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이어짐



6

초로의 대학동창생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십 년, 혹은 이십 년, 더 길게는 대학 졸업 후 처음 만나는 친구들도 있다고 했다. N교수의 목소리가 단연 크다. 그는 동창 모임에 H선생과 나도 동행하기를 바랬다. 우리는 N교수의 현재 관심사를 대변하는 상징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N교수의 과거 친구들이 궁금했다. 그러나 막상 인사를 나누고 나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 사이에 쌓였던 이야기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H선생과 나는, 부유하는 일본어 속에 떠있는 섬 같다.

우리는 조금 머쓱해져서 좀 전에 받은 명함들을 연구라도 하듯 진지한 태도로 들여다본다. 광고 회사 상무, 방송국 부장, 기계설비 회사의 대표, 고액과외를 한다는 이는 명함이 없었고, 나머지 세 장은 공산당원들의 것이다. 한 명은 삿뽀로 공산당 지부장, 또 한 명은 일본 공산당 북해도 사무소 소장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일본 공산당 기관지인 『적기』지 편집장이다. 젊은 한 때, 혁명을 꿈꾸지 않는 이들이 있을까. 그런데 삼 십 년이 넘도록, 중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공산당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본 공산당

눈에 취한 것일까. 아니면 벌써 술에 취한 것인가. 내 주위를 둘러싼 사물과 사람들이 모두 서서히 뒤로 물러난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혼란. 이명이 울리는 듯 하다.

H선생이 문득 고개를 들고 말문을 열었다. 야릇한 감흥에 젖은 표정이다.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인가? 일본에 왔을 땐데, 그때 기억이 나는군."

H선생은 일본이 초행이 아니던가? 일본이라면 무조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선생의 단순한 민족주의적 태도 때문에 나는 선생이 일본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조총련 간부라는 사람을 만났거든. 인사를 하고 명함을 건네주면서 하던 말이, 그때 만나서 했던 이야기들보다 아주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더라구. 그런데 지금 그 말이 또 떠오르는군."

마치 모노드라마의 배우처럼, H선생은 짐짓 엄숙한 표정까지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거 비행기 타기 전에 버리시오. 다 이해합네다. ……이러는 거야."

H선생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몹시도 허전해보인다. H선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꿈이, 희망이 슬픈 단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시절이 있었네요. 정말 세상이 변하긴 변했나봐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공산당원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거잖아요. "

나는 세상이 변한 한 구체적 물증이라도 되는 양 다시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일본'이라는 말과 '공산당'이라는 말이 제게는 왜 이리 낯설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어요. 마치 갓쓰고 양복입은 사람같기도 하고,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모순' 그 자체로 보이는 거예요. 어불성설이라고 해야 할까요?"

나는 촌스럽게도 내 곁에 앉은 일본 공산당원을 곁눈질한다.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양복 차림의 그들은 일본의 전형적인 샐러리맨과 똑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그들이 작업복이라도 입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런 구태의연한 발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산당은 자민당은 아니지 않은가. 내 머리 속에서는 나 스스로도 가닥을 잡을 수 없는 엉뚱한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지금 일본 공산당이 의회에서 한 40여 석을 차지하고 있을 걸? 당원 수도 만만치 않을 거고. 당비도 세계적으로 제일 많이 걷힌다지, 아마?"

H선생은 일본 공산당이 나보다는 낯설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그들을 직접 만나고 나니 내심 당황한 눈치가 역력했다.

"이게 마르크스가 말한 단계설에 해당하는 걸까요? 마르크스가 그랬잖아요. 자본주의가 극에 달하면 진정한 사회주의가 온다고……."

"하하하, 그런 말, 오랜만에 듣는구만. 참 낯설게 들리네. 아마, 일본 공산당이 생긴 게 20년대 무렵일텐데, 어쨌든 그때 이미 이들은 선진국에 맞는 공산주의를 들고 나오거든."

선진국에 맞는 공산주의? 순간, 내 눈앞에는 어젯밤에 보았던 거리 풍경이 환등기처럼 찰칵거리며 돌아간다.

우리 숙소가 있는 스즈끼노 거리는 삿뽀로에서 유명한 환락가였다. 거리는 밤새도록 삐끼와 행인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에게서는 추운 지방 사람들 특유의 움츠림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금방 패션 화보에서 톡 튀어나온 듯 발랄한 옷차림에 발걸음도 경쾌했다. 반라의 여자들이 뇌쇄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대형 사진들이 빌딩마다 붙어 있었고, 네온사인은 밤을 잊은 채 현란하게 돌아갔다. 공중전화 부스에까지 빽빽하게 붙어 있던 콜걸들의 스티커는, 그러나 아침이 되자 막 세수를 끝낸 여인처럼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그 많은 스티커를 누가 떼어냈을까. 스티커를 붙이는 직업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그걸 떼어내는 것으로 삶을 연명하는 것이리라.

이제 더 이상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대체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야흐로 신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가 진행되고 있는 마당이 아닌가. 소련도 중국도 자본주의의 물결 앞에 무릎을 꿇은 지 오래다. 그런 판국에 일본 공산당이라니…….

갑자기 터져나온 커다란 웃음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모두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웃어대고 있었다. N교수와 친구들은 삼십 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대학시절로 돌아간 듯 했다. 교수든, 회사원이든, 공산당원이든, 지금 그들에게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공산당원도, 콜걸들의 전단지를 떼었다 붙이는 직업처럼 수많은 직업군 중의 하나일 뿐일지 모른다. 어쩌면 공산당원이란 저들도, 일본의 자본주의가 사회주의 체제로 바뀌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작지만 첨단경비 시스템이 갖춰진 시내의 이 아파트가 한국 돈으로 5억이 넘을 거라고 N교수가 말했었다. 그리고 도쿄의 대학에 유학 중인 두 아이들. 이미 사회체제의 변혁을 꾀하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보인다.안주인인 이시가와 여사는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부지런히 부엌을 오가며 빈 접시와 술병을 채운다. 그녀는 시원시원하게 말도 잘하고 웃기도 잘하는 활달한 여성이었다. 그녀 역시 같은 대학 출신이므로 옛날 친구를 대하는 마음가짐으로 스스럼없었을 것인데도, 나는 그녀의 시원시원한 태도를 삿뽀로 공산당 지부장의 아내다운 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이른바 문제아들을 모아서 가르치는 대안학교의 교사라고 했다.

N교수가 상기된 표정으로 우리 곁으로 온다.

"죄송해요.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아니, 괜찮아요. 우리는 우리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H선생이 예의를 차리며 대답했지만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대뜸 묻는다.

"일본공산당 강령이 뭡니까?"

그러자, N교수는 두 번 생각도 하지 않고 식상하다는 표정으로 "아이-, 몰라, 나도 몰라."하더니 웃어버린다.



7

침대, 미니냉장고, 텔레비전, 디지털 알람시계가 부착된 라디오, 그리고 욕실. 비즈니스 호텔의 싱글룸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만큼 완벽하다. 이곳에서 한달, 혹은 일년을 지낸다고 해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새것처럼 주름 하나 없이 청결한 시트나 냉장고의 각종 음료수, 샤워 후 갈아입을 수 있는 유카타 같은 것은 기본이고, 마치 독방 감옥같이 좁은 곳을 백 프로, 아니 백 이십 프로의 효율로 극대화시킨 공간 배치가 놀랍다. 그러나, 한치의 허술함도 없는 이 완벽함이 나의 숨통을 틀어막는다.

창문을 열어본다. 건물들 사이로 스즈끼노 거리의 네온사인이 섬광처럼 빛나고, 삿뽀로의 하늘은 어두워질 줄 모른다. 그토록 아름답던 삿뽀로의 눈도 이 거리에서는 도시의 비둘기 떼처럼 구질구질하게 보인다.

샤워를 하고 나자 할 일이 없다. 텔레비전을 틀어보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는데, 갑자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의 남녀가 얽혀있는 모습이 화면 가득 확대되어 나타난다. 남녀의 나신은 물론이고 얼굴 표정, 거친 숨소리까지 마치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양 생생하다. 침대에 길게 누워있던 나는, 잠시 긴장했던 근육을 이완시키며 핍쇼를 보듯 덤덤하게 화면을 바라본다. 남자는 금방 사정할 듯,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남녀는, 바야흐로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바로 그 순간, 팟-하며 화면이 바뀌더니, 파란 바탕에 하얀 글씨가 나타난다. 동전을 넣으라는 소리일 것이다.독방에 절정의 침묵이 들어찬다.

문득, 삿뽀로 공산당의 명함이 떠오른다. 삿뽀로 공산당. 그것은, 타락한 자본주의의 소금인가, 아니면 자본주의화한 이념인가. 차라리 적과 아군이 분명하던 시절이 행복한 시절이었던가. 행복한 이분법의 시절을 지나 혼돈의 개성 시대에 이르러 우리는 불행한가.

조금 있으려니 노크 소리가 들린다. 나는 방기하고 있던 몸과 목소리를 아연 긴장시키며 문을 연다.

H선생이다.

"잠도 안 오고, 술이나 한 잔 하러 나갈까 해서 말이야."

나는, 웃으며 코트를 꺼내 들고 밖으로 따라 나선다.

"교수님은요?"

"벌써 잠이 들었는지, 노크해도 대답이 없어. 저러니 새벽같이 일어나서 우리를 깨우지. 확실히 학자들은 우리들하고는 생체리듬이 자체가 다른가봐."

밖으로 나오니 우울하게 가라앉았던 기분이 훨씬 나아진다. 일상이란 이런 것인가. 거리로 나가 친구를 만나고, 일을 하고, 술을 마시고, 차를 마시는 일상의 자잘한 일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곰팡이처럼 피어나는 우울. 무엇이 진짜 삶인가.

한밤의 거리는 활기가 넘친다. 현란한 불빛과 고막을 찢을 듯 요란한 테크노 음악. 선정적인 옷차림의 여인들. 팔색조같은 머리카락과 가짜 속눈썹, 앗찔할 정도로 굽이 높은 구두. 저 여인들의 맨 얼굴을 상상할 수가 없다. 화려한 것은 거짓과 기만에 가깝다. 도시의 불빛이 현란한 것은 도시인들이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할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거리를 잠시만 걸어보면 인파의 물결 속에 행인들보다 호객행위를 하는 삐끼들이 더 많다는 것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후미진 골목의 조그만 주점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볼 때는 조그만 술집이려니 했는데, 홀과 카운터, 그리고 방에까지 제법 손님들이 많았다.

손짓발짓을 동원해서 안주거리와 술을 주문하고 나자, H선생은 거리에서 삐끼가 나눠준 전단지를 들여다본다. 서너 장은 되는 것 같다. H선생은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씨익 웃으며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내가 원조 교제 연구를 좀 하려구 말이야."

"네?"

내가 깜짝 놀라 소리치자, H선생이 팔을 내저으며 변명한다.

"아니, 아니, 소설 쓰려구. 4.3진상 위원회가 생겨서 4.3문제가 제도권으로 넘어갔으니까, 나는 이제 다른 걸 써야지. 안 그래? 가족 해체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한번 다뤄볼까 싶은데……. 일본에서는 '가정 내 이혼'이라는 말이 아주 흔하게 쓰인다더군. 섹스도 없이 남처럼 사는 부부들 말이야. 우리나라도 비슷하잖아. 겉으로는 멀쩡한 것 같은데,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모두 제각각 방황하고 있거든."

"흥미롭겠는데요? 특히 선생님이 쓰신다면……. 어쨌든 선생님으로서는 새로운 실험이 되겠네요."

"그런 셈이지. 한동안 소설을 쓰지 못했는데……. 모르겠어. 잘 써질지……. 거참, 적이 사라지고 나니까 내가 누군지 모르겠더란 말이지."

선생은 막 가져온 술병을 들어 내 잔과 선생의 잔을 채운다. 나는, 술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그렇구나. 적이 사라져서……. 나는 방향을 잃고 정처없이 떠돌고 있을 우현을 다시 떠올린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우리가 싸워왔던 적이 사라졌는데……, 그럼 모두 행복해야 되는데, 왜 우리는 정체성 혼란을 겪고있는 건지……."

"그게 그런 거야. 여기 조총련들도 그렇다더라구. 남북 화해 무드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요즘은 한국 국적을 취득하거나 일본인으로 귀화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난다더구만."

"그런 걸까요?"

나는 막막한 심정으로 술잔을 비웠다. 어쩌면 적은, 더욱 교묘해져서 우리들 마음 속에 기생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라는 개성의 목소리로 위장한 자본주의적 욕망들.

H선생이 쓸쓸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게 뭔지 알아? 아이들한테는 내가 박정희 같은 사람이란 거야."

나는 선생의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다음 말을 기다린다.

"적과 싸우다보면 적과 비슷해지거든. 적과 비슷한 힘과 오기를 가지지 못하면 싸울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아이들이 나를 무척 싫어했어."

"……."

"박정희가 죽었을 때,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게 했었거든. 당연히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 그랬더니 그때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이 선생님이 국기 달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왜 그러냐고 항의를 하는 거야. 아마, 내가 뭐라고 설명을 했겠지만, 그걸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었겠어? "

H선생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생의 눈자위가 붉그레하다.나도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본다. 밤이 깊었지만 거리는 백야처럼 어두워질 줄 몰랐다. 선생과 나는 말없이 하얀 어둠을 노려보고 있었다.



8

"그럼, 서울에서 만나겠습니다."

N교수는 기차표를 쥔 손을 번쩍 들어 보이고는 돌아섰다. 기차 시간이 급했는지 개찰구를 지나자 쌕을 어깨에 둘러메며 달리기 시작했다. 기차 타는 걸 배웅하겠다고 따라나선 우리는 그가 너무 순식간에 사라져버려 조금 머쓱해진 기분으로 발길을 돌렸다. 기차역 개찰구에서 구름다리를 건너면 간사이공항 국제선 청사였다. 그 아래, 노란 택시들이 질서 정연하게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 내려다보였다. 하늘은 곧 비라도 뿌릴 듯 습기를 잔뜩 머금고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저녁 일곱 시에 출발하는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까지는 무려 다섯 시간이 넘게 남아있었다. 우리는 보딩게이트 사이의 한갓지고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 뭘하며 시간을 때우나 싶어 머뭇거리는데, H선생이 배낭에서 와인 병을 꺼내 보였다. 삿뽀로의 편의점에서 산 것이다.

"이거나 마시자구."

선생은 내 마음을 읽었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서 그걸 마시게요? 그냥 가져가시죠."

공항 대기실에서 와인 한 병을 어떻게 마시나 싶어, 나는 지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행기에서 터져 버릴 지도 몰라."

예?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바라보는 H선생의 눈매에 장난기가 그득하다.

"기압이 높아지면, 이 코르크 마개가, 뻥!"

오따루 와인. 삿뽀로에서 가장 풍미가 좋은 오따루 와인은 요이치의 포도로 만들어진다고 N교수가 말했었다.

요이치는 바닷가를 끼고 있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해안선과 자작나무숲 사이로 기차가 달렸다. 눈이 부셨다. 마을이며 산이며 거리, 골목, 그리고 바닷가 해안선 끝까지, 온통 하얬다. 평화로운 순백의 마을, 그곳에 온갖 문제아들을 모아놓은 학교가 있었다. 야쿠쟈, 폭력, 약물중독, 임신, 학습 부적응…, 노랑머리, 전기머리, 꽁지머리, 스킨헤드…. 칠판 앞에서는 선생님이 한창 강의에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열심히 듣는 아이들, 아니 그냥 듣는 척이라도 하는 아이들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아예 뒤돌아 앉아 자기들끼리의 대화에 열중인 아이들, 점심 도시락을 꺼내놓고 먹는 아이들, 거울을 들여다보며 화장에 여념이 없는 여학생, 초점 없는 멍한 눈으로 교실 문턱에 기대앉은 아이….

우리를 안내하던 이시가와 선생이 복도에서 어슬렁거리던 학생들에게'한국에서 온 소설가'라고 말했다. 그 말에 학생들이 우와-, 탄성을 내질렀다. 그때는 심심하던 차에 으레껏 내질러보는 소리려니 치부하고 웃어넘기고 말았다.

그런데 현관에서 막 신발을 신고 있을 때, 등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일본말 할 줄 아십니까?"

우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돌아보니 십 여 명쯤 되는 학생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그 중, 턱에 피어싱을 한 노랑머리 남학생이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다급한 말소리와 달리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국말을 썩 잘하는 건 아닌 듯 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씨익 웃었다. 당장 눈앞에 벼락이 떨어진다고 해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좀 전에 교실에서 보았던, 세상을 다 포기한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180 센티가 넘는 큰 키에 거뭇거뭇한 수염자리, 복숭아씨처럼 불궈진 목울대에서는 남자 냄새가 물큰 풍겼지만 멋쩍은 듯 웃는 표정에서 앳된 티가 슬몃 드러났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언어의 장벽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자, 한잔 더 해."

어느새 내 술잔이 비어 있었다.

"그 학생, 말이예요."

"누구?"

"요이치 학교에서, 일본어 할 줄 아십니까? 라고 묻던 남학생……."

"아, 아 그래, 그 학생."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만……, 처음 보는 사람한테 무슨……."

"하지만, 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해요. 어쩐지 절실함 같은 게 느껴지는 게……."

"허, 그런가? 나도 일본어를 조금은 배워야 할래나봐. 아무리 싫다고 해도 시대가 시대라서 그러나? 아님, 제일 가까워서 그럴까？ 어쨌든 자꾸만 일본에 갈 일이 생긴단 말이지."

학생들과 우리는, 엉거주춤 어색한 자세로 웃기만 했다. 돌아가야지 싶으면서도, 웬일인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때 배낭 속에 들어있는 카메라가 생각났다. 나는 사진이나 한 장 찍자고 제안했다.

마침내 묘수를 찾아낸 듯 모두 카메라 앞에 모여 섰다. 그때 화인더를 통해 바라보이던 모습이 기억 속에 인화되어 잊혀지지 않았다. 울긋불긋한 머리의 학생들 사이에서 흰머리가 성성한 H선생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응? 왜?"

H선생이 무슨 영문인가 싶어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 학생들하고 찍은 사진 말이예요. 아마 그 사진 나오면 볼만할 걸요."

"그래? 왜?"

"꼭 무슨 헤비메탈 그룹같던데요? 선생님은 그룹 리더같구요."

선생은 정말 그렇겠는걸, 하며 소리 높여 웃었다.

"그런 아이들하고는 절대로 공감대를 이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요. 그 짧은 순간에 진한 느낌 같은 게 오간 것 같아요."

"그렇지? 나도 그랬어. 거리에서 봤던 말쑥한 차림새의 아이들한테서는 느끼지 못하던 어떤 느낌이 있었어."

"그 아이들이 소설가에게 그렇게 열광하다니, 그것도 신기해요.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소설가라면, 자기들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았는지 모르지. 우리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공감대를 형성했다면, 아마 그 지점이 아닐까."

언젠가 N교수가 내게 해준 이야기 한 도막이 떠오른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그는 명동의 로얄호텔에 묵고 있었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밖으로 나가보니 호텔 맞은 편 명동성당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연히 시위 장면을 목격하게 된 그는 갑자기 피가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갑자기 취기가 오르는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9

스피커에서 탑승 시간을 알리는 어나운스먼트가 흘러나왔다. H선생과 나는 천천히 배낭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얼굴이 불콰해져서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보딩게이트를 향해 걸었다. 안내 방송이 반복해서 울려 퍼졌다. 그걸 유심히 듣던 H선생이 말했다.

"아무래도, 억양이 일본 여자 같지?"

"그런 것 같네요."

"에쿠, 한국어 방송을 들으니까 비로소 돌아간다는 실감이 나는군. 아주 새삼스럽구만."

"겨우 사흘인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 역시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아주 멀리, 오랫동안 떠돌아다닌 기분이 들어. 아마, 신문을 안 봐서 그럴 거야."

비행기에 탑승하면 H선생은 가장 먼저 신문을 집어 들 것이다. 별로 달라진 것 없는 기사들을 훑어보며 한숨도 쉬고 화도 내겠지만, H선생이 자신의 존재감을 생생하게 느끼는 순간이 바로 그런 때가 아닐지.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다.

청사 밖을 쳐다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기 유리창에 웬 유령처럼 내 모습이 어른거렸다. 아니, 우현인 것 같기도 했다. 비에 후줄근히 젖은 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야윈 듯 했지만 자유로워 보였다. 유령처럼. 그의 육체는 비록 세상의 끝을 헤매고 있으나 그 영혼은 내게 깃들어 있는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깨달음처럼 찾아온 그 느낌은 나를 전율케했다. 내가 그의 덫인지 닻인지는, 아마 이 생이 끝나는 순간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나의 덫인지 닻인지도.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한무리의 한국인들이 몰려왔다. 단체 여행객들인 듯 했다. 면세점에서 쇼핑을 하다가 급히 달려왔는지 양손에 쇼핑백이 잔뜩 들려있었다. 그들은 옆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큰 소리로 웃고 떠들어댔다. 누군가 코를 비틀어 먹기 싫은 음식을 마구 밀어 넣는 기분이었다. 오지에서 한국어를 듣고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숨겨버렸다는 우현처럼 나도 할 수 있다면 이 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들 틈에 끼어 보딩게이트로 밀려들어가고 있었다.(끝)(출처: [황해문화] 2001년 가을호)



이성아 경남 밀양 출생. 장편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웅진)를 발표하며 등단. 작품으로 '풍장', '미오의 나라, '눈꽃'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