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




김종호





1.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에 모여들었을 때, 나는 그 사람들의 무리 바깥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자꾸 꾸역꾸역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뭔가 대단한 구경거리가 생겼음이 분명하다. 나 역시 호기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굳이 사람들 틈에 내 자리를 마련하면서까지 그것을 보고싶지는 않다, 라고 생각하며 약간 도도해진 느낌으로 그 무리를 지나치려 했다. 그때 누군가 “이야! 저것 봐!”라고 외치자, 그 소리에 맞춰 사람들도 “와!”라는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나는 사람들 틈을 헤집고 들어가, 궁금증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웬만하면 비켜줄 듯한데도 다들 서로 봐야겠다는 듯 그곳으로 몰려드는 통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만한 공간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도대체 뭐지?’ 나는 약간 짜증 섞인 표정으로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둘러봤다. 그리고 다시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시간이 없군……. 그냥 갈까?’ 다시 걸음을 돌리려 할 때, 도저히 이 세상 사람의 목소리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 낮고 길게 울리는 목소리가 그 안에서 터져 나왔다. “이봐. 거기. 거기 가지말고 이리 들어와…….” 내가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나?”라고 되묻자, “그래, 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몰려든 사람들이 두 편으로 갈라지면서 통로가 열렸다. 나는 통로 앞에 서서 머뭇거렸다. ‘시간이 없는데…….’ “어서 들어와. 널 무척 오랫동안 기다렸어.” 나는 용기를 내서, 그리고 기왕 늦은 김에 몇 분 더 늦는다고 무슨 일 있으리, 라는 생각을 하며 통로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다시 통로를 막고 ‘나와 그것’을 원처럼 빙 둘러쌌다. 나는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물론 지금도 모른다. 밝은 듯 하면서도 한없이 어둡고 캄캄한 것 같았다. “왜 나를 불렀지?” 그것은 말했다. “나를 봐.” 나는 그것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곳에 내가 있었다. 그것은 말했다. “왜 나를 불렀지?” 나는 말했다. “나를 봐.” 내게 그것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내게 비쳤다. 그가 말했다. “나를 부른 것이 너야? 왜 나를 불렀지?” 나는 그의 말을 똑같이 따라했다. 물론 나의 말이 음성으로 변형되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의 말을 따라했다. 그는 ‘뼈다귀를 문 강아지’처럼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는 잠시 침울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했다. “너를 사겠어.” 그가 결정을 내리자, 나와 그를 둘러 싼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자, 그는 나를 들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시계를 보면서 그는 “늦었어, 너무 늦었어…….”라고 중얼거렸다.

2.
당신은 나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고 흡족한 듯 웃는다. 나도 당신에게 웃어준다. 당신은 내게 바짝 다가와 눈을 크게 뜬다. 나도 놀라 눈을 크게 뜬다. 당신은 티슈를 꺼내나를 닦는다. 그제야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이 깨끗해진 것 같다. 당신은 나를 바라보며 황학동의 벼룩시장에서 사 온 이 오래된 거울이 그럭저럭 쓸 만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거울 속의 자신을 빤히 바라본다. 거울 밖의 당신은 거울 속의 나를 빤히 쳐다보며 뭔가를 속살거린다. 당신은 나를 툭툭 쳐보더니,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시간이 흘렀다. 그가 늦는다. 방은 밖보다 먼저 어두워졌지만, 곧 바깥의 어둠과 방안의 어둠은 같은 정도의 밝기로 같이 어두워진다. 바깥에는 별 몇 개, 점처럼 반짝이며 떠 있다. 그것을 보는 나에게도 그것들이 점점이 박혀왔다. 거울 속에서 나와 그것들과 어둠이 한데 섞여 버린다. 그것들은 경계도 없고 구분할 수도 없었다. 그리 대단할 것 없는 기술로 만들어진 나는 가게의 한쪽 구석 쇼윈도에 오랫동안 걸려 있었다. 매일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나들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나는 무척 많은 인격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이렇게 회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도 그런 이력을 가졌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이제 나를 소유하게 된, 사나흘에 한 번씩 들어오기를 밥먹듯이 하는, 당신은 항상, “너무 늦었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정작 자신의 귀가는 한없이 늦어지면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만이 늦어지고 있다는 듯이.

3.
그렇게 사나흘에 한 번씩 들어오던 당신이 어느 날인가부터, 외출을 하지 않게 되었다. 당신은 하루종일 잠을 자거나, 잠에서 깨면 이불 속에서 잠이 들 때까지 뒹굴었다. 당신은 나를 바라보지 않거나 완전히 나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누운 채 언제까지고 나를 보지 않았다. 나도 차츰 눈이 아려오다가 침침해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 쌓인 먼지가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을 덮어갔기 때문이다. 시간이 계속 흘렀다. 가끔씩 당신은 “너무 늦었어…….”라고 잠꼬대처럼 말했지만, 난 그것이 무슨 뜻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나도 잠이 왔고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누군가가 내 온몸을 뒤덮고 있던 먼지를 닦아내고 있었다. 당신이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 갑갑한 공기를 뒤로 물리려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당신이 아니었다. 당신은 여전히 고치에 싸여 구석에 누워있었다. “그만 나와 봐……. 벌써 한 달째야.” 여자가 말했다. 당신은 여전히, 귀가 없어요, 눈도 코도 입도 없어요. 라고 말하듯이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당신의 머리맡에는 엎어진 냄비가 보였다. 재떨이에 가득 쌓인 담배꽁초가 보였다. 찢어진 잡지들이 보였다. 낡은 카세트도 보였다. 그래도 먹고 피우고 보고 듣고 다 하는 걸로 봐서 마냥 죽은 ‘체’하지는 않는 것 같다. “벌써 봄이야.” 당신이 꿈틀거렸다. 여자가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을 털어 내자, 내 안의 여자가 보였다. 눈그늘이 짙고 마른 얼굴이었다. 머리는 약간 갈색이 도는 생머리였고, 눈가와 귓바퀴 쪽으로 안경 자국이 나 있었다. 나는 불편하게 여자를 받아들였다.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자 눈그늘이 더 짙어 보였다. 여자가 당신 위에서 숨을 헐떡인다. 낮이 꽤 길어진 늦봄이었다. 당신은 누운 채 담배를 피웠고, 여자는 티슈로 사타구니를 닦아냈다. “너무 늦지 않았어?” 당신이 말했다. 여자는 “아직. 조금 있다…….”라고 말했다. 여자가 나와 당신의 집을 빠져나간 것은 꽤 늦은 시각이었다.

4.
다음 날 당신은 나를 들고 뒤뜰로 나갔다. 내게 제멋대로 자란 꽃들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민들레가 어지럽게 피어있고 잡초들도 한 뼘씩 자라 있었다. 당신은 담벼락에 나를 세워둔다. 내 안으로 꽃들이 가득 들어왔다. 거울 속의 꽃들에는 향기가 없다. 그래도 거울 속의 꽃들에 거울 속의 벌들이 들러붙는 걸로 봐서, ‘유혹하는 무엇’을 거울 속의 꽃들은 품고 있으리라. 당신이 거울 속의 꽃과 벌에게 정신을 빼앗겨 있을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당신이 황급히 방안으로 들어가는 소리에 거울 속의 벌들이 날아가 버린다. 나는 봄바람에 흔들리는 민들레를 내 안에 들여놓은 채 밤을 새웠다. 그는 나를 잊은 듯 다시 뒤뜰로 나오지 않았다. 몹시 서운했지만, 알고 보니 내가 서운한 것이 아니라, 곧 질 꽃들의 서운함이었다. 황사가 잔뜩 낀 하늘은 밤이 되어도 여전해서, 언젠가 보았던 별들은 보이지 않고 어둠만 보였다. 당신이 나를 찾아 뒤뜰로 나온 것은 여름도 한 고비를 넘긴 무렵이었다. 당신은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의 먼지를 털어 내고 방으로 들고 왔다. 방에는 그 여자가 등받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 거울, 아직 가지고 있는 거야?” 여자가 말했다. “아직 버릴만한 물건이 아니야.” 당신이 말했다. 여자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다. 나는 여자가 맘에 들지 않는데, 당신은 여자 곁으로 가서 같이 책을 읽는다. 나는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을 질끈 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벽에 비스듬히 세워진 내 안에 당신과 여자가 엉킨 채 고스란히 들어온다. 여자가 당신에게서 떨어져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니 어두워서 안 보인다. 소리만 들렸다. 여자는 여기에서 살려는 것 같다. 내가 너무 늦게 뒤뜰에서 돌아온 것일까? 너무 늦은 것일까…….

5.
당신이 아직 고치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이른 아침에, 여자가 내게 들어왔다. 잠이 덜 깬 나는 여자가 몸 여기저기를 만지며 들어오는 것이 무척 불쾌했다. 그러나 여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게 들어온다. 여자는 여전히 야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눈그늘이 짙었다. 한 여름에 뙤약볕을 많이 받은 듯 주근깨가 몇 개 보였다. 얼굴도 처음 볼 때보다 검어 보였다. 여자가 손을 든다. 내 손이다. 거칠다. 아무래도 나는 몸을 잘 가꾸지 않는 여자인 것 같다. 여자는 당신을 돌아본다. 나는 여자의 뒤통수를 처음 본다. 머리숱이 적다. 브레지어 끈이 한쪽 어깨로 삐쳐 나와 있었다. 지나치게 여윈 뒷모습이다. 당신은 한쪽 구석에 단단히 고치를 붙박은 채 잠들어 있었다. 여자가 다시 나를 보더니 티슈를 꺼내, 나를 곱게 닦기 시작했다. 여자가 하―, 하며 입김을 불었다. 온몸이 눈인 나의 한쪽이 잠깐 감겼다가 뜨이자 좀 더 방안이 밝게 보인다. 여자는 온몸이 눈인 내 온몸을 그렇게 아침나절에, 열심히 닦았다. 여자가 좀 더 힘차게 내게 들어왔다. 여자가 웃었다. 당신이 고치를 뚫고 나와 여자 옆에 섰다. 아니 뒤에 섰다. 내게 여자와 당신 둘이 한꺼번에 들어온다. 그래도 다 들어올 만큼 내 속이 넓지는 못한가 보다. 당신과 여자가 깊은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누웠을 때는, 아직 아침이었다. 나는 모른 척 하려고 했지만, 여자가 나를 너무 깨끗하게 닦아놨다. 여자의 배꼽이 깊었다. 검었다. 당신이 여자에게 짧은 키스를 하고 일어선다. 당신은 옷을 입고 젖은 날개를 털고 집밖으로 날아간다. ……당신이 다시 집으로 들어 온 것은 사흘 만이었고, 그때 집에는 여자가 없었다. 당신은 잠깐동안 낯선 집에 들어 온 것처럼 겉옷도 벗지 않고 넥타이도 풀지 않고 구두도 벗지 않고 마루에 주저앉아 신발장에 몸을 기댄다. 그 날 밤 당신은 잠을 자지 않았고, 나도 잠을 자지 못한 채 외로운 너를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6.
당신이 없던 사흘동안 여자는 매일 다른 남자들을 데려온다. 남자들은, 아니 차라리 벌레들은, 여자와 엉켜 하룻밤을 지낸 뒤 슬그머니 골방을 빠져나갔다. 여자는 항상 내 앞에 서서 브레지어의 호크를 채우고, 티슈로 사타구니를 닦고, 팬티를 입었다. 나는 온몸이 눈이란 것이 이때만큼 싫었던 적이 없다. 그러나, 그런 감정들은 어쩌면 내게 투사되었던 수많은 남자들의 공통분모로서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사회적인 통념. 여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당신은 얼마나 많은 날을 어두운 골방에서, 더 어두운 고치 안에서 지내야 할까……. 여자는 사흘째 되는 날, 통통하게 살찐 벌레와 함께 나간다. 집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공기들은 자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자꾸자꾸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바깥보다 방이 먼저 어두워졌고, 바깥에 그나마 빛이 남아 있을 때 당신이 들어온다. 바보같으니라구, 너무 늦게 왔어,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온몸이 눈인 나는 온몸으로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당신은 한 동안 그 자세로 신발장에 기댄 채 앉아 있다가, 일어나 내가 보이지 않는 큰 창문 아래쪽으로 갔다. 책 한 권을 꺼내들고 여자가 가끔씩 앉았던 등받이 의자에 앉는다. 당신의 손에 들린 책은 꽤 여러 사람의 손때를 타 거뭇거뭇해진 얇은 책이었다. 그가 낮은 소리로 책의 한 구절을 읊었다.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에 대해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

7.
당신은 먼저 발작적으로 들고 있던 책을 찢거나, 연필을 부러뜨려 벽에 세차게 던져버린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을 때는 컵을 던진다. 그럴수록 더욱 발작적으로 깨부순다. 손에 잡히는 대로, 그릇, 라디오, 냄비……. 나중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서럽게 운다. 사실 당신이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나를 사온 것이 우연은 아닌 셈이다. 그런 발작이 일어날 때면 여지없이 거울이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다. 거울은 세상에서 제일 깨지기 쉬운 물건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당신의 두어 번의 발작에도 깨지지 않았다. 첫 번째 발작 때 나는 뒤뜰에 있었다. 두 번째 발작 때 내게 날아온 물건은 푹신한 베개였다. 당신은 헝클어진 머리, 사나운 눈으로 내게 들어왔다.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에 그가 쑥 들어오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거울 속에 들어 온 당신이 너무 아파 나는 눈물을 흘린다. 얼굴이 찡그려지더니, 어깨가 들썩거리더니, 아아, 소리 없이 울더니 당신은 내 아래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의 눈물에 어깻죽지의 날개가 온통 젖어버릴 것 같았다. 아무리 날아가도 내 시선이 미치지 않는 먼 곳까지 날아가도, 결국 너는 돌아온다,*** 돌아왔다. 돌아와서 봐서는 안될 것을 봤다.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르게 돌아왔다. 언제 왔나, 오긴 왔나, 여자가 당신을 뒤에서 껴안는다. 울지 마라, 착한 아기, 자장자장 우리 아기……. 온몸이 눈인 내 온몸은 어쩐지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그래 부재 하는 존재인 내게 눈물샘 따위는 너무 사치스러운 공상이 아니냐. 내 아래 당신과 여자가 다시 엉킨다. 방안의 어둠과 밖의 어둠이 똑같이 어두워져 대신 눈꺼풀이 되어 나는 비로소 눈을 감는다. 그래도 없는 귀에서 들리는 소리가 나를 자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두워도 어른거리는 욕망이 내게 그대로 비친다.

8.
너는 거울 앞에 서있다. 그리고 거울 안에 서있는 너는, 네가 거울과 떨어져있는 만큼 거울 안쪽으로 더 들어가 있다. 다가가면, 손을 내밀면 거울 안의 너도 다가와 손을 내민다. 너는 손바닥을 거울에 댄다. 거울 속의 너도 손바닥을 마주 붙인다. 차갑다. 거울 속의 너는 체온이 없는 것처럼 차갑다. 너의 눈그늘이 짙다. 작은 눈이 자주 깜박거린다. 눈은 붉어지는데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숱이 적은 갈색머리를 쓸어 내린다. 너는 브레지어를 채우고 팬티를 끌어올린다. 벌레들 중 하나가 선물한 립스틱을 반쯤 끌어올려 거울에 뭔가를 적는다. 그러다 북북 긋는다. 그리고 뭔가에 화가 난 듯, 거울 속의 너에게 욕을 한다. 거울 속의 너도 지지 않고 욕을 하지만, 거울 안쪽의 벽에 반사된 거울 안의 소리가 거울 밖에까지 들릴 리 없다. 너는 사각거울을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거울 속의 네가 수 십 조각으로 쪼개진다. 큼직한 유리조각 하나를 들어올려 바라보는 너. 너는 뭉툭하게 뭉개진 립스틱을 입술에 바른다. 너는 당신이 황학동에서 사 온 거울을 생각하고, 자신도 새 거울을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너는 황학동으로 나갈 채비를 한다. 당신 역시 오랜만에 골방을 빠져 나온다.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은 당신이 현관을 빠져나가는 것을 본다. 너무 늦으면 안 된다고, 속살거린다. 당신은 내 속살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잠깐 고개를 꺾어 나를 보고 다시 현관 밖으로 나간다. 문이 닫히자 현관이 내게 들어왔다. 그 날 밤이 다 지나도록 나는 현관만을 바라본다.

9.
당신이 나간 사이, 여자가 들어온다. 여자는 방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후, 긴 한숨을 내뱉는다. 핸드백을 신발장 옆에, 툭, 던져두고 여자는 내 앞에서 머리를 쓸어 올린다. 여자의 마른 얼굴, 광대뼈가 더 도드라져 보인다. 피곤한 눈이다. 하루종일 어딘가를 걸은 걸까, 온몸이 먼지투성이다. 여자는 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뒤져 셔츠를 하나 꺼낸다. 여자가 내 앞에 서 옷을 벗는다. 청바지를 벗자, 바짝 마른 다리가 드러난다. 대체 살 한 점 없을 것 같고, 꼬챙이만 같은 여자의 다리. 나는 여자의 얼굴을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에 들여놓고, 여자의 착 가라앉은 감정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여자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커다란 눈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들여다 본 감정은, 바다였는데 다시 보면 사막이었다. 바다였을 때 헤엄치던 물고기들이, 사막이었을 때 말라죽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바다인데 사막이다. 바다였었는데 사막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바다이고 사막이다. 죽음과 생이 서로를 간섭(干涉)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여자는 죽어있다. 살아있다……. 죽어있다……. 삶이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면 죽음이 충만해진다. 뒤집어보면 그게 삶이다. 마찬가지로 바다와 사막은 같은 자리에서 서로를 보충하며 존재한다. 여자는 바다면서 사막인데, 여자는 그곳에 물고기 몇 마리를 키우고 있다. 물고기는 조금만 더 크면 새가 된다.**** 그래서 바다면서 사막인 여자는 또 하늘이다. 그러니까 여자는 세계이고, 알이고, 알을 깨고 날아오를 새인데, 아직 깨어나지 않은 알이 혹시나 곯을까 전전긍긍한다. 그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두 개의 다리가 너무 여위었다. 아니 세계를 둘러 쓴 여자의 거죽이 볼품없이 말라있다. 여자는 셔츠를 입는다. 긴 셔츠가 여자의 무릎까지 내려온다.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은 여자를 들여다보는 것을 그만둔다. 여자가 펼쳐진 이불에 풀썩 엎어져 잠이 든다. 새벽에 당신이 현관을 열고 들어온다. 내가 제일 먼저 당신을 반겼고……, 그녀가 자고 있다. 그녀가 자고 있다…….

10.
당신은 자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야윈 얼굴, 여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당신은 고치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고치 안에 잠든 여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마치 신기한 무엇을 대하는 것처럼 당신은 계속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가 몸을 뒤척인다. 그래도 당신은 여자를 바라본다. 처음엔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다음에는 얼굴이 일그러졌다가, 다시 아이같이 웃다가, 이제 장난기 어린 눈으로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가 참지 못하고, 큭큭 거리며 눈을 뜬다. 당신도 큭큭 거리며 웃는다. 여자와 당신이 입맞춤을 한다. 여자의 셔츠 안쪽으로 손을 넣어 도드라진 젖가슴을 만진다. 여자는 당신을 끌어안고 목에 키스를 한다. 당신은 남은 한쪽 손을 여자의 사타구니에 집어넣는다. 여자가 거칠게 숨을 내쉰다. 마침 작은 창으로 별이 들어왔는데, 그 별이 내 눈에 담긴다.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에 별이 하나 점처럼 찍혔다. 한낮의 소음에 가려 들리지 않던 작은 소리들이, 밤에는, 크게 들린다. 벌레소리라든지……. 그런 것보다는, 공기들이 파도처럼 부딪쳐 철썩거리는, 쏴아―, 하는 소리들, 이런 밤은 너무 아름다운 밤이다. 별이 한 두 개 더 내 눈 속에 들어온다. 당신과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 담배연기가 작은 창을 통해 빠르게 빠져나간다……. 밤이라는 부드러운 눈꺼풀이 내 온몸을 덮는다. 그게 내게는 잠이다. 누군가 목매다는 밤, 부드러운 잔디 같은 밤…….

11.
이사다. 당신과 여자는 짐들을 부지런히 싸고 묶는다. 가끔씩 몸을 부딪히며 장난을 친다. 대충 짐이 정리되자, 당신은 신문지 몇 장을 찾아들고, 나를 벽에서 떼어내 싸매기 시작한다. 여자가 말한다. “그 거울 바꾸지 않을 거야?” 당신이 말한다. “글쎄, 아직 쓸만한 것 같은데…….” “새집에 어울리지 않아. 내 말대로 하자.”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을 가린 신문지에 가려 나는 앞을 보지 못한다. 당신이 짐을 옮기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한참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무슨 일일까. 생각보다 오랫동안……, 아니, 나를 두고 가버린 것 같다. 보이지는 않지만, 공기들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몇 밤이 지났을까……. 당신이 보고싶다, 는 생각을 잠깐. 내게 눈물샘이 있다면, 감정이 있다면 어땠을까……. 별들이 작은 창문으로 몇 번인가 떴다 졌을 것이다. 낮인가 보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뭔가 부산한 움직임. 누군가 이사를 오나……. 신문지가 거칠게 찢어진다. 아침 10시정도 된 것 같다. 작은 창문으로 비스듬히 쏟아지는 햇빛이 온몸이 눈인 내 온몸에 부딪힌다. 반사된 빛에 눈이 부시다. 내 앞에는 당신이 서있다. 왜 다시 왔지? 당신은 나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어떤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 버려지는 물건들은 대개 ‘재현된 과거’의 물건들이다, 혹은 기억이거나.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의 현재를 인정하는 시간은 좀 더 유보된다……. 당신에게 어쩌면 나는 ‘집착’일지도 모른다. 한 번도 제대로 된 눈길을 내게 주지 않았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도 나를 사랑한다. 나는 너의 반사된 무엇이기 때문에. 나는 너의 감정까지도 비춰내는 무엇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흉내내는 거울이기 때문에…….

12.
여자가 보이지 않는다. 반지하에서 옥탑으로 바뀐 것 말고는 당신의 생활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여자의 알을 싸고 있던 여읜 거죽이 허물처럼 무너져 내린 것일까. 당신은 여자를 찾지 않으려는 것 같다. 완전히 망각 속으로 여자를 보내버린 것 같다. 여자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여자에게 당신은 무엇이었을까. 여자가 품은 알이 곯지 않고 온전히 새가 되어 멀리멀리 날아갔다면, 아마 당신은 순순히 그 새를 날려 보내줬을 것이다.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신의 방에는 한쪽 구석에 잣다 만 고치가 남아있었다. 당신도 변태를 하려는 것 같다. 예전에 보던 고치보다 훨씬 튼튼해 보인다. 갑충의 그것 같다. 여자라는 허물을 벗고 새가 된 그것은 어디로 갔나. 당신이 고치에서 나오면 그 화사한 호랑 무늬 날개를 펼쳐 어디로 갈까. 나는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으로, 그런 변태의 과정들을 지켜본다. 당신이 고치 속에 들어 가 입구를 단단히 막는다. 한 계절이 지나 봄이 온다. 고치를 찢고 나비 한 마리가 더듬이를 내민다. 젖은 날개를 몇 번 쓰다듬고 열린 창문으로 날아간다……. 아니 당신은 그런 꿈을 내 눈에 그려 넣으며 내 앞에 선 채, 중얼거린다.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어…….”

13.
당신의 집에는 전에는 없던 손님들이 많아져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눈으로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나는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에 다른 것들―다른 것들은 더러운 것들이다―이 틈입해 오는 것이 불쾌하다. 나는 눈을 부릅뜬다. 내 세계는 어둡다, 라고 말한다. 너를 집어삼키겠어, 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의 말이 그들에게 들릴 턱이 없다. 어린아이같이 상심한다. 손님들이 오면 당신은 말이 많아진다. 당신은 말한다. “벌써 왔어? 안 늦었네, 빨리 왔군…….” 항상 너무 늦는다, 라는 말을 하던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듣고 있으면, 네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시 밤이 되어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침울한 너는 나를 한 번 쓰다듬고 한숨을 내뱉는다. 처음 당신이 내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에 비쳐 들었을 때, 그 ‘각인됨’이 너무 강렬해, 나는 곧장 당신의 인격을 공유하게 되었다. 나는 당신을 갈구한다. 그 욕망을 가로 챈 계집이 미운 건 당연한 일이다. 거울 안쪽에서 끊임없이, ‘나는 너를 원해’라고 발화되는, 감정들은 바깥과 정확히 제로zero로 경계지어진 그 표면에 부딪혀 돌아온다. 네가 침울해지면, 나도 침울해진다. 만약……. 만약 그 경계가 깨어진다면, 나의 ‘말’은 너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가능할까? 아니다. 이 경계는 절대 깨어지지 않는다. 아니 너무 쉽게 깨어진다. 그 경계를 깨는 것은 폭력이다. 발작적으로 내게 날아오는 물건들이 언제고 이 경계를 깨뜨릴 것이다. 그러나 깨어진 순간 그 자리에 나는 없다. 그 경계야말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뜨려져야 할 것은 깨뜨려져야겠지. 과거와의 완전한 결별을 위해, 나는 언제고 깨뜨려져야 할, 어떤 것이다…….

14.
나는 벽 안쪽으로 뿌리를 내린다. 못 하나를 탕탕 박고, 나를 그 못에 거는 당신은, 그것이 ‘씨뿌리기’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벽이 세워진 건 인류역사에 경하할만한 일이다. 건축의 시작은 문명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벽에는 온갖 정념(情念)들이 스며들어 있다. 골방도 벽이다. 침실도 벽으로 구분되어 있다. 나누는 것, 구분 짓는 것, 경계들. 그 안에서 사람들은 당대에 걸맞는 정념들을 불태운다. 태워진 정념들의 잔해가 벽에 스민다. 스미고 쌓인다. 그것이 바로, 내 뿌리의 양분이다. 이제 좀처럼 그 단단한 뿌리를 자르고 나를 벽에서 떼어낼 수 없다. 사실 정념이 양분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거꾸로, 그 정념의 늪에 내가 서서히 빠져 들어가는 거라 해도 무방하다. 왜곡된 현실에서라면, 이제 나는 ‘틀’이 없다. 벽 한 가운데 뻥 뚫린 결핍이다. 모든 것을 보는 눈이다. 여기서 더 진화하면, 나는 완전히 벽에 함몰된다. 정념의 눈이 되는 것이다. 무서운 눈이 되는 것이다.***** 제대로 걸렸어! 라고 소리치며 히드라처럼 쉬쉭거리는 머리카락으로 당신의 목을 조를 것이다. 정념의 독하고 빨간 눈이 바로 나다! 당신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지 양 볼에 손바닥을 대고 눈을 크게 뜬다. 입을 크게 벌린다.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널 부숴 버리겠어! 너 때문이야! 라며 당신은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을 벽에서 떼어내려 한다. 나는 더 깊이 정념에 뿌리를 박고, 애원하는 투로, 위협하는 투로, 앙탈을 부리듯,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떨어지지 않는 나를 붙잡고 당신, 주저앉아 운다. 너무 외로운 것 같다. 불꽃같던 정념이 사그라든다.

15.
사랑하는 사람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서럽게 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 눈물에 그/그녀에 대한 기억이 씻겨 내려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눈물이 없는 사람, 슬퍼도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은, 눈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존재다, 당신이 그런 것처럼.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이 하나로 묶여버린 나와 당신은 눈물을 흘리지 못하고, 눈가만 붉어진 채,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옥탑에서, 덩그러니, ‘나 혼자 뿐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문이 사라진다. 창문도 사라진다. 벽뿐이다. 모든 벽이 눈이다. 거울에 비친 수많은 나들이 저만의 공간에서 저만 있다고, 저 뿐이라고 말한다. 내 이 넘치는 감정을 투사할 대상이 사라진 지금, 나는 외롭다고……, 쓴다. 당신은 아마 여자를 만나기 전에 또 다른 여자와 깊은 사랑을 나눴을 것이다. 그 사랑이 여지없이, 거울이 깨지듯 산산조각 났을 때, 당신은 오랫동안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 같다. 그게 한 달이 너머 지속되었을 것이고, 당신의 친구였던 여자는 그것이 걱정되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걱정한다는 것은, 그래서 사랑이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그런 연민은 반드시 사랑―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이런 진부한 물음이 본질이 되어 버리는 상황은 또 무엇인가!―의 파탄을 예고한다.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이 바라본 것은 그 오랜 시간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당신을 사랑하는 나는 단지 ‘눈’일 뿐인가, 사념일 뿐인가, 나를 쓰는 자의 유희일 뿐인가……, 라고, 쓴다…….

16.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인 나는, 새로운 주인을 만났다. 당신이 마침내 나를 떼어내 집밖에 세워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가져간 사람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그러니까 내 얘기를 받아쓰고 있는 그 사람이다. 나와 그는 어렵지 않게 서로간에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연극을 하는 사람인데, 내가 버려진 것을 보고, 잘됐네, 발성연습하기 딱 좋겠어, 라며 나를 가져다 그의 거실에 걸어두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 말을 걸었다. 울고, 웃고, 화내고, 우울해하고, 찡그리고, 평온해하며, 말을 걸어왔다. 만약 그가 당신 같은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와 얘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와 나 사이에는 어떤 매개가 있었던 것 같다. 극적으로 꾸며진 표정 말이다. 그가 극중 인물의 표정으로 내게 얘기하면, 나는 내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에 비친 극중 인물의 표정으로 그에게 얘기한다. 서로가 서로의 상대역을 맡아 훌륭한 연극을 해 내는 셈이다. 그리고, 그가 당신에 대한 얘기를 글로 쓰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러라고 했다. 내가 구술하면 그도 그것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글을 적어갔다. 그 동안 가을이 되었고, 그의 맞은 편 옥탑방의 당신은 고치에서 나와 커다란 호랑 무늬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갔다……. 온몸이 눈인 나의 온몸에 잠깐 그 날개가 비쳤을 때 나는 구술하기를 멈췄다. 그도 받아쓰기를 멈췄다. 얼마 후에 나는 마저 얘기를 시작했고, 그도 그 날 받아쓰기를 끝마쳤다.


*“그 자신의 삶을 사는 그러한 거대한 눈―즉, 전체 신체(유기체)와 신비스럽게 일치하는 특수한 기관―은 아마도 궁극적인 정신병적 대상일 것이며 동시에 대상 소문자 a의 가장 순수한 구현일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할리우드의 정신분석』p.202, 한나래.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p.197. 문학과지성사.

*** 마치, ‘모든 편지는 그 목적지에 도착한다’라는 명제를 실천하려는 듯이, 그는 미지(未知)의 곳까지 날아가 기지(旣知)의 곳으로 돌아온다. 그가 보내는 편지는 그 자신이다.

****장자에 의하면 그것은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붕(鵬)이라는 새로 변한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논리에 의하면, 그것이 물고기에서 새로 변한다, 라는 것에 그 요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지, 대지(大智)의 공간으로 ‘날아오름’에 있다. 이 언술이 ‘미꾸라지가 용으로 변해 날아오른다’, 라는 식으로 변질될 때, 최초로 발화된 곤→붕, 의 ‘날아오름’의 요체까지 변질시킨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이미 존재하는 텍스트를 변화시키듯이.
바르트의 간텍스트(inter-text)가 독자의 입장에서 독자가 읽은 ‘후대의 텍스트로부터 이전에 씌어진 텍스트를 불러오게 하는’ 바로 그 ‘후대의 텍스트’를 지칭한다고 할 때, 이 이전의 텍스트를 불러올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그 텍스트(이미 씌어진 텍스트)를 변화시킨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텍스트를 hyper-inter-text(hypinterext), 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단, 이때 말하는 ‘텍스트’는 보다 광범위하게 ‘결, 무늬, 짜임’ 등의 확장된 의미를 가지는 것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시간에 새겨진 텍스트(삶)이며, 의식, 또는 뇌의 주름으로서의 텍스트이다. 이러한 개념이 협의로 이해될 때 그것은 더 이상 텍스트가 아니라 ‘～적(的)’이라 불려야 마땅하다.

*****“대상 소문자 a는 거울 이미지 속에서 영원히 상실되는, 즉 ‘거울로 반사할 수 없는unspecularizable’ 무시무시한 잉여the unheimliches surplus, 하지만 그 덕분에 거울 이미지가 자신의 무시무시한 특성을 얻는 그 헤아릴 수 없는 X라는 형상으로 그 속에 현전하는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중체는 ‘나와 똑같은 것’ 그러나 전적으로 낯선 것이다.”슬라보예 지젝, 같은 책 p.214.




김종호1970년생. 2000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소설집 [검은 소설이 보내다] 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