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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젊은작가포럼] [산문]권혁소/ 우린 모두 빚진 자들이다
이름 관리자



우린 모두 빚진 자들이다
[황새울에 평화를! 릴레이 기고] 권혁소 '황새울에 진 빚'

2006-06-22 오전 11:44:11


외삼촌이 칠순을 맞으셨다. 대추리가 짓밟히고 난 그 토요일이었다. 외삼촌은 대대로 땅을 일궈 온 농사꾼이다. 고향을 지켜 온 파수꾼이다. 외삼촌의 존재는 내가 고향을 찾게 되는 각별한 이유 중 하나다.

5·16쿠데타로 무너진 가계를 이끌고 어머니가 솜털 보송보송한 새끼들을 주렁주렁 옆구리에 차고 찾아간 곳은 남동생이 살고 있는 '친정'이었다. 태를 묻은 곳은 아니지만 그곳은 내 유년의 상흔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향, 그렇다 고향이다. 여남은 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 아이들이 놀기에 적당한 뒷산이 있고 미역 감기에 적당한 깊이를 지닌 개울이 있는 마을.

고향으로 차를 몰아가는 마음은 언제고 설렌다. 때론 조금 조급하다. 머리 속에는 아홉 살에 멈추어 버린 헐린 두 칸 초가집이 떠오르고, 대보름날 달맞이를 하다가 달맞이 깡통이 화장실 이엉에 떨어져 화장실을 홀랑 태우던 일, 혼이 날까 무서워 깍지가리에 숨어 깍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일, 빡빡머리를 깎으러 갈 때마다 이발소집 금선이가 있으면 어쩌나 부끄러워지던 일…. 말로는, 설명으로는 다 안 되는 그 무엇이 고향이다.

안방, 상방, 도장방 구석구석 친지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난다. 외삼촌은 마을을 점령한 대자본의 리조트 뷔페 대신 마당에 비닐하우스까지 쳐놓고 친지들을 맞았다. 며느리 넷에 딸이 또 둘이나 있으니 내심 자식 자랑도 하시고 싶었을 텐데, 그 깊은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며느리들은 입이 댓발은 나와 있다.

안방에 들어서니 토론 아닌 토론이 뜨겁다. 그 주제란 게, '가까운 데에 몇 백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식당들이 널렸는데 왜 새끼들 고생스럽게 집에서 잔치를 하느냐'였다. 좋은 날, 누이들의 일방적인 공세에 외삼촌은 억센 봉평 사투리에 날을 세우는 것으로 수세를 만회하려 한다. 그러나 형제들이 하나둘 고향을 떠날 때, 고집 하나로 여태까지 고향을, 땅을 지켜온 분 아니던가.
정부에서 권장하는 작물을 심으면 망한다는 것을 아시는 분, 올해 금이 좋았다고 내년에 또 심었다간 본전도 못 찾는다는 것을 세월을 통해 터득하신 분, 내가 데모에 앞장을 서거나 어쩌다 빨간 머리띠 두른 모습이 저녁 뉴스를 탈 때, '왜 꼭 너냐?'고 추궁을 하거나, '앞에는 서지 말고 대충대충 하라'고 뭉개시지 않는 분, 외삼촌은 그런 분이다. 그런 외삼촌이 형제들에게, 입을 빼문 며느리들에게 반격을 가한다.

"여가 어디나? 느들이 여기에 이제 멫 번이나 더 오겠나? 내 살아 있으니 그나마 느들이 오지 않던? 그런데 식당에 가서 지 손으로 밥 퍼다 먹고 돌아가게 한단 말이여? 그건 개쌍놈의 식이여…. 내 집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이여. 이제 얼마나 더 산다고…."

내 외가 쪽 장남들은 대부분이 농사꾼이다. 오늘 같은 날은 어차피 공치는 날, 술 마시기 알맞게 봄비가 내리고, '가정식 칠순잔치'도 무르익는다. 막내 이모를 빼곤 모두들 칠순을 넘긴 나이, 박자가 안 맞는 노래가 이어진다. '음악 선상님이 한 곡 해야지', 이모들이 노래를 권한다. 나는 젓가락 장단에 맞춰 '흙에 살리라'를 불러드렸다.

어른들과의 술상을 뒤로 하고 이종 형제들과 한 상에 앉았다. 형제들 중 제일 큰 형인 둘째 이모네 재근이 형이 느닷없다.

"혁소야, 니 여 와서 데모 좀 해라. 이 새끼들이 여다 레미콘 공장을 짓는댄다. 정신이 나간 놈들이잖나?"
"레미콘 공장이 대수예요? 엊그제 평택 대추리 뉴스 못 보셨어요? 다 한 배에서 난, 그렇고 그런 놈들인데 말해 뭐해요. 정권과 자본은 다 똑 같아요."
"그러게 말이다. 근데 그 대추리 사람들 바보 아니여? 지 살던 집이랑 땅이랑 몽땅 뺏는다는데 그렇게 당하고만 있단 말여? 낫이고 쇠스랑이고 뭐이고 간에 들고나가 모가지라도 따야지."

술이 얼콰해진 재근이 형, 수십 년 쌓였던 불만이 가세한다.
"하여튼 정부 놈들 한다는 짓이 꼭 그 모양이여. 미국놈들 똥구멍 핥아주면 뭐이가 좀 나온대? 내가 국민학교밖에 못 나와 아는 게 없다만, 그게 뭐하는 짓이여. 지 백성 팔아 미국놈들하고 갈보짓 하자는 거지…. 난 우리 동네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가만 안 있는다. 정부가 농민들한테 해준 게 뭐이 있나? 내가 지금
정부빚이 얼만 줄 아나? 아직도 2억이 넘어 2억이…. 캬아…, 내 올 봄에만 팔 키로가 빠졌드라. 씨팔노무 세상 힘들어 못살겠다."

그러고 보니 형의 까맣게 그을린 얼굴 광대뼈가 유난하다. 형은 소주를 반잔씩 꺾어 마시는 내게, '선생님이 뭐이 그리 쩨쩨해, 그래 가지고 아들을 우째 가르치나…' 한다. 불쾌하지 않다. 형은 재차 종이컵 가득 소주를 따라 건넨다.

고향, 내 유년을 키워준 외갓집 도장방에서 마시는 소주맛이 유별나다. 나는 형에게 평택의, 대추리의 수탈사를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지금 이 시간, 대추리 어딘가에서 규탄집회가 열리고 있을 텐데, 그저 그것이 미안하고 죄스러울 뿐이다.

형의 술다짐에도 불구하고 대자본의 레미콘 공장은 추진될 것이고, 형은 또 다른 대추리를 살게 될 것이다. 내 고향이 대추리가 되는 것이다. 텔레비전이나 냉장고로 입막음을 하려 드는 자본의 공세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 결코 녹록치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날 잡아 잡슈, 강 건너 불구경으로 방관할 일은 더욱 아닐 것이다. 낫이든 호미든, 들어야 한다면 들어야 할 것이다.

"내 이번에는 안 진다. 여기 리조트 들어올 때 그 놈들이 환경영향평가선가 뭔가에다가 이 앞 개울에 어떤 고기가 산다고 쓴 줄 아나? 붕어, 메기, 잉어… 뭐 이런 걸 잔뜩 적어놨드라. 내 정말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드라. 지금은 똥물이 되어 멱 감는 애들도, 멱 감을 애들도 없지만, 그 물이 어떤 물이었나…. 나쁜 놈들…."

벌컥, 술잔을 털어 넣으면서 형은, WTO와 한미FTA까지 술상에 올린다.
"농사꾼들 무식하다고 함부로 했다가는, 두고 봐라, 곧 나라가 망하지…. 쌀값이 떨어지는데 월급쟁이들 월급은 올라갈 줄 아나? 도시 사람들이 헷 똑똑이여."

넥타이가 답답하다. 적어도 오늘 만큼, 형은 '은혜'를 베푸는 부흥강사다. 대규모 집회의 유명인사 선동보다도 탁월한 교선이다. 형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오금에 와서 박히는 것은 그의 포효가 절박하기 때문이리라. 돈 몇 푼에 저 죽는 줄 모르고, 그것도 강제로 제 땅을 내어줄 농사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도두리나 대추리 사람들이 보상금을 20억이나 받았다? 그런데 불순 세력들과 어울려 더 받으려 그런다? 이것이 2006년 5월, 대한민국,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실상이다.

평택에 가본 적이 없다. 아이들과 함께한 수학여행 길에 지나친 것을 두고 평택에 가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대추리나 도두리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미안하다. 선생이어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더욱 미안하다. 가보지는 못한 땅, 그러나 눈에 선하다. 개구리밥이 파랗게 피어 있는 논, 엉머구리 제창이 멋들어진 검은 들판, 지붕마다 하얗게 피어오른 박꽃….

미국 민요의 왕 포스터의 '오울드 블랙 조'를 수업하던 날, "지금 평택의 대추리·도두리라는 곳에 사는 농민들이 어쩌면 이 시대의 '오울드 블랙 조'가 아니겠니?" 가르친 것, 그것이 내가 황새울을 위해 한 일의 전부다. 사람들에게는 두 말 할 것 없고 땅에게 더욱 미안하다. 논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철조망에 갇힌 볍씨들에게 미안하다. 멈추어 선 이앙기에게 미안하다. 비스듬히 삽날을 내리꽂고 논을 갈아엎어야 할 트랙터에게 미안
하다.

한참 늦게 부안에 갔을 때도 눈발에 나부끼는 낡은 깃발들에게 미안했었다. 막바지 물막이 공사를 하는 해창벌을 마주하여 백합칼국수에 소주를 마실 때도, 시린 발로 서 있는 장승들에게 미안했었다. 그러면서 또 미안하다고 쓴다. 어쩌면 이것이 내 '운동'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세상 하찮은 것들에게 미안해하며 살고 싶다. 그나마 이것이 내가 나약한 시인으로나마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춘천이 평택에 무심한 사이 철심 박은 곤봉과 날 선 방패, 자본과 정권의 군홧발이 우리들의 고향을 살해했다. 미군이 이 땅에 남아 있는 한, 민중을 발밑에 깔아야 직성이 풀리는 정권이 존재하는 한,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빚진 자여야 한다. 살아 있는 한 서로에게 미안해해야 한다. 미안한 만큼 함께 싸워야 한다. 그리하여 '투쟁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보여 증명하여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어린 시절 놀이용 깡통을 주우러 다니던 춘천 근화동의 캠프 페이지가 드디어 문을 닫았다. 어떤 시민들은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반세기 넘게 폭군으로 군림해 온 미군을 몰아냈다고, 춘천 유일의 30만 평 평지를 되찾았다고 기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데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황새울에 다시 황새가 날게 하는 일, 그것이 춘천시민인 내가 도두리·대추리에 갚아야 할 빚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주름이 펴지도록 이마에 두르고
핏대가 서도록 소리 치고 주먹질을 하고
방패에 찍히면서도 일기장 갈피갈피 쓰고 또 썼건만
단결투쟁, 이 말은 왜 낯설게 부담스러울까

대학도 다니고 대학원도 다니고
교육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공부도 할 만큼 했는데 민중해방,
이 말은 왜 아직 일상어로 자리 잡지 못하는 것일까

미국보다 사악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자본보다 영악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그들에게 너무 많은 힘을 썼기 때문이다
YS DJ 그들에게 너무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아직 속고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계급을 버리기 때문이다

-졸시「단결투쟁」전문



*작품 설명(위에서부터)
▲ <대추리 최고령 조선례 할머니> ⓒ 강우근 · 노동만화네트워크 들꽃
▲ <신자유주의식 농사> ⓒ 강우근 · 노동만화네트워크 들꽃
▲ <단 한 평도 내줄 수 없다> ⓒ 강우근 · 노동만화네트워크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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