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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 제23회
호 도 백
김 열
나는 한동안 낡은 옥편을 뒤적거리며 이름에 이 뜻 저 뜻을 심어보곤 했다.
따뜻한 겨울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휘황한 거리를 그는 찾아왔다 그의 긴
방랑이 풍향기처럼 자꾸만 꺾이는 길을 스치던 중이었다 환한 웃음과 함께 음계
를 기억하지 못하는 피리를 누굴 부르는 듯 불어댔다 삐이 삐- 삐 삐 삐- 음계
를 가진 사람들의 수상한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리를 불어댔다 바람에
숭숭 뚫리고 남은 말들을 더듬더듬 이어갔다 나는 먼지 내리지 않은 눈 속, 아
무도 알려주지 않은 아득하고 신비한 땅으로 둥지를 틀었다
일기예보를 어긴 적설의 꿈들이 빙빙 공중을 떠돌던 날, 벙거지를 눌러쓰며
맑은 피처럼 씨익 웃으며 한 마디 물어왔다…… 과연 대답을 기다린 것일까, 다
시 맑은 피처럼 웃었다 그 때 내 입 속에서는 이미 얼음의 뼈들이 엉기고 있었
다 내 가슴이 누구와의 단절임과 시간이 정지할 수 있음을 그 때 알았다 막연히
부풀던 그리움들과 열망들이 차가운 시멘트로 굳을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알았
다 (나를 두고 간다) 그는 뒷주머니에 피리를 꽂고 눈발 속으로 걸어갔고, 이후
서로의 길은 한번도 교차하지 않았다 계절이 가기 전, 영문을 모르는 채 바삐
청춘을 기대려던 거리, 그 낯설어진 거리에서 독감 같은 방황을 했지만 계절은
몇 개의 장면을 뜯어내고 남은 길들은 모두 딱딱한 구조물로 걸어갔다
겨울은 생각보다 빨리 어김없이 왔다 또 다시 외풍은 진상을 드러내지 않았다
끝내 추위를 다 태우지 못하고, 결국 추위와 함께 살았다 간혹 마음은 치달아
아득한 지평을 향해 칼날처럼 달려가곤 했지만 숨은 공포처럼 언제나 돌아오는
길과 맞닿아 있었다 무심히 떠도는 거리의 주술과 소문에 묶였다 풀리면서 정체
를 잃은 주검들에 대한 보도를 듣곤 하였다 이불 속에서 주먹을 쥐는 버릇이 생
겼고 아주 가끔씩 불을 끌 때 점멸 스위치를 누르곤 한다 또 아주 가끔씩은 서
너 숨 앞서 죽음을 감지할 때 어쩌면 존재의 마지막 플래시처럼 터질, 저 먼 인
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삐이 삐- 삐이 삐- 눈바람 스친다
피리 구멍 속에서 호도백이 따뜻하게 산다
차갑게 죽어가고 있다
김 열(시인) --------------
민족문학작가회의 대전충남지회 회원. 1966년 충남 천안 생. 현재 한국정보기술
시스템 근무.
처음 올린 날: 2001년 11월 26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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