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조용한 전쟁

 *중동지역 파견작가 오수연 회원이 보내온 네번째 기고문

 

오수연(소설가) 111

 

오후에 만난 팔레스타인 화가가 깜짝 놀랄 얘기를 했다. 바그다드가 점령당했다고. 그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나를 만나기로 한 약속 때문에 억지로 나온 참이었고, 우리는 당장 그의 집으로 달려가 다시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사담 후세인의 동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아니 오늘 아침만 해도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반시간 전에도 나는 한 팔레스타인 작가와 이번 전쟁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 이런저런 예측을 했었다. 아무도 이라크가 미국을 이기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좀더 버틸 줄 알았고 그래주기를 바랐다. 무모하게 피를 흘리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전횡에 너무 쉽게 굴복하지 않기를 기대했다. 본격적으로 시가전을 벌이리라던 이라크 정예 공화국 수비대는 어디로 갔나? 바그다드에는 방어 진지를 쌓으려던 흔적조차 별로 없다. 그들은 심지어 싸워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화가는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사담 후세인이 마치 왕처럼, 자기 손에 입 맞추라고 군중들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을 보고 그가 완전히 썩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사담 후세인이 무릎 꿇고 이라크 민중들의 손에 입을 맞추어야 했다. 시작부터 '미국산 Made by USA'인 그는 끝까지 미국의 의도에 놀아났다. 전쟁 못 해 안달이 난 미국에게 이라크는 희생양으로 바쳐졌다. 이라크 민중들에게는 미국이 쏘고 싶어 하는 미사일을 맞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싸웠다. 비록 바위에 계란치기일망정, 미군이 바그다드에 닿기까지 각 도시에서마다 그들은 아랍의 자존심을 위해 저항했다. 오늘 그것은 짓밟혔다. 아랍뿐일까. 이 전쟁은 전쟁이 아니다. 도륙이다. 이라크 민중의 주검을 폭식한 미국 경제에 기생할 인류에게, 과연 자존심은 남아 있는가? 몇 시간 후에도 팔레스타인 화가는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현관을 나서는 나를 배웅하지 못했다.
이라크 전쟁이 터졌을 때, 팔레스타인인들은 심각한 각오를 했다. 중동 전체가 전쟁에 휘말리게 되리라는 예측도 있었지만, 그보다 이들에게 코앞에 닥친 위협은 전쟁 선포조차 없는 이스라엘의 공격이었다. 빗자루로 쓸어내듯 팔레스타인인들을 내몰아 웨스트 뱅크와 가자 지역에 격리시켜 왔던 이스라엘은, 이라크 전쟁으로 중동이 들먹거리는 틈을 타서 다시 한 번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많았다. 이는 이미 두 번에 걸쳐 이스라엘에 쫓겨 민족이 대이동했던 팔레스타인인들이 또다시 난민 신세가 돼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웃 나라 요르단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몰려올까봐 서둘러 국경 감시를 강화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입국을 거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의 경계선 '그린 라인'을 넘지 않았고 전쟁은 신속히 끝났다. 미국과 이스라엘 권력자들 사이에 무슨 밀담이 오갔는지야 알 수 없어도, 그들은 챙길 것을 챙겼다. 팔레스타인은 지금 숨을 죽이고 있다. 팔레스타인에게 돌아올 몫은 무엇인가? 미국 부시 행정부는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 세계 전체에 대한 이스라엘의 우위를 구축하고 견지한다는 정책을 고수해왔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을 인정하지 않고, 이스라엘과 별개가 될 수 없는 이스라엘 내부 지역으로 본다. 승리에 취한 미국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위해 남겨둔 술잔은, 필시 쓰디쓸 것이다.
군대가 그린 라인을 넘어 총진격하지 않아도, 이스라엘은 다른 방식으로 팔레스타인을 꾸준히 공격해왔다. 웨스트 뱅크 남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트웨니'는 그 공격에 노출되어 위기에 처한 팔레스타인 마을들 중의 하나이다. 200명 쯤 되는 트웨니 주민들은 돌언덕에 굴을 파고 돌담을 두른 동굴집에 거주하면서, 밀과 보리를 기르고 양과 염소를 치며 산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집집마다 한 대씩 있는 트랙터와 마을 전체에서 단 두 대뿐인 자동차, 시멘트로 지어진 집 몇 채와 학교, 발전기 몇 대를 빼면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온 팔레스타인 고유의 생활양식 그대로이다. 송전탑은 마을을 지나가지만 정작 마을과는 전선이 이어지지 않아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물은 샘이나 우물에서 긷는다. 이방인에게는 황무지로 보이는 이 거친 땅이 이들에게는 땀 흘려 가꾼 농토요 목초지이며, 바위 틈새에 조금 고인 흙에서 야생화처럼 하늘거리는 향초들도 다 물을 주어 기른 농작물이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낮에는 자기 밭에 자기가 기른 농작물을 수확하지 못하고, 밤에도 개 짖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잠 못 이루며, 학생은 학교에, 환자는 병원에 가지 못한다. 인근에 있는 이스라엘 정착촌 '마온' 때문이다.
정착촌, 사람이 정착해서 사는 촌락이라는 뜻이건만 팔레스타인에서 이 단어는 재앙이라는 함의를 품는다. 이스라엘인들의 정착촌이 일단 생기면 그 주변의 팔레스타인 마을들은 밀려나다가 반대편에서 확장되어오는 또 다른 정착촌 사이에 끼여 축소되고, 정착촌과 정착촌들이 연결되면 외부와 단절되고 고립되어, 끝내는 없어지기 마련이다. 십 여 년 전, 트웨니에서 발뒤꿈치를 들면 보일만한 지척에 이스라엘 정착촌은 반듯하고 아담하게 돋아나 살금살금, 그러나 끊임없이 넓어졌다. 8년 전에 밭에서 혼자 일하고 있던 트웨니 주민 '사비르'에게 총을 든 네 명의 정착민들이 다가와, 거기가 자기들 영토라며 즉시 꺼지라고 위협했다. 정착민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말하는 방식은 이렇다. "총에 맞아 죽을래? 아니면 죽도록 맞을래?"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태초부터 하나님은 이 땅을 오로지 자기들에게만 주었다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그 땅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자기 땅이므로 사비르는 저항했고, 집단폭행을 당해 팔이 부러졌다. 이후로 이런 일은 점점 잦고 격해져, 트웨니 남자들 중에서 정착민들에게 맞아 어딘가 깨지거나 부러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없다.
정착촌은 트웨니 깊숙이 전진거점을 만들고 일직선으로 도로를 뚫어, 컴퍼스로 원을 그리듯 과감하게 영토를 넓혀나갔다. 정착민들은 트웨니 주민들의 식수원인 샘에서 수영을 하고, 소중한 재산인 올리브 나무를 자르고 밭을 뭉개며, 농사 시설물을 무너뜨렸다. 재작년에 인근 작은 마을에서 트웨니에 있는 초등학교에 오던 7살짜리 소녀가 머리를 돌로 맞아 심하게 다쳤다.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4 킬로미터, 그것만도 만만치 않은 거리였는데 이제 어린이들은 왕복 20킬로미터를 돌아다녀야 한다. 산 너머 '야타'시와 '헤브론'시로 이어지는 단 하나의 길은, 어느 이스라엘 법조차 정당화할 수 없는 무장 정착민들의 사설 감시 초소에 막혔다.
그리고 군대가 나섰다. 트웨니와 정착촌의 접경 지역을 군대는 '민간인 제한 군 작전 지역 Closed Military Zone'으로 선언했다. 군 작전 지역에 민간인이 출입하면 체포된다. 트웨니 주민이 자기 밭에 일하러 들어가면 체포된다는 얘기다. 이 규정은 악의적이다. 이스라엘 군대는 웨스트 뱅크과 가자 지역, 즉 팔레스타인 전부를 '민간인 제한 군 작전 지역'으로 설정한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어디나 이스라엘 정착촌이 들어서면 정착촌을 보호하기 위해 주위가 군사 작전 지역이 되고,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정착촌은 증식하고, 넓어진 정착촌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 작전 지역은 더욱 넓어진다. 정착촌의 안전을 명분으로 군사 작전 지역이 넓어지고, 군사 작전 지역이므로 정착촌이 확장되는 이 순환논리는, 그러나 정착촌이란 것 자체가 국제법상 불법이므로 오류다. 민간인 제한 구역이라면서 역시 민간인인 정착민들은 왜 체포하지 않는지, 체포하기는커녕 오히려 거주를 장려하는지 이스라엘 군대는 결코 해명하지 않는다.
경찰은 트웨니 주민이 구타당한다는 신고를 받아도 언제나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도망간 이후에 도착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정착민 편을 들었다. 그리고 구타를 당하던 트웨니 주민이 행여 정착민을 되받아치기라도 하면 당장 폭행죄로 입건함으로써 노골적으로도 그랬다. 관공서는 거듭되는 트웨니 주민들의 탄원을 묵살하고 행정 절차를 복잡하게 만듦으로써 우회적으로 거들었다. 정착민, 경찰, 군대, 관공서 모두가 일치단결해서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의 등을 떠밀었다. 어디론가 없어져 버리라고. 목을 조르는 듯한 강압을 못견뎌 6 가구가 마을을 떠났다. 28가구 중 6가구가 떠났다면 적은 비율이 아니다. 그리고 이야말로 이스라엘이 원하는 바이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모든 정책들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인들을 퍼뜨리겠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트웨니에서 정착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집이 있는 '함만'은 한 달 전쯤, 이라크 전쟁이 터진 무렵부터 주말마다 이스라엘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정착민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배회하던 거친 청소년들로 구성된 패거리들은 주로 금요일 밤, 유대교의 휴일인 토요일 전날 쳐들어와서 함만의 집을 부수고 가족들을 구타했다. 집이 지속적인 공격의 목표가 됐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징조다. 팔레스타인 다른 지역의 예를 보건대, 이는 정착촌의 대대적 확장을 알리는 신호일 수 있다.
이를테면 가자지역에서 정착촌과 대면하고 있는 '카유니스' 난민촌의 붕괴도 이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총을 든 정착민들이 몰려와서 분탕질을 치고, 겁에 질린 주민들은 마을 안쪽으로 도망쳤다가 집에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다음 단계로 군대가 주민들이 아예 돌아올 수 없게끔 캐터필러와 불도저로 집을 파괴해버렸다. 그리고 주민들이 도망쳐 숨을 마을 전체를 싸그리 폭파해버렸다. 이스라엘 군대는 1킬로그램만 해도 위력이 대단한 폭약을 한 집에 30킬로그램이나 터뜨려 주변 120 채의 집들을 한꺼번에 폭파시켜 버린 적도 있다. 이유는 늘 똑같다. 테러리스트들의 온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파괴 활동을 이스라엘 군대는 '테러리스트들을 청소한다'고 말한다. '말끔히 면도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이 말끔히 청소해놓은 땅에는, 이스라엘 정착촌의 선명한 붉은 지붕이 들어선다. 이런 식의 단계 적인 영토 확장은 이른바 '살라미 작전'이다. 살라미 쏘시지를 한 칼, 한 칼 잘라먹듯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차근차근 잠식해 들어간다. 이들에게 군사 작전이란 곧 팔레스타인 민간인 소유 토지의 몰수이며, 민간인에 대한 군사 무기 활용이다. 이스라엘 군대의 적은 팔레스타인 민간인이다.
지난 4월 첫째 주말, 나는 외국인 평화 운동가들과, 그리고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의 연합 모임 '타유시(Ta'ayush 아랍어로 '함께 산다'는 뜻)'의 회원들과 함께 트웨니에 갔다. 타유시는 2000년 9월 두번째 인티파다(팔레스타인 전체가 들고 일어난 저항 운동. 2300명의 팔레스타인인들과 600명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죽었다고 추정된다.) 이후, 폭력이 아니라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팔레스타인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겠다는 양심적인 이스라엘인들이 함께 결성한 단체다. 이스라엘 정착촌에 둘러싸여 고립된 팔레스타인 마을들에 식료품과 의약품을 전달해왔고, 이곳 트웨니를 비롯해서 가장 위기에 처한 몇 군데 마을들과는 지속적으로 인연을 맺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같이 대처해왔다. 트웨니에는 요즘 주말마다 정착민들이 공격해올 뿐만 아니라, 3월 말 내내 이스라엘 군대 차량이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했다. 그들은 일부러 소독차처럼 매연을 내뿜고 확성기로 소음을 방송하며, 자칫 돌담을 뚫고 집안으로 들이닥칠 듯 말 듯 좁은 마을길을 헤집고 다녔다. 타유시 회원들에게 사진이 찍힌 뒤로 다시 오지 않는 걸 보면 공식적인 군사 활동은 아니었겠지만, 그들은 엄연히 군인이고 군용 차량이었다. 타유시 회원들은 상황이 심상찮다고 판단하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마을을 지키기 위해 주말마다 밤을 여기서 보내기로 했다. 나를 비롯한 평화운동가들은 이들의 뜻에 동조해서 여기 와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뼈저린 원한에도 불구하고, 이 곳 주민들은 이 년 전 타유시 회원들이 처음 찾아왔을 때 따뜻하게 환대했다고 한다. 물론 이 마을 주민들은 전부 이슬람교도, 타유시 이스라엘인 회원들은 대개 유대교 신자들이다.
"우리는 수 천 년 동안 기독교인, 유대교인들과 아무런 문제 없이 어울려 살아왔다. 종교나 민족이 다르다고 분쟁을 일으키기 시작한 건 이스라엘이다. 우리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차별하지 않는 한, 우리가 유대인을 미워할 이유가 없다."
마을 주민 '하페즈'는, 타유시 회원들을 아들과 딸로 여긴다고 말했다. 정착민들이 주민들을 구타할 때 우리가 중간에 끼어들어 막을 것이냐 말 것이냐로 평화운동가들이 토론할 때도, 끼어들어봤자 주민들에게 도리어 불리하다는 타유시 회원들을 하페즈는 두둔했다. 그들을 믿으라고, 그들은 트웨니 주민이지 외부인이 아니라면서.
지난 1월 타유시 회원 '아비야드' '아나트' '이즈라'는 정착민들과 마주쳤다. 이들이 한 마디 헤브루어도 입밖에 꺼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착민들은 이들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그리고 혐오했다. 정착민들이 보기에 이들은 조국의 배신자고 극단주의자들이다. 여성인 아나트까지 예외 없이 타유시 회원들은 구타를 당했다. 26살의 청년 아비야드는 비폭력 원칙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맞기만 했고, 이즈라는 그 국면에서 자기를 보호하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항했다. 타유시에는 정해진 규정이나 틀이 없으므로 불시에 벌어진 상황에서는 개인적인 판단이 다를 수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사담 후세인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다는 데 나는 놀랐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잔혹하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정부를 비판하는 이스라엘인들이 많다는 걸 알고 또 놀랐다. 국적 따위로 개인을 판단하는 선입견이 얼마나 위험한지 다시 한 번 깨우쳤다. 그러나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숫자가 애초의 내 생각보다는 많더라는 것이지, 그들이 다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랍권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스라엘에서는 아랍에 대한 적대감이 주류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의약품을 전달하는 행사에 60여대의 자동차를 끌고 400명이 참가한 적도 있지만, 평소에 소속감을 갖고 타유시 회원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40-50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타유시에 대한 일반적인 이스라엘인들의 반응은 '테러리스트 팔레스타인인들하고 어울리다가 언젠가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말 거다'이다.
아비야드는 이스라엘 정부에 반대하는 이스라엘인들도, 개인들의 힘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뿌리 깊은 갈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침묵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왜 남들처럼 침묵하지 않느냐고, 내가 묻자 아비야드는 자신에게는 그게 자연스러웠다고 대답했다. 열혈 정착민들이 애국심 때문에 광분하듯, 그에게도 애국심이 있다. 그러나 조국을 사랑하는 방식은 정반대다.
"그들은 내가 극단적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뿐이다. 이스라엘은 가장 온건했던 바라크 수상 때도 정착촌을 확장하는 속도를 늦춘 적이 없으며,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인정한 오슬로 협정 이후에 도리어 정착촌을 더 공격적으로 늘려왔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 그들에게도 살 땅이 필요하고, 그들도 살 권리가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오랜 역사를 가진 한 민족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불가능한 정책을 펴고 있다. 그 결과는 반드시 이스라엘에 돌아올 것이다. 팔레스타인에 미래가 없는 한, 이스라엘에도 미래가 없다."
유대교인인 아비야드와 아나트가 생각하기에, 타민족을 몰아내고 땅을 독차지하라는 말은 유대교의 가르침 어디에도 없다. 많은 이슬람 신도들이 여자를 집안에 가두고 교육을 금지하는 식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꾸란에 위배된다고 항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종교도 타인에 대한 미움과 증오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세상은, 특히 중동은 종교 분쟁으로 피가 마를 새가 없을까. 아나트는 종교의 이름으로 땅을 놓고 싸우고 있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종교와 정치가 연결되면 위험하고, 게다가 땅 문제까지 포함되면 더욱 위험하다. 그건 종교가 아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에 의해 자기 땅에서 쫓겨난 난민들이듯이, 이스라엘인들도 이차대전 때 유럽에서 쫓겨난 난민들이다. 이스라엘을 만든 것은 유럽과 미국이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고향마저 없고, 우리도 여기서 살 땅이 필요하다.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들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같이 사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여기서 날마다 벌어지는 분쟁의 유일한 해결책이며, 종교의 진정한 가르침일 것이다.” 오늘 밤에 정착민들이 쳐들어오면 타유시 회원들과 우리 평화운동가들은 그들의 만행을 카메라와 비디오로 기록하고, 나중에 목격자로서 증언할 것이다. 슬픈 일이지만 이스라엘 경찰은 팔레스타인 주민들보다는 이스라엘인이나 외국인의 증언을 덜 무시한다. 우리는 우리가 거기 있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정착민들이 공격을 삼가기를 바라지만, 그런다는 보장은 없다. 정착민 공격대들은 규율에 묶인 군인들보다 더 감정적이고 깡패 집단에 가깝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건 폭력을 휘두르고 카메라와 비디오를 빼앗아 박살내기 일쑤다. 토론 끝에 우리는 정착민들에게 맞아도 반응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마을 밖에서 온 외부인까지 개입되어 문제가 커지면, 그 보복은 마을 주민들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공격의 주요 목표로 예상되는 함만의 집 마당에 우리는 마을 남자들과 둘러앉아, 달콤한 차와 커피를 몇 잔씩이나 마셨다.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서로의 언어를 절반쯤씩은 이해하기 때문에, 두 가지 언어를 동원하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삼중 번역을 통해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그들은 어느 과일은 언제가 제 철인가, 별자리에 대해서, 운명에 대해서, 결혼과 자녀 교육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삶이란 이런 것이다. 해가 지면 마당에 앉아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며 하늘에 뜬 초승달을 올려다보는. 그러나 문득 말소리가 끊기면 사람들은 어느새 청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점잖게 티를 내지는 않지만, 모두 속으로는 긴장해 있다. 정착민들이 올 것인가? 그들은 오늘도 와서 총성을 울리고, 피를 튀기고, 아우성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잠시 후에 다시 대화는 이어진다.
우리들을 위해 마을에서 지어준 천막으로 밤늦게 어른들이 다시 밤마실을 왔다. 뜨거운 차가 어김없이 계속 날라져 왔다. 자정이 넘었다. 정착민들은 보통 저녁 9시쯤 쳐들어 오기 때문에, 그들이 특별 작전을 펴지 않는다면 오늘은 무사히 넘어갔다고 봐도 된다. 마을 남자들은 정중히 인사하고 물러갔다. 내가 침낭 속에 들어가 지퍼를 끌어올리려는 순간, 모닝커피가 아니라 진한 '나이트 커피'가 한 주전자 가득 도착했다. 불면증이 있는 내가 그걸 마시고도 곧 잠이 들었는데,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전자 게임을 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그동안 만나왔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 주소, 전화번호 등을 컴퓨터에 열심히 입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컴퓨터는 자꾸 뭔가가 모자라다며 내가 졌다고 거듭 선언했다. '미달' '부적격' '과실' '전과'. 컴퓨터는 다양한 이유를 대며 나를 패퇴시켰다. 나는 그게 팔레스타인인들이 어떻게 국경에서, 감시 초소에서, 법정에서, 살고 있는 마을에서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축출 혹은 거부당했던가 하는 사연들의 되풀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등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잠이 깼다. 서늘한 밤바람에 텐트가 펄럭거리고, 가스등 불빛이 일렁이는 텐트 안에는 우리말고도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마을의 촌장 격인 사비르였다. 그는 마을 외곽, 함만의 집보다도 정착촌에 가까운 데서 자고 있는 우리가 걱정이 되어 왔던 것이다. 정착민들이 몰려왔을 때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신인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거기 갔고, 사비르는 우리를 지키기 위해 텐트로 왔다. 정녕 삶이란 이런 것이다. 각자 다양한 자세로 자고 있는 타유시 회원들과 평화운동가들을 쳐다보며, 나는 무엇이 한 개인을 주위의 다른 인간들과는 달리 사고하고 행동하게 만드는가 생각했다. 왜 당신은 주류가 아니라 소수 의견을 갖게 됐는가, 내가 전날 집요하게 물은 질문에 대해 아무도 속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웃에서, 이웃 나라에서, 지금 지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요즘 같은 인터넷 세상에서 정보가 부족해서는 아니다. 알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당신은 자신 이외에 타인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고, 걱정하게 됐는가. 교육 때문인가? 출신 계급 때문인가? 천성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관공으로 살아왔다는 이즈라는 어깨를 으쓱하고 간단히 대답했다. 도덕의 문제가 아닐까? 그런가?
몇 년 전의 팔레스타인 지도와 지금의 지도를 비교해보면, 이스라엘 정착촌이 확장되는 규모와 속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웨스트 뱅크에는 총알을 난사한 것처럼 정착촌이 무수히 박혀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가자 지역은 경계선 안쪽을 물샐 틈 없이 덧바른 정착촌이 몇 겹이나 두터워졌다. 팔레스타인은 눌리고 졸리고 줄어들고, 와해당하고 있다. 트웨니 마을에 대한 이스라엘의 침탈은, 웨스트 뱅크 남쪽 끝에서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 헤브론까지 넓고 깊숙하게 파고들려는 그들의 장기적인 계획의 일환일 뿐이다. 정착촌에 밀려난 팔레스타인인들은 난민이 되어 난민촌으로 몰리고, 이미 충분히 좁은 난민촌은 자꾸만 비좁아진다. 예컨대 가자 지역 자발리아 난민촌에는 사방 3킬로미터의 땅에 10만 명의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물, 전기, 하수도, 의료 시설, 모든 게 부족하다. 그나마 이 복닥거리는 난민촌들도 이웃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정착촌 때문에 차례로 '청소'되고 '면도' 당한다. 난민촌에서마저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은 하늘로 올라가야할지 땅으로 꺼져야 할지, 꾸란에도 그 대책은 나와 있지 않다.
전쟁이 선포되고 포성과 폭발이 작렬하는 그 어떤 전쟁보다도, 수십 년 간 끈질기게 강행된 이스라엘의 이 불법 점령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살 떨리게 무섭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그들은 1993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맺은 평화협정인 오슬로 협약이 실패작이라고 보는 근거로, 이스라엘 정착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을 제일 먼저 지적한다. 이라크 전쟁이 끝난 지금 이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도, 미국의 대가성 묵인 아래 이스라엘이 정착촌을 본격적으로 확장할 가능성이다. 미국 대통령 부시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장 아라파트를 만나기를 거부하고, 정착촌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테러리즘부터 포기하라고 엄포를 놓은 바 있다. 정착촌과 테러리즘, 땅 때문에 원수가 된 이 지역에서 두 단어는 실로 관계가 있다. 그러나 누구의 테러리즘을 말하는가? 이스라엘이 무보상 토지 몰수와 강제 추방으로 팔레스타인 인구의 60퍼센트를 난민으로 만든 건 테러가 아닌가? 군대가 출동하여 군사 무기를 사용했으므로 ,이건 테러가 아닌 전쟁인가?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테러리즘을 논의하기 전에, 전쟁부터 포기해야 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아무리 죽고 쫓겨나도 세상에는 소리 소문조차 안 난다. 이라크 전쟁은 끝났지만, 팔레스타인에서는 조용한 전쟁이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이토록 오래 지속된, 그러면서도 이토록 인류의 무관심 속에 진행되는 전쟁은 역사에 드물 것이다.
"우리를 죽여라. 우리 후손들은 여기 살 것이다. 우리 후손들을 죽여라. 그 후손들이 여기 살 것이다."
트웨니 주민 하페즈는 난민 신세가 얼마나 처량한지 알기 때문에, 결코 고향을 등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들은 요즘 그 고장에서 하나밖에 없는 초등학교에 정원을 만들기 위해 공사를 벌이고 있다. 아무리 짓밟혀도 떠나지 않는 것, 죽여도 죽여도 살아남는 것, 이것이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항해서 벌이고 있는 조용한 전쟁이다.
트웨니에서 예루살렘에 돌아온 저녁, 나는 그 날 오후 평화운동가 한 명이 제닌에서 얼굴에, 다른 한 명은 가자 지역에서 다리에 총을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음날에도 가자 지역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에 의해 총격을 당하는 어린이들을 구하려고 뛰쳐나간 미국 언론인 한 명이 총에 맞아 죽었고, 며칠 뒤에는 7명의 어린이들이 사살당했다. 또 며칠 전에는 나블루스 인근에 있는 아스카 난민촌에서 팔레스타인 청년 두 명이 총에 맞았다. 아스카 난민촌은 내가 '순교자의 집'에 머물렀던 발라타 난민촌의 옆 마을이다. 발라타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탱크가 밤에 난민촌에 진입했고, 두 청년은 옥상에서 돌을 던졌다. 나는 발라타에 대한 원고에서 똑같은 문장을 쓴 적이 있다. '그들이 탱크에 던진 것은 돌이었지만, 맞은 것은 총알이었다.' 한 명은 죽었고 다른 한 명은 중상을 입었다. 얼굴에 총을 맞은 평화운동가는, 발라타 난민촌에 내가 있을 때 그도 일행 중의 한 명이었다. 그의 이름은 '브라이언'이며, 옅은 노란색 머리를 길게 기르고 만화 주인공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이다. 그가 거울 앞에서 긴 머리를 빗어 내리는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있다. 그도 트웨니 마을에 오기로 되어 있었으나 대신 제닌으로 갔고, 거기서 총에 맞았다. 그의 한쪽 뺨으로 들어와 다른 뺨으로 뚫고 나간 총알은, 이스라엘 병사들이 들고 다니는 M-16도 아니고 국제법으로 금지된 손가락만한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 그는 살았으나, 뺨의 살점과 턱과 이빨과, 혀를 크게 잃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의 삶은 크게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희생당한 다른 팔레스타인인들의 이름을 몰라서 나는 매우 미안하다. 그들의 이름은 신문에조차 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바그다드 점령 때문에 온통 텔레비전이 왕왕거리는 여관 식당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텔레비전을 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다들 귀신을 보는 듯 얼빠진 표정들이다. 국제 관계는 인정사정없는 힘의 각축장이라고 흔히 말한다. 정말 그것뿐이라면 어떤 말도 필요 없고, 이런 글조차 쓸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다. 국제 관계에서, 땅을 빼앗기고 빼앗는 현실의 아귀다툼에서 도덕을 얘기할 수 없다면, 도덕이란 도대체 무엇에 쓰는 거냐고. 지난주에 트웨니 마을은 안전했다. 이번 주는 어떨까? 그걸 알 수 없어서 나는 분노한다. 이라크 다음 미국의 목표는 누가 될까? 시리아? 이란? 북한? 과학 기술의 시대에도 극소수를 제외한 인류의 대부분은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바보가 되지 않으려는 것, 바보 같은 다수가 아니라 남다른 소수가 되고, 그 소수가 다수가 되는 것, 이 또한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될 조용한 전쟁이다. (헤브론 남쪽 트웨니 마을에 다녀와서)


(오수연/소설가)
 


 처음 게시판 올린 날 2003년 5월 1일- 작가의 눈/ 6월 11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