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제30회

선생님! 그 텃밭에 가면....

-고 명천 이문구 선생님 영전에

안 학 수(아동문학가)

무례무지無禮無知한 우자愚者가 모처럼 그 앞길을 지나다가 둘러봅니다. 선생님이 생각나거나 그리워서 들른 것은 아니고 모든 것이 잘 있는지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아니, 아직도 일구셔야 할 그 글밭의 고랑이 먼데 너무 일찍 펜을 놓고 떠나신 선생님이 야속해, 가슴속에 담긴 선생님과 그 기억들을 다 버리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우자가 경영하던 금은방에 처음 들르신 해가 1990년 초쯤이었습니다. 선생님을 불온한 반정부 운동자쯤으로 여기며 아내에게 한내문학회에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말라고 당부했을 정도로 우자가 무지했던 때였습니다.
"왜 금은방에 걸린 시계들은 모두 제각각 시간이 다른 게요?"
"다 지덜 개성대루라서 틀려유."
"쥔냥반 닮은 게로구먼."
웃음을 머금고 불쑥 던지신 질문이 우자의 기억에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버려도 이 소중한 기억 하나만은 버리지 않겠습니다.
손수 심어 놓으신 매실나무가 봄 냄새를 맡고 새잎을 돋기 위해 가지마다 붉게 물을 올리고 있습니다. 단감나무, 호두나무, 듬직한 은행나무까지 모두 겨울을 잘 나고 튼튼합니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부러질 것 같아 받침대로 잡아주셨던 소나무도 이젠 제법 튼튼합니다. 돌 판 걸쳐놓고 고기 구워 소주한잔 마시자며 마당에 돌덩이를 쌓아 만드신 화덕도 해놓으신 그대로 대기하고 있습니다.
「길없는 마을」의 소설가 故강순식 선생 문학비 제막식 전날 밤에 나주에 도착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턱이 멍멍한 날의 아침이면 어김없이 룸메이트에게'이가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잤다'는 항의를 듣는 우자였는데, 그 날은 얼마나 심했던지 턱이 멍멍하다 못해 얼얼했습니다. 초췌하신 선생님의 얼굴을 뵙고 통 못 주무신 것을 알았습니다.
"엊저녁에 지가 자갈 한가마닐 깨밀어 처먹는 바램이 선생님은 통 뭇 주무신개벼유."
"나도 코나발 불며 정신 없었는디 알간? 먼 곳까지 운전해서 피곤했던 게로구먼."
우자를 원망하시기는커녕 위로하시던 기억은 지금까지 너무나 죄송스러워 도저히 버릴 수 없겠습니다.
가꾸던 텃밭 가족들도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대천 장날 손수 사다 심어 놓으신 목단 포기들이 평소 믿어주셨던 만큼 성성합니다. 부지깽이로 쓰시던 명아주 지팡이도 문설주에 기댄 채 선생님을 기다립니다.
포항의 동화작가 故 손춘익 선생의 아들 결혼식 때도 기억합니다. 우자가 문단의 큰 문인들을 만나고 생애 최고 비싼 요리와 술을 먹어본 날입니다. 손춘익 선생의 열렬한 팬이요 포항제철 이사란 분이 베푸는 자리로서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화기애애하다 취기몽롱하며 밤늦도록 즐거웠노라고 다음날 모두 자랑하는데, 선생님은 거꾸로 우자를 챙기시며 끝까지 맨숭맨숭하시다 일찍 여관에 드셨던 일도 버리기엔 너무 송구한 기억이라서 이 기억 또한 못 버리겠습니다.
서산 갯마을을 거쳐 안면도 끝 영목까지 가서 후배문인들(이정록 한창훈 유용주)과 술 한잔 나누시다 불쑥 서주교의(對外로는 西主敎. 對內로는 西酒敎라 칭함) 창단을 권고하신 일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 때 문인끼리는 가까이 있어도 안되고 멀리 떨어져도 안 좋다는 뜻으로 우자의 무리에게 불가근불가원不可近不可遠이란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너무 진하게 박힌 기억이라서 버릴래 버릴 수 없겠습니다.
겨울을 잘 견뎌낸 부추는 푸르게 새싹 돋고 돌나물과 다북쑥도 새순이 보입니다. 냉이는 아직도 선생님의 귀천을 믿을 수 없는지 싱싱한 봄 냄새로 단장한 채 선생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혼자 사는 여인(처녀? 이혼녀? 미망인? 지금도 모름.)이 선생님과 몇몇 사람을 초대해 도화담까지 갖던 일도 생각납니다. 융숭한 대접을 받고 모두 거나할 무렵 선생님께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시자 모두 영문을 모르고 따라나서는데 노총각 시인 한 사람만 만취한 척 머뭇거리며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아 정신이 말짱했던 우자가 총각시인을 챙긴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선생님은 불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이 재숫박머리 웂는 예수쟁이! 그냥 두고 가지 뭘 다 끌고 가느라고 지럴이여!"
선생님의 깊은 뜻을 이제야 이해한 우자는 그 타성의 옷을 벗지 못해 여태 눈치 없고 재수 없는 예수쟁이에 불과합니다. 이 기억 또한 버리기엔 너무 아파서 그냥 두렵니다.
선생님의 서재는 차마 들여다보지 못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손때묻은 서적들과 물품들을 보면 금방이라도 부르시며 나타나실 것 같은 그 기운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장마철마다 빗물이 천장으로 샌 까닭은 떨어진 은행잎이 처마의 홈통을 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20.5평의 이 조립식 건물은 우자의 졸속 설계와 무성의 한 감독으로 아쉬움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렇게 항상 어디 한곳이 부족한 우자였기에 정녕 버리고 싶은 기억인데 선생님께서 우자 부부에게 입주 기념으로 내리신 김지하 선생의 난 그림 한폭이 너무 아까워 못 버리겠습니다.
허구헌날 오뎅국물에 소주만 찾으며 오늘도 마시자 거나 오늘만 마시고 말자 거나 오늘은 절대 안 마신다고 장담하다 코 깨지게 마셔버리거나 오늘중에 끝장내자고 마시는 오가 사 형제(한내문학회원 가운데 별명이'오늘도, 오늘만, 오늘은, 오늘중'이라고 있었음.)들을 향해 "이젠 좀 좋은 안주랑 비싼 술로 삶의 질을 높여봐."하는 농담 속에 후배문인들이 건강을 염려하고 아끼시는 마음을 보이셨습니다. 이도 오래오래 버리지 못할 만큼 너무 진한 기억입니다.
겨울마다 동치미를 담그셨던 바탱이도 그자리에 대기해 있고 잡초 속에 옹기종기 장독대를 이룬 옹기 가족들도 모두 잘 있습니다.
무시에 불쑥불쑥 찾아뵙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우자의 유치하고도 좀스러운 속내 이야기나 무지무식하고 조잡한 주장이라도 끝까지 진지하게 들으시며 토론에 응해주시고 격려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이제 어느 누가 어리석고 못난 이 우자의 이야기를 선생님처럼 들어주겠는지요. 우자의 내면에 화인처럼 박히고 정신으로 배어들어 죽도록 못 버리고도 영영 못 버리게 되었습니다.
잘 지내고 있는 여기의 모든 것들에게 다 쏟아주려던 기억들을 끝내 하나도 못 버리고 그냥 돌아가야겠습니다.
전기 안전스위치가 내려갔다거나 보일러가 안 돈다고 우자를 믿고 부르시던 고마운 말씀이 지금 또 환청으로 쟁쟁하게 들립니다. 큰 소리로 대답을 하며 선생님께 달려가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안학수/아동문학가

처음 올린 날: 2003년 3월 21일(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