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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논문] 조정환, 통치의 제국적 재구조화와 노동문학의 새로운 방향모색
이름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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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노동자문학회에서 발표한 조정환 회원의 논문입니다.
노동문학 전문계간지 [삶글]에 실린 바 있습니다.


통치의 제국적 재구조화와
노동문학의 새로운 방향모색


조정환



머리말

한국에서 역사적 노동문학 운동들은 식민지 시대에 구축되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민족해방을 위해 싸웠고, 해방공간에서 민주주의와 민족해방의 완성을 위해 싸웠으며, 분단 시대에는 민족통일과 민주주의, 그리고 노동해방을 위해 싸웠다. 이 과정에서 많은 노동문학 작가들은 일본 제국주의에서 미군정, 권위주의적 파시즘, 그리고 사회주의적 관료주의에 이르는 지배의 사슬의 포로가 되어 재갈 물려지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였다. 최서해, 이북만, 한설야, 임화, 박노해, 백무산, 김해화 등은 이 문학 전통 속에서 글을 써온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널리 회자되고 기억에 남게 된 몇 안 되는 작가들 중의 일부이다. 그리고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더불어 전국에 생겨난 지역 노동자문학회들은 노동자들의 문학적 표현 욕구를 실현하는 중요한 공간으로서 오늘까지 십 수년의 연륜 속에서 살아오면서 노동문학의 실존을 그 누구도 지울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지금도 곤고하다. 권위주의적 파시즘을 대체한 것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등의 수사학과 노벨상을 위한 외교술 뒤에서 실제로는 물신화된 시장의 권력을 노동자에게 강제하며, 노동자의 삶을 한편에서는 지나친 속도에, 다른 한편에서는 생존위기에 허덕이게 하는 신자유주의 정부이다. 지난 날 노동자들을 정치, 경제적 수준에서 결속시키면서 저항의 힘을 키워냈던 당적, 조합적 결집체들은 오늘날, 저항을 인간해방과 연결시키기보다 사회적 복리나 경제적 실리와 연결시키는데 몰두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저항의 새로운 힘은 공장 밖에서, 예컨대 주거권을 지키려는 철거민들의 싸움 속에서, 핵폐기물에 희생당하지 않으려는 주민운동 속에서, 정보통제에 맞서 싸우는 해커들과 정보공유운동 속에서, 부르주아 정치권과 기업권의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시민운동 속에서, 성애의 다양성을 옹호하려는 동성애자 운동 속에서, 가부장제에 반기를 든 여성운동 속에서, 생물다양성과 자연권의 수호를 위해 싸우는 생태운동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저항의 신은 전통적 /'/노동자/'/ 세계를 떠나가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보면 한국의 노동문학들은 노동운동의 당적-조합적 흐름의 일부로서 탄생하고 성장했다. 많은 노동문학 작가들이 어떤 형태로건 조합적 흐름이나 당적 흐름과 연결되어 있었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단순한 연결을 넘어 종속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적-조합적 흐름들이 근대적 노동체제에 전투적으로 맞섰을 때, 이 연결은 문학에 필요하기도 했고 그것이 문학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조차도 그렇게 심각한 상처를 야기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동자의 정당적-조합적 흐름들이 근대적 노동체제 속에서 노동자들의 상대적으로 더 나은 지위를 할당받는 데 진력하고 있는 오늘날, 그리고 덧붙이자면 전통적인 전업적 글쓰기가 관료적-시장적 물신 메커니즘의 부속물로 전락해 가고 있는 오늘날, 노동문학은 어디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근대의 노동문학과 재현 패러다임

자본주의는 교환을 매개로 하는 사회적 개인들의 특정한 배치 형태이며 여기에서는 노동시간이 사회적 부를 측정하는 척도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한 사회적 개인들의 배치는 인간의 삶과 활동성을 노동으로 환원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잉여가치 축적을 유일한 목적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자본과, 살아 남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을 수 없는 노동자 사이의 적대를 구조화시켜 놓았다.
전통적 노동운동은 이 배치의 변형을, 즉 새로운 배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자본주의적 재생산과정은 양면적이다. 그것은 표면에서 잉여가치를 축적하는 한편 그 이면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축적한다. 전통적 노동운동에 이론적 틀을 제공한 마르크스는, 이 프롤레타리아의 힘을 지렛대로 자본가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는 생산수단을 장악한 후 이것을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에 귀속시킴으로써 기존 배치관계를 대체하려는 혁명 구상을 제안했다.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과 사회적 생산수단의 재결합은 협동적 생산을 낳게 될 것이고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를 대체하게 되면, 국민생산은 이 단결된 사회의 공동계획에 의거하여 자율적으로 통제될 것이고 자본주의 생산의 참화인 항구적인 무정부 상태와 주기적인 변동은 종식될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에서 항구화된 인간들 간의 사회적 적대와는 매우 상이한 코뮌적 배치가 확립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재생산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축적이 거대한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수단의 재전유라는 탈자본주의적 배치관계의 확립은 결코 순풍 항해와 같은 자연스런 과정이 아니었다. 첫째의 벽은 기존 배치관계와 그 대행자들로부터의 커다란 저항이었다. 특히 국가의 무장력은 그 저항의 핵심적 보루였다. 둘째의 벽은 프롤레타리아 주체가 협동 생산의 정신적·조직적 준비를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위, 아래로부터의 장벽에 직면하여, 전통적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경제적 방어조직인 노동조합과 정치적 전투조직인 정당을 사용하여, 그리고 혁명과정에서 자생적으로 생성된 코뮌들을 이용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한편 국가를 자본의 반격에 대한 방어의 기관이자 노동자들을 협동적으로 조직하는 훈련 기관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1917년에 러시아에서 대규모로 실험된 이 시도는 결국 마르크스가 우려한 바의 사태로, 즉 /'/협잡과 함정/'/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가들의 저항뿐만 아니라 볼셰비끼의 위로부터의 권력 행사에 동의하지 않는 농민과 병사, 노동자들의 저항까지 분쇄했다. 농민과 프롤레타리아를 협동적으로 만들기 위한 위로부터의 국가의 조치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불복종을 감추는 분열되고 예속적인 인간형을 대규모로 양산했다. 자본주의적 배치는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지 못했고 형태만 바꾼 채 지속되었다. 낡은 분할 집단 대신에 새로운 분할 집단이 들어선 것이다. 노동이 여전히 삶의 핵심적 요소로 남아 있었고 노동시간은 (암)시장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생활 속에서 부를 측정하는 척도로 남아 있었던 점이 그것을 증거하는 지표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학은 어떤 일을 수행했는가? 혁명적인 문학 역시 낡은 배치 관계를 전복하고 새로운 배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노동운동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당시의 문학가들은 리얼리즘의 방식으로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려고 했다. 리얼리즘이 작업하는 방식은 자본주의적 사회 배치가 가져온 비참한 결과들을 드러내는 한편, 그러한 현실 속에서 싸우고 있는 적대하는 인간형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사를 이용하는 재현의 방법/'/을 통해 수행되었다. 지주, 자본가, 쁘띠 부르주아, 지식인, 노동귀족, 혁명적 노동자 등의 사회학적으로 도출된 인간형들의 파노라마를 펼치는 것, 문학 언어를 이 같은 사회학적 개념의 당의(糖衣)로 사용하는 것. 리얼리즘 문학이 현실이라고 불리는 현존하는 사회적 배치와 그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저항의 힘들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개념적 재현을 수단으로 하는 사회학은 결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즉 형상적 재현의 방식으로 기여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성과는 어떤 한계 내에서의, 따라서 무엇인가를 억제하면서 이룬 성과이다. 재현의 언어는 무엇인가를 지시한다. 그러나 지시의 언어는 그 대상에 내재하는 /'/물 그 자체(Ding an sich)/'/[칸트], /'/실체(Substance)/'/[스피노자], 물질(Materie)[마르크스], /'/존재(Being)/'/[들뢰즈], 잠재력(puissance)[네그리] 등에 가 닿을 힘이 없다. 왜냐하면 지시하는 언어는 그것이 아무리 그 지시대상에 밀착한다 하더라도 본질상 기호나 상징으로서 하나의 비유임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재현 언어에서의 의미는 기표-기의의 언어적 시뮬레이션 채널을 따라 흐를 뿐이다.
당은 위대한 재현의 기관이었다. 그것은 전 계급의 영역으로 파고 들어가 작업하는 인식 기관이자 선전선동 기관이고 조직 기관이었다. 리얼리즘에서 문학과 당의 접속은 아주 용이하다. 당이 하고자 하는 것을 문학이 하고자 하며, 문학이 하고자 하는 것을 당이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이 당문학론 속에서 그 최고의 형태를 발견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당이 그것의 넘치는 인식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로 인하여 사회적 개인들의 현실적 배치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하고 새로운 조절형태를 구축하는데 머물렀듯이 리얼리즘 문학도 현실의 이 배치를 바꾸는 새로운 언어적 배치를 산출하기보다 언어적 시뮬레이션 채널을 따라 흐르면서 욕구, 분노, 사랑, 희망 등 표현의 요소들을 거기에 외삽하는 것에 머물렀다.
실제로 당은 재현의 시선으로는 잘 포착되지 않는 표현의 언어들에는 극히 둔감했고 그것을 쁘띠 부르주아지의 비조직적 일탈의 언어로 받아들였다. 표현의 언어는 재현을 자신의 전개를 위해 이용할 수 있지만 그것에 한정되지 않으며 지시관계를 통해 작용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에 갇힌 짐승의 높고 긴 울음소리처럼,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가 바이얼린 소리를 들으며 흘리는 눈물처럼, 뭉크의 비명처럼 흘러나오며 그 언어의 흐름 에너지가 누군가에게 유통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안정된 것을 뒤흔들며 새로운 배치를 생산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코민테른 당들의 공식적 문학론으로 채택되어 인간관계의 사회주의적 배치를 공고화하는 문학적 기계로 활약한 제3인터내셔널 시기에, 재현의 언어보다 표현의 언어를 더 선호했던 카프카나 브레히트 같은 작가들이 외면, 비난, 배척, 탄압을 피하기 어려웠던 것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이다.

통치의 제국적 재구조화와 재현 패러다임의 위기

우리는 표현의 언어들이 재현의 언어와 대립하였고 그 대립에서 재현의 언어가 더 우세했던 한 역사적 시기에 대해서 검토했다. 이 시기에 리얼리즘은 사회적 배치의 변혁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문학적 규범으로까지 격상되었다. 재현의 언어의 우세는 단순한 언어철학적 오류의 산물로만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당대의 생산의 특질 및 계급 구성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언어학적·미학적 현상이다. 그렇다면 당대의 생산 및 계급 구성의 어떤 특징이 그러한 현상과 연결되어 있는가?
근대의 생산과정은 인간 신체기관과 근력을 매개로 한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였다. 그 과정에서 응용된 지식은 역학이나 화학과 같은 재현성 짙은 과학들이었으며 기계체계가 발전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 신체 기관의 연장으로서 이 물질적 신진대사 과정을 매개하는 것에 그쳤다. 근대를 지배해온 생산방식인 테일러리즘이 인간 동작의 세분과 그것의 기계적 연결에 기초한 것이었음을 이를 말해준다. 테일러리즘적 노동과정에서 구상과 실행은 분리되었으며 구상은 실행의 재현적 시뮬레이션에 기초하여 준비되었다. 이로써 노동자계급 내에 숙련층과 비숙련층, 전위와 대중의 구별이 생겨났다. 노동조합이나 미조직 노동자 대중에서 분리된 당적 조직화의 출현은 재현 패러다임을 부단히 재생산하는 이 계급 내적 구별의 노동자 계급 정치 및 조직화에의 투영이다. 이런 맥락에서 리얼리즘은 예술행위에 적용된 재현 패러다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재현 패러다임을 노동운동 속에서 살펴보았지만, 그것의 원조는 자본에, 그리고 그것이 구축하는 공동체인 민족국가에 있다. 자본의 척도 관념은 정확히 재현적인 것이다. 자본은 인간의 삶을 노동으로 환원시킴과 동시에 노동의 추상화를 통해 도출되는 사회적 노동시간을 노동의 언어로, 가치척도로 부과한다. 민족국가는 이 가치척도를 법률적으로 안정화시키고 그것을 인간 생활의 정치적 매트릭스로 정착시킨다. 제국주의는 민족국가 모형의 국경을 넘는 확장,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비자본주의적 바깥 세계를 향한 국경 팽창의 경향이며 비노동자 인간들의 노동자 국민들로의 포섭의 경향이다.
그러나 자본이 영토화 할 바깥 세계를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을 때, 즉 자본의 바깥이 없고 자본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바램만큼이나 지구 인구 전체가 노동자로 변한 시대에도 재현 패러다임은 그것의 우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이 변화의 기원과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지금이 바로 그러한 시대의 초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전, 그리고 산업사회와 구별되는 정보사회의 출현이 그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근력보다 지식이 생산의 더 중심적인 요소로 되며 부 창출의 더 큰 원천이 되고 있다. 카오스 물리학, 불확정성 이론, 가상 현실 기술, 생물 테크롤로지 등 비재현성 과학과 기술이 생산에 응용되면서 생산에서 재현 패러다임을 지탱했던 관계들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첫째 노동시간이 더 이상 가치척도로서 부과되기 어렵게 된다.
둘째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확산과 다중화(becoming multitudes: 다형다질의 차이적 개인들)로 대중의 조합적 재현이나 당적 재현이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셋째 재현의 민족국가적 기관들(의회, 사법, 행정)이 재현의 권위를 잃는다.
이 재현 패러다임의 위기에 직면하여 자본은 생산의 지구화·정보화와 통치권의 제국화로 대응하고 있다. 초국적 금융자본, 자본 이동의 디지털화를 통한 네트워크 생산, 생산 각 요소의 유연화, U.N., IMF, WTO, WB 등을 이용한 네트워크적 통치 등은 이 대응의 양상들이다. 재현 패러다임은 급속히 시뮬레이션 패러다임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지시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표현 패러다임과 유사하지만 존재의 자기 발화가 아니라 존재와는 동떨어진 기호들의 자기충족적 놀이, 이것이 시뮬레이션이다. 오늘날은 정치도, 경제도, 전쟁도, 예술도 이러한 시뮬레이션 활동으로 바뀌고 있다.

4. 시뮬레이션 시대의 노동문학

그러면 재현 패러다임에서 시뮬레이션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는 근본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재현의 이전 형태인 언어 역시 /'/흐름으로서의 존재/'/(Being)와 오직 비유, 상징, 기호의 방식으로만 관계 맺는 시뮬레이션의 일종이었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뮬레이션은 오히려 언어적 시뮬레이션의 극단화, 재현 패러다임의 극단화라고 볼 수 있다. 리얼리즘에 반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극사실적 모사와, 현실에서 극단적으로 유리된 추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제 시뮬레이션 시대의 노동문학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노동문학들은, 특히 한국의 노동문학들은 재현 패러다임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박영근, 김해화는 말할 것도 없고 박노해, 백무산의 시들도 재현을 무게 중심에 둔다. 모상이나 전형뿐만 아니라 상징도 넓은 의미에서 재현의 형태들에 속한다. 사회적 배치를 변형시키는 힘은 재현에 외삽된 의지나 전망의 형태로만 출현했다. 우리는 이전의 유물론의 주요 결함을 지적한 [포이에르바하 테제]의 첫 절을 지금까지의 노동문학에도 적용할 수 있다. 즉 그것의 주요 결함은 /'/대상, 현실, 감각을 객체 또는 지각의 형식으로만 파악하고 인간의 감성적인 행위로서,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의 능동적 측면은 리얼리즘과 대립하고 있었던 모더니즘이나 전통적 서정주의에 의해 추상적으로 표현되어 왔다고 말이다.
박노해 혹은 백무산과 같은 노동문학의 옛 /'/거장/'/들이 새로운 상황을 맞아 이 재현적 패러다임에서 떠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박노해는 교술과 전통 서정으로, 백무산은 명상시로 나아간다. 이들에게서 재현은 그 지배적 위치를 잃고 교술이나 서정, 혹은 명상 속에 포섭된다. 이들의 급속한 변화와는 달리 김용만, 김해화, 김명환을 비롯한 /'/일과 시/'/의 동인들처럼 변화를 거부하면서 노동문학의 전통적 방법을 고수하고 그것과 운명을 같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국의 지역 노동자문학회들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글쓰기들도 개인에 따라, 그리고 세대에 따라 편차는 있겠지만 크게 보면 이러한 조류에 속한다. /'/노동문학/'/이라는 이름 아래에 살아남은 조류는 이 중 후자이다. 이 조류의 특징은, 전자가 미학적 재현을 통해, 그리고 그 미학적 재현의 정치화를 통해 작업할 때, 현장적 서정에 머무르면서 노동자의 삶을 생활수준에서 집단화하는 작업에 더 치중하는 것이었다.
이 두 조류의 우열비교 혹은 그것들에 대한 평가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현 시대의 지배적 배치 관계를 새로운 배치관계로 대체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가늠하는 일이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통치형태의 변화 즉 지배의 제국적 재배치이다. 실제로 재현 패러다임의 붕괴도 사회의 이러한 유연화, 네트워크화, 시뮬레이션화와 무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이 전통적 노동문학 지형에 미치는 충격은 무엇인가?
첫째 지배의 제국적 재배치는 전자의 조류가 기초하고 있었던 전위와 대중의 구별을 허물뿐만 아니라 후자의 조류가 터잡고 있었던 노동자의 집단적 생활 장소, 즉 공장/공단을 허문다. 노동문학에서 공장은 상품이 생산될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진리가 생산되는 특권적 장소였다. 많은 지식인과 학생들이 /'/존재이전/'/, 즉 공장취업을 동경하고 실행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미포만의 공장지대뿐만 아니라 강남의 테헤란로, 관악산과 신촌의 대학들, 그리고 헤아릴 수조차 없는 무수한 가정들과 이동하는 자동차들이 생산 공장으로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노동자의 재영토화에 대한 자본의 탈영토화적 공격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둘째 지배의 제국적 재배치는 노동문학이 생성되고 발전되어 적대 공간을 변형시킨다. 왜냐하면 그 재배치가 인간의 육체노동 이외에도 자연, 지식, 성 등등의 삶의 다양한 영역들, 활동들을 자본의 활동영역으로 포섭하고, 그로 인해 자본과 노동간에 구축되어온 이원적 적대관계가 유연화되며, 적대가 다차원화, 복잡화되기 때문이다. 이제 적대는 자본과 노동 사이에 형성될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 육체와 지식 사이에, 여성과 남성 사이에, 어린이와 성인 사이에,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사이에도 형성된다. 수직적 적대에 수평적 적대가 중첩된다.
아마도 무수한 변화들 중의 일부에 불과할 이러한 변화가 노동문학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이것은 무시해도 좋을, 혹은 외면해도 무방할 변화인가?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노동문학이 기초해온 주체성과 지향성 전체를 와해시키는 커다란 변화이다. 노동과 문학의 합성어인 노동문학이라는 명명이 암시하듯이, 이것은 노동을 인간 활동의 대명사로 놓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긍정적 가치로 평가하는 문학이다. 노동문학이 노동해방을 표현한다면 그것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노동의 해방/'/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정보적 재구조화로 인해 노동 시간이 부의 원천으로 되는 비중이 급속히 줄어들면서 전통적 의미의 노동은 서서히 그것의 중심적 지위를 잃고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90년대 이후에, 특히 IMF 이후에 그러한 징후는 뚜렷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지금 전통적 의미의 노동문학을 주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노동의 만회와 노동의 해방을 주장하는 한, 서서히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는 낡은 노동사회의 복구라는 회귀주의와 보수주의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리해고에 맞서 /'/일자리 나누기/고용증대/완전고용/'/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문학 밖의 조합주의적 대응과 일치하는 것이다. 왜 우리가 노동이라는 자본에의 역사적 예속 형태를 고수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삶의 지평에서 전개되는 존재의 복수적, 다원적 변용이다. 나는 이러한 시대일수록 문학은 /'/발화의 집단적 구성능력/'/이라는 들뢰즈의 문학관의 유효성이 더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존재의 복수적, 다원적 변용은 소수집단화(마이노리티화)가 단순한 주변현상이 아니라 인류의 정치적 재구성과 집단화, 즉 코뮌화의 현실적 경로일 수 있도록 만든다.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차이는 코뮌적 결집의 장애요인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차이를 장애로 인식했던 일치단결의 관념은 유효성을 상실하며 연대보다도 더 유연한 공명이 집단화의 유효하고 내재적인 방법으로 부상된다. 실제로 오늘날 세계의 낡은 배치들을 뒤바꾸는 투쟁은 중앙집권적 지도기구의 명령에 의한 단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투쟁들의 유통과 공명에 의해 장편소설처럼 무한히 지속되고 있다.
과거의 노동문학은 대규모적이고 군사적인 집단화에 익숙했으며 위로부터의 재현적 담론에, 선동적·선적적 담론에 익숙했다. 생활주의적 노동문학은 이념주의적 노동문학에 비해 이러한 대서사와 보편문법에 대한 집착이 적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활주의적 노동문학 역시 지역에서 전국으로 이어지는 집중적 조직화, 규모의 정치에서 자유로웠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제는 존재하는 것들의 직접적 목소리에, 표현적 자기발화에 길을 열어주고 그것들이 서로 울리고 어울려 아래로부터 수평적 집단화를 이루도록 장려할 때이다.
이 창조적 과정을 표현하는 말로 노동문학이라는 용어는 아무래도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노동자는 이미 무수한 차이들로 자신을 드러내는 다중의 일부로 전화되었다. 다중은 일상 속에서 부단히 사회의 낡은 배치를 어기고 부수며 새로운 배치들을 창출하는 능동적 존재들이다.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통치의 이행, 그리고 규율적 생산에서 네트워크적 생산으로의 이행은 다중의 이 유연한 율동을 축적의 회로 속으로 재흡수하기 위한 노력이다. 노동문학은 이제 노동이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그리고 이제 그 한계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는 지평으로부터 다중이 펼치는 복수적 삶의 지평으로 내려옴으로써 비로소 낡은 배치의 새로운 배치로의 대체라는 본래적 욕구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5. 노동문학의 재구성을 위하여

노동문학이 삶의 지평에서, 다중 주체성의 관점에 따라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것은 90년대 초에 일종의 복고주의적 조류로 출현했던 민중문학, 노동문학의 민족문학에의 재통합을 재연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저항과 적대를 내파(implosion)의 형태 속에 감금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로의 귀순을 주장하는 것인가?
노동문학과 민중문학의 전선붕괴와 그것들의 민족문학에의 재통합 이후에 민족문학의 위기가 찾아 왔다는 것은 얼핏 보면 아이러니로 보인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민족문학의 실질이 실제로는 노동문학과 민중문학에 의해 유지되어 왔음을 반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최근 들어 민족문학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공세를 받으면서, 한국문학이라는 이름의 국민문학적 재정향을 꾀하고 있다. 60년대 이후 지속되어온 저항문학의 총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사단법인으로 되면서 한편에서는 등단작가들의 길드로, 다른 한편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재구조화의 문필적 전위대로 전화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실정치적 영향력 확대의 이면에서 나타나는 민족문학의 이러한 예술적 무력화는 그것의 국민문학으로의 후퇴적 재구성의 필연적 결과이다. 민족통일이라는 민족문학의 오랜 염원은 아주 가까이에 다가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민족문학의 치열한 저항, 그 자랑할만한 투쟁의 성과인가? 아마 그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민족통일의 지구적 맥락이다. 한반도에서 민족분단은 제국주의적 통치 형태, 즉 미소 제국주의의 경쟁의 산물이고 임박한 민족통일은 그것의 제국적 통치로의 이행의 산물이다. 민족국가가 창조의 범주가 아니라 수구의 범주로, 민족국가가 자본의 제국적 재구조화의 담당 관절로 재편성되는 시대에 비로소 한반도의 민족국가적 완성의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을 관할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그것은 자본의 제국적 재구조화의 민족국가적 전략이자 정책이고 이데올로기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가? 그것은 시대의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했지만 그 기민성에는 존엄함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스펙터클과 시뮬레이션과 가상현실이 인간의 존엄성, 다중의 힘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실현하고 있음을 보았지만 바로 그것들이 다중의 힘과 욕구의 표현 형태이며 그것을 삶 속으로 재통합할 힘 역시 다중 속에 축적되어 가고 있음을 보지는 못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허무주의의 언어로 제국에의 순종을 설교했다. 유럽에서 새로운 노동자들의 힘이 보수당 정치를 몰아내고, 제국의 권력 조절자인 미국과 그 접경지대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자본주의의 희망 아시아 신흥공업국이 침몰하면서 파업의 불길이 타오를 때, 순종의 전도사 포스트모더니즘이 고개를 숙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노동문학의 창조적 재구성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민족문학에로의 재통합이나 포스트모더니즘에의 귀순과 같은 것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노동문학이 옷을 바꿔 입는 정도의 개량으로 이 시대에 필요한 문학적 요구, 다중의 문학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통치의 제국적 재구조화에 맞서 근본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할 필요에 직면해 있다.
나는 앞에서 노동문학이라는 명명의 현시대적 부적합성에 대해 지적했다. 이제 끝으로, 그 부적합성을 규정하는 몇 가지의 역사적·미적 계기들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새로운 명명, 새로운 문학적·조직적 재배치의 방향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첫째는 투쟁의 전사회적·지구적 시야.
오늘날 공장은 적대의 유일한 장소가 아니며 적대의 선은 전 사회를 횡단하며 수직적이고 수평적으로 그어지고 있다. 다중은 이 속에서 숨쉬며 살고 있다. 특히 통치의 제국적 재구조화는 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 등 지역적 선을 따라 인류를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적 네트워크에서 차지하는 위치라는 공간적 선을 따라 인류를 분할한다. 다중 속에는 이 분할선들이 각인 되지만 그 선들은 유연하다. 취업자가 실업자가 되고 실업자가 취업자가 되며 제1세계가 제3세계로 되며 제3세계가 제1세계로 되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지금, 뉴욕에서 나비의 날갯짓이 북경에서 폭풍을 일으키는 지구적 카오스,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투쟁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분할선들이 그어진 국지 공간에서 일어나지만 인터넷을 비롯한 디지털 매체를 통해 지구 곳곳으로 유통된다. 그 어떤 투쟁도 국지적으로 한정될 때에는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문학적 사건으로서의 창작 역시 지구적 유통 속에서 그 힘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바 이를 위해서 문학은 투쟁의 전사회적·지구적 시야를 획득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정치의 소수집단적 재구축.
전사회적·지구적 시야가 필요하다는 말이 지구적 규모의 조직과 일치된 지구적 정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는 사회 각 영역에 그어져 있는 분할선을 따라 흐르는 소수집단적 흐름 속에서 재영토화를 저지할 수 있을 힘을 발견할 수 있다. 소수집단적 흐름이란 양의 다과(多寡)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공리계, 사회관계의 지배적 배치에 혁명적으로 맞서는 흐름을 말한다. 그것이 흐름인 한에서 다양한 소수집단적 정치들은 그 개별성 속에서 상호 소통하면서 사회적 배치의 완전한 전복과 새로운 것으로의 대체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언어의 자기혁신.
언어, 특히 문자 언어는 생물적 디지털로서의 DNA를 이어 역사에 출현한 문화적 디지털 코드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지시대상이니 언어적 표현의 의미들과 아무런 직접적 유사성이 없는 음소들의 조합에 기초한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적 생태계를 구성하면서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대비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조사하고 의미를 창조하며 다가올 세대를 위해 새로운 발명을 기록하고 저장한다. 이 문화적 디지털 코드가 어떻게 이용되는가는 이 코드의 잠재력 가운데 어떤 것이 발현될 것인가를 결정짓는다. 앞서 나는 언어 이용의 재현적 패러다임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재현적 패러다임은 언어의 힘을 크게 확장시켰지만 그 확장된 힘은 역설적으로 존재자들의 힘을 억압하는데 더 많이 사용되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가 언어의 자기혁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누가 언어의 자기혁신을 이룰 것인가? 인터넷에 등장하고 있는 다양한 발화형태들은 이미 이 언어적 자기혁신이 시작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정동적인 채팅 언어들, {딴지일보}의 풍자언어들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언어의 힘을 약화시키는 속류화의 경향과 분별하기 어렵게 섞여 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문학이 언어의 발화적 힘을 증폭시키는 데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욕구를 내재화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지금도 자신을 투여하고 있으리라고 예상한다. 이것이 어떤 형태를 띠고 표면화되건 그것은 다양한 발화적 힘들과 어우러져 /'/발화의 혁명적이고 집단적인 구성/'/을 이룸으로써 인류의 코뮌적 재구성의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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