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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젊은작가포럼] [산문]박향/ 어머니, 우리는 오늘 볍씨를 뿌리고 싶습니다
이름 관리자



어머니, 우리는 오늘 볍씨를 뿌리고 싶습니다
[황새울에 평화를! 릴레이 기고] 박향 '땅과 묶인 생명'

2006-05-24 오전 11:59:22


어머니, 아픈 허리를 동여매고 쪼그려 앉아 밭을 매는 당신.

제게는 익숙지 않은 일이지만, 호기롭게 나서봅니다. 아서라 도시에서 자란 니가 흙을 만져보기라도 했겠느냐.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따라 나서는 며느리가 당신은 그리 싫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툰 호미질은 30분도 채 못 가 저를 나가떨어지게 합니다. 도대체 누가 농촌 생활을 전원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하여 그리 낭만적으로 이야기하였단 말인가 하고 투덜대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잠시 쉬는 사이 당신의 온 몸은 낡은 장롱처럼 푸슬푸슬 거스러미가 일고, 여기저기 삐그덕거립니다. 허리를 두드리며 다리를 손바닥으로 쾅쾅 치는 당신. 어머니, 이제 일 좀 그만 하세요 하고 한마디 할라 치면 당신은 그러십니다. 흙에서 세상 모든 것이 나온다. 땅을 놀리면 못쓰는 법이다. 여태까지 땅이 우리를 먹여 살렸다. 니 같으면 니 목숨같이 소중한 거를 그냥 버려두겠나. 벌 받는다. 나는 이 흙 만지고 살다가 여기서 죽을란다. 어머니는 고개도 들지 않으십니다. 말을 하시는데, 눈은 땅을 보고 계십니다. 손도 땅을 만지고 계십니다.

몇 년 전, 추수를 앞둔 벌판에 태풍이 몰아쳤을 때가 생각납니다. 벼는 무거운 제 몸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물이 철벅한 땅바닥에 다 익은 벼가 고개를 처박고 있었습니다. 곧 싹이 날 지경입니다. 잡아서 일으켜 세우느니 추수를 하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남자들이 낫으로 벼를 베고, 여자들은 그 볏단을 어깨에 짊어지고 물기없는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펼쳐서 말려야 했으니까요. 물 먹은 볏단은 어머니께서 한웅큼이나 빼 주셨는데도 제 몸을 휘청이게 합니다. 등뼈가 휘어질 것 같습니다. 떠듬떠듬 앞으로 나아가기는 하지만 다리는 달달 떨립니다. 목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징그러운 벌레의 움직임마저 귀찮습니다. 평소 같으면 비명을 꽥 질렀을 것인데 말입니다.

물 먹은 볏단을 다 날랐을 때, 사람들의 어지러운 발자국으로 진흙범벅이 된 논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땅도 힘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루터기만 남은 논을 보았습니다. 볍씨 한 알을 일궈내 한 묶음의 볏단으로 만들어 낸 땅. 내 어깨를 휘청이게 했고, 등줄기를 바로 세울 수 없게 했지만, 우리는 저 땅의 결실로 또 1년을 살아낼 것입니다.


땅은 준 만큼만 돌려주지 않습니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강낭콩 한 알을 심었더니 강낭콩 5알을 품고 있는 꼬투리가 여러 개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누렇게 익은 꼬투리를 깠을 때,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한 알을 수십 개로 만든 땅의 신비함을 손바닥만한 작은 화분에서도 느꼈습니다. 그 작은 화분에서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 넓은 땅에 철조망이 쳐졌습니다.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있던 황새울 들판은 날카로운 철조망이 잔인하게 둘러쳐져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지난 겨울, 봄에 모내기 하러 오라고 했던 그들은 이제 모를 심을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신발도 벗지 못합니다. 그들은 수저도 들지 못합니다. 그들은 땅을 갈지도 못하는 엉터리 농부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막내아들이 몇 년의 수배생활을 거치고, 결국 붙잡혀 감옥에 있었을 때, 저는 어머니께서 얼마나 빠르게 변하시는지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누구보다 땅을 사랑하는 농부였던 어머니는 투사가 되었고, 호미를 들었던 손에는 마이크를 쥐었습니다. 군중 앞에 서 본 적도 없는 당신은 떨지도, 주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아들이 얼마나 착했으며, 얼마나 엄마 말을 잘 들으며, 바르게 자랐는지 오직 그것만을 이야기했습니다.

농투성이였던 그들 역시 이제 투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불끈 쥔 주먹이 보입니다. 농기구를 들었던, 더덕처럼 거친 손은 빈손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그들의 주먹은 분노와 울분으로 터질 듯 합니다.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차라리 땅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땅과 함께 죽기를 원합니다. 비상구가 아니라 출구를 찾기 위해 그들은 온 몸을 내던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일어난 그 자리에 그들의 땅이 갇혀 있습니다. 들어갈 수도 없는 땅, 바로 그들의 땅이 사라지려고 한답니다. 그 누구의 땅도 아닌 그들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땅이 말입니다.

대추리 도투리 넓은 벌판은 지금까지 누군가의 이름으로 살아 왔을 것입니다. 어딘가에는 누구네의 벼를 심고, 어딘가에는 또 누구네의 농작물을 심었겠지요. 하지만 이제 그 곳에 제방을 쌓고, 군사시설이 들어오고, 비행장이 들어서며, 철도를 건설하고 골프장이 들어온다고 하네요.

땅이 얼마나 놀랄까요. 뿌리를 통해 영양분을 빨아올리고, 저장시키며, 땅의 온갖 기운을 뽑아 식물에게 전해주었던 그 땅의 할 일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일인지 땅은 아직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 꿈도 꾸지 못하겠지요. 어머니가 눌러 앉아 있던 땅,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땅. 어머니의 심장과 같았던 그 땅은 지금도 천연덕스럽게 기다리고 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이렇게 말하겠지요. 지금쯤 올 때가 되었는데, 빨리 땅을 갈아야 모를 심을 텐데, 도대체 저기서 뭣들 하는 거지? 서두는 농부의 발걸음이 들리지 않아 불안할 것입니다. 경운기 트랙터의 소리가, 땅에 생명을 불어넣을 씨앗 한 알이 그리울 것입니다.

어머니, 언젠가 쟁기질하는 소의 뒤를 따라다니며 어린 도라지를 캐던 생각이 납니다. 동네에는 일하는 소가 두어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아버님께서 굳이 소를 끌고 한 바퀴 돌자고 했던 까닭에 남의 집 소를 잠깐 빌려 왔던 것이지요. 저는 바로 옆에서 콧김을 푹푹 뿜으며 걸어가는 소가 무서웠습니다. 혹시 뒷발길 당하지는 않을까 소와 거리를 두고 땅을 뒤집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소의 숨소리가 들리면 또 얼른 자리를 다른 곳으로 피하고는 했지요. 느낌이 이상해서 문득 돌아보면 소란 놈이 제 옆으로 그 순박한 눈을 뒤룩거리며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려, 이려, 아버님이 소를 끌면 소는 묵묵히 땅을 팝니다. 그 묵묵함. 흙 묻은 다리가 지나는 곳마다 숨쉬는 흙이 느껴졌습니다. 그 때 땅과 소는 하나였고, 소를 끄는 아버님과 어린 도라지를 호미로 척척 캐어내시던 어머니는 분명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완전히 다른 사물이 완전히 다른 인간과 하나가 되는 것을 저는 그 때 처음 느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이나 좋아함 같은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었습니다. 그들은 '삶'이었고, 묶어진 하나의 생명이었습니다.

어머니,

저는 너무나도 소중한 그분들의 생명과 삶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언 땅을 뚫고 파릇파릇 솟아나는 겨울의 보리싹처럼 그런 작고 작은 희망이라도 그들이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그들의 삶터이자, 일터이자, 목숨의 터였던 그 땅을 어제처럼 그냥 그대로 살게만 해 주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들은 '땅'을 걸고 그 대가로 목숨을 내어놓았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 배의 숨이 제일 먼저 끊어지고, 그 다음 가슴의 숨, 그리고 마지막에 목줄의 숨이 끊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숨이 끊어진다고 하면 그것이 그 사람의 끝이라는 것이지요. 땅은 그들의 목숨이고, 그들은 지금 그들 생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붙어 있는 그 목숨을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태풍이 오지도 않았는데, 팽성의 벌판은 비어버렸습니다. 어서 빨리 그 땅에 물을 대고 모가 심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올 가을, 다시 그 벌판에 태풍이 불어와 알지게 익은 벼가 머리를 물 고인 바닥에 처박을지라도 말입니다. 농부들이 저 쓰러진 벼를 우짜나 하고 한숨 쉬며 발을 동동 구르고 고민할 그런 때를 기다립니다. 그들은 지금 그러겠지요. 그런 고민을 하고 살 수 있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태어난 땅에서 농사 짓다가 남은 생을 이 땅에서 마치는 것. 바로 어머니와 똑 같은 소원입니다.

휭 하니 빈 황새울 들판, 미군의 레이다망인 둥근 흰공이 둥실 떠 오른 황새울 벌판에 어머니, 우리는 오늘 볍씨를 뿌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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