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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허용하라
신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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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이맘 때였다. 연변 조선족자치주 연변도서관의 창으로 나른한 가을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는데, 긴 하품의 말미에 느닷없이 낯선 단어 하나를 발견했다. 한성문단… 한성문단? 이 단어는 낡은 <만선일보>의 한 귀퉁이 문장 속에 얌전히 들어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가슴을 후벼들었다. 안수길이며 최서해, 강경애란 이름이 되살아나서 등을 툭툭 쳤다. 그때 비로소 나는 왜 ‘조선문단’이 아니고 ‘한성문단’인가 하는 의문을 떠올렸다. |
그랬다. 일제시대 만주에서 활약하던 작가들에게 만주라는 공간은 변방이 아니었다. 몇몇 일본 유학파들이 내뿜는 모더니즘의 입김은 단지 ‘한성’의 특성이었을 뿐 그것이 ‘조선문단’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성에 형성된 문단세력을 ‘한성문단’이라고 불렀다. 그러고 보니 당대의 ‘조선문단’이란 김소월의 영변, 김유정의 춘천, 채만식의 군산… 무릇 한성과 평양, 만주뿐만 아니라 조선 구석구석, 일본과 중국 내지에서 활약하던 이들까지를 포함한 광범위한 개념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평등하고 확대된 문화의 전통은 해방과 분단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가장 최소한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조선이 남한으로 바뀌더니 급기야 서울이 국토의 혈맥을 부여잡고 많은 이들을 떠나 보냈다. 남은 자들이 ‘조선문단’이라는 이름을 슬쩍 자기들의 명함에 박아놓고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이 중앙권력은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지방을 상상의 공간에서 지워버리고,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으로 국토의 반을 상상의 영역에서 삭제해 버리고, 프로파간다란 비아냥으로 민족 공동의 창조적 산물을 애써 헌책방으로 던져 버리고 있다.
일찍이 연암은 연경으로 가는 길목에서 여기저기 존재하는 평양을 발견했다. 땅이 넓은 곳을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평양이라 불렀고 그 땅을 흐르는 수많은 ‘패수’를 만났다. ‘어찌 조선 선비들은 패수를 대동강이라 우기며 관념적으로 국토를 축소하느냐’는 연암의 말은 단지 <열하일기>에 남겨진 옛 선비의 한탄이 아니다. 조선의 선비들이 사고의 공간을 대동강 이남으로 축소시켜 사대주의에 빠져들었듯이 역대 위정자들 또한 휴전선 이남으로 상상력의 공간을 한정시킴으로써 국민 모두를 변방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개인의 상상은 꿈을 꾸게 하며 그 꿈은 열정을 만든다. 집단의 상상은 신명을 만들고 사회를 역동적이게 한다. 어쩌면 우리의 현대사는 상상의 공간을 되찾는 지난한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개인의 꿈을 온전히 되찾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경의선 침목 하나만큼 상상의 크기가 확대되고 고구려에 대한 관심의 크기만큼 단절된 상상력이 복원되기를 우리는 얼마나 고대했던가.
결국 친일문인이 되었지만 근대적 인간으로서의 춘원은 대륙을 자신의 상상 영역에 두었다. 사랑하는 이를 찾아 바이칼로 떠나는 <유정>의 여주인공 정임의 머리 속에 도쿄, 만주, 시베리아는 지도에만 존재하는 땅이 아니었으며 꿈과 현실이 만나는, 살아있는 땅이었다.
민초들은 새로운 세계를 설계하기 위해 상상의 공간을 넓혀 가는데, 아직 일제의 유산으로 권력을 쥔 ‘한성’의 기득권자들이 걱정이다. 그러니까 그날은 시월 어느날 볕 좋은 오후, 관습헌법을 이유로 행정수도 이전의 중단을 헌재가 발표하는 순간 모든 사유가 멈춰졌다. 느닷없이 폭격이 시작되어 생각지도 못한 절망이 눈 앞에 펼쳐지듯, 나의 상상력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들 앞에서 무력해졌다.
대통령 탄핵에서 수도이전 위헌… 이것뿐이랴. 상식을 깨고 벌어지는 사건들이 국민들의 꿈을 깨지 않으면 좋겠다. 분단을 극복하고 대륙 끝까지 사유의 선을 이어가는 데도 60년을 넘기고 있지 않은가. 제발 이 현실이 문학이나 연극을 뒷전으로 둘만큼 황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겨레 2004-10-3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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