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소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과업]
(삶이보이는창, 2006년 8월 22일)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과 반성을 던지는 자각의 시인이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는 너그럽게 살고자 하는 시인은 수많은 질문과 여행을 통하여 스스로 해답을 찾아간다. 여행은 좁은 일상을 벗어나 많은 사람과 사물을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하여 자신의 내적 성숙의 계기를 마련한다.

그의 시집을 열면 수많은 투쟁의 기록들이 나온다. “집시법 위반으로 경고장을 받”고, “농성장”에서는 “신문지를 덮”고 잠을 청하기도 하고, “풀무원” “엄마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연대하면서는 노동자의 절규를 몸으로 배우고 실천한다. 그런가 하면 “조국이 자랑하는 정보화 세계화의 아침”에 인권을 유린당하는 아이들을 만나고, “모니터 속에서 절규하는 한 청년의 이라크 파병반대 목소리를” 만나고 ,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과 눈물을 만나고, 베트남 처녀를 인신매매하는 자본주의의 추악한 플래카드를 만나면서 그는 분노하여 외친다. “세상은 왜 감탄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냐”고.

그리하여 그는 노동자가 주인되는 민중해방을 꿈꾸며,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제국의 횡포에 분노의 칼날을 벼리면서, 무엇보다도 “계급을 버리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며, 그 자신 투사가 될 것임을 공공연히 작품을 통하여 단호하게 선언한다.

권혁소 시인의 시는 담백하다. 그는 일반적인 시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표현기교나 비유, 상징 등의 문학적 장치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직설적 언어로 드러낸다.
그가 질박한 민중의 언어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적 삶을 온전히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며, 그 노력이 사랑과 눈물과 대결의지로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있다. 그가 독자들에게 제기하고 있는 이 자본의 시대는, 아직 우리가 인간답게 대접받으며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단정적 인식이 여전히 유효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권혁소 1962년 강원 평창 진부 출생. 1984년『시인』을 통해 작품 발표를 시작하였으며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 시집으로 『논개가 살아 온다면』,『수업시대』,『반성문』,『다리 위에서 개천을 내려다보다 』 등이 있다. 현재 인제 원통에서 미래의 노동자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있으며 전교조 인제지회장을 맡고 있다.

::책 속에서

과업
유복자 외아들로 태어나 부담스러웠다
미완으로 끝난 아버지의 항쟁은 모호하였다, 하여
어머니 돌아가시면 혁명의 길을 가리라 다짐했다, 허나
흙 묻은 장갑 끝에 매달리는 네 살 딸애를 가족애로 껴안으면서,
조금씩 두꺼워지는 월급봉투를 차곡차곡 쌓으면서,
북향에서 남향으로, 언덕에서 평지로 아파트 평수를 늘려가면서,
자동차의 배기량을 높여가면서,
등산·운동·레저용품을 카드로 긁는 과감성을 키우면서
혁명의 길도 투쟁의 길도 그저 남의 길이 되어버렸다

오늘도, 자본의 길을 간다, 가다가
허름한 몸뻬, 구부정한 허리, 튀어나온 엉덩이, 플라스틱 슬리퍼,
그 뒤로 까맣게 드러나는 갈라진 뒤꿈치
내 어머니, 저 어머니들, 일생의 꿈을 만난다

지주의 등짝을 관통하던 저 갑오년의 죽창 같은 시를 쓰자고,
선생도 꼭 선생 같은 선생만 되자고,
동지에겐 관대하더라도 자신에겐 냉정하자고
맹세하고, 일기에 쓰고, 또한 그들처럼 다짐했건만
맹세와 다짐은 방패 앞에 주저앉고, 신문지 앞에 자빠지고, 경고장 앞에
널부러지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자, 나는
자본의 자식도 지식인도 아니다, 이 세상의 주류도 아니며 지배계급은 더더욱 아니다, 아니다, 적어도 나는
중앙시장 좌판계급의 자식이며, 교육노동자이며, 주류 세상을 일갈하는 시인이며, 피지배계급의 가난과 억압에 눈물 흘릴 줄 아는 투사 아닌가, 그런 전사여야 하지 않겠는가

자본의 아가리는 점점 견고해지는데
가엽게 한 세상을 산 어머니만 땅에 묻혔다
땅 속 어머니를 세상에 복원하는 일, 이것이 작금 나의 과업(課業)이다



::시인의 말

시들을 묶어 책으로 낼 때마다 마음속으로 절필을 다짐한다. 이 험악한 세상에 도대체 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자괴감 때문이다. 그런데 또 만삭으로 부풀어 오른 습작노트를 보고 있노라면, 이 놈들을 어딘가로 보내긴 보내야 되는데, 조바심이 쳐지는 것이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의 대부분은 노동조합 전임을 하면서,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서 쓴 시들이다. 하여 ‘단결투쟁’ 머리띠를 풀기 전에 쓴 시들도 더러 있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시 속으로 걸어 들어와 내게 말을 걸어준 뭇 민중들에게 못난 시집을 바친다. 조금 더 치열하게 운동에 복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경화 시대’에 돈 안 되는 시집을 묶어 주신 <삶이 보이는 창>에 동지적 애정을 보낸다.

2006년 가을 문턱에서 권혁소


::추천글

문단의 말석에 이름을 내민 지 어느새 20년이 흘렀다. 혁소와의 남다른 인연, 같은 지면을 통해 등단한 문단동기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내게도 한때 시를 쓰는 일보다는 유인물을 더 써야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껏 이시대의 질곡과 세상의 아픔들을 껴안고 가는 한 시인의 고통과 분노와 개나리 꽃 같은 노란 희망이 여기 있다. 혁소의 시가 수사에 굴절되고 거짓된 은유 속에 나가지 않는 것은 ‘진전사지’의 ‘반듯한 삼층석탑’을 쌓는 ‘석공’의 거친 숨결과 더운 땀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책을 펼치면 거기 조선호랑이 한 마리 피아노를 치며 나지막이 노래하는 이 시집.
-박남준 시인

권혁소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 권혁소가 아니라, 소년 권혁소를 만난다. 소년은 그 태생에서부터 시정(市井)에 휩쓸려야하는 삶을 살아야했지만, 바로 그 시정 속에서 권혁소의 시정(詩情) 또한 단련되어 왔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권혁소의 시편 속에서 거친 외피 속에 숨겨져 있는 수줍은 순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또 현실에서의 딱 그의 모습이기도 하다. 텁수룩한 그의 겉모습을 보고 누가 그를 음악선생이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시인이라니. 그러나 그것이 바로 권혁소 시의 힘이며 매력인 것을!
-공선옥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