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삿뽀로 공산당

이성아





1.

삿뽀로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간사이공항이 가라앉고 있다면서요?"

H선생의 목소리다.

"네, 그래요. 그래서 영종도공항이 허브공항이 될 거예요."

N교수의 냉정한 대답. 당신네 땅이 가라앉는다는데, 묻지도 않은 영종도 이야기를 한다.

"무서워서 어떻게 살지?"

다시 H선생.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나는 N교수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없다. H선생의 말은 좀 잔인하다. 천재지변이 일상이 되어버린 나라의 국민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N교수는 아마, 눈가에 예의 잔주름을 잔뜩 매단 채 소리 없이 웃기만 할 것이다. 조금은 씁쓸한……. N교수의 그런 표정을, 나는 알고 있다. 한 지붕 아래서 십 년 가까이 남처럼 살고있는 아내. 무작정 말이 좋아서 학교를 빼먹고 경마장으로 달려가지를 않나, 안 그러면 목장으로 가출해버리는 중학생 아들, 혼전 동거 중인 첫째 딸, 몸이 약한 둘째 딸……. 학문에 관한 한 논리정연하고 분석적인 N교수도 가족 문제만 나오면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야기의 끝은, 잘 놀다가 장난감을 흩어 버리고 심술을 부리는 아이처럼, '몰라, 나도 몰라'하며 쓸쓸히 웃어버리는 것이었다.

바다는 고요하다. 공항 청사가 바다 한가운데 섬처럼 떠있기 때문이다. 바다 건너 오사까가 옅은 해무에 가려 가물거린다. 서울에서는 흔연히 술을 마시고 노래방도 가곤 했지만, 함께 여행을 하기에 우리 세 사람은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다. 나는 내가 앉아있는 소파가 바다에 둥실 떠서 흘러가는 듯한 열락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삿뽀로 이야기가 나온 건, 첫 눈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오르기 시작하던 초겨울 무렵이었다. 안식 휴가를 받은 N교수의 서울 체류 기간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 기간 내내 그는 H선생의 소설 번역 작업에 몰두했다. 제주 4.3문제에 관심을 가진 그에게 내가 H선생의 소설을 소개하자 단박에 그 소설에 매료되어 아예 번역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십 년 가까이 한국을 오가며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한 덕에 이제는 한국어로 농담까지 할 정도의 한국통이었지만 제주 사투리를 번역하는 것은, 지구를 들어올리는 것만큼이나 힘겨웠다고 털어놓았다.

곧 서울을 떠날 N교수의 환송을 핑계로 모여 앉은 술집의 하얀 회벽에 '러브 레터'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무연히 그것을 올려다보던 내가 물었다.

"저기가 어디예요?"

"아, 저 영화, 오따루예요. 삿뽀로에 있는…, 제가 대학을 다닌 곳이 바로 저기예요. 정말 눈이 많이 와요. 일년에 반은 눈으로 덮여있어요."

N교수는 열에 들떠서 말했다. '러브 레터'는 우현과 함께 본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오니 신기하게도 영화 속처럼 밤하늘에 눈송이가 날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우현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여자를 끝까지 기다려주는 남자, 참 멋지지 않아? 나는, 펄펄 날리는 눈송이를 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그래, 멋져. 그런데 내가 남자라서 그런가? 난,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그 여자가 더 멋지던데? 그것도 이미 죽어버린 남자를 말이야. 그러면서 우현은 멋쩍게 웃었다. 그때는 별 생각없이 했던 그 말이 시간이 흐를수록,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아프게 상기되곤 했다.

"이 소설 번역하는 걸로 학교에서 연구비를 받을 수 있을지 몰라요. 혹시 그 돈 나오면, 삿뽀로에 같이 가요."

H선생과 나는, 좋다고, 꼭 초대하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그건 다분히 술자리의 흥취에서 나온 즉흥적인 것이었으므로, 나는 곧 잊어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눈이 많이 오는 곳이건, 비가 많이 오는 곳이건,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우현이 불쑥 한국을 떠난 후,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바람처럼 떠돌고 있는 우현의 닻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우현의 방랑이 예상외로 길어지면서 내가 닻이 아닌 덫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들기 시작했다.

N교수는, 삿뽀로 눈 축제가 끝난 마당이라 패키지 가격이 무척 싸다며, 우리를 초대했다. 관광 같은 걸 할 기분도 아니었고, 눈이라면 서울에도 푸지게 내렸지만, 나는 서울을 떠났다. 아무런 설레임이나 기대도 없이……. 할 수 있다면 모두 다 잊고, 지난 시간을 타임캡슐처럼 눈 속에 봉인하고 싶었다.



2

백 여 년 전, 제국주의 열강이 탐험이라는 미명 아래 마구 파헤쳐 놓은 사막에 미지의 신비는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지구상에 더 이상 탐험할 곳은 없는 것이다. 미지의 세계가 사라진 자리에 권태만이 식곤증처럼 부풀어오르고 있다.

중국의 사막을 헤매다 중앙아시아로 들어간다는 우현이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였다. 나는 편지를 끝까지 읽지 못하고 팔을 툭 떨어뜨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막으로부터 날아온 화살이 가슴 한복판에 박힌 것 같았다. 통증은 목구멍을 타고 머리끝까지 치올랐다가, 서서히 팔, 다리로 퍼져 나갔다. 파란 하늘 호수에 바스라질 듯 말라버린 나뭇잎이 떠있었다.

"우리는 유물론자거든."

"우리는 술이라면 청탁불문이지."

"우리는 예술영화라면 잠부터 오니까 말야."

오랜만에 만난 우현은, 자신을 '우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허공에다 돼지꼬리를 그려가며 '나'라고 고쳐주었지만, 우현은 마치 눈깔사탕이라도 문 아이처럼 '나'라는 말을 어색해했다. '우리' 속에 나는 없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세월이, 나이가, 그리고 시대가 베풀어준 관대함 탓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현은 그렇지 않았다. 늘 '우리' 속에 살던 우현에게 '나'란 문제는 막다른 골목에서 맞닥뜨린 채무자처럼 난감한 화두인 것 같았다.

"마치 한바탕 회오리 바람에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버린 것 같아. 세상이 온통 나, 나, 나라고 외쳐대고 있어. 그 동안 억압되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분출한 거지. 물론 인정해. 그 동안 억눌려왔던 개인의 문제들, 개성 모두 소중하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그럼 이 세상은 어디로 가는 거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건가?"

우현은 마치, 걸음마 연습을 하는 갓난아이처럼 세상을 낯설어하고 있었다.

그런 우현이, 이제 이 지구상에 권태만이 들끓어 오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건 무슨 의미인가. 나는 편지에서 극도의 피로감에 지쳐있는 우현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위그루 여인이나 몽골 여인을 만나 사랑에라도 빠진 것인가. 초원을 달리며 양떼를 쫓고 있는가. 그토록 혐오하던 자본주의의 사슬을 끊고 소로우처럼 살고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사막의 모래 바람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풍화시키고 있는가.

삿뽀로행 비행기에서 나는 앞좌석 주머니에 들어있는 아나 항공 잡지를 펼쳤다. 건성으로 잡지를 넘기던 나의 눈길은 제일 뒷장의 지도에서 멈췄다. 삿뽀로가 있는 홋까이도는 북위 45도에 걸쳐있는 섬이다. 비슷한 위도에 블라디보스톡이 있고 그 위로 시베리아 벌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몽골,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 자잘한 글씨로 씌어있는 낯선 나라들. 내가 우현을 다시 만나기는 했던 것일까.



3

"오따루에서는 눈이 와도 우산을 쓰지 않아요."

오따루 역사를 빠져 나오자 펄펄 눈이 날리고 있었다. 내가 우산을 꺼내려고 하자 N교수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곳의 눈은 습기가 적기 때문에 툭툭 털어 내면 된다는 거였다. 나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손바닥을 펼쳤다.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앉은 눈은 정말 금방 녹지 않았다. 거리도, 자동차도,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도, 입자 고운 밀가루를 뿌린 듯 했다. 얼핏, 하얀 분칠을 한 게이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눈을 파우더 스노우라고 해요."

파우더 스노우? 부자나라는 눈도 다르군.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이유도 없이 심통 난 아이처럼 굴고 있었다. 그러나 오따루는, 슬픈 사연 하나쯤 꺼내 음미하고픈, 아름다운 거리였다.

백년이 넘은 석조건축과 목조가옥들, 좁다란 골목길들은 고풍스러웠다. 그곳이 골동의 박제된 거리가 아닌 실제로 사람이 음식을 해먹고 잠을 자고 사랑을 나누기도 하는 곳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불쑥,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그들이 밥을 먹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곁에 서서 지켜본다고 해도, 그들은 알지 못할 것 같았다. 사실, 그랬다. 도로에 세워놓은 차를 빼려고 바퀴 주위의 눈을 치우는 사람도,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사람도, 화복차림에 머리 수건을 질끈 동여맨 생선 가게 주인도, 우리를 전혀 눈여겨보지 않았다. 격자 창이 달린 여닫이문, 낮게 매달린 화선지 등, 시리도록 새하얀 눈이 쌓여 있는 이 거리에는 달콤하고 나른한 향기가 배어있는 듯했다. 일본의 옛날거리를 알 리 없으면서도 나는 오래된 그 거리를 첫눈에 친근하게 느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군."

꿈결인 듯 걷고있던 H선생이 나즈막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N교수가 금방 알아듣고 맞장구를 쳤다.

"네, 맞아요. 오따루는 하나도 변한 게 없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오따루가 삿뽀로보다 컸어요. 그러나 지금 오따루는 그대로이고, 삿뽀로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큰 도시로 변했어요."

눈은 소리없이 계속 내린다. 아주 먼 옛날에도 그랬듯이……. H선생도 N교수도, 그리고 나도 백발 노인이 되어 있었다. 먼 미래의 어느 날, 과거 순례에 나선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오사까에서 자라고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 어쩌다 유배라도 가듯 이렇게 춥고 먼 곳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었냐고, N교수에게 내가 물었다.

"아버지로부터 도망가려구요."

N교수는 농담처럼 말하더니, 이내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그 시절이 저에게는 가장 농밀한 시간이었어요. 가장 열심히 살았고 뜨겁게 살았던……."

나는, 왈칵 목이 멘다. 그의 말이 통째로, 그의 인생 전체의 무게로 가슴에 턱하고 실려와, 더 이상의 설명 없이도 모든 걸 알 것 같았다. '농밀한'이라는 말을 이보다 더 훌륭하게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대학 시절, N교수는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소위, 전공투 세대였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요도호 사건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이 친구라고 했으니, 꽤나 급진적인 학생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때 친구가 함께 북으로 가자고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주저앉았다고 했다.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N교수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길을 걸어오다가 갈림길에서 헤어진 친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N교수와 함께 한 대학 시절을, 그도 어디에선가 가장 농밀했던 한 시절로 기억하고 있을까.



우현에게 가장 농밀한 시간은 언제였을까. 대학시절, 문학 청년이던 그는 사회주의에 경도된 후, 무엇보다 운동가요 활동가가 되고자 했다. 대학 1학년 때, 순수 문예지에 추천 받았던 시를 그는 언제나 부끄러워했다. 그때만 해도 사회주의에 물들기 전이었다. 이후 그는 일본어로 된 마르크스와 헤겔 등을 밤새워 읽으며 자신을 단련했다. 한 잠도 자지 않고 밤새도록 세미나를 한 후에도, 우현은 피로한 기색 하나 없이 의욕과 생기로 충만했다. 글을 잘 쓴다는 이유로 문건을 작성하는 것은 늘 그의 몫이었다. 그 바람에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고 수배의 길에 올라야 했다. 막막한 도피생활을 떠나면서도, 우현의 눈빛은 마치 생 그 자체인 듯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우현을 영영 떠나보내는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수배 생활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우현은 지금, 어디로 도망가고 있는 것일까. 무엇으로부터…….

"어디로 갈 거야?"

"대륙으로……."

"그게 어딘데?"

"몰라. 중국이나 소련. 아니, 그냥 초원이나, 사막."

"언제, 올건데?"

"그것도, 잘 모르겠어. 다만, 좀 갑갑해. 바다에, 휴전선에 막혀서 오도가도 못하는 이 나라도 답답하고, 나도 답답해. 민족이니 국가니 이상이니 신념이니 하는 것들이 도대체 뭐였는지, 다시 생각해보고 싶어. 그게 모두 위선이었을까?"

"그럼 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니가 늘 말하던 '나'라는 것도 생각해볼게. 사람도 말도 모두 낯선 그런 곳에 가면 혹시 알 수 있을까?"



4

까페 분위기는 아주 모던하다. 강철 스텐 골조가 천장을 가로지르고, 짙은 검정색 하이그로시 스탠드 바 위의 파카글라스는 쨍 하고 소리를 낼 듯 위태롭게 진열되어 있다. 역시 검은 색의 테이블과 의자들. 그 사이로 흰 블라우스에 검은 조끼를 입은 여종업원이 우리 테이블을 향해 미끄러지듯 사뿐히 걸어온다.

"커피나 마시지."

H선생이, 흥이 가신 목소리로 말했다. N교수도 나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까페 창 밖으로 연인들과 관광객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나타나고 사라진다. 그들은 운하와 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눈싸움을 하기도 한다. 웃고 달리고 끌어안고 넘어지는 모습들이 마치 한편의 무성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그때, 가로등에 반짝 불이 켜졌다. 서서히 땅거미가 내리던 거리가 순간 차가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세상과 한 걸음 떨어져, 한 세계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어떤 지점을, 목격한 듯 했다.

N교수는 졸업 후, 두어 번 오따루에 왔지만 운하가 이렇게 변했는지 비로소 알았다고 했다. 운하는 문학관에서 바다 쪽으로 두 블록을 걸어 내려온 거리에 있었다. 먼바다에 정박하고 있는 대형 선박에서 물건들을 실어 나르던 물길이었던 운하는, 지금은 모두 복개하고 반 정도만 관광용으로 남겨둔 상태였다. 운하 옆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창고건물은 외관은 옛날 모습 그대로 남겨둔 채 내부만 까페나 음식점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라고 했지만 우리나라의 개천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다만 물길을 따라 가스등처럼 생긴 가로등과 허름한 창고 건물이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있으니, 그것의 운치가 그런대로 괜찮았다.

H선생이, 기분도 그렇지 않은데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말했다. 그렇지 않은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진작부터, 세계적인 관광지에 여행을 온 것이라기보다 어쩐지 회한에 찬 과거 순례라도 나선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창고 뒤편으로 돌아서자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네온사인과 대형 간판들로 화려하게 치장을 한 거리는, 여느 유흥가와 다르지 않았다.

그 중 가장 소박해 보이는 까페를 골라 들어갔지만 역시 운하에서 느꼈던 조촐한 운치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창고 입구를 통유리로 막아 놓아 마치 쇼윈도에 앉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 거리에, 고바야시 다끼지의 문학관이 있었다.

다끼지 문학관을 발견했을 때 H선생은, 돌연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흥분했다. 사거리 신호등 부근에서 문학관 안내 표지판을 발견한 것은 H선생이었다.

"문학관이 있다는데?."

표지판에는 오따루 문학관이라고 써 있었다. 그제서야 N교수가 생각난 듯 외쳤다.

"맞아요. 고바야시 다끼지하고 이시하라 신따로의 문학관이 있어요."

"고바야시 다끼지? 그 사람…, 『게 공선』? 그게 고바야시 다끼지 작품, 맞지?"

"네, 그래요. 그 사람, 잡혀가서 고문 받다가 하루만에 죽어버렸어요."

"그래, 그랬지. 노동당 활동도 활발하게 했던 걸로 아는데…, 그 사람 문학관이 있다니, 이거 뜻밖인걸."

H선생은 잊고있던 친구 소식이라도 들은 듯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앞서 가는 두 사람을 얼른 따라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귀가 먹먹해지고 숨이 가빠왔다.

"일본에 이렇게 훌륭한 작가가 있었어. 노동자들의 집단 투쟁을 이렇게 리얼하게 묘사하다니, 그것도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을 굳건히 유지하면서 말이야. 일본에서 20년대 말에 벌써 이런 작품을 썼다는 거 아냐. 제국주의와 천황제에 대한 비판도 신랄해."

십 여 년도 훨씬 전에 우현이 내게 했던 이야기가, 마치 지금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우현이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우현이 내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같아, 두려웠다. 우현은 달라지고 있었다. 나는 우현이 시를 계속 쓰기 바랬다. 운동이라면 문학을 통해서도 할 수 있고, 어쩌면 그것이 더욱 영향력이 클 거라는 말까지 하며 우현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우현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미 그에게 문학은 수단일 뿐이었다. 우현은 나에게 이기적인 아나키스트라고 쏘아붙였다.

우현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면회를 갔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머리 속에서 다끼지의 작품들이 연극무대에 올려진 듯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몽둥이 찜질에 사지가 너덜너덜 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바늘로 살을 쑤셔 후비는 살인마들의 고문에 돼지내장처럼 널부러져 있는 것은, 우현이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이런, 벌써 폐관 시간인가?"

문학관은 셔터가 굳게 내려져 있었다. H선생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오래도록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변심한 애인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싶어하는 청년 같았다. 선생은 무엇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걸까. 다끼지의 친필 원고? 그가 쓰던 안경이나 가방? 아니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고문기구들?

감옥에서 나온 우현은 한사코 나를 피했다. 그가 옥중 결혼식을 올렸다는 소식을, 모두들 알고 있던 그 사실을, 나는 그제서야 들을 수 있었다. 신부는 수배 중 그를 도와준 조직의 선배며, 결혼식 당시 이미 만삭이었다고 했다.

"다끼지 작품을 읽은 게, 대학생 때였어요. 소설의 무대가 거의 삿뽀로, 오따루예요. 60년대에 이 거리를 걸으면 다끼지의 체취가 그대로 느껴졌어요. 그 사람, 여기서 학교도 다니고, 척식은행에 취직도 했어요. 소설 쓸 무렵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심취해서, 혁명적 인간상을 구현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아주 충실한 작품들을 썼지요. 『게공선』은 직접 어선을 타고 취재한 거예요. 제국주의, 재벌, 국제관계, 그리고 노동자……, 이 전부를 전체적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 사상은 당시로서는 정말 획기적인 것이었어요."

"그래, 맞아. 정말 대단한 작품이야. 자본주의가 어떻게 침투하고 착취를 하는지, 통찰력이 예리하더군. 고문 장면은 또 얼마나 끔찍하던지, 읽으면서 모골이 다 송연해지라구. 그런데 바로 자기가 그렇게 고문을 당하고 죽은 거 아냐."

"제가 대학 다닐 때도 다끼지가 소설 쓰던 무렵하고 크게 달라진 게 없었어요. 게다가 맨날 데모다 휴교다 해서 정신없을 때였고, 그러니 그 작품은 정말 충격적이고 감동적이고, 재미있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8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 소설을 읽고 감동을 받았었지."

H선생은 감동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아련한 향수에 젖어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읽으면 재미없을 거예요."

가차없이 되받는 N교수. 그 말에 내 가슴이 다 철렁 내려앉는다. H선생도 뜨끔한지 일순 표정이 굳어버렸지만, 이내 어색한 미소를 띠며 순순히 수긍한다.

"그래, 그렇긴 해. 지금은……, 내 소설도 그럴 거야. 내 소설도 다끼지처럼 싸움의 소산이었거든."

N교수의 단호한 평가도 그렇지만, H선생의 담담함도 서늘한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후빈다.

"하지만 그땐 희망을 말해야 했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니 뭐니 그런 것보다, 그땐 정말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으니까. 희망, 그게 내가 소설을 쓴 이유였고, 그만큼 절실했었는데……, 그게 지금 와서 작위적으로 보이고 재미가 없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뭐라고 할 수 있을는지……. 나는 오히려 요즈음이 더 절망적인데 말이야. 내가 이상한 건가?"

제주에서 태어난 업으로, H선생의 문학은 4.3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H선생의 태생은 업이나 족쇄가 아닌 튼실한 닻처럼 보인다. 바로 그것이 H선생을 지금껏 지탱해주고 있는 기둥일 것이므로.

며칠 전, 우연히 한국인 단체 여행팀과 마주쳤어. 중국 변방의 소도시였는데, 그런 곳에서 한국말을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지. 그런데 왜 그랬을까? 한국어, 점점 잊혀가던 한국어가 너무나 익숙하게 들리는 것, 그것이 또한 얼마나 낯설던지……. 나는 마치 그들이 나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기라도 한 듯 얼른 고개를 돌리고 말았어. 한국어를 듣는 순간, 갑자기 한국으로 소환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나도 모르겠어. 그러면서 이러다가 나는 영영 내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떠돌게 되는 게 아닐까하는 두려움을 느꼈지. 그랬으면서도 그들과 마주치기도 싫었고…….

설국에 어둠이 내린다. 싸늘하게 식은 코끝이 시큰해진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을 주는 이 거리. 제국주의를 무찌르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자던 다끼지가, 옆구리에 유인물을 낀 다끼지가 어느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올 것 같다. 잔혹한 고문 앞에서 젊은 생애를, 세상에 대한 희망을 접어야 했던 안타까움이, 아직 옛 모습을 간직한 이 거리 곳곳에 배어 있는 듯 했다.



5

놀랍게도 우현을 다시 만난 건, 지리산에서였다.

그 무렵 나는, 여름이면 혼자서 배낭을 꾸려 지리산을 올랐다. 산을 좋아하던 우현 때문에 알게 된 지리산은, 나에게는 숨구멍같은 곳이었다. 배낭을 메고 등산화 끈만 묶으면 몸과 마음이 바람처럼 자유로웠다.

지리산 구비구비마다 우리의 추억이 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소변이 마려울 때마다 우현이 찾아가던 주목나무는 훌쩍 자라 늠름한 모습이었고, 땀을 흠뻑 흘린 뒤 웃옷을 벗어제치고 등목을 하던 뱀사골 계곡의 너럭바위도 그대로였다. 천왕봉의 해돋이를 보며 커피 마시던 자리, 산새 두 마리가 부리로 입맞추는 걸 보며 처음으로 키스하던 고사목 지대. 부풀어오른 아랫도리 때문에 텐트에서 얼른 나오지 못하고 수줍게 웃던 그 미소까지도, 지리산에 남아있었다.

우현도 혼자였다. 귀신을 본 것처럼 우리는 우뚝 멈춰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일찌감치 산장에 도착한 나는 산책을 나서던 길이었고, 우현은 막 도착한 길이었다. 수배가 떨어져 서울을 떠나던 날 밤, 골목의 가로등 불빛 아래서 본 이후 첫 해후였다. 마음만 먹으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내 마음속의 우현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우현에 대한 모든 정보를 차단한 채 살고 있었다.

가까운 숲으로 함께 걸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란히 숲길을 걸으면서도 꿈속을 걷는 듯 몽롱해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서늘한 한 줄기 바람에 오싹 한기를 느끼고서야 멀리 잉걸불처럼 타오르는 반야봉을 쳐다보았다. 그루터기에 앉아 담배 한 대씩을 나눠 피웠다. 노을이 장삼처럼 반야봉을 휘감으며 서서히 번져나가고 있었다. 깊은 한숨을 토해내듯 담배만 피우던 우현이 말문을 열었다.

"미안하다."

꽉 잠긴 우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훅,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끔 그런 상상을 했었다. 어느 날엔가, 아주 우연히라도 한번쯤은 우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내 마음 속에서 아직 우리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그러면, 무슨 말을 할까. 그러나 그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져,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할 말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보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짐짓 장난스레 말했다.

"그런 말 싫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바보 같잖아."

"그래…, 그렇구나. 미안해."

"으응, 또?"

"응? 아-, 난 왜 이러냐."

그 날 밤, 우리는 밤새도록 소주잔을 기울이며 지난 이야기를 했다. 결혼 생활에 관해서는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문 채. 우리는 어느새 십여 년 전, 지리산에 올랐던 그 날로 돌아가 있었다.

"난 아까, 환영을 보고 있는 줄 알았어. 너무 보고싶더니 드디어 내가 헛것을 보는구나……."

"보고 싶었다구?"

"응. …보고 싶었어."

"정말? 언제부터?"

"그런 게 중요한가? 꿈결같이, 이렇게 만나고 있는데."

"뜻밖인걸? 난, 네가 날 많이 미워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여길 온 게, 십 년째야. 처음 몇 년간은, 은근히 널 만날 기대에 부풀어 있었어.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자신이 없어지더라. 그리고, 네가 나를 정말 싫어했었구나, 라고 비로소 인정했어."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땐 좀 그랬어. 넌, 문학 밖에 몰랐잖아. 그게 그렇게 이기적으로 보이더라. 그리고 너희 집이 부자라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그러고 나니까 네가 나의 적인 것 같더라구."

"적이라구?"

"하하, 이해해라. 내 머리 속에서 관념적인 적은 분명한데, 내 눈앞에 구체적인 적으로 간주할 만한 사람은 너밖에 없었던 거야. 그땐 그랬잖아. 내편 아니면, 적."

"참, 기가 막히는군. 십 년도 넘게 궁리한 변명이 겨우 그거야? 자기를 가장 사랑한 여자를 적이라니……."

"그 사랑이, 나를 약하게 만들었으니까."

"사랑은 강하게 만드는 거지, 약하게 만드는 게 아니잖아."

"넌 여전하구나."

"뭐가?"

"사랑에 관한 한……."

"그래? 그 말, 비난인지 찬산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황홀한 찬사로 들리는 걸? 하지만, 그때의 나는 이제 없어. 그때 나는, 나를 움직이는 건 오직 사랑밖에 없다고 믿었었어. 네가 막시스트건 코뮤티스트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 그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살인자가 됐다고 해서 사랑을 무를 수 없는 거나 똑같은 거야. 유치하고 오만했지. 지나고 보니까 사랑은 정말 무력하더라구. 그땐, 내가 애정 결핍이었나봐."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의 넋두리를 듣고 있던 우현이 고개를 들었다.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야. 정말 미안하다. 너한테는 정말 미안해. 그때 난, 경주마처럼 눈가리개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 오직 앞만 보고 달렸어."

"우와-, 됐네요. 다시 내 맘 약하게 만들지 마."

"어쨌든, 내가 이렇게 나타난 게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무슨 소리야?"

"만약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넌 아마 홧병이라도 났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나한테 마구 욕하고 때리고 야단치고, 그렇게 해줘. 제발 부탁이야."

"너, 엉뚱한 소리하는 건 여전하구나."

그날 밤, 예고도 없이 폭우가 쏟아졌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던 우리는 빗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 싸리비처럼 굵은 빗방울이 온 몸을 내리쳤다. 불어난 계곡물이 우당탕 쿵쾅 바위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흘렀다. 나는 야트막한 계곡으로 내려갔다. 우현이 나를 붙잡았다. 위험하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 계곡물이 무릎을 휘감으며 잡아당기는 듯했다. 나는,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바지도 웃옷도, 그리고 마침내는 속옷까지 모두 벗어버렸다. 멍울져 있던 앙금이 말끔히 풀려 씻겨 내려간 듯 속이 후련해졌다. 우현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우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던 우현이 결심한 듯, 옷을 벗기 시작했다. 우리는, 알몸으로 서로를 끌어안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두 개의 나신이 부딪혀 희미한 빛을 뿜어냈다.

날이 밝자, 나는 당황스러웠다. 눈을 떴지만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우현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우발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후회가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한톨의 욕정도 섞이지 않은 자연스런 포옹이었다. 둘은, 태초의 여자요 남자였다. 폭우로 고립되었던 그 사흘 동안, 우리는 지상의 마지막 날을 누리는 시한부 인생이었다. 산에서 내려가서 돌에 맞아죽더라도, 아무런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다시는 못 만난다고 해도…….

그러나 산에서 내려간 후, 우리 삶은 예전 같을 수 없었다. 일년 후, 나는 이혼을 했다. 이미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가슴에 다른 남자를 품고 있는 아내를 남편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이유 모를 아내의 배신에 남편은 치를 떨었고 외도로 복수를 했다. 상처는 상처를 불렀다. 딱지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상처를 덧내는 일도 반복되다보니 타성에 젖었다. 그렇게 죄책감도 없이 허울만 뒤집어쓴 부부로 타협하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나의 이혼 소식에 우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우현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별개의 문제라고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우현 때문이었다. 우현과의 새 삶을 꿈꾸었던 것이 아니라, 우현으로 하여 새로운 삶을 꿈꿀 힘과 용기가 생긴 것이었다.

우현이 별거 중이었다는 사실은 우현이 한국을 떠나기 전날에서야 알게 된 일이었다.

우현은 꽤 심각한 알콜홀릭이었다고 했다. 함께 일하던 동지들이 하나 둘 등을 돌려 떠나고 그들이 변신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마시기 시작한 술이 나중에는 폐인이 될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결국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고, 집에 틀어박혀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의 빈자리를 아내가 보험 외판으로 메웠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다. 남자가 생겼다고 했다. 아내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보였고, 그 요구가 정당하게 느껴졌으므로 그는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아내가 이혼을 하려고 하자, 남자가 아내를 버렸다. 아내는 한동안 우울증을 앓을 정도로 실의에 빠져 있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우현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가까스로 자신을 추스렸다. 선배가 경영하는 무역회사에 들어갔지만, 적응할 수가 없었다. 거래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벌어지는 로비와 상납, 룸사롱 접대, 그렇게 흥청거리는 그늘에서 자행되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난, 그동안 참으로 험한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했어. 독재 투쟁, 수배, 고문, 감옥 생활. 그런데 지금 보니 그 시절은 마치 온실 같은 날들이었어. 육체적으로는 고달팠지만 정신만은 명징했거든. 이제 난, 좀더 단련 받아야 해. 더 상처받고, 더 철저히 망가져야 해. 독재보다 더 무서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말이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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