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대한 감회


김원일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36년간은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이 지워지지 않는 멍으로 아직 시퍼렇게 그 자국이 남아 있다.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들, 일본에 빌붙은 덕에 영화를 누린 배덕자들, 조선총독부 산하 말단 기관에 이르기까지 충복으로 기생하며 동족을 박해한 모리배와 간상배들……. 따지고 들면 당시 반도 땅에 나와 있던 일본인보다 각종 이권 챙기기에 급급했던 그들 등쌀에 조선 백성은 더 많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일제가 36년 동안 조선 강토와 조선인을 늑탈한 갖가지 사례는 수많은 자료가 이를 증명하며, 아직도 그 고통을 잊지 못하는 세대가 증인으로 살아 있기에 새삼 재론할 필요가 없다.

이런 응어리진 상처가 낯짝 두껍게 역사 속에 그대로 묻혀서는 안 된다며 한탄만 할 뿐 가는 세월을 허송하고 지낼 때, 참여정부가 들어서서 일제하 부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법을 들고 나왔다. 누구보다도 나는 이를 환영했다. 일제 말에 태어났으나 식민지 시대의 미체험 세대로 성장해 사료나 피해 당사자의 증언에 의지해 그 시대를 짚어온 나로서는 따질 것은 확실히 따져 시시비비를 가려서 매듭을 짓고 역사를 진전시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편소설 『바람과 강』을 1985년에 발표했으니 그 동안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소설은 일제하의 한 변절자의 생애를 다룬 작품이다. 작품을 쓰게 되기는 대학원 석사논문으로 이광수의 동우회사건에 연루된 옥중 체험기인 중편소설 『무명』과 김동인의 3·1만세운동 체험기인 단편소설 『태형』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 분들의 친일 행적을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있어, 그 계기가 촉매 구실을 한 셈이다. 소설 내용을 요약하면, 벽촌에서 성장한 무식꾼 이인태가 뜻을 세워 만주로 들어가 독립군 병졸이 된다. 그는 청산리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일경에 체포되어 독립군 위치를 불라는 저들의 취조를 받는다. 고문 과정에서 그는 비몽사몽간에 독립군이 머물렀던 한인촌을 무심코 흘리고 만다.

우리가 가혹하게 족쳤다 하더라도 조국을 배신한 개돼지 같은 놈은 영창에 가둬둘 필요조차 없다며 일경은 이인태를 석방한다. 이국땅의 북풍한파를 무릅쓰고 국권회복에 나선 독립군 부대원에게 더운 밥 한 끼 대접했다는 이유로 그 한인촌은 왜군에 의해 쑥대밭이 된다. 폐허화된 그 한인촌을 찾아간 이인태는 이제 동포들로부터 배신자란 낙인 아래 매타작을 당한 후 한쪽 귀까지 잘린 채 개돼지보다 못한 인간말종이란 저주를 받고 마을에서 내쫓긴다. 그로부터 이인태는 짐승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 참회로 생명을 부지하다 후생에서나 참 인간으로 태어나겠다며 죽음을 맞는다는 내용이다.

인용이 좀 길었지만, 나는 크게 작게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협조함으로써 명예를 더럽히고, 권력과 재력으로 호화를 누리고, 자식에게 고등교육의 혜택을 줄 수 있었던 자들의 비도덕적인 마음을 간접적이나마 응징 하고자 했다. 한편, 그 자들이 해방 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숙했든, 과거의 치부를 밀봉한 채 권력과 재력만을 부나비처럼 쫓았든, 한 번쯤은 자신의 지난 행적을 되돌아보는 준열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시절, 존경하는 인물을 쓰라면 나는 안중근 의사와 고산자 김정호를 기입하곤 했다. 왠지 그 분들이 걸어간 길이 참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비쳤다. 소설가가 된 후 안중근 의사 전기를 집피해보려 자료를 모으기도 했으며. 1993년에는 일제하의 민족 수난사를 다룬 대하소설 『늘 푸른 소나무』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나는 일제하의 민족 문제, 특히 친일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다. 자료를 섭렵하는 과정에서, 소설을 쓸 동안, 나는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에 대해, 부일 행위자들의 행태에 대해 아픈 마음을 가다듬었고 분노했음도 사실이다. 당시 조선인 대부분은 일제의 엄격한 통제 아래 달리 정보를 얻을 수 없었기에 대 일본제국이 패전하리라고는 꿈에도 믿지 않았고 그들의 조선 지배가 영영세세하리라 여기며 애면글면 힘들게 생존했기에, 한 몸 바쳐 의로서 나라를 구하려 했던 의사와 열사들은 더욱 우러러 보였다.

그런 식민지 민족 수난사를 몸소 겪은 백성이기에 지난 역대 정권들이 부일 행위자를 가려내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고, 한국 현대사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그 치부의 일부가 드러나기도 했으나 제대로 매듭을 맺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났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 부일 반민족 행위자들의 뿌리가 의외로 막강한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일제하, 해방공간, 전쟁, 군사정권, 산업화 이행 과정의 첩첩한 시대적 굴곡에서 면면히 살아남은 기득권 세력인데, 백주에 발가벗기는 수모를 어떻게 당할 수 있냐며 온갖 권모술수를 동원해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결사적으로 과거의 허물을 감추고, 덮어버리고, 아예 자취조차 없애고, 심지어 타겟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 응징하는 적반하장의 죄악마저 저질러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친일진상규명이 회자되자 먼저 떠오른 생각이, 북측의 체제를 반대하여 월남한 이들이 조직한 서북청년단이다. 해방을 맞자 북측 정권이 가장 먼저 착수한 정책이 토지개혁과 친일잔재 청산이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통해 토지를 국유화하고 경작은 농민에게 돌려주고, 동시에 친일파 숙청에 철퇴를 가했다. 그 응징이 철저했던 만큼 부일 협력자들은 북측 땅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온건한 지식인, 보수적인 지주 계층, 신앙심 강한 종교인들이 남측을 선택해 삼팔선을 넘었고, 부일 행위자들도 그들과 함께 남행 대열에 섞여들었다.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달성하려 일제 때 권력께나 누리며 자족했던 자들을 관, 군, 경찰을 가리지 않고 요직에 대거 등용해 수족으로 부렸다.

거기에도 끼지 못한 채 좌불안석 눈치만 보던 부일 행위자들은 월남한 청장년들이 공산 도배 타도를 내세우며 조직한 서북청년단에 들어가 몽둥이를 들고 설치기 시작했다. 객지살이가 고달팠던 그들에겐 이 반공단체가 좋 은 은선처였다. 옥석을 가려낼 수 없었던 당시, 서북 청년단이 좌익분자를 때려잡는다며 저지른 패행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제하 독립운동가가 좌익이란 붉은 딱지를 달고 과거 일본 경찰 끄나풀의 밥이 되어 다시 고문을 받고 타살되기도 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란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내가 태어난 남도 땅 김해군 진영읍에도 서북청년단이 적산건물을 차지해 경찰의 묵인 아래 갖은 행패를 부렸다. 경찰보다 서북청년단이 더 무섭다는 말이 돌았으니, 당시 수리조합에 근무하던 고모부가 서북청년단 사무실로 끌려가 아버지 때문에 초죽음이 되어 나오기도 했다. 남측에서 부일 행위를 했던 자들도 각종 우익단체를 등에 업고 일제하에 했던 못된 짓 이상으로 허술한 법망을 비웃으며 패행을 저질렀다.

또 하나 예를 든다면, 도피성 이민이다. 70년대에 본격적인 미국 이민시대가 열리자 미국이란 광활한 부자 나라에서 새 생활을 하겠다며 너도나도 이민을 떠났고, 많은 월남민이 그 대열에 끼었다. 월남민들 이민의 경우는, 만약 한반도에 다시 전쟁이 터진다면 가장 안전한 곳은 미국이라, 어차피 고향 떠난 타향살이 신세라면 대국이 차라리 낫다며 떠났고, 결과적으로 미국 국적으로 이북 고향 땅을 남한의 월남민보다 먼저 밟아보기도 했다.

그들 대열에 다수의 부일 행위자와 그 자손들이 끼게 된 것이다. 독립운동가 자손은 교육조차 변변히 못 받아도 권력과 재력을 누렸던 부일 행위자 자손은 일찍 미국 유학물 먹는 혜택을 누렸고, 그들이 현지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며 가족과 친척을 불러들였다. 숨어산다 해도 과거에 저지른 패행을 훤히 알고 있는 이웃이 살아 있는 이상 손가락질 받으며 살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선대 의 못된 행위가 족쇄가 되어 이를 숨기려 이민 길에 오른 자 또한 많았다.

때를 놓친 지도 한참 세월이 지났으나 부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법으로 이번만은 본때를 보여야 마땅함은 나 이외에도 국민 누구나 공감하는데, 예를 든 두 부류만 보더라도 이 시점에서 그들에게 문초하기에는 긴 세월이 흐른 만큼 많은 애로가 따른다. '동행명령'만 하더라도 고인이 된 이가 더 많고, 타국인을 마음대로 증인대에 세울 수도 없다. 자손들이야 권세와 돈 있는 부모 만난 게 무슨 죄가 된다고 조상 욕보이기에 나서냐는 항변에 그 답이 궁할 수밖에 없다.

조사대상자 선정에 당시의 '지위'가 아닌 '행위'에 중점을 두겠다 하지만, 당대를 겪어보지 않은 미체험 세대가 행위를 밝혀내어 옥석을 가리기에도 난관이 많다. 기록상 확실히 드러난 거물급만 추려낸다는 발상은 과거 정권 시절 대충 써먹은 수법이라 그 실효성이 반감된다. 짧게는 60년, 길게는 100년의 세월이 흐른 이 시점에서 친일 진상문제를 철저히, 제대로 규명하기가 힘든 시점에 와있다.

열린우리당의 이번 '부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법' 발동의 결단을 환영하고 그 도덕성은 높이 사지만, 정치적 입김이 작용하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국가 인권위원회 같은 한시적인 별도 기구를 만드는 것에 찬성하나 위원 구성에 대통령, 국회, 대법원 등이 3명씩 추천한다는 게 시작부터 관치(官治)가 작용하는 게 아닌가 히는 의혹이 앞선다. 어쨌든, 정치적 입김이 배제된, 객관적 안목을 갖춘 그 방면의 전문가들 머리로 이 사안이 다루어져야 한다. '시작이 반이다'란 말이 있지만 쇠뿔을 단김에 빼겠다는 만용보다 시간을 갖고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함이 순리라고 본다.

부일 행위자 명단과 죄과를 낱낱이 밝혀 이를 책자로 낸다면 처음은 착오와 오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연차적 작업으로 수정과 보완을 거쳐 개정판도 몇 차례 나와야 한다고 본다. 한편, 부일 행위자의 응징도 중요하지만, 대통령도 말했듯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복원시켜 후손에게 그 동안의 불명예를 씻어주고,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하며 한 푼 두 푼 독립기금을 모아 상해 임정에 보낸 분들까지 발굴하여 등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일제하의 수난과 영광을 후손에게 물려줄 날을 고대해 본다.



[대산문화 2004년 겨울호]


김원일1942년생. 소설 『마당 깊은 집』『바람과 강』『노을』『불의 제전』『물방울 하나 떨어지면』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