말았다. 이처럼 제1세계 중심의 패권주의와 세계체제라는 새로운 인류사의 상황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본국인 미국은 정확히 말해서 국가라고 할 수 없다. 국가이면서 세계인 미국을 작가들은 때때론 적으로 간주하고 목숨걸고 항거하자고 말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쯤은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명민한 학자가 탈식민의 이론으로 제국주의를 비판했지만 결국 미국과 신자유주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현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락방에 갇힌 갑갑함을 느낀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대체---. 말은 반세계화를 외치면서 몸은 신자유주의 체제로 휩쓸려 가고 있음을 모른다면 그는 인천 역전의 관식이다. 남한의 작가들은 백치 관식이가 아니다. 적어도 그런 정도는 꿰뚫고 있어야 작가일 테니까 말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개인은 민족국가와 같은 고전적인 가치만을 가지고 살 수 없다. 민족과 국가는 근대의 산물이거니와 민족국가 또는 국민국가가 한 개인들의 삶을 지배했다. 반대로 개인들은 민족과 국가로부터 정체성을 부여받고 삶의 유일한 터전으로 간주했는데 갑자기 그런 방식은 이제 낡은 것이라고 신자유주의(new-liberalism)는 협박을 가하고 있다. 그 신자유주의는 세계화라는 현실적인 방식으로 근대적 생존방식을 압박해 들어왔다.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하나의 제도, 하나의 언어, 하나의 원리가 인류사에 필연적이라는 제법 그럴싸한 이론까지 제출해 두었다. 이제 인류는 세계가 하나의 제도로 묶여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우리는 반대한다. 각 민족에는 민족만의 삶의 방식이 있고 역사적 경험으로 축적된 감정과 사상이 있기 때문에 획일적인 세계체제 역시 반대한다. 이에 대해서는 세계체제를 제시한 왈러슈타인 역시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반대하며 무슨 대안으로 신자유주의의 폭력에 대항할 것인가이다. 지금까지 한국인들은 민족적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민족과 국가라는 신성불가침의 가치가 한국인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음은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여기 두 문제가 잠재하고 있다. 하나는 한국이 아직도 근대적 개념에서의 국민국가(nation state)를 이룩하지 못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민족과 국가라는 가치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압력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국민국가를 이루는 것은 민주주의 시민사회를 만드는 것을 넘어서서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통일된 민족국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어려운 과제만 하더라도 한국인에게 벅차다. 그런데 어느덧 제1세계는 신자유주의 세계체제라는 힘의 논리를 세계사의 현장에서 관철시켜 나가고 있다. 자, 이 거대한 원리 속에서 한 국가는 초국적 자본과 신자유주의의 중간관리인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 명확해 졌다. 물론 적당하게 민족적 감정과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긴 하겠지만 실제로 한 국가를 움직이는 것은 그 국가 자체가 아니라 초국적 자본이며 초공간적 정보체계이며 그 원리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이다. 이 때 민족과 개인의 생존관계는 이완되고 상당한 틈이 벌어지며 개인의 가치관에 혼란이 생긴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가 불분명해진 것이다. 오로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자본과 정보의 가치라는 데 이르러 아연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나는 민족문학의 위기가 여기 있다고 판단한다. 민족적 가치와 민중적 진실을 담보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상황은 필연적으로 위기를 불러온다. 그래서 1990년대 들어서 민족문학이 다소 공허하게 된 것은 민족문학 진영의 작가나 이론가들 때문이 아니라 세계사적 원리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반적인 진단처럼 남한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경제적 불균등이 다소 해소되었기 때문에 민족·민주·민중과 같은 가치가 소멸되면서 민족문학이 약화되었다고 진단하는 것도 맞다. 그러나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런 요인보다 더 중요하게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역사의 태풍(颱風)이 민족국가를 뒤흔들고 있기 때문에 민족문학의 정체성이 불확실하게 되어 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민족적 가치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민족을 위한 그 무슨 사상과 감정이 힘을 발휘할 것인가? 이 때 민족문학의 약화는 필연적이다. 민족문화의 전설을 기억하고 있는 작가들은 통일문제나 비인간성에 대한 분노로써 내적 긴장(緊張)을 유지하려 하지만, 현저한 긴장의 이완은 피할 수 없다. 지난날 한국이 걸어온 탈식민의 과정에서 비서구적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담론일 수 있다고 해서 그 가치를 부여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제3세계라고 하기가 어렵게 되어 버린 남한에서 민족적 가치만을 주장한다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곤란한 물음이다. 그래서 이제는 민족적 특수성보다 문학적 보편성이 중요하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요즈음 작품이 이른바 포스트모던한 기법과 해체적인 여러 요소가 문학의 우세종이 되어 버린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 지역문학이 있다. 그러니까 지역문학은 다른 하위 양식 즉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시하는 해체의 세례를 받고 생긴 양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다른 개념들과 비교해 볼 때 지역문학이 생겨난 태생의 과정이 다르고 지역문학이 전망하는 목표나 원리가 다르고 지역문학이 존재해야 하는 근거가 다르다. 단순하게 말해 보자. 지역문학은 민족문학의 원리를 승계하면서 약화되고 있는 민족문학에 맑은 피를 수혈(輸血)하는 혁명의 화살일 수 있다. 삶의 양식을 바꿔 버리려는 세계사적 음모(陰謀)를 민족국가만으로 항거하기 어렵듯이, 민족문학만으로 21세기의 세계사적 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아니 문학적 진실을 표현할 수 없다. 이런 시대에 민족문학만을 고수하면 할수록 마치 지난 시대의 배상(賠償)을 받으려는 응석받이라는 비판이 돌아온다. 민족문학의 자기성찰과 반성은 그 자체와 내면에서도 이루어져야 하지만 시대적인 상황에 대응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지역문학이라고 나는 믿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지역문학은 지역의 문학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현단계적 상황이 지시한 하나의 양태(樣態)이면서 민족문학이 전망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때문에 지역문학은 서울과 지방이라는 이분법과는 별 관계가 없다. 지역문학은 서울이 아닌 다른 지방의 문학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의 정도가 지나치다. 어떤 이들은 지역문학이라고 하면 지방의 열등의식을 해원(解寃)하기 위해서 고안된 감정적 개념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지역문학은 서울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 틀렸다. 지역문학은 공간적 개념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역사적 개념이다. 그리고 정신사적 개념이기까지 하다. 서울을 예로 들어서 말하면 작가들이 서울을 하나의 지역으로 인식하면서 서울의 본질을 언어예술에서 담아내는 것이 서울의 지역문학이다. 곧 지역문학은 민족모순과 분단모순과 지난날의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는 사명의 과정에서 다다른 개념이다. 바로 이 지역이라는 이름 속에 담긴 역사적 폐해가 서울이 아닌 공간에서 더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문학적 불평등을 해소(解消)하려는 의지로써의 지역문학운동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역문학은 민족문학의 공간적 개념이라는 본질적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된다.

민족문학과 지역문학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작품과 연관지어 논의한다면 도종환 시인의 가작 「고두미 마을에서」를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한다. 의아하신가? 그렇다면 잠시 작품을 보기로 하자.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이 내린다.

오동나무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오던

한줌의 유골 같은 푸스스한 눈발이

동력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

꽃뫼마을 고령 신씨도 이제는 아니 오고

금초하던 사당지기 귀래리 나뭇군

고무신 자국 한 줄 눈발에 지워진다.4)

 

민족의 스승이신 단재 신채호 선생님을 추모하는 이 시는 비장함과 서정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훌륭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이 땅/'/은 민족적 삶의 공간이다. 청주 귀래리의 고두미라는 지역공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민족적 의지가 실현되는 것은 삶의 현장인 공간을 시적 자아가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당연히 시로써 표현된 민족문학일진대, 여기서 우리는 지역문학의 개념을 유추할 수는 없지만 거꾸로 민족문학이 어떻게 존재했던가를 짚어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민족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한다>라는 명제를 제출해 보겠다. 민족을 위한 진실과 정의를 언어예술로 표현할 때 그 표현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 지역문학으로 인식되지는 않지만 그 잠재의식 속에 이미 지역문학은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이 때의 지역은 현장이다. 민족문학이 목표로 했던 가치들을 실천하는 현장성을 담보하는 공간이 바로 지역인 것이다. 어찌 민족문학과 지역문학은 별개일 수 있겠는가! 시로써 표현되는 민족적이고 지역적인 진실은 청주의 경우, 단재를 통한 민족문학운동의 전개라는 특수한 형태로 충북지역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 문예운동사의 과정에서 「고두미 마을에서」라는 시는 하나의 상징이며 기호인데 도종환 시인은 그 상징을 앞세워서 지역에서 문학적 실천을 하면서 민족문학이 목표한 진실을 추구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3.지역문학의 현실과 작가의 문학적 실천

 

지역문학은 빈사(瀕死)의 지경에 놓여 있다. 지역이 빈사의 지경에 놓여 있는 것과 유사하게 지역문학이나 지역예술 역시 사경을 헤매고 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작가나 이론가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어느덧 민족문학진영조차 역사사회적인 긴장을 상실해 버리고 /'/문학/'/이라는 절대적인 범주만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여기서 나는 지역의 문제가 민족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해 두고 싶다. 다시 또 강조하거니와 이 때의 지역은 권력의 중심인 서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서울 역시 하나의 지역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물론 물리적으로 이해하자면 서울은 중심권력이 관철되는 공간적 터전을 제공하고 있다. 서울의 중심과 다른 지방의 주변이라는 명확한 이분법에서 이해하자면 서울은 지역인 동시에 중심이라는 묘한 위치에 놓여 있다. 그러나 서울의 서울적인 특징은 반드시 지역문학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서울다운 삶의 진실을 담아내는 작품이 얼마나 되는가를 짚어 보자. 거의 없다. 지역문학의 빈사지경이란 바로 이 점을 말한다. 권력적이면서 반권력적인, 중앙이면서 지역인 서울이야말로 지역모순을 가장 심각하게 안고 있는 이율배반의 공간이다. 바로 이 점을 정확하게 인식할 때만이 지역문학이 올바로 보일 것이다.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모든 지역의 반식민지적 현실이다. 오늘날 지역의 이중적 반식민지 상태는 지역인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제1세계의 정치 경제적 압제를 받으면서 동시에 중심권력인 중앙으로부터의 압제는 결코 소홀히 대할 문제가 아니다. 이제 중심은 그러한 압제와 피지배는 없고, 오로지 문학과 진실만이 있다고 말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전파하는 소리와 상동성이 있어 보인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말한다. 세상은 공평한 것이며 누구든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전세계 모든 인간은 제각각 인권을 가지고 있고 세계의 보편적 틀과 삶의 방식을 따라가면 인류는 위대한 미래를 이룩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럴까? 지역문제도 마찬가지다. 이제 문학권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은 남한 문학의 경우 그러한 불평등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현재 자본의 문학에 대한 지배를 효율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지역문학이 민족문학의 든든한 반석이면서 유기체적 구성의 실체라면 민족문학의 가치와 지역문학의 가치가 일치해야 한다. 그런데 민족의 가치나 이해와 지역의 가치나 이해가 상충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자 만약 다음과 같은 시를 읽는다면 무슨 느낌을 받을 것인가?

 

두린 아기덜아

오망삭삭헌 나 새끼덜아

갇건 들어나 보라

무자년 섣달이라났주

조반상 받아아장 숟가락 들르멍 말멍

몰아진 밭담 메우젠 집 나산 보난

아이고 돌아오도 못헐 질 나사져서라

무신 죄로 죽어졈신디도 몰르고

무사 죽염쑤겐 들어보도 못허고

하도 칭원허고 하도 서러완

울어지지도 안 허여라

몸착은 어드레사 가신디 문드려불고

그자 비 오민 구름질에

바람 불민 바람질에 의지허멍 살암시녜

죽엉도 눈감지 못허연 영 살암시네5)

(김수열의 시 「이승 저승」의 전반부)



우선 낯선 느낌을 받을 것이다. 새겨 읽어야 뜻을 알 수 있다. 제주의 어법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결국 독자를 제한하는 것이어서 글 쓰는 사람들에게 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당연히 제주도라는 지역의 어법은 지역의 생존사를 반영하고 있다. 강력한 문학의 중앙집권이 지시하는 언어적 통일은 그러나 현명한 것만은 아니다. 생존의 깊은 역사를 배반하고 언어의 중앙집권에 항복해 버리는 것은 지역성을 포기하는 것이라서 시인에게 고통을 선사한다. 문제는 이러한 언어적 편차가 아니다. 제주도라는 한 지역의 본질이 언어로 드러나는 형식이 문제다. 보다시피 시적 자아의 서러움과 애절한 체념은 제주의 지역적 정서라는 본질을 함의(含意)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가장 민족적인 동시에 가장 지역적이다. 반면 민족적 가치와 공동체의식만으로 담아둘 수 없는 지역적 특수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무자년(1948년)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우리는 흔히 <4·3 제주 민중항쟁>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데올로기가 지시한 야만의 살육으로 가장 비인간적인 만행이었음은 우리 모두 아는 바와 같다. 그러나 무자비한 힘에 의한 민중의 죽음이라는 이 단순한 주제는 그러나 파시즘 대 반파시즘이라는 식의 간단한 규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 시는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자행한 만행이므로 그 폭력성과 야만성을 문학의 이름으로 증거하면서 언어예술로 그 깊은 슬픔을 표현한다는 고상한 지경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제주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지역에 대한 권력의 폭력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본능이다. 역사의 경험이 기억하고 있는 오랜 관성(慣性)에 따라서 식민의 제주와 지배의 육지라는 아주 특별한 집단무의식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의 화자가 반공독재의 야만성만을 비판하는 민중성의 화신(化身)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순진한 해석이다. 피압박 제주인들의 분노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가 지시하는 내면의 기의(記義)는 제주라는 지역적 공동체 의식이다. 그렇더냐고 시인에게 묻지는 마시라. 시인은 집단무의식을 거칠게 드러내는 수준을 넘어서서 시로써 존재하는 것이니까--. 우리는 <섬에서 나고/섬에서 자란 사람들은/바람이 말하지 않아도/섬에서 사는 법을 안다>(김수열의 「섬 사람들은」 중에서)라고 은밀한 진실을 읽는다. 여기서 섬사람이라는 특별한 지역적 의식은 단지 표현을 넘어서서 절박한 생존의 문제를 담보하고 있는 것이어서 진실할 수 있는 것. 내가 이 시를 인용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민족문학의 가치와 지역문학의 가치가 꼭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지역문학이 민족문학의 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때때로 아니 상당히, 그 가치와 지향과 전망이 다를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도 덧붙인다.

 

4.탈식민·탈근대·반자본으로서의 지역문학

 

지역문학은 근대의 산물일 수 있지만, 아니 근대와 별개로 논의할 수 없지만 근대의 패러다임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말을 고쳐 보자. 근대문학으로서의 지역문학이 아니라 탈근대문학·탈식민문학으로서의 지역문학이어야 한다. 근대의 연장선상에서 아무리 지역문학의 이론을 세우고 분석하더라도 지역문학의 본질에 다가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남한의 지역이 걸어온 오욕(汚辱)과 고난(苦難)이 역사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아주 당연한 것이라고 믿는다.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보는 지역문학은 백화점에 진열된 박제(剝製)된 문학일 뿐이다. 초국적 독점자본의 힘이 문화예술에서 드러나는 포스트모던한 제반 경향들과 지역문학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문제는 /'/광포해진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포스트모더니즘/'/6)으로서의 근대문학인가, 그 자본의 논리에 저항하고 인간주의를 찾는 탈식민의 근대문학인가로 압축된다. 물론 대서사담론(grand narrative)을 해체하고 미시적이며 세부적이고 또 다양한 제반 현상에 대해서 주목을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지역문학은 그러한 대서사담론의 해체로서 얻어진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이 시대의 대서사담론을 추동하는 정신으로서의 문학이다. 부족하지만 이로써 세계적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대항문학으로서의 지역문학이 왜 필요한가는 부족한대로 설명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세계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민족문학을 의지를 지역문학에서 실천한다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지역의 진실은 지역의 고통에 정비례한다.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과 경험이 아름답고 진실한 언어예술로 표현될 때 비로소 지역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지역이 어떻게 세계사에 지배당했던가라든가 문화적 우세종(cultural dominant)들에게 영향을 받았던가만을 평면적으로 이해하는 지역문학은 연구자에게는 필요한지 몰라도 지역문학인들에게는 필요없다. 그러므로 나는 반자본·탈식민·탈근대의 역설적인 자리에서 지역문학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지역문학을 근대문학의 연장선장에서 논의하면 할수록 의미는 퇴색된다. 이제 민족문학이 지향했던 목표가 부족하지만 그런대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그런 거대담론이 아닌 소수담론으로 관심의 축을 이동시켜 보자는 것이 아니다. 이건 이래서다. 지방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것을 대입해서 지방문학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하자. 지방이라는 용어는 봉건적이며 중심과 주변을 이분화하는 비민주적 개념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지역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여하간 중앙의 권력과 지방의 복종이라는 이상한 권력관계에서 지방은 언제나 수탈 당하고 또 배제당했다. 민족적 삶의 결정력에서 지방사람들은 소외당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지방 대신 지역이라는 객관적 어휘를 쓰기 시작했다.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지역문학이라는 것은 반봉건 반독재 반식민의 투쟁으로 얻은 역사적 어휘다. 그래서 지방이라는 정형화된 개념이 있음에도 우리는 지역이라는 공간적 개념을 쓰면서 삶의 공간에 가치중립성을 부여해서 문학적 평등을 어휘에서 실현시켰던 것이다.

지역문학은 민족문학의 한 부분이다. 내용적으로 그럴 뿐만 아니라 장르의 형식으로도 그렇다. 이제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식의 포괄적 개념으로 문학예술을 규정하기 어려워져 버렸다. 그래서 나는 "가장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다소 낯선 정의를 제출해 둔 바 있다. 더 정확하게는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민족적인 것이며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지역적인 특수성이 세계적인 보편성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나는 앞서 에드워드 사이드를 등장시킨 바 있다. 그 사이드가 말했다 - 서양인들은 동양을 신비하고 이국적인 그 무엇으로 인식한다고 말이다. 지역문학이나 민족문학도 마찬가지다. 세계문학사가 어떤 지역의 문학을 이국적인 신비취향으로 간주하고서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인가 그렇지 않은가. 언어를 매체로 하는 한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역사적 경험과 깊은 삶의 감정을 다른 언어 사용자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문학은 다른 장르보다 이데올로기적이고 또 역사적이다. 그러니까 세계문학사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민족문학이나 지역문학을 특수한 문학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럴 때 한국의 민족문학은 백화점에 진열된 신비한 이국정취 정도로 상품화되어 버리고 만다.

다시 사이드로 돌아가 보자. 그가 문화의 제국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더라도 결국 제국주의적 논리에 기대고 있다는 혐의를 벗기는 어렵다. 제1세계의 심장부에서 제1세계가 제공하는 갖가지 특권을 누리면서 제3세계의 식민성을 분석한다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 의미가 있을까에 대해서는 역사가 말을 할 것이니 우리 답은 유보하자. 다만 진정으로 세계체제를 거부하지 않는 논리나 감정은 결국 적절한 타협과 굴종이 될 것이라는 점만을 적어 두기로 한다. 지역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삶을 지역에서 실현시키고 삶의 흔적을 언어예술로 남기겠다는 진정성이 문학성을 담보하고 있다. 목숨을 건 내기가 아니라 유희적 내기라면 그것은 우습다. 예를 들어보자. 제주도에 가면 다랑쉬라는 오름이 있다. 큰 다랑쉬도 그렇고 작은 다랑쉬도 아름답고 신비로워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자연이란 이름의 예술이다. 그런데 이 다랑쉬의 역사를 알고, 다랑쉬에 얽힌 부당한 설움을 이해하며, 압제와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제주지역의 작가가 다랑쉬를 소재로 해서 작품을 쓰는 것은 필경 남다를 것이다. 반면 삶의 공간으로 다랑쉬의 역사를 공유하지 못한 작가가 다랑쉬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아서 다랑쉬를 표현했다면 그 역시 문학성에 따라서 훌륭한 작품이 될 수도 있다. 뒤의 것을 우리는 지역문학이라고 하지 않는다. 지역문학은 지역의 진실과 지역의 역사를 자기화시켜서 이해하면서 작품으로 드러낸 결과를 말한다. 이렇게 되면 지역문학은 지역에 자신의 생존을 내기로 걸어둔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저절로 정의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이드가 아닌 자파티스타의 의미에 다가서게 되며 그것은 남한의 작가가 세계혁명이라는 거대한 주제에 머리를 마주 대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탁(神卓)의 소리를 듣는다.

우리 작가들은 예술가로서 뛰어난 언어예술을 생산하는 본질적인 역할 외에 무슨 의무가 있는가? 문학적으로나 대중적으로 명망이 있는 그런 작가만을 꿈꾸는가? 아닐 것이다. 우리 작가는 끝나지 않은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열화의 뜨거운 자갈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는 공간에 대한 목숨을 건 인정투쟁(認定鬪爭)은 그러므로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민족문학의 자기정체성 확립을 위한 눈물어린 인정투쟁은 어제도 오늘도 치열해야 하는 법. 그것은 민족문학과 한국문학(korean literature)의 존재이유를 설명해 주는 열쇠이다. 여기서 작가들은 세계의 문학(literature in the world)이 아닌 세계문학(world literature)이라는 미증유의 제도체가 생기고 있다는 초거시적인 문학환경을 직시(直視)할 필요가 있다. 대타개념이 없으므로 세계문학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으나 민족적 감정을 넘어서는 범세계적 감정의 보편적 표현으로서의 세계문학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강요하는 것이 신자유주의다. 이에 대해 왈러슈타인은 /'/각 민족적 특수성 때문에 세계문화가 성립하기 어렵다고 말했는데/'/7) 나는 그가 학자적 양심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세계문화가 성립되어 가고 있음을 학문적으로 밝혀 주었다고 믿는다. 그의 말처럼 문화는 언제나 강자의 논리였다. 세계체제에서 강자는 정치·경제·정보를 장악한 복합적인 그 무엇(국가나 정치체제가 아닐 수도 있는)일 것이고 그 강자는 문화를 종속화시키면서 자신의 논리를 관철시킬 것이다. 문화의 가치에 대한 보편적 규준이 없다는 순진한 생각과는 달리 이 광속도(speed of velocity)의 신자유주의가 세계문화와 세계문학을 성립시키고자 진군(進軍)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는 말자. 감정이 현실을 지배할 수는 없으니까--.

이 때 문학의 매체인 언어의 미래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한다. 이 세계체제는 세계공용어라는 곤란한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 세계공용어의 문제는 작가들에게 심각한 미래를 제공하고 있으니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시계의 시간을 돌려서, 오백 년쯤 후에, 한국에 사는 후배 문인들이 이 시대에 생산한 문학작품8)을 지금 우리가 용비어천가 보듯이 한다면(비유가 좀 비약적이지만) 오늘의 우리 작가들은 얼마나 불행한가? 오백 년의 시간차를 두고 한 작품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작가만의 불행이 아니라 역사와 시대의 불행이다. 그러니 우리는 민족어를 고수해야 하고 살려야만 할 것이다. 이 말은 감정적이다. 감정적 민족주의의 오류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런 감정의 문제와 의지의 상황이 과연 현실이 강제하는 압력을 이길 수 있을까. 문제는 간단치 않다. 세계공용어가 생긴다면 그것이 영어가 될지, 중국어가 될지 또는 다른 어떤 언어가 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사람의 수로 힘을 표시하는 원시적 방법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위험을 강조하는 경고는 이제 너무나 익숙하다. 그래서 서양의 제1세계는 동양을 순치(馴致)하고 보편적인 제도와 법으로 세계체제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의 깊은 내면에는 황화론, 즉 동양에 대한 두려움과 멸시가 한꺼번에 작동하는 이상한 인식체계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까 서양인의 동양인에 대한 특별한 태도는 인종적인 문제와 더불어 역사적인 기억의 문제다. 단지 인종적인 문제라면 생물학적인 존재론으로 그 시각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종적이고 생물학적인 문제와 함께 역사적인 문제이면서 내면화한 기억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중층성이 깊고 또 짙다. /'/황인종(黃人種)이라는 이 어휘 속에는 결코 단순하고 만만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위기의식이 숨어 있음을 우리는 이제 숨길 필요가 없다. 저 옛날 몽고족이 말을 달려서 유럽을 초토화시켰듯이 이제 황인종은 역사의 들판을 달려서 자기들이 믿는 인류사를 초토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는 아주 깊숙이 은폐되어 있지만 숨겨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서양인들은 그 기억을 잠재우고 동양인을 순치시키면서 세계를 단 하나의 언어체제로 개편해 나가고 있다. 세계공용어와 민족어의 이원체제가 도래한다면 작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민족어의 고수와 민족문학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임무는 끝나는가? 아니다. 아직 우리 답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 민족문학이 한국문학으로 존재하는 이 세계체제의 본질을 우리는 탈식민과 탈근대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세계체제에서 민족문학은 단지 한국문학으로 존재할 뿐이다. 한 지역의 문학으로 세계문학의 구성 단위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미국의 학자들이 지역학이라는 이름 아래 전세계를 자기의 연구영역으로 삼으면서 결과적으로 제1세계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체제를 만들어 나가는 것과 같다. 21세기의 민족문학이 과연 이러한 세계문학에 저항할 것인가, 아니면 하위 영역에 머물면서 예술적 보편성만으로 존재할 것인가는 난감한 주제다. 언어라는 매체를 사용하는 것이 문학이고 필연적으로 한국어라는 언어로 표현되는 문학은 역사성과 이데올로기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운명은 피하지 말자. 세계문학과 민족문학과 지역문학이라는 이 세 화두는 이제 우리의 존재를 뒤흔드는 21세기의 화두이다.

 

5.지역문학의 전망 - perspective of regional literature

 

지역문학의 전망은 무엇인가. 지역문학의 독립을 선언하고 중앙문학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하자는 것인가. 아니다. 지역문학은 독자적으로만 존재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지역문학은 /'/중심이라고 착각하는 문화(문학) 권력이 스스로를 해체하고 문화의 지역적 평등을 실현하는 인간적 목표의 전망을 가질 때/'/9) 비로소 존재의의를 확보한다. 한마디로 모든 삶의 터전을 지역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것이 작품 속에서 형상화되는 것이 지역문학의 의의다. 여기에는 물론 언어와 그 언어사용자인 민족이 절대적인 조건으로 놓여 있다. 그러므로 민족문학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는 엄숙한 운명적 한계를 우리는 언어적 동질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민족사가 걸어온 생존의 공동 경험이라고 덧붙인다. 지역의 감정이 아닌 지역의 경험이 지역문학의 의미를 지시해 주고 있거니와 역사적 존재와 생물학적 존재가 규정한 운명적 한계 속에서 우리는 민족문학과 지역문학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난처한 지경에 놓여 있다. 운명공동체의 위기는 세계사적 변화에서 온다. 국가라는 제도를 무력화시키고 세계의 모든 개인들을 장악한 것은 자본과 정보인데 이 자본과 정보가 지배하는 제도를 우리는 세계체제라고 한다. 그리고 그 세계체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를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한편 초국적 자본과 초시공간적 정보는 국가를 중간관리자로 고용해 버렸다. 이 역사의 틈새 속에서 한국은 근대적 개념의 국민국가(nation state)를 이룩하면서 동시에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때 민족적 가치는 무엇보다도 우위에 놓여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두 과제를 달성할 수가 없다. 여전히 국가와 민족을 최고의 가치로 둘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국가의 반영태(反影態)인 민족문학을 강력하게 고수할 것인가 하는 다소 곤란한 문제가 대두한다. 나는 어느 시기까지는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민족문학을 실천하는 방식은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싫든 좋든, 우리는 반대를 분명히 했지만 세계체제는 피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니까--. 이것을 부정한다면 이야기는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니 일단은 그렇다고 치자. 세계적 규모의 독점자본에 고용되어 있는 예술가들을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말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러한 예술가들은 자신이 세계국가체제에 복무하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고 또 알고 있더라도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고 다만 예술의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세계적 규모의 독점자본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예술의 다양성으로 본질을 은폐하고 있는 반면에 그러한 음모를 간파한 사람들은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의 깃발을 문밖에 내걸었다. 바로 여기 지역문학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지역문학은 한 지역의 문학적 총량이 아니다. 지역문학은 민족문학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식이며 역사적인 과정인 것이다. 생존의 정체성을 확인받고 삶의 현실을 반영하는 구체적인 언어예술의 방식이 지역문학이다. 다시 말해서 21세기적 삶의 세 범주는 세계체제, 민족국가, 지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민족국가의 약화와 세계체제의 강화에서 삶의 정체성을 보장하며 언어예술로 표현하는 것이 지역문학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문제까지 작가들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작가들은 논리적 설명 이전에 직관적으로 진실을 파악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좀 거칠게 논의한 지역문학을 다음 몇 항목으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첫째, 지역문학은 민족문학운동의 21세기적 과제로써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실체이다. 197,80년대 남한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획득한 지역이라는 고귀한 개념을 21세기의 지평에서 실천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다. 지역문학은 한 지역의 문학 전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지역문학은 지역의 진실을 지역의 감정으로 표현하며 지역을 위하여 존재하면서 문학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문학을 말한다.

둘째, 지역문학의 개념을 서울 이외의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서울 역시 지역이다. 서울은 서울 지역의 역사적 경험과 생존의 현실을 정직하고 아름답게 문학으로 담아내야 하고 다른 모든 지역도 역시 그렇다. 다만 중심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문학의 권력이 있다면 그러한 문학권력은 즉각 해체되어야 마땅하다.

셋째, 지역문학은 근대문학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지만 그보다 탈근대·탈식민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성장과 발전의 근대는 이미 이데올로기적 파시즘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적 정의를 본질로 하는 문학이 취할 바가 아니다. 해방과 압제라는 탈식민의 고통스런 흔적이 지역문학에 잠재되어 있음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문학의 대서사를 해체하고 다양한 현상들이 드러난다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이 아닌, 탈근대 탈식민 반자본을 실현하는 지역문학을 상정해야 하는 것이다.

넷째, 지역문학은 지역의 문학이라는 일반적 개념을 넘어서야 한다. 지난날 민족문학이 운동과 실천으로서 존재하면서 수많은 정의와 진실을 실현한 것과 같이 지역문학은 운동과 실천으로 존재해야 한다. 한 지역의 문학적 총량(總量)은 지역문학이 아니다. 민족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지역문학은 민족문학의 하위 영역이면서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지는 문학이다.

다섯째, 지역문학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의 유기체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지는 문학의 단위로 존재해야 한다. 지역에는 지역의 생존사가 있고 지역의 감정과 지역의 문법이 있다. 문인(文人)들은 그러한 지역적 정서와 사상을,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문제로 인식하면서 작품을 써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체제가 지시하는 세계문학과 민족의 가치를 담는 민족문학과 지역에서 실천되는 지역문학은 같은 것이면서 다르다.

여섯째, 지역문학은 언젠가는 해체되어야 할 개념이다. 민족문학이 한국문학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지역문학은 지역이라는 배타적 공간개념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민족문학이 걸어가는 과정의 개념이면서 지역문학보다는 제주문학이나 청주문학과 같은 공간적 하위 양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완성하면서 해체하는 이 이중적 과제를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지역문학의 진실성과 미래는 달려 있는 것이다.

(김승환 homepage http://trut.chungbuk.ac.kr/~whan86)

-끝-

 

 

Reference

 

1)Edward. W. Said, Orientalism, 박홍규 역, 교보문고, 1997. p.13.

2)김승환, "지역문화와 지역의 새로운 인식을 위하여", 『지역문화의 해와 지역문화』, 충북민예총 예술사업위원회, 2001년.p.57.

3)Franz Fanon, Peau Noire Masques Biancs,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이석호 옮김, 인간사랑,1998. p.25.

4)도종환, 「고두미 마을에서」, 『고두미 마을에서』, 창작과비평사,1985. p.6.

5)김수열,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실천문학사,2001. p.114.

6)최원식,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창작과비평사,1997. p.13.

7)Immaneul Wallerstein, Geopolitics and Geoculture, 『탈아메리카와 문화이동』, 김시완 옮김, 백의,1995. p.251.

8)문학(文學)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과연 /'/학/'/을 붙일 수 있는가 하는 반성을 좀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작가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문학이 아니라 문예(文藝)여야 한다. 그러나 문예를 연구하고 분석하는 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일 수 있다. 이 문학이라는 용어가 기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의 잔재라는 점에 대해서는 깊은 반성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이 기회를 빌어 문제를 제출해 본다. 문학은 도학(道學)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전통적으로 쓰여오긴 했지만 개화기 이후 근대문학으로부터 주로 쓰이고 있다. 문학이라는 것은 /'/문(文)/'/ 즉 글에 대한 태도를 표시하고 있다. 이 언술은 그러나 식민지적 근대(colonialistic)라는 역사적 개념으로서 작동하면서 식민지적 기억의 제도화라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제는 문학을 /'/문예/'/로 바꾸자고 하기가 좀 어렵게 되어 버렸지만, 예술로서의 문예와 학문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구별만은 필요하다고 믿는다.

9)김승환, "지역문화의 제3세계적 인식과 탈식민의 전망",『지역문화의 해와 지역문화』, 충북민예총 예술사업위원회, 2001년.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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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2001년 회원 여름수련회 발제문(박영근)

2004.10.23. 1082
9

  [성명서] 한나라당 망언 비판 (자실위)

2004.10.23. 1180
8

  [성명]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문학인의 견해

2004.10.23.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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