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스나기가 없다




김동승



아름다운 전원주택이다. 외벽을 감싼 담쟁이, 의젓하고 완만한 곡선의 형태로 얹혀진 지붕, 정원 구석구석에 깔려 있는 잔디, 처마 끄트머리를 향해 가지를 뻗은 산수유, 대지 경계선을 따라 일정한 폭과 크기로 질서정연하게 심어져 담장 역할을 하는 쥐똥나무, 그 옆으로 드문드문 심겨져 있는 이름모를 나무들과 화초들은 콘크리트 구조물에 익숙한 나한테는 경외의 대상이다.
사방으로 펼쳐진 드넓은 논에는 바람이 한 번씩 불 때마다 황금 물결이 일렁인다. 논둑 너머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은 지난여름 지독한 물난리를 치를 때 넘칠 듯 말듯 분노를 표현한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정원 한 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평상은 어림잡아 십여 명이 한꺼번에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는 크기다. 애견 해피는 피부병에 걸려서 털이 몽땅 깎였다. 평상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눈을 치켜 뜨고 나를 주시하지만 이름에 걸맞지 않게 처량하다. 짐작을 하건대 이방인 격인 내가 수상한 짓을 할까봐 경계를 늦추지 않거나, 털이 몽땅 깎인 것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장시간 햇볕을 쬐다 보니 갈증이 생겼다. 평상에서 내려와 호스를 입에다 바싹 갖다 대고 수도꼭지를 돌렸다. 물은 쫙쫙 입 속으로 들어간다. 갈증이 가셔지고 간장이 싸늘해지는 냉기에 어깨가 움츠러든다. 역시 지하 이백미터 암반을 뚫고 뽑아 내는 물이라서 그런지 정수기를 통해서 먹는 물맛하고는 생판 달랐다.
입사이래 가장 힘든 시기는 작년 이후부터 단절이 안 된다. 구조 조정 본부장으로 임명된 후 한솥밥을 먹는 동료와 선후배를 어느 선까지 정리 대상으로 삼을지 고민하다가 밤새 불면증에 시달렸다. 지친 심신을 달래느라 소파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 자폐증 증세로 하는 말끝마다 발음이 정확치 않은 명민이가 가슴팍을 세차게 흔들었다. 비몽사몽간이라 멀뚱멀뚱 눈뜨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명민이는 무선 전화기를 귀에다 바싹 갖다 댔다.
"여보세요."
얼떨결에 받는 전화라 목소리는 가래가 끓는 데다 맥도 없었다.
이성민씨 되십니까 하는 남자의 사무적인 목소리에 이어서 나 애자야 하는 가늘고 여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잘못 들었나 해서 누구냐고 되물었다. 잠시 망설이는 듯한 숨소리가 들리더니 나 애자야 하는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리 산사의 새벽을 깨트리는 범종 소리처럼 기다란 여음을 울렸다.
과거를 돌이키다보면 아쉬움과 후회로 점철된 부분은 항상 정지된 화면이었다.그러면 '만약'이라는 단어가 거기에 자동적으로 대입이 되었다. 비록 결과가 뒤집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자위와 합리화의 수단이다.
그렇지만 애자는 내 과거에서 비켜나 있었다. 나중에 적당한 시기에 '너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고' 실토를 하는, 만약을 대입하면 어떨지 궁금해진다. 아무래도 겉으로는 체면상 아무렇지도 않다는 가식을 꾸미겠지만 속으로는 무시를 당했다고 분통을 터트릴 것이다. 그게 아니면 이유가 뭐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섭섭함을 나타낼 수도 있다.
폐점 시간이 임박한 백화점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던 애자는 싱글거리면서 손을 들었다. 이윽고 거리가 좁혀지자 미소로 반가움을 전했지만 눈가에는 잔주름이 가득히 새겨졌다. 식사를 곁들인 술자리를 전통 일본식 요리 집에서 가졌다. 창호지를 둘러싼 전등 장식을 통과한 불빛 아래로 애자를 다시 훑어보았다. 원형을 잃지 않으려고 공을 들인 자국이 엿보였지만,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이란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시간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각자 잊고 싶은 상처들을 들춰 내려고 하지 않았다. 지나치는 말 한마디도 조심스러웠다. 어차피 지켜질 수 없는 비밀은 적당한 시간이 되면 노출이 되기 마련이었다. 물이 엎질러진 이상 나를 깊이 관찰할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집으로 초대를 하겠다는 애자의 호의를 바쁘다는 핑계로 번번이 뒤로 미뤘다. 실로 그 이면에는 제발 연락도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바램도 다분히 깔려 있었다. 그럼 다음에 연락할게 하고 전화를 끊고는 사나흘을 넘기지 않았다. 그렇게 한번 와라 못 간다 하는 짓을 탁구공 치고 받듯이 했다. 그러다가 사무실이건 집이건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울적해진 김에 라이터를 켜서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끝이 마른 나뭇잎 타 들어가는 것 같이 재가되는 즉시 불은 필터를 향해 서서히 번진다. 이런 날이 올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내일이 온다는 사실과 동급으로 맞아떨어진다.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빨았다. 화장실에서 피운 아침 담배 이후로 첫 담배다. 정기 검진시 의사는 종합 검진을 받아 보라고 권유를 해 놓고서는 가급적이면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내일을 생각하면 이미 손은 담배 갑에 닿아 있기 일쑤다. 어차피 당장에 끊지 못할 담배라면 어서 빨리 한대라도 더 피워 내일의 두려움을 씻는 편이 현명한 방법이다.
난데없이 잠자리들이 떼지어 나타났다. 고추잠자리는 왕따를 당했는지 동료들로부터 이탈해서 원을 그리고 있다. 저들도 인간세계처럼 끼리끼리 노는 부류가 있는 모양이다.
태양은 정남향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이동을 하다가 일인 시위를 하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이글이글거리고 있다. 반대편 논둑 길에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다. 맞은편 쪽으로 연결된 농로로 빠져나가는 척 하던 남자는 왔던 길을 다시 걷는다. 도중에 한 두 번씩 제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으면 사색에 빠져든 것처럼 보여 덩달아 내가 숙연해져 옷깃을 여민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나무들은 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마를 가렸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진다. 나룻배 한 척이 얌전하게 물살을 가로지르며 강을 건너가고 있다.
이런 초가을 날이었다. 승진을 한 자와 탈락한 자는 어떤 방법으로 축하를 해주고 위로를 해줄지 난감한 나머지 밖으로만 나돌았다. 아예 회사에 출근조차 하지 않는 직원도 있었다. 승진 대열에 끼이지도 못한 직원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말과 행동이 부자연스러운 나는 갑갑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애자는 남성들의 아성을 깨트리겠다고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겉으로는 선의였고 속으로는 치열한 경쟁의 상대였다.
구매과장은 반도체와 관련된 기자재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게다가 요령껏 짭짤한 부수입도 올릴 수 있어 누구나 한번쯤 탐을 내는 자리이기도 하다. 음으로 양으로 이권에 개입하는 상사의 압력성 청탁을 적절한 수준에서 처리하고, 한 푼이라도 더 챙기려는 납품업자의 농간을 예방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선과 악을 발휘하는 기지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회사의 녹을 먹는 이상 말 한번 잘 들으면 승진의 길이 보장되는데 마다 할 이유는 없었다. 대량으로 소비되고 지속적으로 납품할 수 있는 물품은 시장조사 가격보다 항상 높게 책정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은 권위와 위계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침묵을 지켜 주면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는 언제나 뒤따랐다. 향응과 돈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했다. 세상을 바꿔 보자고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거리로 뛰쳐나간 패기는 아득한 옛날의 철없는 짓거리로 치부되었다.
반면에 애자는 승진에 대한 미련을 훌훌 털어 버렸다. 패자에 대한 오만과 편견은 아니어도 회사를 떠나는 애자의 뒷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일년이 다 돼 가는 무렵에 외국 항공사 직원이 됐다는 연락, 다시 일년 후 결혼과 미국 이민, 수 년 후에는 이혼, 외국 항공사 재취업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이 집은 애자가 간략하게 평면 계획한 것을 토대로 건축사가 설계를 한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가 직접 설계를 했다고 하니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넓은 집에 혼자 살기에 적적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때에 따라서는 사람이 그립다고 했다. 아무래도 주변에 집들이 없다는 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내가 혼자가 된 이 시간에 애자는 하늘을 날고 있다. 어디쯤일까. 알 수는 없지만 이틀 후에 돌아온다.
숨을 죽이고 거실에서 커피를 타 담은 보온병 뚜껑을 열다가 콧잔등에 맺힌 개기름을 닦는다. 앞다리를 들어올려 폴짝폴짝 뛰면서 나도 좀 달라는 의사 표현을 하던 해피는 제풀에 꺾여 평상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구름과 하늘이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슬며시 붉은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또 한 차례 바람이 기습적으로 불어댔다. 약한 추위에도 민감한 팔뚝의 피부는 오들오들 잔이슬같은 소름이 돋는다. 조건반사 반응으로 팔짱을 꼈다. 진한 커피 향이 코밑을 스쳤다. 팔짱을 풀고 코를 벅벅 문질렀다. 새벽에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더니 바람이 더 차가워진 느낌이 든다.
아직도 회사에 근무하냐고 애자가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용하다고 했다. 하기야 가뜩이나 반도체 산업이 불황을 타는데도 불구하고 자리를 보전한다는 것은 여간해서 쉬운 일은 아니다.
커피가 빨리 식는 것 같아 손가락 사이에 끼여 있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커피 한 모금으로 입안을 헹구고 바로 목구멍으로 넘겼다. 목젖이 뜨거워져 팔을 들어올려 허리를 뒤로 꺾는다. 평상이 삐꺽거린다. 해피가 놀란 듯이 평상 밑에서 기어 나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외로 꼬고 쳐다본다. 커피를 마시고 나니 군것질이 하고 싶어진다. 심심해질 때 먹으라고 애자가 식탁 위에 두고 간 배 두 개가 생각난다. 누구한테 빼앗기기 전에 빨리 가져와서 먹어야 한다는 조급증이 생긴다. 맨발로 뛰다시피 한다. 해피는 멋모르고 따라온다.
식탁 위의 배는 얌전하게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다. 날름 양손에 하나씩 들고 평상으로 가지고 왔다. 배는 절반에 절반에다 절반으로 열 여섯 조각의 반달 모양으로 잘려졌다. 해피는 배 쪼가리를 날름날름 받아먹으면서도 꼬랑지는 연신 살랑거린다. 배를 집어먹고 남은 이쑤시개를 부러트려 빈 접시에 내던졌다. 흔히들 말하는 욕구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짓이다.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도 무의식에서 나왔다. 상사는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는 차원에서, 그 반대로 인재로 발굴되는 대열에 줄을 서고 싶은 자들은 나에게 접근을 했다. 자칫 내 말 한 마디에 회사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인재를 잡을 수도 있었고, 놓칠 수도 있었다. 그러면 한 쪽으로 치우쳐지지 않는 중도로 인물의 됨됨이를 살피고 상사한테 조언을 해주었을까. 여태까지 내가 은밀히 추천한 인재들이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킨 불상사를 일으킨 적은 없다. 그렇다면 주관적인 내 판단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인데 어째 자신이 없다.
어떤 조직이든지 간에 악역을 연출하는 심복이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터득했다. 교통사고로 한쪽 눈을 잃어 개눈깔을 박은 애꾸를 통해서.
재단 이사장의 비리와 횡포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유인물을 뿌린 주모자를 색출하려는 애꾸의 집착은 그칠 줄 몰랐다. 이틀 간격으로 책가방은 애꾸 앞에서 까발려졌다. 문제의 유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애꾸는 모두들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꿇고 손을 들라고 단발마를 질렀다.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책상과 책상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애꾸는 자수를 하기 전에 자기 손에 잡히면 좋지 않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렇다고 이름과 얼굴도 모르는 주모자가 지레 겁을 먹고 내가 그랬어요, 하고 나설 리도 없었다.
안되겠다 싶었던지 애꾸는 아이들의 얼굴과 복장을 면면히 살폈다. 이윽고 건우가 담배 불로 지져진 것처럼 보이는 손등에 동전 크기 만한 화상 자국이 트집 잡혔다. 왜 나만 붙잡고 그러냐고 건우는 불만을 표했다. 애꾸는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두 손을 허리에 올리는 일명 원산폭격이라는 기합으로 기선을 제압했다.
"너 담배 피우지?"
"아닙니다."
"일어나서 입 벌려 봐."
건우는 동물원 하마처럼 입을 벌렸다. 입안을 요리조리 살피고, 코를 킁킁거려 냄새를 맡고, 손가락을 일일이 검사를 해봐도 별 뚜렷한 이상은 없었다. 물증은 없어도 심증 하나만으로도 애꾸는 건우를 교무실로 끌고 갈 수 있었다. 정문을 닫을 시간이 임박해서 건우는 붉은 얼룩으로 점철이 된 얼굴을 해 가지고 교무실을 빠져 나왔다.
학교에 반감을 산 선생들의 수업을 복도에서 염탐하는 짓도 애꾸는 서슴지 않았다. 저학년 고학년 할 것 없이 이사장 똘마니, 충견, 선머슴이라는 별칭을 애꾸한테 붙여줬다. 그랬지만 애꾸는 교감으로 승진하는 행운까지 얻었다.
시기와 장소만 달랐지 듣기 거북한 별칭을 의식하고도 모른 척하는 뻔뻔함은 애꾸와 피차일반이다.
구름은 바람에 밀려 동향으로 이동을 하고 일몰을 준비하는 태양은 시시각각 크기가 달라진다. 해피의 등을 쓰다듬어 주다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그만 둔다. 논둑을 걷던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평상에 드러누워 팔과 다리를 쭉 뻗는다. 비행기가 구름에 가려졌다 보였다 하다가 영영 시야에서 사라졌다. 눈에 실핏줄이 맺혔다는 것을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게끔 피곤한 기색이 느껴진다. 한 알씩 복용하던 수면제는 내성이 강해져 약발이 받지 않는다. 뇌파 검사도 받았지만 특이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집안의 일상사는 명민이한테 초점이 맞춰졌다. 가장의 의미는 이미 오래 전에 빛 바랜 깃발처럼 퇴색되었다. 인정하기 싫은 반항보다는 심한 좌절감에 빠져드는 것이 더 버거웠다. 코앞에 집을 두고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발길을 돌렸다.
"이리로 올 줄 알았지."
해피를 껴안고 흔들의자에 앉아서 TV를 보던 애자는 예언자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은근히 과시했다. 어! 그래, 하는 대답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쉬었다. 장황한 긴 설명도 없이 내 고통이 고스란히 애자한테 전해졌다. 거기에다 응 그래, 그렇지, 그렇고 말고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과묵함은 몸 속의 노폐물을 걸러 내는 것처럼 불면증을 말끔히 삭여줬다. 그러나 빈집을 혼자 지키는 시간에는 원점으로 되돌려졌다.
옆으로 돌아누워 팔베개를 한다. 공항에 착륙을 하려고 고도를 낮추는 비행기와 이륙을 해서 고도를 높이는 비행기가 동시에 보인다. 가족들이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국내에 연고가 없는 애자한테 비행기는 제 2의 친구다. 이번 비행은 가족들을 뵙고 오는 휴가까지 겹쳐서 보통 삼 일이던 귀환 예정일이 곱빼기로 늘어났다.
새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간다. 해피는 잠에서 깨어났다. 코를 킁킁거리며 주위에 퍼진 냄새를 맡더니 몸을 한번 뒤흔든다. 어째서 그런지 오늘은 샤워도 하기 싫었다. 잠옷도 벗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는다. 할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 씻지 않고 견딜 수 있는지 한번 내기라도 하고 싶다. 집안도 역시 난장판이다. 방과 거실 바닥은 먼지를 밟은 흔적이 남겨졌다. 욕실 바닥은 물때가 끼어 한 밤중에 생리 현상을 해결하러 들어갔다가 미끄러질뻔한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다. 비누와 치약 거품이 허옇게 말라붙은 거울은 면도를 할 때마다 임시방편으로 샤워기로 물을 뿌린다. 구겨진 휴지와 찌그러트린 치약 껍데기, 빈 샴푸통, 조각비누로 가득 채워진 휴지통이 보기 싫어도 버리고 싶은 의욕은 안 생긴다. 그래야만 애자의 부재를 절실하게 실감할 수 있다. 방과 거실을 돌아다니며 어질러진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그리워하는 것도 행복이다.
평사원 시절, 하루의 일과 중 규격화된 공간에서 내 의지에 상관없이 타의에 의해서 절반 이상이 좌지우지되었다. 그에 따른 무기력은 '여기 아니면 밥 먹을 곳이 없냐는' 푸념이 되었다가 그 다음날이 되면 사그라졌다. 그리고 목을 죄어드는 것 같은 긴장감과 뒤섞인 피곤에다 뻣뻣하게 곤두선 촉각은 술과 쾌락으로 풀었다. 뿌리가 뽑히는 치유책은 아니었지만 그 이외의 방편은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퇴근 후 마실 수 있고 흔들 수 있는 곳이면 얼마든지 대환영이었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눈길만 마주쳐도 영혼이 빼앗겨 서로가 이끌렸다. 슬그머니 빠져나와 호텔로 향해도 동료들이 기꺼이 모른 척 해주는 아량도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객실에 낮손님이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어도 개의치 않았다. 부리나케 옷을 벗고 섹스를 하고 나면 눈동자는 나른하게 풀렸다. 결혼을 전제로 한 섹스가 아니라 옷매무새와 머리를 고치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꾸며대는 짓도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
내가 아니면 애자, 애자가 아니면 내가 먼저 의도를 밝히는 호텔에서의 섹스가 스릴이 있었다면 밤하늘의 별들이 내려다보는 평상에서의 섹스는 안정되고 달콤했다. 그 시간은 하늘과 땅의 기가 일치한다는 자정이었다.
"너무 좋았어."
애자는 드러누운 채로 얼굴을 문지르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한쪽 팔을 뻗어 라이터를 집어 달라는 시늉을 했다. 상반신을 일으켜 라이터를 집어들자 아예 불을 붙여 달라고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한쪽 손을 이마에 얹고 연기를 훅훅 내뿜다가 내게로 돌아누워 젖꼭지를 만졌다.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쉬운 것이야."
문은 닫혔지만 언제 어느 때라도 열 수 있도록 애자는 빗장을 걸어 놓지 않는다. 과거처럼 절정기에 올려놓고 급속히 냉각시키지도 않는다. 서두르지도 않는다. 강요하지도 않는다. 우회적으로 잠재의식도 건드리지 않는다. 나의 의지에 맡겨 놓고 따라오고 있다. 설상가상 부부관계를 언제 했는지 기억이 까마득하다. 새벽녘만 되면 성욕은 샘물이 고였다 차 오르는 것처럼 발바닥 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아내를 껴안고 살살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허벅지 살을 맞비벼도 반응은 없었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인지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분간이 안된 상태에서 내리 꽂는 좌절과 모멸감에 성욕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내 위치를 유지하려면 그러한 모순을 입밖에 내는 경거망동한 짓은 절대적으로 금물이다.
"그 자식은 내가 연극을 했다는 것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어. 멋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바보라고 하지."
성공한 이민 일 세대 후손답게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남편은 그어진 선 밖으로 애자를 밀어내지 않았다. LA근교의 수영장까지 갖춘 대저택은 마음의 감옥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집안의 대를 이을 아이가 생기기를 기다리는 시어머니의 기대는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가중시켰다. 애자는 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어 발버둥을 쳤다고 한다. 순종의 미덕을 발휘하면서 견디면 손에 쥘 수 있는, 뭇 여성들이 한번쯤 아닌 그 이상으로도 꿈꿀 수 있는 삶을 애자는 과감하게 차 버렸다. 잠자리에서 내 이름을 불러 이혼을 유도해서 성사시켰다. 물론 단 한번으로 목적을 달성한 것은 아니다. 여자로서 견딜 수 없는 주변의 눈총과 모욕은 나를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견뎌 낼 수 없었다고 했다. 날개를 다시 달은 애자는 나를 수소문하고 근황을 면밀히 조사하는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지난달에는 인공수정을 해서라도 예쁜 딸을 하나 가졌으면 하고 혼잣말을 해서 진위 여부를 가리려고 정말 그럴 마음이 있냐고 되물었다. 애자는 이마에 손을 갖다 대고는 살포시 웃었다. 그리고 그 얘기는 두 번 다시 꺼내지 않는다.
결혼 전, 나 모르게 뱃속의 아이를 지워 버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 아이가 몇 살이나 되었을지 헤아려 본다. 명민이보다 두 살이나 많은 열 다섯 살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가벼운 신음이 나오려고 한다. 입술을 살며시 깨문다.
명민이를 요모조모로 살핀 의사는 최종적으로 장애 판정을 내렸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하면서도 염려를 놓지 않았던 아내는 넋을 잃었다. 보기가 민망했던지 의사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파일 철을 제자리에 꽂았다. 거기까지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아내가 눈물을 흘려도 의사는 여전히 고개를 외로 꼰 채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야박하게 군다는 생각에 주먹을 쥐었다. 아내는 무엇에 홀린 듯이 벌떡 일어나 의사를 가로막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명민이는 화들짝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데도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전적으로 내 잘못이에요."
억지를 부리는 것도 아니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해 놓고는 책임을 다 할 때까지 자기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아내는 매달렸다. 싹싹 손까지 비비며 제발 이라는 말을 연발하는 호소력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답변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고 하는 아내한테 조건을 제시했다. 정상아로 되돌려 놓는 특수교육 비용은 내가 얼마든지 부담을 할 테니 한시라도 명민이 곁을 떠날 생각은 하지 말아 달라고.
적극적인 노력에 비해 결과는 소극적이다. 명민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자폐증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차돌처럼 딱딱한 내 인내심은 밑바닥을 치려고 한다. 이런 마당에 아이를 다시 가질 수 있다면 삶의 대단한 활력소가 될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뇌와 방황은 명민이 하나로 끝나야 한다고 하는 아내의 주장을 존중한다. 언제든지 나를 놔줄 수 있다면 떠날 의향은 있다. '자폐아를 부부애로 보살핀다는' 미명은 오색실을 요리조리 얽어서 곱게 다듬어진 매듭이다. 그 매듭을 억지로 풀어 버리는 독선을 부리면 나는 도마 위에 올려진 고기처럼 난도질을 당한다.
나뭇가지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던 새 한 마리가 벌레를 발견하고 날렵하게 날갯짓을 했다. 그러고 보니 잠자리 떼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해피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웬만한 소리 정도는 민감하게 반응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구분할 줄 안다. 그리고 같이 자다가도 둘의 행동이 진지하다 싶으면 자리를 피해 주는 예의도 갖출 줄 안다. 안 그랬으면 온갖 체위를 구사하는 섹스는 불가능했다.
칠월인지 팔월인지 확실하게 구분이 안 된다. 해피를 데리고 일산 호수공원으로 바람을 쐬러 간 그 날은 무더위가 한물 가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것 같이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해피는 꼬랑지를 연신 흔들어 대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혹시라도 걸음을 놓쳐 길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간간이 멍멍 짖으면서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뒤따라오던 얼굴에 병색이 완연한 중년 부인이 두 분께서 아주 다정스럽게 보인다고 눈웃음을 쳤다. 문득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을 아내가 생각났다. 훨훨 날아갈 듯이 가벼워진 발걸음은 납덩어리를 매달은 것처럼 무거웠다. 출발한 곳으로 거의 다 다다를 즈음 갑작스레 천둥과 번개가 쳤다. 주르륵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주차장까지 걸어갔다.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몰골로 핸들을 잡은 손은 마비가 오는 것처럼 따끔거리고 저렸다. 윈도우브러쉬가 좌우로 움직이는 틈새를 놓치지 않으려고 부릅뜬 눈으로 정면만 응시했다. 애자네 집 앞에 도착하는 즉시 무거워진 눈꺼풀을 손으로 비벼 뭉쳐진 근육을 풀었다.
"미안해. 급한 일이 생겼어."
그래 그러면 빨리 가 봐야지 하면서도 미련을 버리기 싫어하는 애자는 찌푸린 눈살을 풀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셋이 살기에는 넓어 보이는 집은 아내 혼자서 지키고 있었다.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명민이를 출장과 귀빈들 접대 핑계를 대고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 미안하고 꺼림칙했다. 하지만 차도가 좀 있냐고 묻는 말에도 감정의 변화는 없었다. 완전하게 거동은 못하지만 열은 많이 내렸다고 고분고분 대답을 하고는 아내는 바늘에다 실을 꿰었다. 흰색 천 바탕에는 바구니에 푸짐하게 담긴 과일 형상을 한 밑바탕 그림이 그려졌다.
"명민이 책상에 깔아 주려고 십자수를 놓는 거예요."
흘끔 나를 쳐다 본 아내는 바늘을 꽂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붉은 실이 숨소리조차 내는 것도 부담스러워진 분위기 속에서도 천 위에 점으로 박히다가 점점 더 복숭아의 형상에 가까워졌다.
"퇴원은 언제쯤 할 것 같아?"
"아직은 잘 몰라요."
"왜 폐렴이 걸렸을까?"
"지난번 비올 때 우산을 안 쓰고 집에 온 것이 화를 불렀어요."
둘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는 굳이 꺼내지 않아도 정답을 알 수 있는 주제였다. 시간이 흐르면 좀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은 밧줄 하나에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알피니스트처럼 지탱이 될 뿐이다.
애자가 없는 공백을 하루라도 빨리 메우기 위해 아내를 선택한 것은 나의 주관이었다. 그렇지만 아내의 태도는 무언가에 갇힌 듯이 거부감을 나타내다가도 아닌 것처럼 모호했다. 부담 없고 편안하게 대할 수 있었던 애자와 비교가 되면서 난기류를 만나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비행기처럼 나는 불안정해졌다. 불안정은 나무 밑동에 기생하는 잡초처럼 끈질기게 붙어 다녔다. 안식처가 되어야 할 집은 거리감이 생겼다.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혼자서 남해안 일대를 순례하는 여행도 갔다오고, 암벽을 오르기도 해보고, 술집에 진열된 술을 죄다 마셔 보고 취해 보기도 하고, 인적이 드문 밤길을 걸어 보기도 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아내의 임신으로 인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책하고 가까워졌다. 성공한 기업가의 자전적 소설은 나의 흥미를 가장 많이 끌어 잡아당겼다. 책에 나온 대로만 하면 나도 굴지의 재벌이 된다는 확신이 섰다. 착각이라고 빈정거리는 주변 인물들의 입을 봉쇄하고픈 오기도 생겼다.
일중독자가 되기로 하고 한 시간 먼저 출근해서 자정 무렵까지 책상을 떠나지 않았다. 시험삼아 해본 짓이었지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잡념이 말끔히 가셔졌다. 부수적으로 일에 대한 집착이 생겼다.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다는 말은 나한테만큼은 씨알도 안 먹혔다. 일거리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 동분서주하는 나를 바라보는 부하 직원들의 눈은 불만과 원망으로 뒤섞였다. 하지만 정상적인 것에서 벗어나도 건설적인 면이 뚜렷하면 달리 보는 눈은 따로 있게 마련이었다. 일욕심에 관한 소문은 그룹을 총괄하는 최고 경영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그룹의 이익을 절대적으로 대변해야 하는 자리에 나를 심어 놓았다. 기회주의자라고 해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강자들 앞에서는 무조건 고개를 숙일지언정 약자들의 권리와 호소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겉과 속을 달리해서 얻는 쾌감은 명민이에 대한 강박관념을 감추는 삶의 의욕으로 전환되었다. 대단하다, 훌륭하다, 존경한다, 당신 같은 사람을 본받아야 한다, 장애아 가족들의 등불이라는 등 각종 화려한 수식어만으로도 나를 속이는 짓은 대성공이었다. 그런고로 나를 흠집 내려는 자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루살이들의 군무가 눈을 어지럽힌다. 애벌레로 수년간 물 속에 갇혀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을 자축하는 듯 하다. 혹평을 하자면 내일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즐길 수 있는데까지 즐겨 보자는 광란이다.
강에서 배를 타고 노를 젓던 사내가 일어나서 어깨에 걸쳤던 그물을 던졌다가 끄집어냈다. 그물에 걸려든 고기가 몇 마리에 불과했는지 사내는 다시 노를 저어 북상을 한다. 저공으로 날던 헬기가 지나가면서 일으킨 바람과 소음에 놀란 해피가 겨드랑이를 파고든다. 으스스 한기가 들려던 참이라 얼른 해피를 한 팔로 감았다. 하늘을 쳐다보다가 한 점이라도 부끄러움이 없었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냉철하게 판단한다면 길은 하나다. 하지만 나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 길을 걷다가 중간에 서 있는 중이다.
내가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은 애자와 나 이외는 아무도 모른다. 회장이 최종 마무리를 호텔에서 하도록 주선을 했지만 사양을 했다. 아내는 서울 외곽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는 산사에서 휴식을 취하는 줄 알고 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최고 경영진에서 내려보내 준 쪽지와 인사기록 카드를 세밀히 검토하면서 고뇌하는 모습을 아내는 쭉 지켜봤다. 그러다가 안쓰러워 하는 얼굴을 해 가지고 내가 상당히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고 말꼬리를 흐렸다. 썰렁하기 그지없었던 분위기가 모처럼 화기애애하게 돌아갔다.
"일도 중요하지만 건강도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해 놓고는 아내는 보약이 담긴 사기대접을 내 옆에다 살며시 내려놓았다. 코끝이 찡했다. 어머니 몰래 시앗을 두고 왔다 갔다 하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뇌리에 깊이 박힌 아내다. 첫날 밤 행사를 치르기 전에 에로물 영화에 나오는 여배우의 표정은 아니더라도 한껏 최고의 절정기에 다다랐다는 감정의 표현은 나올 줄 알고 잔뜩 기대를 품었다. 그랬건만 아내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혹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하고 당혹스러웠다. 날이 뿌옇게 새어드는 빛이 커튼 틈새로 보일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이박 삼일의 여정은 수시로 뒤바뀌는 억측을 남겨 둔 채로 마무리를 지었다.
밀어낼 듯이 하다가 끌어안을 듯이 하는 애정이라는 두개의 저울판 한쪽에다 이혼을 올려놓고 다른 한쪽에다 나를 올려놓으면 이혼은 내려간다. 나 대신에 아내를 올려놓으면 이혼은 올라간다. 그와 같은 예견을 무시하고 내 뜻대로 하기 전에나를 노리는 적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기에 현실에 안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식과 위선은 절대적으로 부여된 의무다.
붉은 빛으로 완전히 물들여진 서쪽 하늘은 흡사 세상사의 온갖 풍파를 다 겪고 나서 엄숙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의식을 치르는 것 같다. 해피는 귀를 쫑긋 세우고 대문 쪽을 향해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엊그제부터 이맘때면 나타나는 고양이가 대문 주위를 기웃거린다. 고양이는 해피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순순히 물러났다. 잠시 멈췄던 바람이 다시 분다. 잠옷 틈새로 한기가 스며든다. 팔 다리가 움츠러든다. 바람결에 이리 저리 벼들이 율동을 하듯이 움직인다. 강변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대낮에 볼 수 없었던 차량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다들 갈곳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외로워지려고 한다. 해피는 손등을 핥는다. 배가 고프다는 의사 표현이다. 평상에서 일어났다. 자기한테 밥을 주려는 것을 눈치챈 해피는 꼬랑지를 흔들고 앞장을 선다.
커튼으로 외부의 빛을 차단한 집안이 을씨년스럽기는 불을 밝혀도 마찬가지다. 설거지를 미룬 채 싱크대에 아무렇게나 처박힌 그릇들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쉰다. 냉장고에 가득했던 인스턴트 식품이 절반이나 줄었다. 해피의 밥에 섞어 주는 고기는 먹기 좋게끔 얇게 썰어졌다. 소파와 같이 나란히 하고 있는 원목으로 만들어진 해피 집에서 먹이통을 꺼냈다. 해피는 엉덩이를 깔고 밥과 고기를 섞는 내 손놀림을 보고 있다. 머리에 입력된 식사시간이 초과하자 해피는 제 자리에서 펄떡펄떡 뛰면서 빨리 달라고 보챈다. 먹이통을 내려놓자 부리나케 달려들어 먹어 치운다.
해피가 밥 먹을 동안 애자와 알몸으로 껴안고 뒹굴었던 방 유리창을 통해 바깥을 본다. 내일을 기약하며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태양은 마지막 혼을 불어넣듯이 붉은 빛을 마구 토해내고 있다. 지구 반대편 나라 사람들은 아침을 맞이하려고 준비 할 것이다. 이틀 후 근무를 마치고 이 시간에 들어올 애자가 문을 여는 순간 심란한 생각이 안 들도록 해야 한다.
청소를 하기 전에 설거지부터 먼저 하려고 행주에 세제를 묻혔다. 집안 일은 설거지뿐만 아니라 청소도 해본 적이 없다. 쓱쓱 행주로 그릇을 문지르자 말라붙은 밥풀때기와 양념 찌꺼기들이 거품에 휩쓸린다. 수도꼭지를 온수로 돌린다. 거품이 묻어 있는 그릇들이 온수를 뒤집어쓴다. 마른행주로 그릇에 남은 물기를 닦아 선반에 올려놓았다. 그릇은 점포 진열장에 전시된 그릇처럼 반질반질 윤이 난다. 혼자 감당하기 어렵게 보였던 일이 술술 풀린다. 이 감각을 그대로 유지하면 청소도 수월하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흥이 나고 어깨춤이 절로 난다.
시도 때도 없이 명민이가 해대는 발작 증세를 막으려다가 힘에 부친 아내는 혼절을 해 버렸다. 집안 여기 저기에는 명민이가 혼잣말을 하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진 물건들로 난장판이 되었다. 내가 애지중지하던 오디오는 날카롭고 둔탁한 물건에 긁히고 부딪힌 자국으로 산뜻하고 품위가 있어 보이는 제 모습을 잃었다.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문 하나는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깨진 유리 파편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도 붙잡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명민이를 때릴 듯이 윽박지르기도 해보고 달래 보기도 하면서 겨우 진정시켰다. 텅 빈 주차장이 차들로 빽빽이 메워졌다. 그제서야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알아차렸다. 정신을 가다듬은 아내는 내가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혼자서 일어나겠다고 손을 저었다. 내가 오기 전에 수습을 하려고 해도 명민이가 워낙 거세게 나와서 손쓸 겨를도 없었다고 했다.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아내는 차분하게 어질러진 집안을 치웠다. 나는 뒷짐만 지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설거지를 다 끝내고 청소를 할 차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잠시 우두커니 서 있는다. 구겨진 채로 침대 위에 나뒹굴었던 이불이 눈에 뜨였다. 단정하게 개어서 붙박이장에 반듯하게 포개 놓은 이불 위에 올려놓았다.
진공청소기 손잡이를 잡았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던 해피는 소파 밑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숨겼다. 이참에 약을 올려 주려고 먼지를 빨아들이는 흡입력을 최고로 올려놓았다. 윙윙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나오는 동시에 몇 겹의 층으로 쌓였던 먼지는 청소기 안에 내장된 봉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손길이 자주 닿지 않는 곳에 눌어붙은 먼지도 청소기로 빨아들였다. 해피는 청소기를 피해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내가 걸레를 들자 소파 위로 올라갔다. 걸레는 기름칠을 한 것처럼 쓱쓱 앞으로 잘 움직여진다. 설거지를 할 때처럼 일하는 기쁨이 생긴다. 가구와 가전제품 그리고 애자가 해외를 들락날락 하면서 수집한 장식물에 앉은 먼지도 닦아 냈다.
맨 마지막으로 청소를 해야 할 곳은 욕실이다. 물때로 찌들은 타일을 닦으려고 철수세미에다 세척제를 묻혀 마구잡이로 문지른다. 쓱쓱 거울과 욕조를 비롯하여 세면기와 변기에다 바닥 타일까지 찌들어 버린 물때가 닦여진다. 세척제 거품을 씻어 내려고 샤워기로 물을 뿌린다. 오물이 하수 구멍으로 쏙쏙 잘 빠져나가고 음습한 기운이 돌던 욕실이 한결 밝아졌다.
청소가 다 끝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해피는 발뒤꿈치를 살살 물으며 장난을 건다. 창문을 열었다. 하늘에는 별빛이 안 보인다. 강 건너 광고탑을 밝혀 주는 불빛이흡사 뱃길을 밝혀 주는 등대처럼 궁상맞고 현실감이 없다.
반면에 내일이 다가온다는 현실감이 생긴다. 내가 작성한 보고서는 극비리에 회장이 검토를 한다. 최종적으로 좋다는 회장의 결재가 떨어지면 정리해고 대상자들을 일대일로 대면하는 일은 내 몫으로 돌아온다.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예상문제를 만들고 대비책을 세운다. 순순히 체념하면 고개를 숙여 사죄를 구하는 모양새를 하고, 이럴 수 없다면서 길길이 날뛰거나, 뭐가 뭔지 모르겠다, 억울하다면서 나를 궁지로 몰아넣으면 경영주 방침대로 했다면서 뻗대는 냉혈한이 되기로 한다.
내일로서 악역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은 요원한 얘기다. 족쇄는 풀릴 기미가 안 보인다. 머리가 띵해진다. 창턱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턱받침을 한다. 강 쪽에서 불어닥치는 바람이 시퍼런 칼날을 세우며 달려드는 것처럼 얼굴을 바싹 조인다.
반짝거리면서 날아가는 불빛은 비행기다. 애자는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다고 했다. 비행 도중 기체에 이상이 생겨 추락을 하면 깨끗이 죽을 수 있도록.
일본 우익 단체의 일원이었고 포르노 배우였던 그의 이름이 기억이 날듯 말듯 가물가물하다. 그는 세스나기를 직접 몰고 록히드 항공사 뇌물 사건에 연루된 고다마 국회의원 집 주변 상공을 선회하는 척 하다가 곤두박질했다. 집은 화염에 휩싸였고 그의 시신은 형체도 알아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오그라들었다. 고다마는 간발의 차이로 화를 면했다.
정확한 사유는 아닐지라도 그는 세스나기 조종간을 잡기 전에 자신을 붙들어매고 있는 그물을 걷어 내고자 했을 것이다. 얽히고 설킨 그물은 실체도 없다. 그랬기에 붙들어 매고 마음대로 지지고 볶고 때리고 짓이겨 버리고 싶은 갈망에 사물을 구별하는 판단력도 희미해졌을 자신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나한테 그물을 던져 상처투성이로 만들었을까. 가상의 공간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물어 봐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상처는 아물기도 전에 덧나기만 해서 겹겹이 층을 이루었다. 반짝거리는 불빛이 하나가 없어지면 다시 하나가 생긴다. 내가 불빛이 되어 날아가고 싶다. 깍지를 끼고 있는 힘을 다해서 손가락을 꺾는다. 우두둑 뼈마디가 꺾이는 소리가 난다. 손가락은 구십도 각도에서 더 이상 꺾이지 않는다.




김동승1956년 서울 출생. 2000년 문학21에 단편 <갈등>으로 등단. 창작집으로 [나는 세스나기가 없다] 가 있음. 본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